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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은 기적을 낳는다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3204 추천수:19 112.168.96.71
2014-11-26 09:50:19
모정은 기적을 낳는다

대 스타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미국 연예계에서도 맹인 가수 레이 챨스만큼 큰 별은 드물 것이다. 거의 20년 동안이나 끊임없이 히트곡을 내면서 가요계에 군림해 왔기 때문이다. 레이 챨스는 1930년 9월 23일 불경기에 허덕이던 미국 남부의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몇 달 뒤 그의 부모는 조오지아 주에서 플로리다주의 그린빌이란 작은 마을로 옮겼다. 아버지는 철도 일로 자주 집을 비웠으므로 어머니가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아이들을 키워야 할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하셨지만 아는 게 참 많으셨어요. 무슨 일이든지 거기에 알맞은 우화를 골라 얘기해 주셔서 나는 아직도 그중 몇 개를 충고 삼으며 살고 있답니다.”
챨스의 어머니는 살림을 돌보면서 때때로 제재소에서 일했다. 수입은 많아야 일주일에 40달러, 그 돈으로 어머니와 챨스, 그리고 한 살 아래 동생이 먹고살아야만 했다. 챨스 일가는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살았지만 행운은 조금도 따르지 않았다. 1935년 챨스가 다섯 살 때 동생이 빨래통에 빠져 죽은 일이 생겼다. 한편 찰스의 눈도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안과 전문의에게 치료가 필요했지만 그들에게는 돈이 없었다. 마침내 일곱 살 때 챨스는 장님이 되었다. “너는 비록 눈은 멀었지만 바보는 아니잖니” 어머니는 챨스를 타이르곤 했다. “네가 잃은 것은 시력이지 마음은 아니란 말이다.“ 어머니는 챨스를 긍지 있는 인간으로 자라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심지어는 마루를 닦고 쓸고 장작을 패는 일까지 시켰다. ”어머니는 내가 마음먹고 골똘히 궁리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해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 내가 널 도와 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너 혼자 뭐든지 할 수 있어야지’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는 좋은 이웃으로부터 간단한 노래를 작곡하고 또 그걸 악보에 적는 법을 배웠다. 그의 음악적 소양은 교회에서 자랐다. 어린 나이에 챨스에게 다시 큰 타격이 왔다. 사랑하는 어머니-이제 겨우 30대 초반에 접어든 어머니가 죽은 것이다. 챨스는 울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두 주일 동안이나 꼼짝 않고 앉아만 있어 사람들이 억지로 먹여야만 했다. 이듬해 아버지 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챨스는 시련을 용기 있게 받아 들였다. ”어머니는 내게 강인한 힘을 남겨 주셨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내 혼자 힘으로 살아나가려고 했지요.“

열 여섯 살이 되면서 챨스는 시골을 순회하는 악단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치고 편곡도 하면서 그가 하룻밤에 번 돈은 3-4달러에 불과했지만 평생을 음악에 바치겠다는 결의가 몸 안에서 들끓어 올랐다. 그는 뉴욕이나 시카고에 도전하는 게 두려웠다. 그는 친구에게 지도를 보고 멀리 떨어져 있는 마땅한 중소 도시를 골라 달라고 부탁했다. 시애틀이 결정되었다. 열 여섯 살이 채 못된 챨스는 몇 년 동안 벌어 모은 6백 달러를 가지고 버스에 올랐다. 닷새 후 시애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지치고 허기져 있었다. 챨스는 음식을 사 먹기 위해 나이트클럽에 갔다. “젊은이 왜 왔소” “음식을 사 먹고 싶습니다.” “안돼요, 오늘 밤 여기선 나이트 클럽에서 일할 음악인들을 뽑는단 말이요” 챨스는 기회가 온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도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 연주를 한다고 했다. 그 사람은 챨스를 쫓아내려 했지만 그의 끈질긴 고집을 꺽을 수 없어 들어오게 했다. 다른 지망자들이 다 떠난 후 챨스는 노래를 불렀다. 그는 트리오의 멤버로 일하게 되었다. 서부에서 몇몇 악단과 일하는 동안 그는 차츰 명성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애틀란틱 레코드’에서 그와 계약을 맺고 ‘나는 여인을 얻었네(I Got a Woman)'란 곡을 취입했다.

대히트였다. 이 곡은 미국 대중 음악사에서 중요한 계기를 이룬 곡이 되었다. 절절하게 심금을 울리는 블랙 사운드가 널리 대중의 호응을 얻은 것은 이 곡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취입 곡이 히트를 한 이래 챨스의 생활이 순탄하게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약 중독자가 된 것이다. 마약을 끊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챨스는 꼭 1년 후에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 후 연달아 히트곡을 내었다. 히트곡에 이어 상도 쏟아졌다. 미국 가요부문의 아카데미상격인 ‘그래미상’을 열 번, 그리고 ‘국제 재즈 평론가 인기 투표’에서 뽑는 최우수 남자 가수상을 다섯 번이나 연달아 받았다. 챨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모습을 이해하도록 내 영혼을 온통 드러내 보이며 노래 부릅니다. 내가 절실하게 겪었던 것만을 노래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도록 노력할 뿐이지요” 그는 사업에서도 성공을 했다. 두 개의 악보회사, 한 개의 레코드 회사를 갖는 등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업상 일년에 아홉 달은 길에서 보낸다는 챨스지만 그는 어디를 가든지 소년 시절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찬송가를 부르는 작은 교회를 찾아갔다.

-사랑은 아름다워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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