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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다리(8) 희망의 종착역, 새 하늘과 새 땅(사65:17-2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216 추천수:3 112.168.96.218
2018-08-19 09:29:56

 

희망의 사다리(8) 희망의 종착역, 새 하늘과 새 땅

이사야65:17-25

 

윤영준 목사님이 쓴 <그 다음은 또 어떻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맨 첫 번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6세기 성자라고 불리는 “필립 디 네리”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하루는 당시 최고의 대학이었던 컨티넨탈 대학의 교정을 걷고 있었답니다. 그 때 어떤 청년을 만났답니다. 그 청년에게 ‘왜 이 학교에 왔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청년은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서 왔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래서 네리는 청년에게 ‘대학 공부를 다 마치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물었답니다. 청년은 ‘박사 학위를 얻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네리는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물었답니다. 청년은 ‘아주 힘든 문제를 몇 개 맡아 웅변과 지식으로 멋지게 변호처리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명성을 얻겠습니다.’라고 했답니다. 네리는 다시 물었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은 ‘그 후에는 많은 돈을 벌어 드디어 부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네리는 다시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물었답니다. 청년은 ‘명성과 재물을 소유한 중에 평안히 살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네리 다시 질문하였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은 ‘그 다음에는 내가 아마 늙어 죽게 되겠지요’라고 말했답니다. 네리는 마지막 또 물었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답니다. 희망은 “어떤 일을 이루고자 기대하는 바람”으로 대부분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 가지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을 이루며 삽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리히 프롬은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고 정의했습니다. 라틴어로 “호모”라는 인간이라는 말이고 “에스페란스”는 희망이라는 뜻입니다. 희망은 정신의 가장 중요한 양식 중의 하나이고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삽니다. 그런데 죽음 너머에는 희망이 없을까요? 죽음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희망의 종착역일까요? 오늘 성경 이사야서를 기록한 이사야는 죽음은 희망의 종착역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죽음 이후에도 희망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죽음 너머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죽음 너머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죽음 너머에 희망이 있느냐는 네리의 질문에 청년은 아무 말도 못했는데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사야는 죽음 너머에도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모태에 있던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어머니 배속에 있던 것은 기억지도 못하는 새로운 세계가 있는 것처럼 죽음 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 다음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롭다는 것은 “하다쉬”를 번역한 말인데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새롭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보다 나은 본질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세상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은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러라(사65:20)".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사65:22b)" 더 이상 사망이 지배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이 세상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버립니다. 그러나 죽음이 없는 세상이 있습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그 뜻을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25장 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두 네 번 나옵니다(사 65:17; 66:22; 벧후3:13; 계21:1) 요한 계시록 21장 4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대표적으로 무엇이 없습니까? 죽음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2장 5절에서는 “장차 오는 세상”이라고 말했고 베드로는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벧후3:13)”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에게 망하여 포로 생활을 하게 될 유다 나라 사람들을 향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고 희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이 전부라는 현세주의의 포로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에게 죽음 후에 천국이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고 영혼 없는 고등동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음은 끝이라고 생각하고 죽음 이후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 못합니다. 죽음 후에 인간 영혼이 가는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성경은 지옥은 죄인들이 죄의 대가를 받는 곳으로 "영원한 불"(마25:41), "꺼지지 않는 불"(마3:12), "수욕과 무궁한 부끄러움"(단12:2)이 있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 곳"(막 9:44-49), "고통"과 "불구덩이의 장소"(눅16:23, 24), "영원한 멸망(살후1:9)이 있는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곳"(계14:10, 11), 그리고 "사악한 자들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불과 유황의 못"(계20:10)이 있는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최종 지옥인 불못에 던져질 것이고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3:50).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의 대문에는 "여기에 들어오는 자여, 모든 소망을 버릴지어다."라고 써 놓았습니다. 토마스 부룩스는 "만일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과 슬픔, 비참함과 불행을 한꺼번에 당한다 해도 그것은 지옥의 가장 가벼운 고통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옥은 끔찍한 곳입니다. 죽음 후에 지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영원한 나라(벧후1:11), 하나님의 나라(눅21:31), 낙원(고후12:4), 하나님의 집(히10:21),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불리는 천국이 있습니다. 천국에는 질병과 고통이 없습니다(계21:4). 천국에는 죽음과 슬픔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염려와 근심, 죄와 유혹과 저주가 없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리 힘들고 어렵게 살아도 죽음 너머에 있는 천국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This Life)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전15:19).”

