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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백신(3) 십자가 사랑(요한복음21:15-1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519 추천수:6 220.120.123.244
2021-02-21 12:49:59

마음의 백신(3) 십자가 사랑

요한복음21:15-17

2월에 계속해서 “마음의 백신”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코로나 19에 걸리지 않기 위해 백신을 맞아야 하는데 마음도 병들지 않기 위해서는 백신이 필요합니다. 병 중의 가장 큰 병은 죽음의 병입니다. 죽음의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유일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와 죽음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죄값을 치르시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우리는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이 말씀을 믿는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백신이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간호사가 예방접종을 해 줌으로 생기는 것처럼 구원이 확신 백신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어 선물로 생기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의 사역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라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홍역 백신(생백신)처럼 한 번 맞으면 다시 맞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도 이 땅에 사는 동안 늘 여러 가지 결핍으로 인하여 행복하지 못하고 불만족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면서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백신이 “자족”입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는 말씀처럼 가난하든 부하든, 많이 배웠던, 배우지 않았던, 젊든 늙든, 권력이 있든, 없던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라고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인생 마지막까지 마음의 행복을 잃지 않게 하는 백신은 자족입니다. 이것은 한 번 맞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독감 백신처럼 욕구의 종류에 따라 주기적으로 맞아야 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자족의 능력을 주시는 내게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자족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 안에서 결핍 의식이 아니라 풍요의식을 가지고 자족하며 어떤 경우에도 평생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인간관계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백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가 죽음을 이기는 마음의 백신, 두 번째가 욕구 충족을 위한 마음의 백신이었다면 오늘은 인간관계의 건강을 위한 마음의 백신입니다. 사람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삽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으며 건강한 삶을 살 수도 있고 병든 삶을 살 수도 있으며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성격이나 성품, 태도나 자세도 어떤 사람을 만나 친하게 지냐느냐에 따라 많이 차이가 납니다.

지난 주 <세상 모든 행복>이라는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이 책을 엮은 레오 보만스가 전 세계 100인의 행복학자와 전문가에게 행복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들의 대답을 모아 낸 책입니다. 이 책 100명 가운데 우리나라 학자로는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분이 우리나라 번역판 감수의 글을 쓰면서 제목을 “행복은 결국, 사람이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100개의 목소리에서 공통의 울린 세 가지를 뽑아 정리해 놓았습니다. 첫째는 행복의 절대적 원천이 타인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졌어도 사랑하는 친구, 가족, 연인이 없는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고 돈, 권력, 명예는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사람들은 행복에 있어서 ‘돈’의 역할을 과대평가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분명 돈은 필요하지만, 그 이상의 경제 수준에서 돈이 행복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력은 미미하다고 합니다. 셋째는 행복이 유전적 기질에 의해 일정 부분 좌우되지만, 개인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이나 상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내면’적인 생각이고 감정이기 때문에 노력과 결심에 따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은 미국 미시간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크리스토퍼 페터슨입니다. 그는 “행복은 관계에서 온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 가지 질문을 합니다. “① 산 정상에 올라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서 바라본다. 과연 행복할까? ② 며칠째 모든 문과 창을 꼭꼭 닫아두고 혼자 집에 있다. 그는 행복할까? ③ ‘난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외로움도 타지 않아. 평생 혼자 잘 살아갈 자신이 있어.’ 진심일까? 그리고 행복할까?” 그러면서 행복하기 위한 간단한 방법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① 자기 안에서만 행복을 찾지 말고 다른 사람 안에서, 관계 안에서 찾아라. ② 부모, 가족, 동료, 친구를 매 순간 소중히 여겨라. ③ 당신도 누군가에겐 이 세상을 조금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약 30년의 역사를 가진 ‘행복학’이 숱한 실험을 통해 내린 결론이 행복을 위한 제 1조건이 ‘관계’라고 합니다. ‘행복학의 대가’인 에드 디너 미국 일리노이대학 교수는 ‘매우 행복한 사람’이란 논문에서 상위 10%의 행복한 사람들이 나머지 사람들과 보인 가장 큰 차이가 돈이나 건강, 재산이 아니라 ‘관계’였다고 합니다. 1955년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태어난 아기 833명을 30년간 추적 조사한 심리학 연구의 결론도 관계였답니다. 당시 카우아이섬 주민 대다수가 지독한 가난과 약물중독, 질병 등에 노출됐고, 이들의 과반수가 부모처럼 중독과 범죄의 길로 들어섰지만 3분의 1은 환경에 발목 잡히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했답니다. 이들을 가르는 분기점은 바로 신뢰와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한 명이라도 있느냐 없느냐였답니다. 물론 재산, 직업, 사회적 지위, 연봉 등의 물질적 조건이 행복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고 어느 수준까지는 정비례한다고 합니다. 밥 세 끼를 먹고, 아플 때 병원에 가고, 오늘 밤 어디서 자야 할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까지 물질적 조건의 영향력은 크다고 합니다. 그러나 생존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물질적 조건의 영향력은 미미해지고 그때부터 압도적 변인은 관계라고 합니다. 부모, 자녀, 배우자, 회사 동료 등과의 관계가 좋으면 행복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서은국 교수는 행복의 핵심을 사진 한 장에 담는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라고 말합니다.

