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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3) 고난 훈련(신명기8:2-3,1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806 추천수:3 112.168.96.71
2017-02-19 04:32:52

 

훈련(3) 고난 훈련

신명기8:2-3,16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너무나도 잘 안 풀리는 한 청년이 있었답니다. 나이는 35세나 되었는데 하는 일마다 되지 않았답니다. 하도 답답해서 최후 수단으로 점을 보러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갔답니다. 도대체 언제나 고생이 끝나겠냐고 물어 보았답니다. 그러자 "당신은 40까지 고생하겠소."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청년은 너무 좋아서 "선생님 그렇다면 40년 이후면 고생 끝, 행복 시작입니까?"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점쟁이가 “40세 이후에는 그 고생에 익숙해질 겁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고난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고 작은 고난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죽을 때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니 내 인생 고난 끝났다고 생각하시는 성도님 계십니까? 예수 잘 믿는 자매가 자기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 믿음 좋은 집안에 시집가면 고생 끝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결국 믿음 좋은 가정 믿음 좋은 신랑을 만났답니다. 행복하게 결혼하여 임신하였답니다. 입덧이 멈추고 심해졌답니다. 청국장 냄새가 난다고 하면 남편이 옆집에 청국장 끓이지 말라고 했답니다. 삼겹살 냄새난다고 하면 남편이 옆집에 가서 당분간 삼겹살 먹지 말라고 했답니다. 나중에는 남편의 얼굴이 호빵처럼 보였고 남편의 얼굴을 보면 헛구역질이 났답니다. 남편은 조금만 참으면 고생 끝이라고 위로해 주었답니다. 출산일이 되어 병원에 갔답니다. 진통이 점점 더 잦아지고 심해지자 새댁은 너무 고통스러워하면서 간호사에게 물었답니다. “어려운 고비는 거의 끝나가는 건가요?” 그러자 나이 많은 간호사는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이제 시작이에요.”라고 하더랍니다. 아이 낳으면 고생 끝이던가요? 혼자 사는 것보다 자식 낳고 살면 얼마나 고난이 많이 다가옵니까? 심방하다가 어느 분이 아들 결혼시키고 며느리와 친해지려고 카톡을 자주했답니다. 그러자 어느 날 아들이 “엄마 카톡 그렇게 자주 하는 것 아니에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주눅이 들려 며느리에게 카톡을 안했더니 “엄마 왜 카톡 안해요”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결혼시키면 아들 딸 며느리 사위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어떤 권사님은 무거운 손자를 다루다가 어깨 관절에 문제가 생겨 수술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식 조금 다치면 딸이 얼마나 타박을 합니까? 어느 권사님은 손자를 낳자 머리에 염색을 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동료 권사님이 “왜 염색을 안 하냐?”고 물어보자 “화학성분이 있는 머리칼이 지 자식들 몸에 안 좋다.”고 아들이 염색을 못하게 해서 못했답니다.

요즈음 시대를 “Three 고(속 쓰리고)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 속의 청년들, '고'단한 장년들, 그리고 '고'독한 노년들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이 시대가 고난이 심각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만 인생살이가 고달프겠습니까?

한 왕이 역사학자들을 불러 모았답니다. 왕은 “세계사를 한 권으로 압축하라”고 명령했답니다. 역사학자들은 열심히 세계사를 한 권으로 요약했답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결국은 한 권으로 요약했답니다. 왕은 그 책을 다 보고난 후에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줄여보라”고 했답니다. 역사학자들은 고민 끝에 이렇게 기록했답니다. “인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면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고통의 바다)라고 말했겠습니까? 과학사는 그 인생의 고난을 풀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모세는 인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살아 보았는데 인생은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기쁨과 환희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인생살이가 수고와 슬픔쁜이라고 할 정도로 고난이 멈추지 않고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욥기에는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욥 5: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고생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다”(욥 14:1)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생로병사의 고난의 강을 건거가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 고난을 당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동안 크고 작은 고난을 실제로 당하며 삽니다. 어느 날 원치 않는 질병에 걸립니다. 때로는 상상하지 못한 사고를 당합니다. 때로는 끝없이 번창될 것 같은 사업이 갑자기 부도를 당합니다. 실패하고, 이별해야만 하고, 시간 문제이지 모든 사람들은 사랑했던 사람들과 사별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하여야 만합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하여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법칙에 따라 태풍으로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늙어서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무지에 의해 뜨거운 그릇을 잘 못 들어 화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질병에 감염될 수도 있습니다.

