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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신앙생활(6)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싸움(여호수아1:1-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887 추천수:6 112.168.96.218
2019-02-10 08:30:04

 

승리하는 신앙생활(6)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싸움

여호수아1:1-9

 

우리는 새해에 들어와서 계속해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미래의 두려움과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입니다. 두려움은 불안이나 공포라는 개념과 유사하게 쓰입니다. 그러나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특정 대상이 없는 막연하고 광범위한 두려움을 불안이라고 말합니다. 구체적인 위험물이 있을 때 느끼는 위협에 대한 감정을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위험에 대하여 미리 예감하고 인식하는 것에 의해 야기되는 유쾌하지 못한 감정입니다. 자각하는 위험이 더 즉각적이고 위협적일 때 느끼는 강렬한 두려움을 공포라고 말합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 찾아오는 대표적인 정서가 두려움, 불안 공포입니다. 존재의 위협을 당할 때 어김없이 찾아오는 정서입니다. 급격한 환경의 변화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농사 짓는 사람에게는 갑자기 태풍이 다가올까 두려워하고, 운전하는 사람은 갑자기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미국에서 총기 사고가 난 보도를 보면 유학을 보낸 부모들은 내 자식도 그런 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경기가 둔화되면 사업하는 사람은 부도가 나지 않을까, 직장인은 실직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무서운 질병에 대한 보도만 들어도 나도 그런 질병에 걸리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일을 하면서도 일을 잘못하여 비난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위기 앞에 모든 것을 상실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합니다. 심리학자들은 현대를 일컬어서 "불안의 세대(the age of anxiety)"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롤로 메이(Rollo R. May)는 "불안은 이 시대의 가장 절박한 문제"라고 합니다. 두려움은 도미노처럼 번지는 이 시대의 암이라는 것입니다. 10대는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20대는 취업, 30대는 결혼, 40대는 노후, 50대는 고립, 60대 이상은 건강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이런 두려움에는 크게 나누면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좋은 두려움입니다.

얇게 얼은 강물을 건너는 사람이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지팡이로 얼음을 두드리면서 건너는 것은 긍정적인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두려움은 생명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을 추구하게 하여 우리의 삶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위험한 동물을 만났을 때, 시험 볼 때, 연설하려 할 때 겪게 되는 정상적인 두려움은 사람을 좀 더 각성하거나 예민해지게 하여 직면한 문제를 효율적으로 잘 해결해 나가도록 합니다.

둘째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나쁜 두려움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0명의 정탐꾼처럼 가나안 토착민을 두려워 원망하고 좌절하며 포기하는 두려움입니다. 부모님이 위암으로 돌아가셨다면 자신도 위암으로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두려움입니다. 현실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신경증적인 두려움입니다. 이런 병적인 두려움은 사람의 잠재력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조직 심리학 박사인 앨런 다운스는 <리더여, 두려움을 극복하라>라는 책에서 인생 성공의 핵심이 바로 두려움에서 해방이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은 자신의 재능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그 재능의 극대화를 방해할 뿐 아니라 재능의 숨통을 죄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두려움은 우리의 심신을 쇠약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무기력하게 만들고, 소화장애, 소화성 궤양을 만들고 심리적 질병을 만들어 버립니다. 존스 홉킨스대학교 의과대학의 심장내과학 교수인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연구팀의 조사에 따르면 불안한 상태에서 1년 3개월 이상 노출되면 92%가 심장병에 걸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파괴적인 두려움은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무시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비난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원만한 대인관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심리학자 린다 새퍼딘은 <두려움이 나를 망친다>라는 책에서 두려움은 사람을 수동적이고 소심하게 하고, 늘 경계심을 품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자신이 없게 만들고, 매사에 비판적이게 하여 자신을 망치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병적인 두려움은 여러 조건이 갖추어졌는데도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많은 재물이나 쌓아놓은 명성이나 획득한 권력이 오히려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도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세네카는 "두려움이 있는 곳에는 행복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워즈워드는 "두려움은 수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힌다" 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두려움의 포로가 되면 대인 공포증, 광장공포증, 고소공포증, 질환공포증, 죽음공포증 등과 같은 심각한 만성 공포증 환자를 만들어 버립니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실패할 것에 대한 뒷탈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어떤 일을 시도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사명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을 가지게 되면 사명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명을 이루는데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 땅에서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불러 사명을 주어 쓰실 때 늘 먼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라고 했습니다.

