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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라(5) 사랑으로 사람을 바라보라(요일3:16-1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706 추천수:1 220.120.123.244
2020-03-29 09:49:07

바라보라(5) 사랑으로 사람을 바라보라

요일3:16-18

 

3월 들어와 ‘바라보라’는 주제로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주에는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성공적인 믿음 생활을 하려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은 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단의 교주를 바라보아도, 사람을 바라보아도, 돈이나 명예, 권력을 바라보고 신앙 생활하면 믿음은 쉽게 흔들리고, 회의하게 되며 실패합니다.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믿음 생활에 마지막까지 성공하려면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주일은 일과의 관계에 있어서 평생 성공하려면 각자에게 주신 소명의 땅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지 구원만 받고 천국에 가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만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 하시기를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각자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그 일을 다 이루어 드려야 일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아이들 열심히 기르며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살다가 아이들 결혼시키고 손자 손녀 열심히 보아주다 결국 인생을 끝마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도 소명이지만 눈을 들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찾아 소명을 이루어 드리고 천국에 가야 합니다. 셋째 주일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성공하려면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주어진 소명을 이루기 위해 살지만, 자신과 싸움을 죽을 때까지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늘 두 마음이 있습니다. 성령의 소원과 육체의 소욕입니다. 그럴 때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내 힘으로 자신을 이길 수 없으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겨야 합니다. 내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넷째 주일은 세상과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바벨탑을 보라고 했습니다. 이 바벨탑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멸망할 바벨론으로 기술 문명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고 결국, 멸망할 땅이라고 했습니다. 개인의 종말은 물론이지만 역사의 종말도 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면서 승리하면 기술 문명으로 교만해져 자신이 하나님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발달된 기술 문명도 언젠가 힘없이 바벨탑처럼 무너집니다. 축복으로 주어진 기술 문명으로 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야한다고 했습니다. 일반은총으로 주어진 기술 문명으로 흩어져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수행하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다섯 번째로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태어나 관계를 가지고 살다 사람과의 관계를 속에서 죽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공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여러 가지 이론과 학설이 있겠지만 신앙인에서 딱 한 가지를 말한다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무조건 사랑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거래의 눈으로 사람을 봅니다. 동백나무와 동백새 관계처럼 서로 서로 모두 이익을 얻는 상리공생의 관계입니다. 고약한 사람들은 요즈음 방송되고 있는 집단 성폭행 사건처럼 사람을 착취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이득을 보기 위해 상대에게 피해를 주면서 기행하는 것입니다. 기생충과 뻐꾸기처럼, 각종 전염병을 옮기는 모기와 벼룩처럼 양심도 상식도 없이 오직 탐욕 본능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끝까지 성공하려면 사랑의 눈으로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착취의 대상도, 이용의 대상도, 믿음의 대상도, 탐욕의 대상도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이기적 유전자를 주장하는 리처드 도킨스같은 사람은 인간은 생존과 종족번식에만 충실하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이타적 유전자가 있습니다. 슈테판 클라인은 여러 요인을 조사한 결과 "이기주의자가 단기적으로 볼 때는 훨씬 잘 살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타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이타주의자가 훨씬 앞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꿀단지 개미를 보십시오. 여름 지나 겨울에 먹을 것 없을 때 빨아 동료들에 의해 먹히며 죽습니다. 이런 개미가 있기 때문에 개미는 겨울에도 죽지 않고 역사 속에 살아 존재하는 것입니다. 연어를 보십시오. 산란기에 고향 민물로 찾아와 알을 낳습니다. 새끼들을 부화시키고 그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뜯어 먹고 성장합니다. 어미는 그렇게 죽습니다. 이런 어미의 희생적 사랑이 있으므로 연어는 사라지지 않고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가시고기의 아빠 사랑을 보십시오. 산란해 놓고 어미는 떠나버린답니다. 아빠 가시고기는 불처 주야 10여 일 동안 먹지도 않고 알을 지킨답니다. 부화하여 5일쯤 되면 새끼들 둥지 앞에서 숨을 거둔다고 합니다. 이런 가시고기 아빠의 희생적 사랑이 있어서 가시고기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희생적 사랑이 없이 인간이 어떻게 이 땅에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무조건 사랑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문둥이가 된 성자 다미엔을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한센환자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자 자신이 한센병에 걸려 그들을 사랑하여 신앙인으로 한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랑은 거래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 성경 요한1서 3장 2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요한 1서 4: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착취가 아니라 희생입니다.