이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에 누가 들어갑니까?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유대인들입니다. 남은 자들입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대인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찾지 않던 이방인도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에 많도다."라고 했습니다. 죽음 너머에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죽음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 참 안식의 시작입니다. 역사의 종말 후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죽음은 벽이 아니라 문입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삶보다 더 환희에 찬 미래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초대 교회 시절,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로마로 호송되어 맹수의 밥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명을 위하여 애쓰던 사람들에게 이런 글을 남기고 의연한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나를 맹수에게 주어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라. …. 오라! 불이든 철이든 맹수가 움켜쥐고 뼈를 부수는 것들이라도. 오라! 악마의 잔인한 고문도, 그것들은 오직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뿐이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여진 이름 중의 하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에 반드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화형을 당하고, 칼과 창에 찔림을 당하고, 맹수의 밥이 되고, 끓는 기름에 처넣어도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 너머에 희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집을 빼앗기고 가족과 이별하고 유리하다가 붙들려 화형을 당했지만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존 폭스의《순교자 열전》을 보면 얼마나 모진 박해를 받았는지 입에 올리기도 싫을 정도입니다. "작센 지방의 틸리 백작이 지휘하던 제국 군대가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다. 반쯤 교살시키다가 회복시킨 뒤에 똑같은 짓을 반복하기, 손가락과 발가락 위로 날카로운 바퀴 굴리기, 엄지손가락을 기구에 넣고 조이기, 목구멍에 오물을 밀어 넣어 질식시키기,머리 둘레를 줄로 팽팽하게 묶어서 눈과 코,입,귀로 피가 쏟아지게 하기,손가락,발가락,귀,팔,다리,혀에 불타는 성냥 매기, 입속에 화약을 넣은 뒤에 불을 붙여 머리 박살 내기, 몸의 모든 부위에 화약 봉지를 잔뜩 달아놓고 불을 붙여 폭파시키기, 살 앞뒤로 줄을 감아서 끌어당기기, 송곳 바늘과 칼로 피부에 상처 내기, 철사로 코와 귀와 입술 관통시키기, 다리를 묶은 뒤에 거꾸로 매달아 불로 훈제하기, 팔 하나를 오랫동안 매달아 탈골시키기, 갈비뼈에 갈고리를 묶어 매달기, 복부가 터질 때까지 강제로 물 먹이기, 뜨거운 오븐에 굽기, 발에 무거운 돌을 달아놓고 도르래로 들어 올리기, 매달기, 질식시키기, 불에 익히기, 칼로 찌르기, 튀기기, 난도질하기, 강간하기, 몸 쪼개기, 뼈 부수기, 살 갈아내기, 야생말로 몸 찢기, 익사시키기, 교살하기, 불태우기, 불에 굽기, 십자가에 못 박기, 감금하기, 독살하기, 혀와 코와 귀 잘라내기, 톱으로 팔다리 자르기, 온몸 난도질하기, 발꿈치를 묶어놓고 길거리에 끌고 다니기 등." 이런 가운데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 너머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희망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어떤 일을 당해도 죽음 너머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죽음 너머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이 땅 살지만 우리가 영원히 살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 이 땅 사는 동안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17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령어입니다. 영원히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8절입니다. 우리말에는 번역을 하지 않았지만 앞에 “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택한 백성 즐거워하며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19절에서도 강조합니다. 과거 이들은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못되었습니다. 과거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우상 숭배를 했습니다(7,11). 강신술을 추구했습니다(4). 레위기 11장에 정해놓은 부정한 음식을 먹으며 불순종했습니다(4). 불신앙 가운데 살았습니다(2). 스스로 거룩하다고 교만했습니다(5). 종일 불을 태워 코에 연기를 불어넣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5)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매사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은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6절 보세요. 하나님이 보응하신 것입니다(7). 그런데 하나님이 보응하고 끝내었습니까? 아닙니다.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선택받은 자가 야곱의 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구하지도 찾지도 않은 이방인 가운데도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종일 하나님이 손을 펴서 패역한 족속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시민이 될 만한 어떤 조건이 있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했습니다. 믿습니까? 엡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해야 할 지옥의 형벌을 다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절망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경제문제, 환경 문제, 질병 문제, 인권 문제이겠습니까?