이삭에게도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창 26:24)”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애굽에 내려가기를 두려워하는 야곱에게도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46:3)”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모세에게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나니(민 21:34)”라고 말씀하여 주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들에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신 1:21)”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놓고 있는 여호수아에게도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천국에 갔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어 가나안 점령을 해야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적들은 잘 무장된 군인이 있고 견고한 성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오합지졸입니다. 말을 잘 듣지 않은 목이 곧은 백성들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이들을 지도하는데 어려웠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지도자를 원망하고 돌을 던지며 죽이려던 자들입니다. 건너가야 할 요단강이 있고, 무너 뜨려야 할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무장하고 기다리는 가나안 7족이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 새 시대, 새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가장 강조한 말씀은 무엇일까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6절 보십시오.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고 말씀합니다. 7절 보십시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고 말씀합니다." 극히 담대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미래에 주어진 사명을 이루는데 꼭 이겨야 할 부분이 바로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미래의 사명 앞에 질병의 두려움, 사고의 두려움, 실패의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 실직의 두려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과 전쟁에서 실패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점령사역을 감당할 때 하나님이 계속해 주십니다.

아이성 점령에 실패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까? 8장 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수 8:1)”

아모리 사람과 전쟁을 앞 두고도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수 10:8)”

가나안 북방 연합군과 싸울 때도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수 11:6)”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미래의 사명을 이루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룰 때 이 부정적이고, 병적이고, 파괴적인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사명을 이루는데 당하는 고통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더 크게 보면 두려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왜 두려워합니까? 자신의 삶, 건강, 이익에 위협이 다가올 때 두려워합니다. 가장 큰 위협은 죽음입니다. 그 위협을 극복할 힘이 없다고 생각할 때 두려움의 크기는 더 커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위협보다 이루어야 할 사명을 더 크게 보면 그 두려움을 이기고 사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명을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명을 방해하는 인간을 보기 때문에 두려움으로 포기하고 도피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갈멜산에서 450인의 바알선지자와 400인의 아세라 선지자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이세벨이 보낸 메시지를 듣고 죽음이 두려워하여 사명을 망각하고 두려움으로 도피합니다(왕상19:2~4).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그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며 발만 동동 구르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옷을 입을 채로 물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아이의 생명이 내 생명보다 더 귀하고 중하고 크게 보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물속으로 뛰어 드는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서있는 다윗을 보십시오.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더 크게 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며 뒤걸음 치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이 죽음의 두려움 앞에 순교합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죽음보다 복음 전하는 사명이 더 귀하고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정복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순교의 사명이 죽음보다 더 중하기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은 순교를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5분에 1명 꼴로 순교를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산주의자들, 권력가들, 민족주의 종교지도자들, 테러리스트 등에 의해 전체 순교 숫자의 절반 이상이 최근 1세기 동안에 이루어지고 있답니다. 그들에게는 사명이 죽음보다 더 크게 보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이기고 순교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도 단지 천국에 들어가는 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자는 것에 불과하고 죽음 후에 영원한 천국에서 사명을 이루어 상급을 받는 관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한1서 4:4)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합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세가 죽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모세에게 주었던 사명을 붙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사업이 어렵다고, 건강을 잃었다고 사명을 외면하고 두려움 앞에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너갔듯이 너는 마지막 강 요단강을 건너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시겠다고하는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비전의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너에게 그 약속의 땅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백성과 함께 그 땅 정복하는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절에 보십시오. 모세에게 약속한 땅을 이미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4절 보십시오. 구체적으로 그 지경을 말씀합니다. 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합니다.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고 약속한 땅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사명을 이루며 당할 고통 때문에 미리 두려워하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고귀한 사명은 기준이 하늘에 있습니다. 아무리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하여도 하나님이 정복하라고 주신 일이라면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 사명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아이성 전투에 실패하고 두려워 포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 지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8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수8:1)” 하나님은 이미 아이성을 이길만한 권위를 주었습니다. 그것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간의 범죄로 실패하고 백성들의 두려움을 "물같이 녹아 버린 백성의 마음(7:5)"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했습니다. 7장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니까 그 많은 군인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멸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절망합니다. 단정해 버립니다. 9절 보세요. 끝났다는 것입니다. 일반화시켜 버립니다. 지금 상태를 보십시오. 아이성 인구가 12000명(수8:25)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무장할 수 있는 군인 6십만 1천 7백 30명이나 됩니다. 않자 그들은 이 삼천이면 될 줄로 알고 삼천으로 싸웠습니다. 일차 실패 때 사망한 사람은 36명에 불과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는'이라는 단어는 '비겁함, 겁 많음, 겁에 질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갖 두려움의 근원은 우리 원수인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창3:1-10). 우리는 어떤 실패를 한다 해도 두려움으로 주어진 사명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 나에게 주어진 아이성을 점령해야 하겠습니다. 두려울 때 그것보다 더 큰 것을 보아야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은 두려움과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2.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왜 두려워합니까? 분리불안 때문이라고 합니다. 소중한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 즉 소외, 이동, 죽음 그리고 이혼 또는 그 밖의 혼자 된다는 것은 두려움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공동묘지도 아버지와 함께 돈을 잡고 가면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어린 유아기 때부터 시작되는데 분리와 낯선 어른들에 대한 유아기의 두려움은 8개월부터 22개월 정도 유아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니까 아이들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회 공포증은 15살에서 20살 사이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친구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여 분리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두려움에 대한 우리 기억의 일부는 편도체에 보관되어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릴 때 병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공황장애, 사회적 공포증, 외상 후 스트레스, 강박적인 집착증, 불안증에 사로잡힙니다.