마태복음5:44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랑"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30-31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4-35)” 이 진리를 믿습니까?

4장 20-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만약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한 말씀도 그러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13)”

베드로 사도가 전한 말씀도 동일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1. 형제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13-16)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천국 시민으로 살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는 것보다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까?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불편하거나 억울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했듯이, 이스마엘이 이삭을 미워했듯이, 에서가 야곱을 미워했듯이 악한 사람들이 약속의 자녀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같이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치관이나 태도를 가진 세력들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믿음의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예수님 때도 그랬고, 로마시대 때도, 프랑스 혁명 때도, 르네상스 때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때도, 과학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도 코로나 19로 예배를 놓고 예배를 강행한고 사람들은 여론의 도마에 올려놓고 신앙인을 몰상식하고 반사회적인 사람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같이 전철을 타고, 군중이 모이는 술집에 가서 춤을 추고, 다수가 모이는 식당이나 백화점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않고 유독 예배만 문제를 삼는 것은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배를 드리면 전염병을 확산하여 자신들에게 불이익을 줄 것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이런 논리는 어느 시대나 있었습니다. 251년 말에 엄청난 전염병이 유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 데시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며 괴롭혔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희생당하였습니다. 전염병은 종교나 신분,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빼앗아 갔고 사람들은 전염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 도망다녔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의 관리나 부자는 감염자를 피해 도시를 떠났지만 기독교 공동체는 남아서 서로를 돌보며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사랑으로 간호하다 천국의 소망을 안고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 도시에는 시체가 즐비했고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때에 키프리아누스는 마태복음 5:43-48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랑하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염병에 감염된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위로하고 도움을 주는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붙여진 영예로운 이름이 ‘파라볼라노이’ 였습니다. 그 의미는 ‘위험을 무릅쓰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들을 통해 많은 인명이 구해졌고, 이 모습을 보면서 이교도들은 기꺼이 신자가 되기를 자청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미움을 받지만 형제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4-16절까지 세가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첫째는 형제를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구원받은 백성인 것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역하면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 왔다는 것을 알아 왔다. 왜냐하면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가운데 머문다’입니다.

즉 우리가 현재 계속하여 사랑하고 있는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져 있다는 증거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자신의 형제에 대해 사랑하고 있는 것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마땅히 사랑하는 것은 신앙인의 삶의 존재양식입니다.

 

둘째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를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는 자는 곧 사탄의 본성을 가진 살인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15). 15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으면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본성을 쫓아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사랑하는 것은 어떤 이유보다 사랑은 신앙인의 속성으로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했으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원수되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친히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무조건적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제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양식이며, 즉 신앙인의 본질과 특성, 속성이며,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신앙인으로 평생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공하는 존재 양식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홍수처럼 떠돌지만 진짜 사랑은 찾아 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과 편리와 기쁨을 불나방처럼 쫓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신앙인들은 어떤 경우도 십자가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은평 평화공원에 6.25 전투에서 참전했다가 29세로 전사한 미국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의 한국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대학을 마친 후 미 해군 소위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한국으로 돌아와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며 한국 해안경비대 창설에 이바지했습니다. 제대 후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는 주저함 없이 젊은 부인과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재입대했습니다. 이때 그는 부모와 주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만 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는다.” 그는 조선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유창한 한국어로 맥아더 장군을 보좌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답니다. 그는 서울 탈환을 위해 해병대로 보직을 바꿔 진군하다 안타깝게도 인민군 매복조의 습격을 받아 젊은 나이에 전사했습니다. 남편을 잃은 부인 슬픔으로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와 이화여대 교수와 세브란스병원 자원봉사자로 평생을 바쳤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도 하버드대에서 한국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내한해 장학사업과 한·미 학술교류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배운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의 동상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자기희생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인류 사회는 개선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G.E. 레싱은“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라.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의 길이며 자기희생의 길이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해질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들었던 손양원 목사님을 보십시오.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한센병 환자 돌보고 상처에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낼 정도로 예수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공산당에 의해 두 아들 동신과 동인이가 죽었습니다. 그 때 자신의 아들을 죽인 그 공산당을 살리기 위해 구명 운동을 합니다. 양아들로 삼아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람을 바라보면 어떤 인간관계도 승리하지 못할 인간관계는 없습니다.