죄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인과응보의 원리입니다. 방탕하게 살다 에이즈에 걸릴 수 있습니다. 술 취해 운전하다가 살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일 하다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남을 돕다가 돈을 잃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다고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과로사로 쓰러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고난을 당할 때 사람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로 온 결과라고 생각하면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불공평하게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면 분노하게 됩니다.

고난이 계속 버티지 못하게 다가오면 포기하고 심지어는 자살하기도 합니다. 인기 절정에 오른 연예인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해 버립니다. 오래 전에 행복 전도사로 방송에 나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했던 분이 질병이라는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부부가 동반 자살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고난을 방치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회의에
빠집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허용하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데 왜 사고를 당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데 왜 질병을 당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데 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심지어는 고난까지도 다스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중에도 십자가에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출 4:11; 삼상 2:2-7; 단 4:34-35; 잠16:9; 시 60:3; 사 45:7; 애 3:28; 암 3:6; 행 4:27-28; 엡 1:11).

성경은 세상에는 고난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좋으신 분인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시 25:7-8; 34:8-10; 33:5; 100:5; 136편; 145:4-9).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대해서 목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고난은 우리 구원의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롬 8:17; 고후 1:3-6; 빌 2:5-9; 약 1:2-8, 5:10-11). 유한한 인간의 고난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오늘 성경은 왜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광야길을 걷게 했다고 말씀하십니까? 광야 훈련을 시키지 않고 바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데 구태여 광야 훈련을 시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왜 우리를 광야의 고난 훈련을 통과하게 할까요?

 

1. 오늘 성경은 광야 훈련을 통과하게 하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낮추시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2).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이 40년 동안을 광야길을 걷게 했다고 말씀하십니까? “이는” 왜냐하면 “너를 낮추시며(안노테카)”라고 말씀합니다. 3절에도 “너를 낮추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아나(압박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5절에 “징계하다”라는 말과 연결되어 일종의 교육적 차원의 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119:71에서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라고 말씀할 때 고난당하는 것이 바로 “아나”라는 말입니다. 낮추시는 것이 곧 훈육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낮추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3)"서입니다. “모든 말씀(콜)”은 “모든 것”이라는 뜻으로 본래 원문에는 “말씀”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먹을 것이 풍부하고 건강해 지면 어떻게 됩니까? 풍부한 만큼 사람은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방치하면 아는 것만큼 교만해지고 가진 것만큼 교만해 집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 잊어버린(13-14)"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 잘 난 맛에 살고 교회 다녀도 제 잘난 맛에 교회 다닙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고 더욱 낮아져 인간답게 살게 만들기 위해 고난의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고난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설명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고난 뒤에 있는 선한 섭리를 경험해야 합니다. 욥이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 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하지도 아니 하겠나이다”(욥 40:4)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고난이 아니면 고쳐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교만의 병은 낮아짐이란 광야 훈련을 받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습니다. 낮아질 때, 능력의 한계 인식의 한계에 부디칠 때 “나는 다 알지 못하고 나는 다 하지 못하는 구나”를 깨닫고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면 끊없이 교만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천사가 교만하여 사탄이 된 것처럼 인간이 교만하면 하나님도 몰라봅니다. 자신을 전능자라고 착각을 합니다. 자기 지배력을 끝없이 확장하려하고 순리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결국 전쟁까지 일으킵니다. 자기 주제를 파악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교만이야 말로 인간의 최고의 문제이고 마지막까지 훈련받아야 할 영역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창으로 인생 곁에 서성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심한 환난이 다가와야 교만이 박살나고 '자기' 라는 우상이 산산조각 깨져버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성이 있습니다.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물이 병들었다고 하여 "아 나는 연약한 존재구나" 라고 깨닫고 겸손해 집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인간은 어른이든 아이든 고난을 통하여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나의 존재와 다른 사람의 본질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을 만날 때 예수님은 구주시라는 것을 고백하여 예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고난의 강을 건너고 광야를 길을 통과한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죄인 중의 괴수로구나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의 죽음을 보면서 인간의 허무를 느끼게 되고 인생이란 별거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의 실패를 통해 나의 욕심대로 모든 것을 채울 줄 알았는데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2).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여기서 시험은 유혹하여 올무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 더 좋은 삶을 살게 만들기 위해 테스트를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순종하지 않음으로 이 땅에 고난이 들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으로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4:15)”라고 말씀하십니다. 잘못된 행동과 못된 성격을 계속 유지하면 고난의 강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그것 고난이 아니면 변화시키지 않으니까 고난의 용광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학교를 통해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고통은 성장의 법칙이요, 우리의 인격은 이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욥이 고난을 통해 성숙해졌듯이, 요셉이 고난을 통해 성숙해졌듯이, 야곱이 고난을 통해 성숙해졌듯이 사람은 고난을 통해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고난은 성화를 위한 도구입니다. 진주도 고난이 클수록 크고 아름다운 진주가 나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과(시 50:15)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 5:8,9).