 

여호수아는 새로운 세대를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할 사명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의지했던 모세가 떠났습니다.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홀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요단강을 넘어가야 하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좋은 무기도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여호수아를 향하여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평생에 너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5) 하나님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5). 하나님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리라고 약속해 주십니다(5).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9하).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목자로서의 하나님이 함께 하여 책임지고 앞길을 인도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어떤 경우든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스위스 출생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책에서 '돈=능력'인 사회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불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돈 있어도 불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어야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벌어진다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모두가 나를 배신하고 떠난다 해도 하나님 만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죽음이 임박하자 많은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딤후 4:10) 그러나 바울은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딤후 4:17-18)"

그 길이 어떤 길일지 명확히 몰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면 가슴 설레임과 기대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여호수아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모세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신명기 31장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이 사실을 믿습니까?

신명기 1장 21절을 보십시오. 요단강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정탐꾼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앞서 인도하여 하나님이 싸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벌벌 떨면서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려 결국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상대를 과대평가하고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14:27)”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잠29:5)”라고 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올무와 덫이 되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그 덫을 빠져나오게 하는 도구입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부정적인 두려움, 파괴적인 두려움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두려움이란 괴물은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잠재력을 쓸 기회를 잃게 만들어 버립니다. 나폴레옹 힐은 "공포는 모든 논리를 무력하게 하고, 모든 상상을 파괴하며, 모든 자신감을 꺾어 버리고, 모든 열성을 지워버리며, 모든 의욕을 없애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나태와 비참과 불행에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움의 95%는 상상적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보통 씨의 일생/마이클 블래스트랜드·데이비드 스피겔할터 지음>라는 책이 있습니다. 확률이나 통계로 표시되는 세상의 모든 위험에 휘둘리고 매여 사는 현대인의 불안 심리를 독특한 시각으로 성찰하고 ‘위험 사회’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법을 조언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위험에도 극도로 민감하게 대응하는 소심 씨, 위험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저지르고 보는 대범 씨, 위험을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관리한다고 믿는 보통 씨를 등장시켜 이들의 일생을 비교 분석하고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100만명 중 1명이 사망할 확률을 1마이크로몰트라고 합니다. 1MM의 위험은 오토바이를 11㎞ 운전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45㎞를 달리고, 자동차를 운전해 533㎞를 가는 것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기차와 비행기는 1만 2000㎞에 해당되고 암벽등반은 1회에 3MM, 마라톤은 1회에 7MM, 스쿠버다이빙은 1회에 8MM, 스카이다이빙은 1회에 10MM랍니다. 응급 상황을 제외하고 수술 중에 전신마취로 사망할 확률 역시 10MM라고 합니다. 그런데 확률과 통계에 사로잡혀 위험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자 100명 가운데 30명이 수술로 죽는다고 할 때 내가 수술로 사망할 확률이 30%라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나의 죽음은 항상 100%이기 때문이랍니다. 언젠가 다 죽고 20% 건 90% 건 사는 사람은 살고 죽는 사람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확률 계산은 전체에 대한 통계상의 개연성이지 개체적 실제와는 달라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체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은 꼭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암 생존율이 70% 넘었습니다. 그런데 췌장암은 아직도 10%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 두려움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통 씨나 대범 씨, 소심 씨의 삶에는 큰 차이가 없고 숱한 위험이 주변을 스쳐 지나갔음에도 별 탈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수명을 누리며 살다 세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위험의 확률은 단지 평균일 뿐이고, 여기에 딱 들어맞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어떤 경우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시121).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에 해와 밤에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에 해와 밤에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3. 우리는 하나님이 형통케 해 주실 것이라는 결론을 알고 말씀대로 살면 미래의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왜 두려워합니까?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추진하지 못하고 두려워 포기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결혼할 수 있을까? 합격할 수 있을까? 취업이 될 수 있을까? 노후 생활이 안정적일까? 건강할 수 있을까? 빚을 갑을 수 있을까? 사업에 성공할까?" 이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추진함으로 신체적 정신적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하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 확신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 후에도 하나님이 함께하고 천국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만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용기 있게 죽을 수 있습니다. 