 

2. 어떻게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까?(17-18)

17-18절에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물질의 도움을 통해 사랑해야 합니다(17).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본문은 궁핍하여 최소한의 생활조차 어려운 이웃을 물질로써 도와주는 것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십자가의 사랑을 물질을 통해 실천했습니다. 부유한 바나바(행11:24)가 실천하였습니다. 가난한 다비다(행9:36-39)도 실천하였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실천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고 힘을 다해 어려운 교회들을 도왔습니다. 권력있는 이방인 신자 고넬료(행10:1-2)도 실천하였습니다. 단지 부유한 자만이 자신의 소유물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재물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궁핍한 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이나 사람을 거래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것으로 더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합니다. 마스크를 사재기하고, 남의 불행을 통해 자기 부를 축적할 뿐 아니라 자신의 욕만을 채우려고 합니다.

코로나 19 사태로 말미암아 교회들이 영상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일부 언론들이 교회가 회중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것은 헌금 때문이라고 교회를 경제적 이익집단으로 몰아가는 것을 봅니다. 어용 목사와 예배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지식인들이 나와 그와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을 봅니다. 돈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헌금을 걷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만큼 물질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세상에 어디 존재합니까? 건강한 신앙인들은 자신의 물질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십자가의 사랑을 물질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에 신앙인들 사람을 대할 때 착취나 거나나 탐욕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로 처음 들어갔을 때 수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이 성찬식을 하는 것을 보고 오해해 사람의 피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을 잃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순교를 당하니까 땅굴을 파고 땅 속으로 숨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카타콤입니다. 그때 로마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길거리마다 시체가 즐비했고,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자기 살기 위해 피했고 썩는 냄새가 진동하였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답니다. 한밤중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시신을 수습했답니다. 자신에게 남은 작은 재물을 가지고 카타콤에 숨어 있었던 기독교인들인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사람들에게 기독교 대한 오해를 풀게 하고 신앙인을 미워하던 사람들의 마음의 빗장을 풀게 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돈을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부 언론과 정치 세력들이 대부분 교회들이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조심하고 있고 성도를 보호하고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지혜롭게 대처하고 있는데 예배를 강행하는 것이 돈 때문이라고 교회와 기독교인 전체를 비난합니다. 돈 벌기 위해 목회하는 목사가 얼마나 됩니까? 누가 더 사랑으로 성도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며 보호하려고 하겠습니까? 나라가 어려울 때 누가 자신의 재물로 나라를 사랑하며 헌신을 합니까? 일본 강점기 때 누가 재물보다 귀한 목숨을 걸고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까? 3.1운동 때 어떤 사람들이 주역을 했습니까? 6.25 때 누가 더 공산주의 자를 반대했고, 독재 시대 때 누가 작은 물질이라고 헌신하여 더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습니까? 지금도 누가 남북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누가 어려운 이웃을 섬기고 있습니까? 자원봉사 참여율 1위가 개신교인이며, 기부금을 통해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사람들도 1위가 기독교인들입니다. 죽음과 고통을 무릅쓰고 세계 오지에 가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개신교인들입니다. 기독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가치 공동체, 사랑 공동체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자신의 생명까지도 거는 공동체입니다.