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입니다. 죄의 삯이 사망입니다. 지옥 가는 것입니다. 지옥 같은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비극이 다가 왔고 그 죄로 인해 희망을 잃고 절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믿습니까?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룬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입니다.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준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어느 날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엡1:4절 보세요. “창세 전에”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22: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 말미아아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있네 나는 기뻐요 정말 기뻐요 주 예수사랑 기쁨 내맘에 나는 기뻐요 정말 기뻐요 주 예수사랑 기쁨 내맘에” 고통 가운데 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고통은 좋은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가능하면 피하기 위해 무통 분만을 하고 마취하고 수술을 받습니다. 그러나 지양될 수 없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죽음을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고 질병을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습니다. 늙음을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 가운데 나의 모든 고통을, 내가 지어야 할 지옥의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내가 십자가를 통해 기뻐하면 내 마음도, 내 감정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을 위해 기쁨으로 고통을 감내하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면 고통을 기꺼이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창조의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우울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불안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경쟁심과 시기심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탐욕으로 인색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기뻐하고 살면 다른 것을 해결됩니다. 택한 백성 하나님이 방치하지 않습니다. 다시 이사야 65장 12-14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택한 자 즉, 남은 자는 먹고 마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기쁘고 즐거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패하고 우상 숭배하고 타락한 자들은 주릴 것이고 갈할 것이며 수치를 당하고 마음이 슬퍼 울며 통곡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요즈음 경기가 안 좋고, 세상 일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해도, 아무리 가야할 길이 사막처럼 어렵고 힘들어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다는 한 가지 이유로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기뻐하라고 명령하는데 그 명령을 거역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단테는 < 신곡>에서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넣어 놓았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여기 왔느냐?"고 묻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의 말이 "다른 죄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믿는다고 하면서 기쁘게 살지 못하고 늘 우울하게 한숨만 쉬며 산 죄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말하게 합니다. 무신론적 철학자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신앙인의 3대 삶의 지침을 "항상 기뻐하라 (살전5:16)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괴로웠던 것, 슬프고 고달팠던 것 다 십자가에 묻어 버리고 희망의 메시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빈곤을 탈출하고 부를 축적했지만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 신음 소리가 통곡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웃음이 보약입니다. 죽음 너머에도 희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는 죽음 앞에서는 기뻐하며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고 즐겁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3. 우리는 앞으로 경험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교회를 통하여 희망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2천 7백여 년 전에 불의와 불공평,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망해가는 나라를 보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가졌습니다. 에덴의 땅, 가나안의 땅에서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실패한 유대 백성들에게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새 인류가 사는 새로운 거주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가운데 남은 자와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이 되게 할 교회 공동체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로 만드시는 새로운 거룩한 인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인이 되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희망의 공동체는 어떻게 될 것을 말씀합니까?

