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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백신(10) 소망(시편42: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724 추천수:2 220.120.123.244
2021-04-11 12:48:12

마음의 백신(10) 소망

시편42:5

우리는 계속해서 주일 예배 시간에 마음의 백신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열 번째로 낙심과 절망을 이기는 마음의 백신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염병은 `절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덴마크의 신학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 키게르케골은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 이라고 하였습니다. 위르겐 몰트만도 자신의 <희망의 신학>에서 “절망의 죄”를 언급하며, 요한 크리소스톰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를 멸망에 빠뜨리는 것은 죄라기보다는 차라리 절망이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 자살률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루 평균 자살 사망자 수는 37.8명으로 1년에 1만 3,799명(2019년)이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어마어마한 인력과 돈을 사용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사망자가 1,765명입니다. 10대-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인데 이만한 돈과 정성, 인력을 투입하며 국민의 정신건강을 돌본다면 아마 자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한때 언론은 청년들에게 결혼도, 출산도, 내 집 마련도, 꿈도, 희망 직업도, 인간관계도, 연애도 포기하는 3포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라는 명찰을 달아 주었습니다. 코로나 19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파산이나 실직, 질병이나 사고 등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설사 자살이 아니더라도, 낙심과 절망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죽이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애인과의 이별, 사람하는 사람의 죽음, 절박한 시험에서의 낙방, 경제적 궁핍, 치유될 수 없는 몸과 마음, 세상에 혼자 남겨진 외로움, 간절함이 수포가 되었을 때 어느 날 낙심과 절망의 불청객은 마음에 찾아와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극단적으로 치닫게 합니다. 삶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어버리게 하고, 정성들여 쌓아 올린 삶을 폐허로 만들며,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공허하게 만들며, 체념하게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치명적으로 병들게 하는 낙심과 절망을 이기게 하는 백신은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에 무슨 백신을 맞으면 낙심과 절망의 병에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희망, 소망입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문 위에 "이 문으로 들어가는 자여, 모든 소망을 포기하라."고 새겨 놓았는데 소망, 희망 없는 삶은 지옥과 같은 삶입니다.

사람은 기대를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심합니다. 낙심이 지속되면 절망하게 되고 그 절망을 이기지 못하며 자살을 합니다.

인간이 불행해져야 호탕하게 웃는 사탄은 끊임없이 낙심이라는 도구를 상용하여 사람을 절망하게 만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경매하였답니다.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걱정, 두려움, 욕망, 슬픔, 자만심" 등과 같은 물건을 팔기 위해 악령들을 불렀답니다. 무기 밑에 가격표가 붙어 있었는데 가장 비싼 무기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악령들이 대장인 마귀에게 물었답니다. "왜 이 무기가 이렇게 비싼 가격이 매겨져 있습니까?" 마귀가 대답했답니다. "이 무기는 백발백중 서서히 넘어지게 하는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무기지." 그 무기는 쉽게 구할 수 있고 도처에 널려 있는 낙심이라는 무기였다고 합니다. 명예를 잃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 인기, 재물, 친구, 건강을 상실할 때 낙심하게 됩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되고 낙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절망하며 절망의 늪에 빠지면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다윗도 자신의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낙심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의 저자는 다윗이고 후대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이 수집한 시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시편의 기자가 다윗이라면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 나았을 때의 기록일 것입니다. 아들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쫓겨난 다윗이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6절에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11절에 "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병균에 감염되면 사람의 몸이 풀이 죽고 누어 꼼짝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낙심에 마음이 감염되면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무기력해집니다.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사람도 만나기 싫습니다. 일하기도 싫습니다. 교회에 가기도 싫습니다. 예배드리기도 싫습니다. 우리가 이 낙심과 절망에서 벗어나 소망을 가지고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낙심과 절망을 이기는 백신은 인간 자신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백신입니다(1,2,6,8).

이 시편 기자는 왜 낙심합니까? 2절을 보세요.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낙심합니다(2).

