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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인생으로 살기(3) 그리스도를 위하여(빌립보서2:29-3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989 추천수:1 220.120.123.244
2021-01-17 13:41:50

존귀한 인생으로 살기(3) 그리스도를 위하여

빌립보서2:29-30

 

2021년 새해 들어 존귀한 삶을 살자는 주제로 계속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첫주에 우리가 존귀한 인생으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상 2장 30절을 통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짐승처럼 살지 않고 인간답게 품위 있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현대인 가운데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나님은 필요 없다고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부인하며 사는 것이 인간답게 품위 있고 존귀하게 사는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신이 짐승에서 진화된 물질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하면 인간은 결코 존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기적 유전자 DNA를 전달하는 비곗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믿으면 결코 품위 있고 존귀하게 살 수 없습니다. 인권을 강조하며 인간 답게 산다며 남자 며느리도 보고 여자 사위도 보고, 필요하면 낙태도 하고, 필요하면 세 명이 결혼하여 사는 것이 품위 있는 삶, 인간다운 삶, 존귀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 진리를 말하며, 타협할 수 없는 정직과 양심, 혼전 순결, 부부 정절, 구원과 심판, 천국과 지옥을 말하면 구닥다리 쓰레기라고, 편협한 사람이라고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몰상식한 자라고 배척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공적 기관이나 언론에서 무당, 미신, 점은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하면서 하나님, 그리스도는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품위 있는 인간의 삶, 인권을 보호하고 품위 있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장 품위 있고 인간답게 존귀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귀한 인생으로 살려면 무엇보다 하나님께 존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야 우리 하나님도 우리를 존중히 여겨 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무시하다 비참한 인생을 산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존귀한 삶을 사는 데 우리는 한계가 있으므로 하나님께 복을 빌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결핍이 비천하게 만듭니다. 건강하지 못하고, 가난하고, 부족하여서 비천하게 됩니다. 인간을 비참하고 비굴하게 하는 죄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결핍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전하게 존귀한 자가 되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결핍을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존귀한 인생으로 살려면 보호의 복을 위해, 은혜의 복을 위해, 평강의 복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고 제사장의 축복(민6:22-27)을 통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7)” 올 한 해 민족을 위해, 교회를 위해, 기업을 위해, 직장을 위해 자식을 위해, 손자를 위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기도를 하여 어디에서나 천대받은 인생이 아니라 어디서나 존귀한 인생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순간적이고 유동적인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하고 영원한 복으로 살아야 진정 존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 번째입니다. 우리가 존귀한 인생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9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여기서 “너희”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말합니다 “그는” 25절에 나와 있는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이 말씀을 하고 있는 분은 바울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로마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때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에게 보내어 도와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도와 같이 사역하다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얼마나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염려되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었습니다. 그를 보내면서 두 가지를 당부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주안에서 에바브로디도를 기쁨으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여 병들었다고 비난하지 말고, 대표로 파송했더니 짐만 되었다고 업신여기지 말고 천대하지 말며, 제가 먼데하며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존귀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빌립보서에만 나옵니다. 아마 빌립보 교회 집사님이었을 것입니다. 이름의 뜻이 “매력”이라는 말인데 짧게 소개되었지만 참으로 매력 있는 평신도였습니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 집사님을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섯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를 나의 형제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바울과 형제된 사람입니다. 함께 수고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수고한 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일하고 협력한 자였습니다. 함께 군사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영적 전쟁터에서 전우가 되어 싸운 자라는 말입니다. 너의 사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사형수의 옥바라지를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멀고 먼 길을 간 사람입니다. 당시 빌립보에서 로마에 가는 길을 당시 한 40일 걸리는 거리라고 합니다. 고약한 독재자 네로 치하에서 자신도 바울과 같이 처형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일이 그리스도의 일이기 때문에 심부름꾼으로 헌금을 가지고 바울을 돕기 위해 기꺼이 간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그만큼 신뢰할만한 도덕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내게 쓸 것을 돕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비난하고 조롱하며, 감시하고 방해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구제금을 맡길 수 있는 도덕성을 가지고 있고, 함께 사역할 만한 충성심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이렇게 사는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한 자로 여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성도를 사랑한 자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다 병이 들었는데 자신이 병든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몸보다 자신의 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까 봐 하나님의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할까 봐 더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보다 성도와 교회를 더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자기 중심적 이기적인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심히 근심하다는 단어는 신약에서 3번밖에 쓰이지 않았는데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마26:37; 막14:33)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실 때 제자들을 향한 사랑의 심정과 같은 표현입니다. 자신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그들이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할 때 에바브로 디도는 차마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12:13).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의 유기체 동일한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함께 목숨을 거는 존귀한 자였습니다. 30절에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헬라어로 '파라볼류오' 인데 '위험을 무릅쓰다'라는 뜻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남을 돌보는 사람을 “파라볼라이”라고 불렀답니다. 고대사회에 전염병이 많이 돌았고 전염병이 돌면 가족도 그를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신앙인 중에 파라볼라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전염병 지역에 찾아들어가 환자들을 돕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로 에바브로디도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존귀한 자니 너희들도 존귀한 자로 대접해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누구에게 소개할 때, 취업할 때, 평판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한 자로 인정하면서 그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면서 존귀한 자로 대해 주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디에 가나 상관에게 존귀함 받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영접받으며 존귀함을 받고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디에 가나 불쾌하게 여김받고 천대받는 것이 아니라 어디 가나 환영받고 존귀함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내 지위와 신분에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어디에서나 기쁨으로 영접받고 존귀함을 받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머물다 간 흔적이 아름다움을 넘어 존귀해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답이 바로 30절에 나와 있습니다. 30절은 우리 말에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지만 “왜냐하면(호티)”라는 말이 맨 앞에 있습니다.