 

순종은 고난 훈련의 꽃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훈련을 25년 동안이나 광야의 방랑자로 받았습니다. 야곱은 30여 년을 광야에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시나이 광야에서 40년을, 다윗은 17여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며 혹독한 순종 훈련을 받았습니다. 특히 바울은 3년 반 동안이나 아라비아 사막에서 외로운 광야 훈련을 받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입을 것이 없습니다. 홍해가 앞에 있습니다. 아말렉이 있습니다. 거할 집이 없습니다. 밤은 춥습니다. 낮은 덥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저 전폭적으로 하나님 믿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복하게 사는 비법이 무엇입니까? 성공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7-10절을 읽어 보십시오. 이렇게 되는 비법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고 성공하고 잘되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그 무수한 고난의 강을 건넜던 다윗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다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 이후 사람은 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선천적으로 싫어합니다. 성경의 요나를 보십시오. 니느웨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길 싫습니다. 결국 폭풍을 만나고 바닷물에 빠지고 죽음의 고통을 맛본 후에야 어쩔 수 없이 순종을 합니다. 순종의 훈련에서 우리는 합격해야 합니다. 억지 부릴 필요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면 광야길은 순조롭게 건너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16).

1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낮추시고 훈련하여 마침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광야 길을 걷게 하시는 이유는 결국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광야길을 통과하게 하는 것은 그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괴로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부모들이 이빨 빼는 고통을 감수하고 아이들의 이빨을 빼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이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의사가 병든 사람들을 그 쓰라린 고통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수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시 고통이 있더라도 질병에서 고침받아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수술하는 것입니다. 어느 생물학자가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나방을 관찰하였답니다. 2mm도 안 되는 작은 구멍을 비집고 나온 나방은 몇 시간 뒤 어른 나방이 되었답니다. 그는 가위로 각각의 누에고치 구멍의 크기를 3mm, 4mm, 5mm 정도로 점점 넓혀주었답니다. 자세히 관찰하니 더 큰 구멍을 빠져나온 나방의 크기가 컸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더 큰 구멍에서 나온 나방들은 작은 구멍에서 나온 나방보다 성장 속도도 느렸고 날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알조차 낳지 못했다고 합니다. 작은 구멍을 통과하는 고통을 누구나 피하고 싶지만 고통을 통과해야 건강한 성장이 있습니다.

 