1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울부짖는 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울부짖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죽음 때문입니다. 일찍 죽은 유아로 인하여 얼마나 부모와 가족이 애통해 합니까? 그런 것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중년에 죽은 가족을 보며 얼마나 가슴 아파합니까?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죄의 문제가 예수님을 통하여 해결되었으니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100세에 죽은 자가 젊은이이고 백세 못되어 죽은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할 것이라는 문학적 수사를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다시는 사망이 없을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이사야 25:8, 계21:4, 마25:46 살전4:17) 새 인류가 사는 희망의 공동체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만족의 장소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세요. 불의가 판을 치고 불공평이 횡행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힘 있는 자가 집과 곡식을 약탈해 가지 않습니다. 공의의 장소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23절 보세요. 에덴동산의 범죄로 수고해도 제대로 대가를 받지 못했는데 수고한 것을 먹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복된 자손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복 받은 자손들 사는 진정한 복지가 실현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24절을 보세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25절을 보세요. 자연계가 더 이상 약육강식이 지배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사11:6-9).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 대한 예언의 말씀도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질 교회 공동체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형으로 이 땅에 남겨 놓은 희망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죽음 너머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산다면 이 땅에서 교회 생활을 통해 희망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평화의 장소로 만들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만족의 장소로 만들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장소로 만들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공의의 장소로 만들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산다는 교회가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면서 교회가 우상 숭배의 온상이 되고, 불순종과 불신앙과 교만으로 세상의 비난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는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주고 있습니다. 서석재씨의 <중산층 대형교회론>이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그는 그 논문에서 신자들이 새로 교회를 선택할 때 교회의 유명도나 신도들의 사회 경제적 수준 등을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목사의 설교 내용, 교단의 교리, 집과의 거리 등을 주로 감안해 교회를 선택했던 과거와는 달리 대형교회 신자들 중 상당수는 소속한 교회가 “수준 높은 식자층과 중산층들이 다니는 교회”로 사회에 알려져 있어 교회에 나오게 되었으며, 이 교회 신자가 됨으로써 자신도 중산층으로 동일시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비교적 편하게 다니며 이런 교회 정도는 다녀야 사회적 체면이 선다는 식의 “지위상승 욕구”나 “나도 중산층”이라는 소속감을 가지려는 신자들의 성향이 이런 교회를 찾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수평 이동에 의해 초대형 기업 같은 교회들이 생겼습니다. 십자가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인들은 예배자가 아니라 관람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이라 종교 소비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기는 자, 강자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횡행하는 종교 시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삶을 위한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사업을 위한 경영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희망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소비자를 모으는 종교 유명 브랜드 매장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회사가 사업을 확장하는 것처럼 부흥이라는 명목으로 개 교회 이기주의가 날개를 달고 개척교회 앞까지 대형차를 돌리며 개척교회의 희망을 꺽어 버리는 파렴치한 집단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한 때 잘 나갔던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가 하이벨스 목사의 성추행 의혹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새벽 기도로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인 영향을 끼쳤던 교회가 아들 세습으로 세상 언론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제자 훈련으로 세계에 영향력을 주었던 교회가 교인들끼리 서로 싸움으로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교회로 이름을 날리며 성령운동을 일으켰던 교회가 목회자의 부도덕으로 힘을 읽고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희망을 주는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도행전 교회를 보면 우리가 어떻게 교회가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2:43-47을 보면 한 열 가지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첫째, 패역한 세대 속에서 부름받아 구원받고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였습니다(40,41,42) 둘째, 가르침 받은대로 구체적으로 서로 교제하는 교회였습니다(42,44) 셋째,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일에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였습니다(42,46) 넷째,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42) 다섯째, 봉사하는 일에 헌신된 교회였습니다(45) 여섯째, 찬양하는 일에 열심인 교회였습니다(47) 일곱째,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였습니다(1:8; 2:41,47; 4:4; 5:14; 6:7; 8:4,31) 여덟째, 치유의 능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43) 아홉째, 온 백성의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47) 열째,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져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47)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희망을 주는 교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예배당 예배와 가정 모임의 두 날개로 비상했습니다.(46) 대그룹 소그룹으로 모여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였습니다. 나누어 싸우려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모인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모이기는 모이되 힘써 모였습니다. 우선순위를 두고 최선을 다해 모였습니다. 모여서 예배와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집에서 모였습니다. 여기 집에서의 정확한 번역은 "한 집에서 또 다른 집으로"입니다.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모였다는 것입니다. 모여서 무엇을 했습니까?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며 교제하였습니다. 성찬과 애찬을 하였습니다.

