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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백신(9) 부활(요한복음11:25-2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46 추천수:0 220.120.123.244
2021-04-04 13:54:35

마음의 백신(9) 부활

요한복음11:25-26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누구나 태어나 죽습니다. 그 죽음이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지각한 후부터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명을 위한 인간의 몸부림

죽음을 이기기 위해 무수히 노력했습니다. 좀 더 젊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을 하며 끊임없이 투쟁했습니다. 어쩌면 불멸을 위한 투쟁사가 문명사 일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백신을 끊임없이 찾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죽음을 정복하고 불멸의 생명을 가지기 위해 수많은 일꾼을 동원하여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중국의 황제 진시황은 불멸의 생명을 꿈꾸며 연금술사들에게 죽음을 막아 주는 불로장생약을 찾아내라고 명령했습니다. 16세기 스페인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은 젊음의 샘을 찾기 위해 카리브해로 항해를 떠났습니다. 과학주의 신봉자들은 과학이 영생을 줄 것이라고 믿고 머지않아 영생하는 새로운 인간, 즉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포스트 휴먼(posthuman)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래학자 호세 코르데이로(Cordeiro) 박사는 "인간의 영생은 불가능한 게 아니다. 과학기술의 성과를 감안하면 시간문제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에디슨 이후 최고의 발명가'로 손꼽히며 지난 30년간 미래 예측에서 80% 이상의 적중률을 보인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2045년엔 인간의 모든 질병이 극복됨으로써 인류가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시대가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2045년이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성을 뛰어넘는 '특이점'에 도달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특이점이라는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시점을 말합니다. 그는 그때까지 생존하기 위해 각종 영양제를 하루 150알 이상 복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돈이 연간 11억쯤 된다고 합니다. 구글, 아마존, 오라클 같은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최대 관심이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벌거숭이 두더지 쥐'는 일반 쥐에 비해 고통을 느끼지 않고 암에 걸리지 않아 일반 쥐보다 10-30배 오래 산다고 하는데 구글은 영생의 비밀을 벌거숭이 두더지에서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과 90%가 같은 유전자를 가진 통상 쥐의 수명은 2년인데 유전자 조합으로 이미 현재 5년까지 사는 쥐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뇌과학, 분자 생물학, 생명공학, 정보기술, 나노기술, 첨단 의료기술 등의 발달로 2029년부터는 해마다 기대수명이 1년씩 더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도 자신의 기술과 돈으로 죽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2. 죽음의 필연성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죽음은 필연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14장 14절에서는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7)"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인 중에서 지금 얼마나 죽고 있는가를 알려 주는 사망시계(world death clock)가 있습니다. 연간 사망한 사람은 56,000,000명, 달마다 4,679,452명, 매일 153,424명, 매시간 6,392명, 매분 106명, 매초 1.8명이 사망한다고 합니다. 어느날 1.8명의 대상 중에 내가 되는 것입니다.

 

3. 죽음 앞에서 인간의 고통과 허무

일생을 죽음에 대한 연구로 바친 퀴블러 로스는 인간은 말기 암 환자들과 같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변화를 ‘부인-분노-타협-우울-수용’의 5단계 순서로 진행된다고 정신적 모형을 제시하였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많은 사람은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기 환자는 ‘아니야, 나는 아니야’라고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부인함과 동시에 고립되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 '분노'나 '원망'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왜 하필 나야?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라고 투덜대며 정서 불안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타협 또는 거래단계로 죽음을 지연시키는 방법을 찾으려고 온갖 궁리를 다 한다고 합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으며 온갖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약을 찾는다고 합니다. 종교에 귀의해 살려주면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도 한다고 합니다. 네 번째 단계는 우울의 단계라고 합니다. 병세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절망 상태에 빠진 환자는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죽은 뒤 남겨질 배우자나 자식에 대한 걱정, 죽기 전 하고 싶은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상실감, 모든 것을 잃어 버린 다는 것 등으로 우울해 한다고 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수용이라고 말합니다. 마침내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임을 인정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합니다.

 

4. 죽음을 이기는 백신

그렇다면 죽음 앞에서 부인, 분노, 원망, 슬픔, 우울, 절망, 허무, 두려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코로나 19에 걸리지 않기 위해 백신을 맞는 것처럼 이런 죽음의 병에 걸리지 않는 백신은 없겠습니까?

성경은 그 백신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을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죽음을 맞이한 한 가정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가족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자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과정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퀴블러 로스가 제시한 그런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살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나사로가 죽은 후에 예수님이 왔습니다. 그 때 마르다는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다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21). 그러면서도 타협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든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살려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줄기 죽음을 이기는 소망을 가져 보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그녀에게 죽음을 이기는 백신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믿지 않습니다. 부활 때나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때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무슨 말씀을 해 주십니까?

