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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백신(2) 자족(빌4:11-1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167 추천수:6 220.120.123.244
2021-02-14 13:46:29

마음의 백신(2) 자족

빌4:11-13

 

2월에는 마음을 병들지 않게 하는 마음의 백신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몸을 전염병으로 예방하기 위해 백신을 맞아야 하는 것처럼 마음도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정신 바이러스로부터 건강하기 위해서는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첫 주에는 우리의 영혼을 죽지 않게 하는 백신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구원의 확신”입니다. 마음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확실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수양한다고, 많이 배운다고, 힘이 있다고, 선을 행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유일한 백신입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죄의식 가운데서 살 수 밖에 없는데 죄와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는 것은 나의 죄와 허물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구원의 확신이 마음을 병들어 죽지 않게 하는 백신입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영생이 없다고 우리 마음을 병들게 하는 각종 정신 바이러스로부터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천국처럼 건강하게 사시다 죽음도, 질병도, 고통도 없는 영원한 천국에 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영생할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여 영원히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라는 말씀을 마음에 확실히 세겨 놓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을 행복하게 하게 하는 백신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마음의 행복을 병들지 못하게 하는 백신이 무엇이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탐욕과 불만으로 공허하고 불행하게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요?

세계 최고의 수제들이 모인다는 하버드대학에서 “행복하고 건강한 삶에도 법칙이 있을까?”를 1937년부터 연구를 했답니다. “잘 사는 삶에 일정한 공식이 있을까”라는 기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하버드대학교 연구팀은 1937년부터 시작하여 72년에 걸쳐 최장기 종단 연구를 진행하였고 지금도 조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 대상은 하버드에 입학한 2학년생 268명이었답니다. 백화점 재벌 그랜트가 연구비를 지원하여 일명 “그랜트 연구”라고 하는 “하버드대학교 성인발달연구”입니다. 당시 하버드 의대 교수 알리 복(Bock)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성이 빠졌기 때문에 두 번째 연구 대상으로 천재 아 연구인 ‘터먼 연구’에서 선정한 천재 여성 90명을 포함시켰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수한 사람만 연구하여 보편성을 가지지 못해 세 번째 연구 대상인 청소년 범죄 연구인 ‘글루엑 연구’의 대상 중 청소년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대조 표준집단으로서 도시 빈민가에서 자란 남자 청소년 집단 456명을 포함했습니다. 그래서 총 814명을 하버드대 생리학·약학·인류학·심리학 분야의 최고 두뇌들이 동원되어 정기적인 인터뷰와 설문을 통해 죽을 때까지 대상자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조사했습니다. 1967년에 부터 이 연구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하버드대학교 의대 교수인 조지 베일런트 박사가 72년의 연구 결과물을 바탕으로 <행복의 비밀>, <행복의 조건> <내 마음속 천국:영성이 이끄는 삶> 등의 책을 내놓았습니다.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을 보면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을 부르는 ‘행복의 조건’을 7가지로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타고난 부, 명예, 학벌, 지성, 계급 따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고난에 대처하는 자세(성숙한 방어기제), 교육년수(평생교육), 안정적인 결혼생활, 비흡연(또는 45세 이전 금연), 금주(알코올 중독 경험 없음), 규칙적인 운동, 적당한 체중 등입니다.

