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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백신(8) 십자가의 고난(히브리서12: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680 추천수:5 220.120.123.244
2021-03-28 13:36:24

마음의 백신(8) 십자가의 고난

히브리서12:2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막다른 골목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생쥐와 배가 몹시 고픈 고양이가 마주쳤답니다. 고양이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오늘 너를 기어이 먹어야겠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생쥐가 고양이 귀에다 입을 대고 아주 느끼한 소리로 말했답니다. "나 오늘 사는 게 고달파서 쥐약 먹었다!" 매일 다가오는 고난과 고통 때문에 사는 게 힘드신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념하는 고난 주일이고 이번 주, 한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에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을 그렇게 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여 매년 추모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고난주간이 되면 좀 더 경건하게 살기 위해 금식을 하고, 특별기도회를 합니다. 계속에서 마음을 병들지 않게 하는 마음의 백신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오늘은 8번째로 어떤 일을 성취하는데 고난과 고통을 이기고 성공할 수 있는 백신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일을 이루려면 수많은 크고 작은 고난과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없고, 고통없이 수술받을 수 없으며, 공부하는 학생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려면 고난과 고통을 이겨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3월 중순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을 시작하여 잘 이루고 있는 자매에게서 기도 부탁이 문자로 왔습니다. 중요한 포지션에 있는 분이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아마 더 좋은 연봉을 주는 곳으로 옮겼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 나가는 가운데 처음 있는 일이라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다고 힘내라고 문자를 보내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고난과 고통이 없는 일이 없습니다. 성공적인 사업을 이루려면 고난과 고통을 이겨야만 하고, 결혼생활도, 신앙생활도, 자녀교육도, 대인관계도 성공하려면 고난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1. 그렇다면 우리 믿는 사람이 어떤 것을 성취하는데 다가오든 수많은 고난과 고통을 이기고 성공할 수 있게 하는 마음의 백신 한 가지를 말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고난과 고통을 받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고 인내하고 이기게 하는 십자가 고난의 백신입니다.

오늘 성경은 고통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백신을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 먼저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같이 큰 소리로 따라 해 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1절에 보시면 우리 인생은 운동장에서 달리는 운동선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인생 경주에는 반드시 고난과 고통이 따릅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며 달립니까? 운동선수가 승리하려면 골인 지점에 집중하고 그곳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축구선수도 골에 집중하고, 배구선수도, 야구선수도, 농구 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골 집중력이 떨어지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과 고난을 참고 견디며 승리하려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선을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늘 집중해야 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믿음의 주입니다. 주(아르케곤)라는 말은 "시작자, 근원자,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하게 하시는 이입니다. "온전케(텔레이오텐)"라는 말은 "완전한 자, 성취자"라는 말입니다. 즉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라보자(아포론테스)"라는 말은 "주목하다 시선을 고정하다"라는 말입니다. 문법적으로 현재분사입니다. 믿음의 창조자이시고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계속 지속적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주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최대 전략을 고통과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것입니다. 사탄은 돈이나 명예, 권력, 쾌락을 바라보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모든 고통과 고난을 이기고 마침내 인류의 구원사역을 완수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심각한 박해로 인하여 고통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유대교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 오랫동안 믿었던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치광이 같은 네로가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고문을 당했습니다. 사자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심한 박해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10:33-34; 11:36-38).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히10:32-34) 그 때 믿음이 확실한 사람들은 기쁨으로 그 고난을 감수(10:34)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계속되자(12:4) 교회 내의 신앙인들이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불신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3:12)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말씀의 초보에 머물렀습니다(5:12). 공적 예배에 잘 모이지 않았습니다(10:25).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12:12). 불건전한 교리에 현혹되었습니다(13:9) 전반적으로 신앙이 침체되었고 세상과 타협하는 자도 있었고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고통과 고난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2) 십자가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참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고통과 고난을 참고 견디며 이기려면 어떤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까?

3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죽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고난을 참으신 것입니다. 세상은 너 죽이고 나 살기 위해 고난을 피합니다. 내가 옳고 너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고난을 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으신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참으면서 인류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신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는 것"은 한 번 참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으로 제1 완료 분사로 죄인들에 의한 지속적인 적대 행위를 계속 끝까지 참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참았습니까?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입니다. "거역한 일(안틸로기안)"이란 반박하고, 논쟁하고, 적의를 가지고 적대행위를 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대적자들이 예수님께 행한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엇을 참았습니까?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 와보라고 조롱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가시면류관을 씌우며 조롱합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습니다. 옆구리에 창을 치릅니다. 강도가 조롱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계속 쫓아다니며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하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가족들도 미쳤다고 하면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에게 수없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았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마음에 조금만 상처를 받도 참지 못합니다. 자존심이 조금만 상해도 참지 못합니다. 조금만 서운한 말을 들어도 참지 못합니다. 조금만 자존심 상해도, 조금만 좋지 않은 말을 들어도 원수 시 하고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떠나버리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완전히 자존심이 뭉개지고, 옷을 벗김 당하는 수치를 당하고 만인들 앞에서 조롱을 당했는데도 참고 견디며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완주하였습니다. 현대인들은 조금만 고통을 당해도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채찍을 통해 주어진 가혹하고 잔인한 고통을 참았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옆구리에 창이 찍히는 고통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십자가의 조롱과 멸시와 수모를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권위가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거부하고 반항하는 것을 참았습니다. 모욕을 당할 때 끝까지 참고 구속사를 완주하였습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비교해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당할 때 예수님이 당한 일을 비교하며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친한 할머님 세 분이 몸이 불편해서 한의원에 갔답니다. 나란이 누워 침을 맞는데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답니다. 그러자 한 할머니가 갑자기 큰 소리로 “십자가를 생각해, 십자가”라고 외쳤답니다. 한의사가 왠 십자가요라고 물어 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못에 찔려 돌아가셨어. 그런데 그깟 침도 못맞아”라고 말하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 못 견딜 고통도 없습니다.