예루살렘에서 떨어져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갈 수 없습니다. 왕일 때는 자유롭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도망자가 되니 마음대로 예배드리러 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다가 능력의 한계에 부딪치면 낙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내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군?" "나라는 존재는 별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라는 식으로 낙심하고 절망하며 극단적 선택을 해 버립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되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왕이라는 자리가 하는 것이지 왕의 자리를 놓아 버린 다윗은 평민과 똑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대단한 것같지만, 인간을 포장하고 있는 것을 거두어 내 버리면 호랑이보다 힘이 없습니다. 시편 42편에는 인칭 대명사가 무려 51개가 등장합니다. 시인은 계속적으로 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를 강조하면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포장지 다 떼어 내면 무능력한 나만 남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합니다. 사람은 대단한 것같지만 그 자리 바뀌면 힘이 없습니다. 왕의 자리 내려오니까 스스로 예배드리러 가는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시편 기자는 어떻게 합니까? 낙심하고 포기해 버립니까? 절망하고 실망하며 좌절합니까?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1절을 보십시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였습니다(1)."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이 없어 물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2절 보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둡니다. 11절에도 반복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인간 자신이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소망입니다(시71:3,5,8, 시62:5-7)

우리는 초점을 연약한 나에게 맞추면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지만 무능력합니다. 내 능력 없어 일이 안 될 때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 의지하다 실망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관심을 무능한 나에서 돌려 하나님을 향할 때 우리는 낙심과 절망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향하는 출발점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무능력을 방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 내 힘으로 안 된다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소망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여성으로 올림픽 3관왕이 된 윌마 루돌프가 있습니다.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22형제 중의 20번째 조산아로 태어났답니다. 그녀는 네 살이 되던 해 성홍열과 폐렴을 심하게 앓아 소아마비에 걸려 양다리가 마비되었답니다. 윌마는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었지만 집안에 갇혀 절망의 수렁에 빠져야만했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가족은 포기하지 않고 소망을 가졌답니다. 어머니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이웃 농장에서 일을 하고, 오후에는 80Km나 떨어진 병원을 찾아갔답니다. 윌마는 다리에 교정기를 부착해야 했고 의사는 그녀가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윌마에게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끈기 그리고 믿음만 있으면 그녀가 원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곤 했답니다.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윌마에게 걷기 훈련을 시켰답니다. "잘했다. 오늘은 80㎝나 걸었구나. 내일은 1m를 걷기로 하자."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킨 훈련은 기적을 만들어 냈답니다. 일곱 살 때 다리 보호대를 차고 목발을 짚은 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답니다. 아홉 살이 됐을 때 윌마는 다리에 차고 있던 금속 보조 대를 스스로 떼어 내고 목발도 없이 걷기 시작했답니다. 열세 살 때 윌마는 춤추는 듯한 이상한 걸음걸이긴 하지만 혼자서 설 수 있었답니다. 같은 해에 윌마는 달리기 선수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그녀는 꼴찌를 하였답니다. 몇 년간 모든 경기에 참여했지만, 언제나 꼴찌를 독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나님을 믿고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열다섯 살 때 그녀는 테네시 주립대학에 입학했고 16살 때 호주에서 열린 올림픽에 출전하여 400미터 계주에서 동메달을 땄답니다. 4년 후 20살이 된 윌마는 로마 올림픽에서 100미터 경기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웠고 200미터, 400미터 계주에서 우승을 하여 사상 최초로 여성 올림픽 3관왕이 되었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의 모든 사정과 형편을 알고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절망의 병에 걸리지 않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 자신에게 소망을 두는 백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백신을 맞고 낙심과 절망의 병에 걸리지 않고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2. 낙심과 절망을 이기는 백신은 내 바람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말씀)에 소망을 두는 백신입니다(6,5,8,11).