하버드대학교의 위건(A.E.Wiggan) 박사는 직장, 가정, 사회생활 등 각 분야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조사했답니다. 그 결과 전문지식이 모자라 실패한 사람들은 불과 15%밖에 안 되었답니다. 나머지 85%의 사람들은 모두 다 인간관계를 잘못했기 때문에 인생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MBA 과정에서 유수 기업 CEO들을 상대로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조사했답니다. 그 결과 전자는 응답자의 85퍼센트가 '원만한 인간관계 및 다른 사람과의 공감 능력'을 꼽았답니다.

독일 예나대 연구팀이 최근 5년간 14개 빌딩, 1천 500개 사무실의 직장인 5천명을 조사한 결과 사무실 내 인간관계가 실내공기나 작업 환경보다 건강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답니다. 직장 내 인간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두통, 피로, 알레르기 질환 등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지능지수나 학교시절의 성적이 인생에서의 성공을 예언하는 정도는 20% 정도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Gibbs). 대인관계 지능이 인생의 행복과 성공, 건강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는데도 대인관계가 중요합니다. 쉘러(Lyle C. Schaller)는 '많은 사람이 왜 교회에 오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10년간 연구하였답니다. 연구 결과 교회 출석 동기가 홍보 2%, 계획된 전도 방문 6%, 목사님의 권유 6%, 친구와 친지 86%였답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게 만드는 백신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단 한 가지를 말한다면 사랑하는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관계에서도 사랑이 있어야 건강한 자존감을 갖게 되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나 직장 동료나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사랑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건강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소개한 <행복의 조건>이란 책을 쓴 미국 하버드대학 조지 베일런트(Vaillant) 교수도 “성인 발달 연구” 72년의 연구 결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는 47세 무렵까지 형성돼 있는 인간관계가 이후 생애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삶에서 더없이 중요한 행복의 원천이며 연인이나 배우자와 교감하는 안정적인 사랑은 그 자체로 커다란 행복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버팀목이 됩니다. 차를 타고 가다 라디오를 듣는데 어떤 분이 자신의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도 아내만 끝까지 나를 지지해주고 인정해주고 사랑하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급 주택과 좋은 직장이 있다고 해도 아침마다 마주하는 배우자로부터 실망과 분노를 느낀다면 아무리 좋은 차를 타고 출근해도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인간관계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인간관계가 건강하고 행복해지려면 안정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즉 사랑의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진 만큼 인간관계의 수준은 높아지고, 인간관계의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진 만큼 건강하고 행복의 수준도 높아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 마음에 어떤 수준 높은 사랑의 백신을 맞아야 하겠습니까? 사랑의 백신 중에 가장 수준 높고 효과가 큰 백신은 십자가 사랑의 백신입니다. 구체적으로 십자가 사랑의 백신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1. 십자가 사랑의 백신은 비교하는 상대적 사랑이 아니라 절대적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의 백신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의 수준으로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대인관계는 사랑의 수준에 따라 결정됩니다. 사랑의 수준이 대인관계의 수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인관계는 파탄이 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연약한 제자들을 잘 하시기 때문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장담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14:29)" 비교하면서 이 사람들 다 배신한다 할지라도 저만큼은 배신하지 않겠다고 장담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요13:37)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힘 있게 부인하지 않겠다고 예수님 앞에서 다짐하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의 다짐과 장담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도 다시 먹고 살기 위해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배신한 것입니다. 