30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존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일로 거의 죽을 뻔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을 때입니다. 둘째는 바울을 위해 빌립보 교인들이 다하지 못한 봉사를 채우려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목숨 걸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니까 존귀하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나’보다 ‘너’의 형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나의 안위, 나의 근심, 나의 기쁨, 나의 염려는 오직 ‘너를 위하여’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세 번째 존귀한 인생을 사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면 존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던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하게 대하여 주라고 말씀하는 바울도 존귀하게 살았습니다. 지금 네로 치하에서 감옥에 있지만 비굴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가난하였지만 비참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없었지만 노후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외롭고 비천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노년에 어떻게 살았는지 빌립보서 4장 11절 이하를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1절에 보면 자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12절에 보면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존귀하게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빌립보서 1:21절을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습니까?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4-15)”.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어 비천한 인생이 아니라 존귀한 인생을 살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혔다고 말합니다(빌3:7).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약한 그때 강하여기지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고후12:10). 그리스도를 위한 삶은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결코 낭비나 손해가 아닙니다. 부담이나 착취가 아닙니다. 종교인들이 종교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귀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상급을 주십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데 방해되는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 3:7-8)”

바울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살았다면 그는 역사상 존경받은 사람이 못되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한 평생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존귀함을 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그리스도를 위해 신앙생활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공부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업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천대받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존귀한 삶을 살게 됩니다.

 