25-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죽음을 이기는 백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백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고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백신을 맞으면 비록 인생은 누구나 죽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불멸하는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5. 죽음을 이기는 백신을 맞는 것은 부활을 믿는 것

그 백신을 맞는 것은 그 사실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도 살아납니까? “믿는 자”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습니까?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입니다. 나는 바로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그 사람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마르다에게 믿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 때 마르다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27절을 같이 크게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심으로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은 신화이며 꾸며낸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스피노자는 "만일 누구라도 나를 위하여 요한복음 11장에 있는 나사로의 부활 기사를 진실로 입증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내가 세운 철학을 파괴하고 크리스천이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독일의 합리주의 신학자 파울루스 "기절한 나사로를 무덤에서 꺼내 바깥바람 쐬어 호흡을 회복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전을 쓴 르낭 "예수에 대한 신앙이 식어 가자 베다니의 세 남매와 짜고 술책을 부렸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다고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이 가짜일 수 없습니다. 소경이 태양을 보지 못하였다고 해서 태양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귀머거리가 바람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고 해서 바람이 없습니까? 개미가 인간의 세계를 자신의 경험으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초논리, 초이성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해되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서울역 가는 길을 아이에게 알려 주면 아이가 이해되지 않더라도 알려 준 아버지를 믿고 그대로 가다 보면 서울역이 나오고 아버지의 가르침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차원이 달라지면 쉽게 논리와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차원의 세계에서 3차원의 세계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경험을 통해 알 뿐입니다. 평면에서 사는 개미가 어느 날 땅에 나비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나비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비가 자기가 사는 평면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공중으로 날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가니까 또 나비가 내려와 2차원의 세계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3차원을 모르는 개미에게는 기적입니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적, 논리적 사유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부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고 과거에도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실에는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사실, 상호 주관적 사실, 과학적 사실, 역사적 사실 등이 있습니다. 여기 제 손에 볼펜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반복적이고 관찰 가능하고 측정하여 계량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믿지 않으면 사람들은 미쳤거나 백치하고 말합니다.

사실에는 이렇게 객관적 사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사실도 있습니다. 제가 결혼했지만 저희 교회에 나와 2부 피아노 반주로 봉사하고 있는 제 딸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님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제가 되어 보지 않는 한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주관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지 실제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열심히 가르치고 딸을 위해 아버지로 희생을 합니다. 딸을 사랑하는 모습을 실제 삶 가운데 일어나면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아 목사님이 딸을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인정을 합니다. 이런 것을 상호 주관적 사실이라고 합니다.

과학적 사실은 반복적이고 관찰 가능하며 수치로 계량화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다릅니다. 한 번 일어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실은 역사속에서 반복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말할 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실제 일어난 사실과 기록된 사실입니다. 독일 말로는 게쉬히테(Geschichte)와, 히스토리에(Historie)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히스토리에는 연대에 따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고 게쉬히테는 해석된 역사입니다.

역사적 사실에는 사실적 역사와 기록된 역사가 있습니다. 과거에 실제 일어난 실제의 사실이 있고 조사되어 기록한 과거의 기록은 해석된 것입니다.

문제는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은 누구도 객관적 사실로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것이나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것이나 지금 그것을 보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 기록된 역사를 통해 믿을 뿐입니다.