고난의 용광로에 들어가야 우리 인생은 정금처럼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훈련을 기록한 욥기에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풀무불에서 죄와 미움과 탐욕과 시기와 분쟁과 교만의 불순물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훈련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이 복 주시는 깨끗한 그릇으로 만드는 것입니다(딤후 2:20,21).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참기름은 참깨를 잘 볶아서 짓이겨야 나옵니다. 좋은 숯은 자신을 태우는 고통을 감내함으로 탄생합니다. 좋은 나무는 오랜 세월 풍파에 시달리는 고통을 통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365일 내내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만 계속된다면 대지는 사막으로 변해 버립니다. 구름도 끼고 바람도 불고 비도 와야 자연이 유지되듯이 고통이 있어야 행복도 진정으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우리가 마침내 고난이 복이 되게 하려면 고난의 훈련을 어떻게 받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기쁘게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진 고난이라고 믿으면 기대를 가지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진주는 땅에서 얻을 수 없는 유일한 보석입니다. 이물질이 조개껍질과 외투막 사이에 들어오면 진주는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나카'라는 특수한 물질로 이물질을 감싸던지 아니면 이물질을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물질을 아예 무시해 버리면 당장 고통은 없지만 점점 살이 곪아 죽고 맙니다. 그러나 몸속으로 들어온 이물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물질을 배출하면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결국 '얼어붙은 눈물(frozen tears)'이 되어 진주로 탄생합니다. 살다보면 어느 날 인생에 날카로운 이물질이 들어옵니다. 이 이물질로 죽을 수도 있고 이 이물질 때문에 진주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면 축복의 그릇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고난은 순금을 만들어 내는 용광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홍 글씨를 쓴 나다니엘 호돈은 열심히 일하였지만 직장에서 면직당했습니다. 실직을 기쁘게 받아들여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해 불후의 명작 '주홍글씨'가 나왔습니다. 소설가 스티븐슨은 결핵 말기의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여 유명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평생 자신을 괴롭힌 만성두통이라는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여 인류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파스칼은 청년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힌 온몸의 통증이라는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여 '팡세'를 남겼습니다. 구세군운동을 주도한 캐더린 부드는 "내 삶에 있어서 단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수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그 고난 앞에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기쁘게 받아들여 구세군 운동을 펼쳤습니다. 재목은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자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순수해 지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며, 겸손해집니다. 용광로에서 불순물이 제련되듯이 고난을 통해 명예욕, 탐욕, 시기심 등의 불순물이 제거됩니다.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동의할 수 없지만 기쁜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급 줄 기회를 주었다고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고난은 거침돌이 아니라 디딤돌, 독약이 아니라 보약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 받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벧전 3:14)"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 4:16)"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그런데 그 고난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까?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로마서 5:2-4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2-4)"

심지어는 그 고난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그리고 자신 뿐만아니라 아들처럼 사랑하는 디모데에게(딤후1:2)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딤후1:8). 고난도 받으면 나로 족하지 아들에게까지 고난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고난을 받았지만 너희들만큼은 편안히 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신앙인들의 삶은 달랐습니다.

 

둘째, 고난을 당하면 인내하여야 합니다. 진주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라고 말씀합니다. 조금도 흔들림 없이 끝까지 인내하라는 말입니다. 인내라는 것은 단순히 참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소망을 바라보고 참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 비굴하게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40년, 아브라함은 25년, 다윗은 17년 인내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새로운 기회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구름이 끼었다고 해도 구름 위로 오르면 파란 창공이 있습니다. 진정 좋은 것은 긴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영광스럽게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고난은 손해가 아니가 거룩한 투자입니다. 막10:29-30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은 백배의 축복이요, 영생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고난은 씨앗이요 축복은 수확인 것입니다. 조금의 씨뿌림으로 백배이상의 수확을 할 수 있다는 기대 속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성도는 고난의 씨를 뿌려 백배의 축복을 수확한다는 것입니다. 고난 훈련을 받은 것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인내하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의 십자가의 고통을 좇을 것이니라"

 

셋째, 고난을 슬기롭게 이기기 위해 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헨델은 음악을 공부하였고 25세에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737년 파산한 뒤에 헨델은 중풍과 건강의 악화로 고통을 당하였고 56세가 되었을 때,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 23일간 기도하면서 때로는 음식을 전폐하면서 작곡에 몰두하여 "할렐루야"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는 68세 때 완전히 실명하였지만 좌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며 위대한 음악을 남기고, 장애에도 불구하고 음악 연주회를 지속하였습니다. 그는 중풍과 허약한 육체, 시각 장애를 겪으면서도 "내가 나서 자라난 신앙 안에서 살다가 죽겠노라"고 말하며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정열적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실낙원의 저자 밀톤은 1652년 실명하였습니다. 어려움은 계속 닥쳐왔습니다. 아내는 떠나고, 아들은 죽었습니다. 자신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였습니다. 실명한 상태에서 서사시를 쓰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딸로 하여금 한 구절 한 구절 받아쓰게 하여 "실락원"을 1667년에 완성하였고, 이어서1671년 "복락원"과 "투기사 삼손"을 합본으로 완성했습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는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이 41세로 백혈병으로 쓰려졌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사전 연락도 없이 다가온 것은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그 때 고통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평생 주를 위해 충성하겠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살다 보면 예고 없이 고난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항상 불행은 아닙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됩니다. 깊은 계곡일수록 메아리는 크게 울리는 것입니다. 진주는 고통 가운데 만들어지는 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훈련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1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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