배신만큼 인간관계를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 없습니다. 결혼할 때 그렇게도 사랑을 다짐했지만, 상황이 어려우니까 점점 사랑이 식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부모가 늙었다고 방치해 버립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의 재산만 가져갈까 궁리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방치합니다. 형제들이 외면합니다. 동료가 따돌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돈이 없다고 등을 돌립니다.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관계로 시작하였는데 이해 못할 일이, 나의 삶에 유익이 아니라 피해를 주는 상황이, 나의 자존심을 상처를 주는 상황이, 나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상황이 다가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럴 때 사람들이 대처하는 방법은 보통 4가지입니다. 첫째는 규범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규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로, 어머니로, 남편으로, 아내로, 자식으로, 친구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조금 성숙하면 둘째는 상황적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배신한 사람을 보고 배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겠구나 라고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하며 대처하는 것입니다. 더 조금 성숙한 인간관계를 가지는 사람은 셋째는 실존적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며 대처하는 것입니다. 수준 높은 인간관계를 가지는 사람은 넷째는 신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초월적인 방법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고 예수님의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지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지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못과 창에 찔려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나음을 위해, 우리의 평화를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갖은 수모와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사랑을 성취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5절 말씀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예수님은 "왜 부인했어 나쁜 놈, 네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수제자로 배신해, 장모의 질병까지 고쳐주고, 갈릴리 어부를 거두어 수제자 삼았는데 그렇게 해, 조폭 깡패도 그렇게 못하겠다. 배신자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너 알지 못해. 아담도 배신해서 그렇게 된 거야."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 대부분은 이런 사람 다시는 만나지도 않습니다. 설령 만난다 해도 마음 속에서는 없는 사람 취급할 것입니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함께 근무하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유영만 교수는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라는 책에서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라고 말하며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은 “귀 막힌 사람, 필요할 때만 구하는 사람, ‘나뿐인’ 사람, 365일 과시형, 많은 문 중에서 말문 막는 사람, 과거로 향하는 꼰대, 감탄을 잃은 사람, 책(冊)을 읽지 않고 책(責)잡히는 사람, 단점만 지적하느라 장점을 볼 시간이 없는 사람, 대접받고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 밥은 매일 먹으면서 운동은 매일 하지 않는 사람, 다짐을 많이 해서 무거운 짐이 된 사람, 밥 먹듯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부정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삐뚤게 보는 사람, 인간미가 없는 매정한 사람, 감이 떨어져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 부끄러움을 모르는 몰염치한 사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비인격적인 사람, 무임승차해서 성과를 독차지하려는 사람, 잘못을 덮어씌우는 야비한 사람,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저속한 사람, 규율을 무시하는 몰지각한 사람, 변칙으로 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 새치기를 밥 먹듯이 하는 뻔뻔한 사람” 등이라고 말합니다.