둘째 희망을 주는 교회생활을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의 두 날개로 비상했습니다. 말씀은 땅으로 추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기도는 땅으로 추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셋째 희망을 주는 교회생활을 위해서는 교제와 전도의 두 날개로 비상했습니다. 교회 생활이란 백화점 다니듯 종교 쇼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친교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끼리끼리 모이는 사교 클럽이 아닙니다. 극장 구경가듯 예배 구경 가고 설교 감상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의 강의실도 학교도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의 사람, 도시, 사건, 역사들을 외워 시험 쳐서 자격증 따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마케팅하는 백화점도 아닙니다. 여러 프로그램을 진열해 놓고 충성스런 고객을 유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값으로 산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유기적인 생명 공동체이고 우리가 앞으로 누릴 영원한 천국의 모형입니다. 천국 생활을 조금이나마 맛보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연결되어 한 몸이 될 때 바로 그 모습이 교회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네 가난이 내 가난되어야 하고, 네 외로움이 내 외로움이 되어야 하며 네 어려움이 내 어려움, 네 고민이 내 고민, 네 고독이 내 고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들이며 한 아버지를 섬기는 식구들입니다. 학력이 문제가 안 됩니다. 출신 지역이 문제가 안 됩니다. 경제의 유무가 문제다 안 됩니다. 미모가, 재능이, 나이가, 성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 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를 인정해 줍니다. 세속화 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세상을 그대로 따라가는 교회가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모방합니다. 세상에 동화됩니다. 이것을 교회의 세속화라고 합니다. 직분이 벼슬이 되고, 외식과 독선이 가득 차게 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집단 이기주의가 횡행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분리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싫다고 자신들끼리만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가 아닙니다. 마치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부조리한 사회를 변혁시키고 사회를 선도하며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더러워진 사회를 정화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모방할 수 있도록 하고 사회가 교회를 추종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먼저 약한 자에게 관심을 갖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홀로 서기를 할 수 없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소년 소녀 가장, 무의탁 노인, 정신적, 신체적 장애인, 경제적으로 궁핍함을 당한 자 등 약자를 향하여 구제의 손길을 펼쳐야 합니다. 가난과 기아, 불의와 전쟁의 종식, 파괴와 오염으로부터 환경 보호. 사회악과 부도덕에 대항하여 변화를 추구하는 일, 인신매매, 유괴, 폭행근절. 물량주의, 쾌락주의, 인본주의적 우상철학과 싸워야 합니다. 지역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주민 스스로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도록 돕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주민들을 위한 권익 사업과 생활 상담사업, 노인 사업, 탁아 사업 등을 모색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이제 우리도 주님의 뜻을 따라 베풀어야 합니다.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구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일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이 일을 위해 전문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교회의 최초의 조직입니다. 구제를 위한 안수집사 모임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사회를 향하여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큰일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는 자선단체는 아닙니다. 영혼을 살리는 영적 병원입니다. 그들에게 물질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 밖에 없습니다. 복음으로 사람이 변화될 때 사회의 물결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물을 길러내야 합니다. 선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바벨론은 무너집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임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 땅에 남겨진 기관으로 유일한 희망의 공동체입니다.

 

희망의 종착역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죽음 너머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죽음 너머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슬픔 많은 이 땅 살지만 우리가 영원히 살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 이 땅 사는 동안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경험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이 땅에 교회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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