사람이 낙심하고 절망하는 두 번째 이유는 신뢰의 대상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면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도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소원과는 달리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도망자가 되어 목숨 건지기 위해 구차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신뢰한 대상으로부터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내가 이렇게 했는데 하나님 어찌하여 왜 이런 결과를 주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했는데 왜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이런 질병을 주고 이런 실패를 줍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어찌하여(5.9.11)"라는 질문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일이 안 된 이유를 모를 때 낙심합니다(2,9). 어찌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잊었는지, 어찌하여 원수들이 핍박하는지를 몰라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를 7곱 번이나 계속 반복하여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왕위에서 쫓겨나 방황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이 잘 안될 때 이런 질문을 던지고 모르는 이유 앞에서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연 "왜 이런 일이 내게 임했을까? .. 왜 하필이면 나라는 말인가?..."라고 질문하면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미래가 불안해지는 것입니다(5,11).

그러나 이유를 안다고 모든 문제의 답이 있습니까? 인간 사회에는 이유를 안다고 할지라도 풀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유를 모두 다 알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밥에 대하여 다 이해하고 밥을 먹습니까? 자동차에 대하여 다 이해하고 자동차 탑니까? 어떤 사람은 신앙도 다 이해하고 믿겠다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다 이해하고 믿겠습니까? 의사가 약을 처방하면 이해가 잘 안 되어도 그 약속을 믿고 치유될 것을 희망하고 약을 먹습니다. 소망은 자신의 소원이 아니라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과 소망을 분리해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사회학자이면서 신학자인 자크 엘룰(Jacques Ellul)은 “희망은 근본적으로 기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어 그는 “희망은 희망일뿐이고 결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희망과 소망은 구분되어져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희망과 소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소망이나 희망이나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신앙인들은 희망과 소망을 분리해서 사용합니다. 희망은 내가 기대하는 것, 내가 얻고자 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소망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근거하여 바라는 것입니다. 희망은 내 꿈을 이루는 것이라면 소망은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희망의 주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것이 미래에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희망 고문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주의 시인이었던 소포클레스는 희망을 “슬픔을 가중하는 인간의 최대 약점”이라고 했고 유리피데스는 희망을 “인류에게 주어진 저주”라 했습니다. 베이컨은 "희망은 훌륭한 아침 식사이긴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저녁 식사이기도 하다"라고 했고, 벤자민 프랭클린 "희망으로 사는 사람은 금식하다 죽을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희망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견해의 중심에는 희망이란 실체가 없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희망은 실체가 없는 거짓된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자 폴 틸리히는 거짓 소망과 참 소망을 구분하여 말합니다. 틸리히는 현실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은 소망은 뿌리가 없기에 백일몽이나 환상에 불과하지만 참 소망은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고 경작을 하면 때가 되어 추수를 하듯이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씨를 뿌리는 작업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참 소망은 실재와 연결되고 삶에 동력을 제공하고 가능성을 부여하기에 현실에 전혀 근거를 두지 않는 거짓 소망과 구별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미래)은 이스라엘과의 계약 관계 속에서 약속을 주시고 이루시는 신실하신(과거)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현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이 소망입니다. 소망은 그 주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시71:5) 본질적으로 성취 불가능한 미래를 그리는 망상이나 유토피아와는 다릅니다.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은 “소망이 없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소망 없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소망의 주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소망의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소망은 믿고 인내하면 믿는 사람 안에서 성취됩니다. 사도 바울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롬 5:5), 이 소망을 확신하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6절에 보면 주를 기억하였다고 했는데 이 시편 기자가 다윗일 경우는 지금은 비록 쫓기는 신세이지만 그의 왕국이 영원하리라는 삼하 7:12-16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 7:16)" 비록 지금 기대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소망 가운데 일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에게 기대하지 않은 일이 이루어진 이유는 몰라도 약속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기대했던 대상으로부터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나와 기대에 벗어난 목사님, 기대에 벗어난 장로님으로부터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선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사람의 말을 향하면 낙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이 신뢰한 하나님이 기대와 다른 결과를 주었을 때 시편 기자는 어떻게 합니까?