거기다 피해야 할 사람을 말합니다. “되는 방법보다 안 되는 이유를 찾는 사람, 도전을 하기보다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 내 이야기보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 물음표를 품기보다 마침표를 찍는 사람, 반성보다 문책을 즐기는 사람, 경험보다 욕망을 자극하는 물건을 사는 사람, 전보다 잘하기보다 남보다 잘하려고 하는 사람, 사소한 일상보다 거창한 미래를 꿈꾸는 사람” 등입니다. 인간 가운데 그가 제시한 조건 중에 한 가지도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간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지치고 상하고 배고프고 패배의식 속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친히 조반을 준비하십니다. 제자들을 초청하시고(9-13절) 베드로에게 진정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십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배신하고 저주할 때 숯불 앞에서 불을 쬐고 있다 그랬는데 주님은 그 때를 상기할 수 있도록 숯불을 펴 놓고 베드로에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여기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헬라어 원어로 '아가파스 메' 아가페는 사랑이고 메는 나이니까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입니다 . 또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은 원문으로 "후토스"입니다. 대명사이고 "이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가리켜 "이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물건을 가리켜 "이것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은 사람을 받는 대명사로 해석했습니다. 지금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다가 지쳐 올라온 제자 7명을 보시면서 베드로에게 여기 있는 여섯 명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준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수준이냐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며 십자가를 지신 십자가의 사랑의 수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관계를 가지고 살다 보면 수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십자가의 사랑의 수준으로 관계를 맞아야 하겠다고 백신을 맞으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사명을 포기하거나 관계를 절단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규범적으로 대하면 정죄하고 지적하고, 불만을 표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적 이해를 하면 포용적일 순 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존적으로 이해하면 교훈은 받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절대적인 십자가의 사랑으로 대하면 실제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행복한 건강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관계 든 절대적인 십자가 사랑의 백신을 먼저 맞고 출발하여 인간관계로 행복해지고 건강해지시길 바랍니다.

2. 십자가 사랑의 백신은 조건적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주어진 혜택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혜택이 있을 때 관계를 맺고 혜택이 없으면 인간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인간관계의 변화과정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심리학 이론 중 하나가 사회적 교환 이론(social exchange theory)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을 포함한 인간관계가 발전하고 유지되고 와해되는 과정을 투자와 보상이라는 경제학적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도, 친구사이의 우정도, 연인과 부부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인간관계는 무언가를 주고받는 거래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상대방에게서 무언가 긍정적인 것을 얻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에 실망하는 이유는 상대방한테서 받고자 기대하는 것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교환 이론에 따르면, 인간관계에서는 각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에 따라 그 관계의 만족도와 존속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투자 대비 보상이 클수록 그 인간관계는 만족하고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행복하게 하는 대표적 투자는 4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물질적 자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사랑을 전하는 대표적인 수단입니다. 감정 계좌에 물질 자원이 들어가 있어야 사랑의 관계가 존속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정서적 자원입니다. 상대방에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애정어린 말, 편지, 포옹, 부부관계 등과 같은 정서적 만족을 주는 자원이 감정 계좌에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행복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지지적 자원입니다. 자존감을 높여주고, 외모나 성품 능력 등을 높이 평가해 주고 함께 해주는 것입니다. 가족 관계는 이 지지적 자원이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이 원수가 되고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추운 날 멋을 부리기 위해 옷을 입고 가는 딸에게 두꺼운 옷 입고 가라고 야단치며 큰 소리를 냅니다. 딸은 왜 내가 입고 싶은대로 입는데 간섭하냐고 대듭니다. 그러면 지지적 자원이 없어지면서 관계가 나빠집니다. 생각을 말해주는 것보다 소망을 말해주면 되는데 말의 훈련이 안 되어 그러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시 명령을 말하는 너 표현보다 소원과 바람을 말하는 나 표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시 명령하기 보다는 “엄마는 너가 감기에 걸리지면 슬프니까 따뜻한 옷을 입고 가면 좋겠어”라고 말하면 지지적 자원이 두터워진다는 것입니다. 지적하기보다는 “꾸나 꾸나” 그렇구나라고 지지해 주면 지지적 자원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힘들어 하는 아이에게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너와 함께 있을 것이야라고 말해주면 어머니와 딸은 죽을 때까지 아주 좋은 관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정보적 자원입니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정보와 지식, 기술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감정 계좌에 이 네 가지 잔고가 많이 남아 있어야 좋은 관계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감정 계좌에 다양한 자원을 입금하여 잔고를 늘려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이 잔고가 다 바닥이 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과 관계를 끊어 버리고 다시 자신들의 옛 생활로 돌아가 고기를 잡으로 갈릴리 바다로 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와 "요안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현대인의 성경은 "이것들 보다"로 번역했습니다. "후토스"를 물고기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 시켜 말씀하셨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일곱 명이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기를 보면서 야 이 고기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해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혜택을 더 사랑해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가 아무런 혜택이 없자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내가 주는 혜택이 아니라 정말 아무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너 정말 나를 사랑할 수 있어"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주어지는 혜택보다 주신는 분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인간관계를 행복하게 지속시키는 사랑에는 첫째로 나로부터 출발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유익할 때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너로부터 출발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연인들의 사랑처럼 상대의 필요와 결핍을 채워주는 사랑입니다.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애쓰는 사랑입니다. 이런 조건적 사랑은 인간과 인간의 상황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합니다. 셋째는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당위성에 의한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자신의 양아들로 입양하여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다미앤 신부처럼 자신이 나병환자가 되어 나병환자 섬에 들어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절대 사랑의 나의 조건적 사랑에 접붙일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이면 10배나 큰 감이 열리듯 관계 속에 새로운 차원의 사랑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힙니다.