이때 이것이 사실인지 믿으려면 과학적 사실처럼 역사적 사실은 반복, 관찰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언이나, 고고학적 유물, 일관되 역사 기록물, 적절성, 합리성, 논리성 등이 필요한 것입니다. 비평의 원리, 유추의 원리, 상관의 원리로 역사적 기록이 사실이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기록된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써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바로바로 보도되는 오늘날 신문도 사실이 아닌 가짜 보도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기록된 역사가 사실이려면 객관성이 필요합니다. 많은 증거와 증인이 필요합니다. 고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개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나간 역사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경험과 불일치가 되면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과거 발생한 사건은 오늘과 상호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결코 현재의 경험과 완전히 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일어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도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이 없는데 어떻게 과거에 부활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과학적 사고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부활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실제적이고 유일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어두운 새벽길에 잘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씀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릿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 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신화, 동방 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님께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과학적 증명만 꼭 사실을 입증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법적-역사적 증명도 있습니다. 재판을 할 때 보십시오. 지나간 사실을 모르니까 재판할 때 법적 증명은 구두 증언과 문서상의 증거 그리고 증거물에 의존합니다. 런던대학교 법률학 교수 노먼 앤더슨도 <부활의 증거>라는 책을 통해 만약 부활이 참이라면, 그것은 역사의 의미를 뒤바꾸는 최고의 핵심적 사건이 될 것이며, 만약 거짓이라면 기독교는 희대의 사기극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법률을 가르치는 교수로 여러 기록 문서의 증언을 철저히 검토하고, 빈 무덤이나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여러 가설을 과학적으로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결론은 부활이 사실이다는 것입니다. 어떤 법정에서든 최고의 증거는 '직접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수많은 증인과 증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성경의 증언이면서 역사적 사실입니다. 진위 논란이 있지만,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초기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 유대인들 중의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도록 했다."라고 기록했고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 이름의 창설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에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라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역사적 사실인 것을 확실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기절했다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눅23:55).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옮겨 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고 실제적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부활을 목격한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요7:5)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하였습니다(행1:14).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했고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자신의 형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희생 제사, 율법, 안식일을 기반으로 하는 유대 사회가 변했습니다. 1500여 년 동안 이어온 안식일이 예수님이 부활한 날로 예배가 바뀌었습니다. 바벨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에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이것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민족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사회 구조가 바뀔 수 있겠습니까? 로마가 부활 신앙으로 정복되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채 20년도 되지 않아 로마의 황실까지 들어가 로마의 권력을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의 부활밖에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이 부활을 증거하다 순교를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던 사람을 잡아 죽이려던 사울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 순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풀어야 할 숙제는 산적해 있습니다. 한글에 대한 그 모든 기록을 부정해야 하고 믿지 못할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역사적 기록은 과학적 사실처럼 반복적, 관찰 가능, 계량화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개연성과 확률의 차원에서 믿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인류 구속 사역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성취하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여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분이십니다. 문학적인 천재이며 캠브리지의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 교수인 'C.S 루이스'는 부활을 믿지 않고 기독교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자기가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마다 연구하다가 자기가 가장 협오했던 복음서의 역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과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엎드려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카고 트리뷴지의 기자였던 리 스트로벨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다가 회심한 후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출현에 대한 증언과 증거의 수량은 압도적으로 많다. 만약 당신이 예수님의 부활 후 출현을 목격한 증인들을 한 사람씩 법정에 세우고서 사람마다 15분씩 시간을 들여 반대 심문을 한다고 해보자. 쉬지 않고 종일토록 심문하면 월요일 아침에 시작해서 금요일 저녁 때까지 그들의 증언을 들어야 할 것이다. 연이어 129시간 동안 목격자의 증언을 들은 후에도 믿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볼 때 분명히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부활했는데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손가락을 내밀어 옆구리를 넣어 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 4절에서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6장 9절에서는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6-17)”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동일한 몸으로 부활하여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자신의 동료들에게 듣고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만져 보라고 했습니다. 만져 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라 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1:29)”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시공간을 초월하여 방에 있는 제자들에게 보여 주심으로 비동일한 몸으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보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백신은 부활입니다. 마음에 죽음에 대한 백신을 맞는 것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을 확실히 믿으면 죽음의 병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부인하고, 분노, 원망, 슬픔, 우울, 절망, 허무, 두려움, 고통에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고전 15:20,51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보며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잠들었도라”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은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처럼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백신을 맞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며 마지막까지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닥터 홀의 조선회상"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선에서 선교 개척자로 일생을 바친 의사 부부였던 부모 아래 태어나, 훗날 다시 의사인 아내와 함께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16년의 세월을 보낸 닥터 셔우드 홀의 자서전입니다. 그분은 98세까지 사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정을 가지고 봉사했는데 그분의 열정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결핵 요양소가 세워졌고 1932년 남대문을 그린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이 발행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제임즈 홀은 조선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환자를 치료하다 전염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남매 둘을 남겨 놓고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의 어머니 로제타 홀은 남편 뿐 아니라 딸도 어린 나이에 조선에서 잃었습니다. 의사인 그녀는 남편을 먼저 천국에 보낸 후 미국으로 갔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절망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평양에 병원을 세우기 위해 모금 활동을 하고, 조선의 시각 장애인을 돕기 위해 점자 공부를 하였습니다. 김 에스더를 유학시켜 한국인 최초로 의학박사가 되게 하였습니다. 다시 조선에 돌아왔지만 6개월 만에 세 살 된 딸 에스더를 천국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간 남편의 이름을 붙여 "홀 기념 병원"을 세웠고, 어린 딸을 생각하며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위해 '에디스 마거리트 어린이 병동'을 세웠습니다. 그 뿐 아니라 지금은 이대 부속병원이 된 '동대문 부인 병원'을 세워 무지한 부인들을 치료했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교"를 세워 의사들을 배출시켰습니다. 시각 청각 장애인을 공부시켰습니다.

자신들을 환영한 것이 아니라 핍박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은 조선 땅인데 어떻게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남편과 딸을 잃고 외아들을 기르면 조선 땅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죽음을 이기는 백신, 부활을 믿는 신앙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 그녀를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실천하게 했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에게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 날도 예수님은 죽음 앞에 절망과 허무와 두려움,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들을 향해 질문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마리아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믿었습니다.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이시니이다”라고 믿었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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