군대 갔다 오신 남자 성도님들은 알겠지만, 군대에 가서 유격 훈련을 받을 때 육체의 한계를 느낍니다. 저는 요령 피우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하는 편이라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유격 훈련을 받다가 점심밥을 먹는데 손이 올려지지 않을 정도로 극한 고난의 상태에 이른 경험을 해 보았습니다. 또 군장을 메고 행군할 때 손에 찬 시계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고 오르막 길을 오를 때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같은 힘겨움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신 예수님, 십자가 못을 박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이겼냈습니다.

저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하다 고난과 고통이 다가오면 포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시며 골고다에 오르셨는데 이것쯤이야라고 속으로 말하며 견딥니다. 제 마음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라는 백신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백신이 있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을 박히고, 옆구리에 창이 찔리는 고통을 참으시며 인류 구원 사역을 이루셨는데 내가 당하는 고통이야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하며 견디며 참고 나아갑니다.

 

2.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인생 경주를 하는데 왜 우리에게 고통과 고난이 다가 오겠습니까?

현재 우리 사회는 Three 고 시대라고 말합니다. '고'통 속의 청년들, '고'단한 장년들, 그리고 '고'독한 노년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 예배가 끝난 후 한 집사님이 몸의 고통을 호소하며 기도부탁을 해 기도해 드렸습니다. 모두가 고난과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입니다. 이런 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마술처럼 고난과 고통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믿음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어떤 일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고통과 고난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보편 법칙입니다. 서양 격언에 "냇물에서 잔잔한 돌들을 치워버린다면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통해서 영글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은 삶을 힘있게 해줍니다. 인생의 맛을 더해 줍니다.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썩지 않고는 거름이 될 수 없습니다. 의자는 자기를 내어 주는 고통을 감수해야 사람을 편안하게 앉게 만듭니다. 텃밭에 상추를 심어 드시는 분이 많으신데 상추는 밭에서 잘리는 고통을 당해야 사람에게 좋은 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산모는 아이를 배에 품은 고난을 겪고 분만의 고통을 겪어야 어머니가 됩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은 크게 세 종류입니다.

첫째는 연단으로서의 고난입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구름같이 허다한 신앙의 선조들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생의 경주를 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거운 것(오그콘)"이 고난의 도구입니다. 이것은 경주를 하는데 방해하는 외부적 요인으로 지나친 몸무게나 귀찮은 짐 보따리, 경주를 방해하는 옷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들이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고난을 줍니다. 하나님은 왜 운동하기에 적합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이 무거운 것들을 벗어버리게 합니까? 광석을 불에 녹여 불순물을 제거하듯이 하나님이 성도를 훈련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군인이 어려운 훈련을 받습니다. 그것은 군인들을 괴롭히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터에 나가 승리할 수 있는 군인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과 같은 인물이 당한 고난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국무총리가 된 것입니다.

 

둘째는 징계로서의 고난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가 고통을 줍니다. "얽매이기 쉬운"이라는 말은 "쉽게 얽어매는", "달라붙는"이라는 말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죄악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그러면 예수 믿고 나서 죄를 지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합니까? 그대로 방치해 버립니까? 아닙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를 합니다.

먼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양심에 조용히 충고하십니다.(요14:26)

그래도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인고로 채찍을 드십니다. 그 채찍의 방법의 다양합니다. 때로는 육신의 질병을 줍니다. 사업의 실패 줍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채찍이 불신자가 당하는 고난과 외형상으로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이 법의 집행자로서 형벌하십니다. 재판관으로서 재판하고 벌하십니다. 죄의 삯인 사망의 벌이며 심판이요 저주의 형벌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은 자비롭고 엄한 아버지로 벌하십니다. 아버지로서의 징계며 채찍질입니다.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참 아들인 것을 알려 주십니다.(6,7,8) ①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8). ②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6).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잠 3:12)" ③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히12:10).