50세를 기준으로 이 7가지 가운데 5~6가지를 갖춘 106명 중 50%가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고 있었답니다. 그들 가운데 ‘불행하고 병약한’ 이들은 7.5%에 그쳤답니다. 반면 50세에 3가지 이하를 갖춘 이들 중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그리고 4가지 이상의 조건을 갖춘 사람보다 80세 이전에 사망할 확률이 3배 높았답니다. 그중 중요한 것은 ‘고통에 대처하는 자세’ 즉 적응적 방어기제(adaptive defense mechanisms)라고 말합니다. 방어기제란 스트레스나 불안의 위협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성숙한 방어기제는 소소하게 불쾌한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일 없이 긍정적으로 전환하지만 미성숙한 방어기제는 삶을 폐허로 내몰고 간답니다. 고난 겪을 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회복탄력성이 좋고 더 행복한 인생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하고 건강한 삶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유전, 환경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지만 유전적 영향보다 자신이 어떻게 고난에 대처하며 살아가려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조상의 수명, 콜레스테롤, 스트레스, 부모의 특성, 유년기의 특성, 사회적 유대관계 등이 건강한 삶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인 욕구만 충족되고 나면 돈 때문에 크게 더 행복해지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도시 빈민 출신자 중 대학 졸업자는 6%인 29명 밖에 되지 않았는데 학력이 하버드를 나온 사람이나 천재 여성이나 도시 빈민 출신이나 행복과 건강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평생 변하고 성장하는 존재라 환경이 바뀌고 환경에 처하게 만드는 조건이 바뀌기 때문에 결국 행복한 인생의 비밀 열쇠는 내가 얼마나 잘 대처하며 성장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을 보면 저자의 아버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는 고고학자였다고 합니다. 하버드대학을 나왔고 뉴욕 자연사박물관장 등으로 자리를 잡아 사회적 명망을 얻으며 성공한 삶을 살았지만, 그가 열 살 되던 해 44세의 나이로 갑자기 권총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하버드를 졸업했고 세상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인생은 불행했다는 것입니다. 141번 사례가 나오는데 유복한 가정에서 동화 속 이야기처럼 행복하게 자라난 남자였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려 깊고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인내심이 많았으며, 어머니는 온화하고 예술적 감각이 풍부했답니다. 하버드 재학 시절 그는 고매한 인격과 지성, 훌륭한 판단력과 건강, 이상을 두루 갖춘 모범적 인재였답니다. 그는 빛나는 존재였으며, 연구원들은 그가 내적 ·외적으로 충만한 인물이 될 거라고들 했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외국에서 살게 된 뒤로 흡연과 음주를 시작했고,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적개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답니다. 30대 중반에 이르자 그는 면담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고 질문서에도 답변이 없었답니다. 베일런트의 간청에 가까스로 ‘곧 연락하겠다’는 답신이 왔지만, 그 뒤로 갑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의 친구에 따르면, 그는 생의 마지막 나날 동안 떠돌이처럼 살았으며 마약에도 손을 댔다고 합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 수많은 문제와 고통이 다가오는데 부정적으로 대응하면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통에 성숙하지 못한 정신병적 방어기제, 미성숙한 방어기제, 신경증적인 방어기제로 대응하면 인생은 불행해지고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건과 결과 사이에는 반응이라는 태도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일지라도 어떤 태도로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 책에는 인생의 문제와 고통에 잘 대처한 앤서니 피렐리라는 사람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늘 싸우는 부모,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머니,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아버지, 콧구멍만 한 아파트에서 우글거리는 여덟 형제가 같이 사는 가정에서 자랐답니다. 그 인생은 비참한 노년으로 귀결될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60여 년에 걸쳐 꾸준히 그의 자취를 밟아온 결과, 놀랍게도 그는 눈부시게 성공했고 품위 있고 행복한 노년을 맞이했답니다. 어린 시절 일주일에 한 번꼴로 아버지는 형들에게 가혹하게 매질을 했고 형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비명을 지르며 집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답니다. 그가 세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조울증에 걸렸고, 아이들을 통제할 기력이 없었고, 아이들도 무력한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을 상실해 버렸답니다. 열세 살 때 부모는 별거 생활을 하다 이혼을 하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1998년 다섯 번째로 찾아갔을 때 훌륭한 고층 아파트에 살며 활력 넘치는 대사업가로 변신하여 있었답니다. 결손가정에서 자라난 여느 아이들과 달리 피렐리 팔 형제는 하나의 동아리로 단단하게 결속되어 서로서로 돌보았답니다. 피렐리는 학교에서 우등생 명단에 올랐으며, 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열일곱 살에 공군에 입대했답니다. 열아홉 살에 결혼해 제대한 후 전문 기술자로 일자리를 잡았답니다. 직장을 다니며 야간에는 대학교 재무회계학과에서 회계학을 공부했답니다. 피렐리는 두 아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는 헌신적인 아버지가 되어 있었답니다. 그는 매사에 감사했고 공인회계사로 자리를 잡았으며, 그의 다정하고 낙천적인 성품을 고객들은 좋아했답니다.