지금 예루살렘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포기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6절 보십시오. 헤르몬과 미살 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보이는 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7절 보십시오. 지금 어려운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로 받아들입니다. 비록 파도에 휩쓸린 삶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5절 하반절,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여전히 하나님께 찬송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갈 수 없지만 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하고자 한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대한 바 대로 주시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약속에 근거하여 소망하며 마치 그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주어진 조건에서 하나님 약속 붙들고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를 접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망의 목표를 향한 걸음을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요셉도, 모세도, 느헤미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험한 세월 인내하며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이 땅에 성취하였습니다. 우리가 낙심과 절망을 이기기 위해 맞아야 할 소망의 백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백신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3. 낙심과 절망을 이기는 백신은 잃은 것보는 사람의 평가에 소망을 두지 말고 남은 것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평가에 소망을 두는 백신입니다(3,10,4).

왜 다윗이 낙심하고 절망합니까? 사람들의 평가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합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평가합니까? 네가 과거 왕이었는데 권력도 부도 명예도 자식도 다 잃었다는 것입니다. 잃은 것 보고 그렇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종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주야로 자신의 음식이 될 정도로 슬퍼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뼈를 찌르는 칼같이 대적들이 비방을 합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하나님 잘 믿는다더니 왜 자식이 그 모양이야, 왜 탈선해, 왜 실패해, 왜 사업이 그 모양이야? 왜 부도가 나, 왜 직장을 잃었어. 왜 병들었어." 이런 말을 한 두 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자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사람들은 잃어버리면, 잃어버린 것을 보며 사람들이 비방하고 조롱하면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인간들의 평가를 전부로 받아들이면 낙심하게 되어 있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잃어버렸을 때 사람들의 평가를 하나님의 평가를 무시하고 자신을 해치고 깎아내릴 정도까지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다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평가는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입니다.