예수님이 주신 153마리 물고기가 없어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바로 당위성에 의한 절대적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혜택이 아니라 손해를 끼쳤는데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요 13:1)"는 사랑입니다. 거짓말 하는 아브라함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살인한 모세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살인하고 간음한 다윗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겠냐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인간관계를 가지려면 그 사람과 관계에서 이익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의 절대적 사랑의 백신입니다.

남편을 통하여, 아내를 통하여, 부모를 통하여, 자식을 통하여, 동료를 통하여 내 감정계좌에 물질적 자원, 정서적 자원이, 지지적 자원이, 정보적 자원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오래 살다 보니 감정계좌가 바닥이 났다고 해도 예수님의 사랑의 계좌로 가득채우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절대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서도 행복하지만 사랑을 함으로 더욱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고 이런 사랑으로 행복을 누리는 것은 아무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10절 말씀에 예수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조반을 주시는 것은 그들이 잡은 생선이 아닙니다. 12절에 보십시오. 이미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가져오라는 것은 교훈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 대로 그물을 던지니까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153마리를 잡은 것입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것은 153마리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고 살면 모든 인간관계 속에 그 사랑으로 넘치면 행복하며 만족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3. 십자가 사랑의 백신은 모든 사역의 동기가 되는 사랑입니다.

십자가 사랑의 백신은 모든 사역이 주님의 사역인 것을 알고 사역의 동기가 사랑이 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질문에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죄송합니다. 부끄러워서 뵐 낯이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이 베드로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연약하여 배신하긴 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꼭 구분하여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로 베드로의 사랑은 필레오로 구분하여 기록해 놓고 있기 때문에 아마 이런 뜻일 것입니다. "내가 실수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인지라 부끄럽고 예수님께 죄송하기 그지없지만 제가 예수님이 사랑하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인간적인 필레오의 사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줄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라는 말일 것입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고백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물어 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째 다시 물어 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필레오)하느냐."