코로나 19로 어려우니까 국가는 국가대로 교회는 교회 대로 성도는 성도대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을 봅니다. 총회 차원에서도, 노회 차원에서도, 교회 차원에서도 어려운 교회 임대료를 내어 주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물질을 나눔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우리가 큰 부자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신 작은 물질을 가장 가치있게 쓰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생명 살리는 사랑을 실천에 쓰임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만만 생명운동 헌금을 늘 합니다. 올해도 많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탄자니아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캄보디아 아이가 유학을 마치고 자국에 들어가 봉사하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대학에 들어갔다는 사진이 오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사는 사람들은 평생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할까요?

 

둘째는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오직 행하므로 해야 합니다(18).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혀로만 사랑을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말과 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철저히 이기적인 사랑이요, 자기 욕망에서 시작되는 에로스적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이용가치가 있으면 사랑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버립니다. 사랑에는 상대방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아끼는 필리아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고, 사랑해도 그 보상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먼저 사랑하여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폐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실천적으로 헌신하는 사랑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사람은 말과 혀의 사랑이 아닙니다. 다미엔 신부는 하와이 군도 몰리카 섬에서 문둥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문둥이가 된 사랑은 말과 혀의 사랑이 아닙니다. 행함이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결핵 요양소를 만들고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던 셔우드 홀이라는 의료 선교사가 계십니다. 지금 서울 양화진에 그의 부모와 동생 그와 그의 부인이 묻혀 있습니다. 그분은 부모님도 의사 부부였고 자신도 의사 부부였는데 부모님은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뼈를 묻었고 자신들도 한국에 와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분이 자신의 가정 이야기를 담아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라는 자서전을 냈습니다. 그분의 아버지 닥터 윌리엄 제임즈 홀은 17살 때 질병으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를 받고 제 2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보람있게 사용할까를 생각하다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어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내가 된 의사 로제타 셔우드를 만나 조선의 선교사로 오게 되었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희생시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복음을 전하며 열심히 환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자신이 질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하나님 품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딸 역시 한국에서 질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포기하지 않고 병원을 세워 환자를 치료했고 맹인들을 위해 점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광혜여원'을 만들었고 '어린이 병동' '평양외국인학교' 조선 여자 의과대학을 설립해 서울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왜 이분들이 이런 모신 수난을 겪으면서 환영받지 못하는 조선 땅에 와서 선교했을까요? 그의 어머니는 이런 일기를 남겨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들을 보내셨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은 말로 형언키 어려운 사랑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이 조선 사람들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이 좋은 소식'을 말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게 되었다." 남편과 딸을 이방 땅에 묻으면서까지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한 한 선교사님의 고백입니다. 어떻게 한 편생을 살든 이 사랑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공하게 하는 비결이며 지름길입니다.

 

셋째는 거짓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18).

거짓 사랑은 이 세상에 차고 넘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무엇이 최대의 이단이냐? 최대의 이단은 교의상의 이단이 아니라,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이단이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엔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이었던 1943년 1월 22일, 뉴욕 항을 떠난 연합군 병력수송선 도체스터호는 904명을 태우고 어둠을 가르며 북으로 향하고 있었답니다. 항해 12일 만에 그 해 2월 3일 55분 독일 잠수함(u-233)이 도체스터 호에 어뢰를 쏘았답니다. 얼마가지 않아 도체스터 호는 어뢰를 맞고 점점 물에 잠기기 시작하였답니다. 도체스터 호는 아수라장이 되었답니다. 비상 훈련을 기억해내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으며 모두 상대편을 잡고 울부짖었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네 명의 군목들은 매우 침착하게 구명조끼를 나누어 주며 병사들을 구명정 타는 곳으로 안내했답니다. 더 이상 나누어줄 구명조끼가 없었답니다. 그 때 군목 폴링이 한 병사에게 물었답니다. "자네 예수 믿는가?" "아니요" 그러자 군목은 자기가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주면서 말했답니다. "나는 예수를 믿으니 지금 죽어도 천국 간다. 너는 이 구명조끼를 입고 살아서 꼭 예수를 믿고 천국에서 만나자" 네 명의 군목은 모두 다 자신이 낀 장갑과 구명조끼까지 벗어 병사들에게 주었답니다. 도체스터 호에는 점점 물이 차올랐습니다. 자신의 구명조끼마저 병사들에게 준 네 명의 군목은 서로 팔을 끼고 기울어진 갑판에 서서 "내 주를 가까이"라는 찬송가를 부르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생존한 병사 Grady Clark은 그들의 최후를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내가 본 마지막 장면은, 군목들이 기도하는 모습이에요. 그들은 최선을 다했고 나는 그들을 다시 보지 못했어요. 그들은 자기 자신들이 입고 있었던 구명조끼와 장갑을 병사들에게 벗어 주었어요." 병사 904명 중 605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수병들이 군목들의 희생을 기억하였습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들 4명의 군목 폭스, 구스, 폴링. 웨싱턴을 기리는 예배당을 짓게 했답니다(US Naval Chapel 미해군 예배당) 필라델피아 시에서는 이 용감하고, 희생적인 4인의 군목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기념관을 짓고, '4인의 불멸의 군목들'이라는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사랑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납니까?(19-24)