1860년대에 자신의 생일 조차 모르는 노예로 태어난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죽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비천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공부하여 박사가 되었습니다. 미국 남부 지방은 면화 재배로 유명했는데 면화가 땅에서 질소를 빼앗아 가 땅이 황폐해져 버려진 땅으로 변해 버렸답니다. 그때 카버 박사가 땅콩 재배를 제안해 농민들이 엄청난 수확을 거두었답니다. 그런데 값이 폭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땅콩을 한 줌 들고 연구실로 들어가 연구하라’는 응답을 받고 밤낮없이 연구하여 땅콩을 이용해 마가린, 비누, 화장품, 구두약 등 음식 105가지, 생활용품 200가지를 발견했답니다. 이로 인해 남부인들은 부를 얻게 되었고 미국 경제도 회복되었답니다. 그런데 카버 박사는 자신이 발견한 그 어떤 것에도 로열티를 받지 않았답니다. 모든 지혜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부 농민들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지혜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답니다.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산 것입니다. 자신의 생일조차 알지 못하는 노예의 자식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 보니 존귀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흑인·백인을 불문하고 모든 미국인들이 존경과 애도를 표했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답게, 품위있고, 존귀한 삶을 살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자기를 위해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오로지 자식을 위해 할 평생을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과 권력과 명예와 돈, 지식을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위하여 평생 살면 대부분 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존귀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자식들에게도 천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살면 존귀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비천한 신분입니다. 왕실에 살다 살인자가 되어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처가살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스라엘 민족지도자로 존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에게 존귀한 자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 26절에 그 비결을 아주 단순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세의 삶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애굽의 왕궁에서 보내는 어떤 풍요로움과 세상이 주는 화려함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과 참된 특권을 이해했기에 세상의 권력과 온갖 쾌락의 유혹을 물리치고 차라리 고난을 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은 고난을 외면하는 삶이 아닙니다.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기쁨게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최대의 위기 가운데 하나는 신앙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역사를 변화시킨 말씀(프랭크 보어햄 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역사를 변화시킨 19명의 그리스도를 위해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된 마틴 루터, <천로역정>의 작가 존번연, 청교도 혁명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 스코틀랜드의 지도자 존 낙스,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 인도 선교의 선구자 윌리엄 캐리,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신대륙 개척자 윌리엄 펜, 중국에 뼈를 묻은 선교사 허드슨 테 일러, 위대한 부흥설교자 조지 휫필드, 현대부흥 운동의 아버지 찰스 피니 등 지금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받는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 산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 존 낙스가 영향을 받은 조지 위셔트 이야기가 나옵니다. 존 낙스는 자신이 “세상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 같다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흑사병이 스코틀랜드에 들어올 때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었답니다. 위셔트는 그 지역으로 달려가 도시의 성벽에 자리를 잡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은 도우며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불굴의 믿음과 용기로 엄청난 재앙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는 그의 모습은 곧 수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의 대상이 되었답니다. 그러나 1546년 그는 이단으로 정죄받았고, 성문 건너편 윈드 성벽 아래에서 화형에 처해졌답니다. 낙스에 의하면, 타고 있는 불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답니다. 이어서 용서의 표시로 화형 집행자의 볼에 입을 맞추며 “이것이 바로 내가 그대들을 용서한다는 증표네. 친구여, 어서 그대의 할 일을 하게나!”라고 당당하게 화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 죽음 앞에, 고난 앞에, 고통 앞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굴하거나 비참해지지 않고 존귀하게 화형을 당한 것입니다.

그 책에 보면 리빙스턴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복음화와 발견되지 않은 아프리카 탐험, 악한 노예 매매를 폐지하는 일에 일평생을 바치 사람입니다. 아프리카 선교를 하다 그가 처음 모국을 방문하여 글래스고 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을 때였답니다. 그는 열대의 태양에 장기간 노출된 탓에 야위고 초췌해 보였답니다. 삼십 번 가까이 그는 아프리카 내륙의 습지에서 나오는 수증기로 인해 열병이 생겨 앓아누워야 했었고, 그의 몸에는 이런 심한 질병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답니다. 사자에게 물어뜯긴 그의 왼쪽 팔은 힘없이 매달려 있었답니다. 그는 연설하면서 “나는 아무런 주저함 없이 기쁘게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 땅은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땅입니다. 아내가 죽을 때 바오밤나무 밑에 묻고 얼마나 슬펐던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죽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에 가서 그곳에서 힘이 다하기까지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 무릎 꿇고 천국에 갔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언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고 이따금씩은 지극히 적대적인 사람들 속에서 지나온 여러 해를 마치 유배 생활을 하듯 살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나를 붙들어 준 유일한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세요? 그것은 바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 이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 하나에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결코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길, 그리스도을 위하는 일은 고통이 따르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한 가지 이유로 바울을 섬겨야 합니다. 바울도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좋아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중 인격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것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죽음에 이르도록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그를 섬겼습니다. 사람을 볼 때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에 부정적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고 수고한다고 이익될 것이 별로 없습니다. 큰 교회를 물려주는 것도 안닙니다. 상속받을 만한 재산도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사형을 받으면 네로에게 같이 사형당할 수 있고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을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왜 빌립보 교인들은 다 편안하게 사는 데 나만 로마에 와서 얼마 있으면 죽을 사람을 위해 생고생을 하느냐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있었으면 몸도 아프지 않고 살 수 있었을 텐데 로마에 와서 죽을 병이 걸렸다고 불평과 원망을 할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일하고 목숨을 돌보지 않고 빌립보교인들의 몫을 다 한다고 생각하고 바울을 도와 주었습니다.