그는 63세가 된 관상동맥 혈전증이 심각해져 사업에서 물러났답니다.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65세 즈음, 그는 사업에서 얻은 모든 지분을 자신을 믿고 의지했던 동료들에게 모두 되돌려주었답니다. 칠십 노인이 된 그는 혈관이식 수술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활력이 넘치고 만족한 삶을 살았답니다. 그는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여인이었다”고 어머니와 아름다운 추억을 이야기했답니다. 그는 아버지를 ‘훌륭한 가장’으로 기억했답니다. “아들들에게 매를 댄 것은 자신의 실패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였죠.”라고 말했답니다. 그는 무능한 아버지와는 정반대 인물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답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와는 달리 부부가 다정다감하게 살았답니다. 지난 40년 동안 가장 절친한 친구가 누구인가를 묻자 바로 “집사람이라오.”라며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답니다.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묻자 “한 사람이 죽으면 나머지 한 사람도 따라 죽을 정도지요.”라고 대답했답니다. 자신의 보모와는 달리 아이들을 잘 양육하여 큰아들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작은아들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답니다. 그는 불우한 유년기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어린 시절 자기가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자식들에게 만들어주었답니다. 그는 원망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쌓아 올린 전부를 다른 사람에게 되돌려주었답니다. 그는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위한 기도’를 성실하게 지킨 덕분에 평생 동안 용기와 인내심을 지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한 번에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한 번에 한 순간을 누리게 하시며, 어려운 일들을 평화에 이르는 좁은 길로 받아들이며, 죄로 가득한 세상을, 내가 갖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그러하셨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제가 그분의 뜻 아래 무릎 꿇을 때, 그분께서 바로잡으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 생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내 생에서는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다함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아멘.” 저자는 과거가 미래를 예견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우리의 노년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고 말하며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냐가 건강과 행복에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합니다.

심리학의 실천적 사명은 첫째 정신장애를 치료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탁월한 재능과 천재성을 발견하여 육성하는 일이었으며, 셋째는 모든 사람들이 좀더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돕는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의학적 연구는 이미 지뢰밭을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로 지뢰를 밟지 않고 가는 방법을 알려 주기 때문에 중요한 인생의 지침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33:29)” 하나님의 백성을 행복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3)"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반응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좌우된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삶의 현장에는 수많은 자극이 있고 그 자극에 반응하는 것은 결국 자신입니다. 똑같은 자극에도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행복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극과 선택 사이에 있는 공간에서 자유의지를 주어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선택하는 것을 오늘 본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오늘 본문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족입니다. “자족”이라는 백신을 맞으면 어떤 상황, 어떤 처지, 어떤 조건, 어떤 고통 앞에서도 행복을 선택하며 행복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자족을 선택하지 않으면 많아도 부족해도 행복을 눌릴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족이라는 백신을 맞아야 세상이 지옥같지 않고 행복해 집니다. 자족이라는 백신을 맞지 않고 탐욕과 불만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현기증 나고, 소돔과 고모라같이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려면 마음에 이 자족의 백신을 맞아 어떤 상황에서도 불행해지지 않는 항체가 생기게 해야 합니다.

자족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스스로 넉넉함을 느낌"라고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자족이라는 말은 '아우타르케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넉넉하고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외부의 환경이나 사람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넉넉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자기 마음을 비우고 무소유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족하는 마음이 환경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자기만족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주의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체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에서 자족이 아닙니다. 욕구를 충족하거나 욕구를 비움으로 얻는 자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풍족하게 내 안에 채움으로 얻는 자족입니다.

자족하는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감옥에 있는데도 스스로 넉넉하다고 느끼고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로마 감옥에서 언제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데도 두려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같은 사람이 서도 권력투쟁을 하는 교회를 보면서도 그들과 협력하라고 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돈도, 자식도 집도, 노후 보장도 없는데 감옥에 갇혀 질병 가운데 있는데도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어디에 있든, 어는 교회에 다니든 어떤 가족 식구와 살든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어 배부르다고 태만하고 교만한 것이 아니라 배고프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궁핍한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 잘되는 모습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기뻐하며, 좋지 못한 환경이라고 불평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는 능력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바울처럼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우리에게 자족하는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자족하는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자족이라는 항체가 생깁니다. 돈 안에 있거나 권력 안에, 쾌락, 출세 안에 있으면 자족이라는 항체는 생기지 않습니다. 끝없이 목마른 상태도 인생은 불만족 가운데 공허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가능합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힘이나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환경에 적응해 나간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줄 아는 능력은 사람의 힘도, 자연의 힘도, 돈의 힘도, 권력의 힘도 아니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힘'입니다. 이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으면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밖에 거하면 자족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을 통해서 어떤 경우에도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초월적인 전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행동도 하나님 안에서 다 용납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능력으로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와 힘과 용기의 원천이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족하려면 어떤 경우든 절대적인 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자족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어떤 여건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능력 주시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괴로움과 궁핌,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족할 수 있었던 능력의 원천은 예수님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조엘 오스틴의 긍정적 사고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최면이나 사고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믿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믿었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 이하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믿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 때문에 나의 배경 때문에 나의 환경 때문에 자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족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는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자족하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 세상 주인입니다. 주님 한 분으로 우리는 자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정수입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저기 서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 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분만으로 나는 만족 하겠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때 만족함이 없겠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때 나는 만족 하겠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2.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님 안에 사는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떤 형편은 "일이 되어 가는 상태나 경로 또는 결과"입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가난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후원금을 보내다가 끊을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설교를 못한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이중인격자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태장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 어떤 형편에 처해도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배웠다는 말은 '아마돈'을 번역한 말입니다. 행동이나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전에는 자족하는 법을 몰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정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바울이 삶을 통해 이미 이를 체득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잘 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것은 배우지 않으면 하지 못합니다.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어 로마의 감옥에서 복음과 함께 살면서 마침내 그것을 배우고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그는 비천에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또한 배웠습니다. 그는 또한 풍부한 생활에 처할 줄 아는 비결도 배운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배웠겠습니까?