19-24절까지 다섯 가지 결과를 말씀합니다.

첫째,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됩니다(19).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줄을 알게 됩니다.

둘째, 우리 믿음이 굳세어지고, 성장하게 됩니다(19).

셋째,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습니다(21).

넷째,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됩니다(22).

다섯째, 그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 안에 거하게 됩니다(24).

주님과 연합되어 진정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사랑이 사람을 바꾸고 사랑이 세상을 하나님이 원하는 세상으로 바꿉니다.

세상은 좁은 6단계로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합니다. 6단계만 연결하면 누구와도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전염병만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도 행복도 전염된다는 것입니다. 건강, 정치, 종교, 문화, 성적 취향, 비만, 금연, 정치적 성향, 배우자 선택 등 다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행복 전염도 3단게 영향의 법칙이 있습니다. 나는 친구에게 15% 영향을 주고 친구의 친구에게 10%, 친구의 친구에게는 7%의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면→친구가 사랑하고→친구의 친구가 사랑하고→세상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웃으면→친구가 웃고→친구의 친구가 웃고→세상이 웃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하면→친구가 행복하고→친구의 친구가 행복하며→세상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회학과 교수가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과제물을 내었답니다. 그것은 볼티모어의 유명한 빈민가로 가서 그곳에 사는 청소년 2백 명의 생활환경을 조사하는 일이었답니다. 조사를 마친 뒤 학생들은 그 청소년들 각자의 미래에 대한 평가서를 써냈답니다. 평가서의 내용은 모두 동일했답니다. "이 아이에겐 전혀 미래가 없다.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 또 다른 사회학과 교수가 우연히 이 연구 조사를 접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에게 그 2백 명의 청소년들이 25년이 지난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추적 조사하라는 과제를 내었답니다. 학생들의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답니다. 사망을 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2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80명 중에서 176명이 대단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답니다. 그들의 직업도 변호사와 의사와 사업가 등 상류층이 많았답니다. 교수는 놀라서 그 조사를 더 진행시켰답니다. 다행히 그들 모두가 그 지역에 살고 있었고, 교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만나 직접 물어볼 수 있었답니다.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모두 한결같았답니다. "여 선생님 한 분이 계셨지요." 그 여교사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답니다. 교수는 수소문 끝에 그 여교사를 찾아가서 물었답니다. 도대체 어떤 기적적인 교육 방법으로 빈민가의 청소년들을 이처럼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끌었습니까? 늙었지만 아직도 빛나는 눈을 간직한 그 여교사는 작은 미소를 지었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었지요. 난 그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의 사랑만 풍성히 받아도 세상은 달라집니다. 오늘 이 시대는 사랑에 굶주린 시대입니다. 무한한 사랑의 샘물인 하나님이 계시는데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에 굶주려 메마른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의지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비판하고 싶은 사람도 의지적으로 칭찬하게 됩니다. 서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세상은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물질의 도움을 통해 사랑하시길 바랍니다(17) 말과 혀로만 하지말고 오직 행함으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18) 보여주기식 거짓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18)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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