질병에서 고침받는 다는 확신이 있다면 질병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극복하고 마침내 성공한는 확신이 있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병들었다고, 지금 가난하다고, 지금 실패했다고, 지금 조건이 좋지 않다고 미래도 동일하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형통케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고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이 나 있습니다. 결론을 알면 과정의 두려움과 싸움은 이긴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 죽을 것 같지만 이미 하나님은 공주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공주가 강가에 나와 목욕한다는 것 신비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수영도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수많은 두려움 앞에 하였지만 주어진 사명을 다 이루도록 만들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구렁텅이에 감금하였습니다. 인신매매를 당하였습니다. 억울하게 옥에 갇혔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보호 해 주었습니다. 결국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두려워 말고 말씀을 다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7). 8절에 보십시오. 얼마나 강조하고 있습니까?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말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기록된 대로 다 지키라고 말씀합니다(8). 두려움 그 자체는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행동하게끔 하는 소중한 감정입니다. 문제는 두려움 그 자체가 아니라 과장되고, 해롭고, 병적이기까지 한 두려움으로 가는 길을 멈추는 것입니다. 시도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중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나라만 해도 일년에 신간도서가 2만 5천 종 이상 나오고 있고 일본은 4만 5천 종 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진정한 비결이 있겠습니까? 정신분석학적 관점이나 실존적 관점, 행동주의적 관점 등과 같은 심리학적 방법으로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상상이 만들어낸 감정을 제거하라고 합니다. 두려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두려움에 실제 이름을 붙여보라고 합니다. 실제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부정적인 뉴스를 멀리하라고 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일이 자신에게 이루어질 확률은 적다는 것입니다.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려리며 두려움을 조정 메커니즘으로 바라본다고 해도 여전히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미래의 두려움이 있다고 해도 두려움으로 포기하거나 도피하지 말고 사명 붙들고 말씀으로 묵묵히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3만 1,173개의 구절 가운데 한 말씀만 붙들어도 우리의 인생의 미래는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은 요한복음 6:37을 붙들고 두려움과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을 붙들고 두려움과 싸워 승리하여 종교개혁을 하였습니다. 세계 선교에 앞장 섰던 윌리암 캐리는 "네 장막터를 넓히라"고 하신 이사야 54:2의 말씀을 붙들고 수많은 두려움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마태복음 28:19,20절을 붙들고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선교를 감당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순결하게 합니다.(시편 19편 7-11절) 일명 큰 바위 얼굴로도 알려진 유명한 미국 블랙힐의 러시모어산 화감암 벽에는 미국인으로부터 존경받는 네 명의 대통령 흉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워싱턴, 제퍼슨,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의 대통령입니다. 이들은 다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미래에 다가오는 수많은 두려움을 말씀으로 이기고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조지 워싱턴은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있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링컨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다”라고 말하며 전쟁터에서도 애독했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어떤 방면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그가 자신의 생을 참되게 가꾸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게 성경을 묵상하라고 권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미래가 보장되는 길은 말씀을 기준 삼고 말씀이 가라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말고 좌로 우로 치우치지 말고 원칙을 분명하게 붙들고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미래의 두려움 앞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면 형통의 길이 열립니다. 평탄한 길이 열립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미래가 불확실할 때일수록, 예측하기 더욱 힘들 때일수록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 말씀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왜소해지고 세상이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신화처럼 보이고 효력이 이미 떨어져 버린 약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영구불변한 진리입니다. 어는 시대든 그 말씀 속에 해답이 있고 삶의 길이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지팡이를 내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세가 그 말씀 붙들었을 때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체험받은 것을 여호수아는 알고 있었습니다. 넘실거리는 요단강, 난공불락의 여리고성 하나님 말씀 붙들었을 때 갈라지고 무너졌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찌, 우리 사업이, 우리 교회가, 우리 인생이, 우리 가정이, 우리 자녀가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변하여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우리의 미래는 평탄과 형통으로 보장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고 말씀합니다. 풍랑 앞에 사도 바울을 외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27:25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외아들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성에도 인간도리에도 맡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았다는 신앙을 갖고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이미 수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질병의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 실패의 두려움, 만남의 두려움, 무능의 두려움(만약 실패한다면?), 거부의 두려움(핵심에 끼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결핍의 두려움(내 성과를 훔쳐 가면 어쩌나?), 현실의 두려움(어디 손쉬운 해결책이 없는가?), 미지의 두려움(저기 뭐가 숨어있지?), 나이의 두려움(퇴물이 되면 어떻게 하지?)이 있습니까? 두려움 앞에 말씀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형통한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인간관계를 파괴해 버리고,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성공을 방해하는 두려움과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슬로건은 '두려움 없는 삶'이었듯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그런 삶을 꿈꾸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우리는 사명을 이루는데 당하는 고통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더 크게 보면 두려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이 형통케 해 주실 것이라는 결론을 알고 말씀대로 살면 미래의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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