여기서 배웠다는 말은 "메뮈에마이"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을 “비법을 전수시키다. 성스러운 비밀을 가르치다”는 의미입니다. 문법적으로 수동태로 사용되어 있는데 그 비법을 전수시킨 분이 예수님이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1절의 배우다의 에마돈은 체험을 통해 배운 것을 의미하고 여기에서 말하는 배움은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전수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환경에서 자족하는 모든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을 통해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한 생활을 하는 비결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기준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족한 삶을 사신 것입니다. 태어날 때도 마굿간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고, 장사 지낼 때도 남의 무덤에 들어갔지만 자족하며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게서 '그 멍에를 메고' 배운 것입니다. 자족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고난과 환경에서도 예수님을 생각하면 자족할 수 있고 마음의 행복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족을 배우면 온도계가 아니라 온도 조절계같은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환경 종속적인 삶이냐 아니면 환경주도적인 삶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사람은 높은데 있다고 교만하지 않고 낮은데 있다고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웬만한 평지 풍파가 다가와도 끄떡도 하지 않고, 웬만한 유혹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고 웬만한 시련이 다가 와도 거뜬히 극복하고 살아갑니다.

 

3. 우리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결핍의식이 아니라 풍요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게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있고”라는 말은 이미 받았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이미 받았다는 말입니다. “풍부한지라”도 이미 풍족하다는 말입니다. 남아 돈다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 준 선교헌금이 이미 풍족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기보다는 바울이 느끼는 주관적 생각입니다. 상대주의가 아니라 절대주의입니다. 그들이 보낸 헌금이 얼마나 풍족했겠습니까? 보내 주다 보내지 않으면 얼마나 불평을 하겠습니까? 10번 도와주다 한 번 거절하면 원수가 되는 세상입니다. 바울도 인간적으로 얼마나 서운하게 생각했겠습니까? "내가 감옥에 갇히면서까지 복음을 전하다 세운 교회인데 내가 로마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니까 선교헌금도 보내지 않아"라고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기뻐하면서 모든 것에 풍성하다고 만족하고 있습니다. 과거 선교헌금 안 보내 준 것 보며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낸 선교헌금으로 인해 이미 가득 채워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무엇을 합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 담긴 물질적 후원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탐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풍요함이나 유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도들의 풍요함에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유익하도록 영육간에 풍성한 열매를 위해 기도합니다.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풍족하게 채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쓸 것 역시 풍성하게 채 워주시리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18절 하반절에 보십시오. 그들이 보낸 선교헌금은 단순하게 인간에게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풍요롭게 채워달라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영광 가운데 풍성함입니다. 하나님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풍성히 채워주시는 가운데 나타나는 이 땅에서의 영광스러움을 말합니다. 받았으니 마지 못해 주는 풍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풍성함을 따라 마음껏 부어 주시는 풍성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으로 확신을 합니다.

 

이런 풍요의식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면서 삽니다. 마땅히 누려야 할 재물이나 권리, 자격 따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면 만족하지 못합니다. 절대적 박탈감으로 불만족하며 삽니다. 절대적 박탈감은 객관적인 상태에, 상대적 박탈감은 주관적인 느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런 발탈감은 준거 기준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기준은 0을 기준으로 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사는 사람들의 기준입니다. 본래 우리가 아무것도 없이 적신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말할 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자가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운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기준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과 실라가 붙잡혀서 매를 맞고 발에 사슬이 묶인 채로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도 행16:25절을 보면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경을 초월하여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했던 것입니다. 고후 12장에도 보면 바울의 육체에 큰 가시가 있었습니다. 질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께 3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그 말씀을 들은 후에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문제거리로 삼지 아니하고 육체의 가시를 품고 자족하였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인생 마지막까지 마음의 행복을 잃지 않게 하는 백신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족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자족의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 자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예수님을 통해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결핍의식이 아니라 풍요의식을 가지고 자족할 수 있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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