우리는 늘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그 남아 있는 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에게는 아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입술이 있었습니다. 다 떠나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 영원토록 가지는 것은 없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씩 하나씩 다 상실해 가는 것입니다. 상실해 가는 것을 보고 낙심하고 절망하면 아무도 이 땅에 제대로 행복하게 살 사람은 없습니다. 2주 전에 인감증명서를 떼로 주민센터에 갔습니다. 지문인식기에 엄지손가락을 올리라고 해서 올렸는데 맞지 않는 것입니다. 몇 차례 반복했는데 틀린 것입니다. 그러자 주민센터 직원이 어머니 이름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딸의 생일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직원이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증명하기 위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아들딸 이름을 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젊은 사람 앞에서 창피하고 한심하지요. 어머니 이름도 모르고 딸의 생일도 모르니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나이 들면서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아직 남은 것이 그래도 많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보며 조롱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의 평가를 보며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나가는 연예인들이 누가 SNS 상에서 조금만 비방해도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과 인기를 누리는 사람은 조그마한 부정적 평가를 들어도 쉽게 망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은 다 잃은 것같지만 모든 것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직도 자신 곁에 있었습니다. 마지막 진정한 평가를 해 주실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5절 같이 한 번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침묵하는 것 같고 안 계신 것 같지만 언젠가 나타나 도우시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잃은 것을 보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평가를 들으며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마지막 평가를 해주실 하나님을 보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평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잘했다 칭찬해 주실 영원한 하나님의 평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어찌 자신을 잊었냐고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인자를 베풀어 주시고 마지막에 잘했다 충성된 종이라고 평가해 줄 날이 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 당하면 잃어버린 것을 보고 자신 스스로 평가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4절에 보십시오. 화려했던 과거와 비교하며 스스로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화려했던 과거와 도망자 신세인 지금을 비교하면 얼마나 낙심되고 절망이 되겠습니까? 과거에는 왕으로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며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는데 지금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속이 상한 것입니다. 스스로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이 들면서 과거 자신의 위치와 지금의 위치를 비교하면 스스로 낙심되고 절망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미래를 보며 소망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정 과거를 생각하고 싶으면 비교되는 과거만 생각하지 말고 처음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적신으로 나온 처음 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왕도 되게 하고 부귀영화도 주었습니다. 지금 생명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자신을 지지해 주고 조금 따르는 사람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조금 사정이 나빠졌을 따름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를 베푸신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낮이 해 뜨는 낮일 수 있지만 상징적 표현입니다. 좋은 날이 오리라는 것입니다.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실 좋은 날 이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 좋지 않은 밤에도 찬양하며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낮이 옵니다. 하나님의 인자함을 맞보는 낮이 오고야 맙니다. 언젠가 번영의 시기가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절대 자포자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앙의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심지어 재앙과 슬픔의 어두운 밤에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반석이십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 인생 끝난 것 아닙니다. 갈 길이 남아 있습니다. 숙제하다 말고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직 인생의 막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인생 살다보면 낙심될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인생 다 산 사람처럼 그렇게 지금이 전부라고 평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30년 준비하여 3년 일하였습니다. 모세도 80년의 준비기간이 있었습니다. 지금 잘되는 것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신앙의 선배들은 낙심과 절망적 상황에 있었지만 낙심하며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17살에 꿈을 꾸며 성경에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설렘과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찾아온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죽음의 고비, 인신매매, 노예였습니다. 얼마나 낙심되었겠습니까? 얼마나 절망스럽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요셉의 인생의 끝인가요? 모세를 보십시오. 40세에 조국을 위하여 큰 꿈을 가지고 출발하였습니다. 민족을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던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40년간이나 말입니다. 장구한 세월을 광야에서 고독하게 보내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위대하고 극적인 부름을 받았지만 3여 년 동안 아라비아에 들어가 침묵의 기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분들이 겪은 것이 오늘 우리가 겪는 것보다 덜 힘든 것일까요?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을 그것으로 마치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훈련시켜 하나님의 쓰실 만한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윈스턴 처칠"도 학교 다닐 때 낙제한 적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발명왕 에디슨도 무수히 많이 실패하였습니다. 링컨도 사업에 실패하고 신경쇠약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실패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대 그 실패의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조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들의 미래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의 과정을 보고 낙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니까 제자들은 실패한 줄 알고 낙담하고 다 제 갈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부활하심으로 그들을 다 회복시켰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사람들처럼 낙담하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실패도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일 뿐입니다. 우상장사의 아들 아브라함, 부인을 누이라고 속인 실패의 사람 아브라함, 목동 다윗, 여러번 실패한 어부 베드로,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 바울, 기생의 아들 입다, 바람둥이 삼손, 겁쟁이 기드온, 농사꾼 아모스, 소모는 엘리사... 하나님은 이들 모두에게 낙심과 절망할 만한 상황에서도 사명을 주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0.01%라고 소망이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든 포기하면 편할 수 있고, 단념하면 그것이 끝일 수 있습니다. 흐린 날에 먹구름만 보고 사는 삶보다 먹구름 속에서도 실낱같은 은빛을 보며 사는 삶이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하늘 가득 구름이 쌓여 있어도 구름 위를 뚫고 올라가면 찬란한 태양 빛이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16세에 어머니를 폐병으로 여의고 18세에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았답니다. 젊은 날 사회주의 결사대에 가담했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살아났습니다. 36세에 결혼했지만, 아내는 43살에 결핵으로 죽었습니다. 아들마저 굶주림과 추위로 죽었고, 자신도 평생 간질병으로 고통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인생의 가시 속에서도 '백야', '죄와 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 등과 같은 아름다운 장미꽃을 피웠습니다. 호흡이 있다면 예수님을 만나면 아직은 희망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환난을 당할 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16:33)고 말씀합니다. 미래를 보며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두려움이 엄습할 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사41:10)라고 말씀합니다. 모두가 떠나 버리고 홀로입니까?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은 "외로울 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고 절망하였습니까? "선을 행하나 낙심될 때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갈6:9)고 말씀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과 절망을 이기는 소망의 백신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소망이라는 백신입니다. 사람의 바람이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소망이라는 백신입니다. 잃은 것 보고 평가하는 사람의 평가가 소망이 아니라 남을 것 사용하시는 마지막 하나님의 평가가 소망이라는 백신입니다. 이런 소망의 백신이 인간의 마음을 낙심과 절망이 병에 걸리지 않게 합니다. 5절을 자신의 이름을 넣어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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