우리를 멸망하게 하고 지옥의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결국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째는 자발적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자발적인 고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성도들이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코로나19 시기이지만 우리 성도님들이 열심히 헌금하고 봉사하고 교회에 나와 혹은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봅니다. 어려운 때 사업하면서 정성을 다해 헌금하시는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몸이 좋지 않은데도 매주 예배당에 나와 청소하는 부부도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자발적인 고난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자 굴 속에 들어가기도 했고 풀무 불 속의 시련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예수님 때문에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은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하다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고, 굶주리고 자존심 상하고 살아갑니다.

 

3. 우리가 무엇을 위해 예수님 십자가 고난의 백신을 맞습니까?

코로나19 백신은 코로나 19에 걸리지 않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맞으면 고통만 있고, 맞으나 안 맞으나 다 걸린다면 누가 백신을 맞겠습니까? 백신을 맞으면 그 병에 걸리지 않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백신을 맞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고난의 백신을 맞으면 어떤 유익이 있겠습니까?

무엇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습니까?

첫째는 인류 구원사역을 이루는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지상에서 얻는 기쁨 대신에 하늘에서 얻을 더 큰 기쁨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고 인내했다는 말씀입니다. 개의치 않았다는 말은 무시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에 주어질 기쁨을 위해 오늘의 고난과 고통을 십자가 고난과 비교하고 생각하며 참아야 합니다.

11장에 나오는 믿음으로 승리한 신앙의 선조들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고 산 그들의 삶은 결국 승리로 끝났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상주심을 바라보고 그 고난과 고통을 인내하며 승리하였습니다.

33-3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신앙의 경주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를 낙심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피곤하여 낙심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낙심의 의미는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진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고난의 백신을 맞아야 어떤 고난과 어떤 결과나 와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에 감염되면 풀이 눕는 것처럼 희망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해집니다. 의욕을 잃게 됩니다.

우리도 십자가 백신을 맞고 고난을 이기면 주어진 사명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11).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세, 아브라함, 다윗, 욥, 요셉, 바울 등이 고난의 강을 건너면서 주어진 사명을 이룰 만한 인격의 그릇들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 보리 이삭 밟기를 해 보았을 것입니다. 보리 이삭이 잘 자라면 한 포기에 450알이나 열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음 돋아난 줄기는 그렇게 많은 낱알을 떠받칠 수 없고 겨우 80알내지 90알 정도 밖에 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농부는 보리가 싹을 내면 발로 밟습니다. 이때 허약한 싹은 꺾여집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전보다 더 강한 줄기가 됩니다. 그래서 몇 100알이 열려도 문제가 없답니다. 보리싹을 밟는 것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모르는 그릇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강을 건널 때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4:14)”

피할 길을 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10)"

 

셋째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십니다.

2절 끝 부분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는 말은 승리했다는 말도 되지만 하나님이시다는 말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 됨을 입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면 믿는 사람답게 된 것입니다. 진짜 믿는 남편, 믿는 아내, 믿는 목사로 입증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십자가 백신을 맞고 극복하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1)징계로서 당하는 고난이라면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복종하면 됩니다(9).

루이스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평안하고 즐거울 때는 우리에게 귓속말로 말씀하시고, 열심히 일할 때는 보통말로 말씀하시고, 고통과 시련 중에서는 고함을 질러서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눅15:11-32)에 나오는 탕자처럼 죄로 말미암은 고난 중에 있으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어떤 무거운 죄일지라도 회개하고 돌아가면 됩니다.

2) 주님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자원하여 당하는 고난은 즐겁게 고난의 강을 건너가면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2-14)"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단3:18)” 고난을 감수했습니다. 다니엘은 “조서에 어린이 찍힌 것을 알고도(단6:10)” 하루에 세 번씩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습니다.

3) 훈련으로 다가오는 고난이라면 끝까지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고 인내함으로 받으면 됩니다(7).

우리는 어떤 고난이 있어도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고 인내함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1절에 "인내"로써 경주하라고 말씀합니다. "인내를 통해, 인내와 함께"라는 뜻입니다. 인내는 고난 가운데 인생 경기 완주의 필수요소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모세 40년을 인내하였습니다. 다윗 17년을 인내하였습니다. 아브라함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수많은 고난과 고통을 인내함으로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낙심이라는 것은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끝까지 가지 못하게 낙심시키고 지치게 만듭니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사람을 보고 낙심시킵니다.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다가 지치게 만듭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사장으로, 직원으로 지치고 낙심을 시키게 만듭니다. 사탄이 쓰는 전략입니다.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쉽게 지쳐 낙심하고 신앙의 경주를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고난의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당하고 순교의 자리를 걸어가면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다가오는 고난과 고통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백신이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는 백신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는 백신입니다. 단순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과 고난을 인내함으로 이기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생각하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속에 들어오는 어떤 고난과 고통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떤 고난과 고통도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보다 더 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 고난의 백신을 맞고 우리 성도님은 믿음의 경주에서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나 고난이나 고통이 있다하여도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김필곤목사/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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