마지막은 베드로의 단어인 필레오로 물어보십니다. 그때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에게 세 번 다시 물어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가페 수준의 사랑을 요구하지만, 베드로는 우정 수준의 사랑으로 멈출지라도 예수님은 제자로서 사역을 맡길 때 다시 한번 사랑의 동기를 회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님 앞에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변치 않는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님은 아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인간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저는 저의 이 사랑이 언제 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주님! 하지만 그게 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계속 사랑하느냐고 물어보고 부족한 고백을 하는 그에게 목양의 사역을 맡깁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양을 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물은 자기 생존과 번식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 원칙을 따릅니다. 이타적 삶보다는 이기적 삶에 익숙해 있습니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못된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질 사나운 양, 변덕 심한 양, 제멋대로 하는 양, 병든 양, 추락한 양, 말썽부리는 양, 말 한마디에 섭접해 하는 양, 삐진 양, 이중적인 양, 멍청한 양, 잘난체 하는 양... 별별 양이 다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양이니까 십자가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다 안다. 너의 약함도 알고, 너의 실패도 알고, 죄의 부인도 알고, 너의 성격도 알고, 너의 처지와 환경도 알고, 너의 죄도 알고, 너의 한계도 안다. 너의 사랑 가지고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사랑을 가지고 시작해라. 너 시몬이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것이다. 네 양 떼가 아니다. 내 양 떼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는 나를 의지하여라. 그러면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대부분 모든 사역은 인간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때 동기가 자기 사랑이나 자기 열심으로 하면 쉽게 지치고 쓰러집니다. 그 동기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자기 사랑이 동기가 되어 자기 이익을 성취하고, 자기 욕구를 충족하고, 자기만족을 하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아를 실현하는 일을 하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기 일을 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우편에 앉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랑이 회복된 후 완전히 변했습니다. 십자가 사랑의 동기로 사역을 합니다. 우리도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목양도 해야 하고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자녀 양육도 해야 하고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전도도 해야 하고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봉사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통해 인간관계를 통해 사역을 합니다. 모든 것을 사랑의 동기로 해야 끝까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153마리 없어도 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동기로 사역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옳으냐 틀리냐'는 것 이상입니다. 부정한 짐승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먹으라면 먹고 이방 땅에 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이 사랑으로 사역을 합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사역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인생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동기로 사역하면 가정과 교회, 직장 생활하면서 불평 원망이 살아집니다. 재미와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창 29:20)"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 험난한 세월을 예수님의 사랑의 동기로 사역하며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사회학과 교수가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과제물을 내었습니다. 그것은 볼티모어의 유명한 빈민가로 가서 그곳에 사는 청소년 2백 명의 생활환경을 조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사를 마친 뒤 학생들은 그 청소년들 각자의 미래에 대한 평가서를 써냈습니다. 평가서의 내용은 모두 동일했습니다. "이 아이에겐 전혀 미래가 없다.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 또 다른 사회학과 교수가 우연히 이 연구 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에게 그 2백 명의 청소년들이 25년이 지난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추적 조사하라는 과제를 내었습니다. 학생들의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망을 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2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80명 중에서 176명이 대단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직업도 변호사와 의사와 사업가 등 상류층이 많았습니다. 교수는 놀라서 그 조사를 더 진행시켰습니다. 다행히 그들 모두가 그 지역에 살고 있었고, 교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만나 직접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모두 한결같았습니다. "여 선생님 한 분이 계셨지요." 그 여교사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교수는 수소문 끝에 그 여교사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기적적인 교육 방법으로 빈민가의 청소년들을 이처럼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끌었습니까? 늙었지만 아직도 빛나는 눈을 간직한 그 여교사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었지요. 난 그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

인생의 미래와 삶의 질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죽음도, 원수도, 욕심도, 경쟁심도, 이기심도, 증오도, 가난도 수치도, 창피함도, 수모도 사랑의 용광로에 들어가면 다 녹아 버립니다. 일생동안 인간과 사건에 관해 연구한 월 듀란트는 "이 천년 동안의 역사가 지니는 교훈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를 서로 사랑하십시오. 역사에 관한 나의 최종적인 교훈은 예수의 교훈과 같습니다. 당신네들은 이 말을 막대에 달린 사탕 정도로 여기시겠지만 한 번 시도해 보십시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실제적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인간관계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의 백신은 십자가의 사랑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에 십자가 사랑의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효력이 떨어지면 또 맞고 또 맞고 마지막까지 이 십자가 사랑의 백신이 항체로 있으면 우리는 건강한 인간관계, 행복한 인간관계,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 십자가 사랑의 백신은 비교하는 상대적 사랑이 아니라 절대적 사랑입니다.

2. 십자가 사랑의 백신은 조건적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3. 십자가 사랑의 백신은 모든 사역의 동기가 되는 사랑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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