“나만 고생하고, 나만 헌금하고, 나만 화장실 청소하고, 나만 교사하고...”라고 불평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몫, 어머니의 몫, 목사님의 몫, 장로님의 몫까지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힘을 다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평판의 힘(주희진 지음)>이라는 책을 보면 평판관리 원칙 첫 번째가 좋은 인간성이고 두 번째가 뛰어난 업무능력이라고 말하고 세 번째는 긍정적 조직 마인드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인간성이 좋고 일을 잘해도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함께 어울리기 힘든 사람이라고 합니다. 조직 생활은 결국 단체생활인데 함께 있을 때 더욱 빛이 나는 사람이 오래 남는다고 합니다. 세 번째 영역인 긍정적인 조직 마인드는 조직 적응력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조직마인드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인가,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인가, 조직에 도움이 되는가, 개인과 조직의 발전에 기여하는가, 팀워크를 형성하고 촉진하는가,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때로는 조직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순위에 둘 수 있는가, 성과를 독식하지 않고 공정하게 배분할 수 있는가" 등을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에 사소한 것으로 양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헌금하여 선교비를 보내는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이나, 선교하다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이나, 바울과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 디모데나, 죽기에 이르도록 헌신한 에바브로디도나 다 한 가지 목적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의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갔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을 고난의 길일 수 있습니다. 불편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이 존귀한 삶의 지름길입니다. 어떻게 살던 짧은 한 평생 살다 가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살겠습니까? 무엇을 위해 살겠습니까? 무엇을 하면서 살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일을 하면서 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전라남도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왕성한 의료선교를 한 서서평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독일에 태어나 갓 1살 된 자신을 버려두고 떠난 어머니로 불행한 시절을 보낸 분이었습니다. 참으로 천대받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한 평생을 걸었습니다. 간호학을 전공하고 32세 처녀의 몸으로 조선에 왔습니다. 서 선교사는 고아 13명을 자신의 자녀로 입양하고 38명의 홀로된 여인을 거두며, 한센인 요셉을 아들로 삼아 함께 살았습니다.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에 남자용 검정고무신을 신고 고아를 등에 업은 단발머리를 하고 금주, 금연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인신매매 반대, 축첩 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서서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하였습니다. 때로는 만주의 홍등가에 팔려갈 뻔한 19세 처녀를 돈을 주고 구해오기도 하고, 많은 창녀들의 빚을 갚아주고 새 삶을 찾게 했으며, 그가 설립한 이일학교에 이들을 입학시켜 공부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3년 6월, 일본 총독부가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펼 때 동역자들과 함께 50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했고,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 530여명이 이 행진에 동참해 결국 총독부의 두 손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소록도 한센병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진다리 교회와 봉선리 교회를 세웠고 이일학교를

세워 여성들의 문맹 퇴치와 계몽에 나섰습니다.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54세의 나이로 천국에 갔습니다. 서 선교사가 떠날 때 남긴 것은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 가루 2홉뿐이었다고 합니다. 한 장의 담요도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누었고, 시신도 의학연구용으로 기증했습니다. 그가 죽자 당시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양 서거'라는 제목과 '재생한 예수'라는 부재로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고 합니다.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땐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 참으로 존귀한 여인이었습니다.

올 한 해 무엇을 위해 살겠습니까? 누구를 위해 살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면 인생은 존귀해집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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