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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역사의 분기점으로 오신 예수님(마태복음2:1-1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165 추천수:7 220.120.123.244
2020-12-20 12:56:38

성탄, 역사의 분기점으로 오신 예수님

마태복음2:1-12

 

오늘 주보 표제 시에 “비가 내려도 성탄절은 성탄절입니다”라는 시를 올렸습니다. <소나무 베어/성탄 트리/세우고//이불솜 붙여/눈 만들며/성탄전야 눈 오길 기다렸습니다.//의자 없는

시골 예배당이지만/함께 성극할 친구 있어/ 그냥 좋고//주인공 아니지만/같이 웃어줄/정든 얼굴 있어 신이 났습니다.//만난 과자 없어도/조개탄 난로에/고구마 구워 먹고//몸으로/부딪치는/놀이에 밤 깊은 줄 몰랐습니다.//새벽이면/등불 들고/어둠에 잠긴 초가집 찾아//고성방가/수면방해 죄 두려움 없이//“기쁘다 구주오셨네” 목청껏 불렀습니다.//소나무에 달빛 어린/하얀 눈 쌓인 성탄절 그립지만/비가 내려도 성탄절은 성탄절입니다.>

어릴 때 시골교회에 다니신 성도님들은 저와 같은 이런 성탄절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시골교회에 다니지 않았어도 교인이면 다들 나름대로 성탄절 추억이 가슴에 있습니다. 제가 어제 오늘 예배 때 보여드리려고 성탄절 영상 하나를 편집해 만들었는데 코로나19가 있기 전에 자유롭게 성탄을 축하했던 지난날을 추억하며 한 번 같이 보겠습니다(9분 상영).

 

성탄절은 시간의 창조자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념하는 기독교인의 최대 명절입니다. 세계적으로 기뻐하는 축제일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분기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예수님의 탄생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습니다. 이른바 BC와 AD입니다.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모든 역사적 기록은 BC와 AD로 나누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BC는 Before Christ 즉,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를 말하며, 일반 역사에서는 ‘기원전’이라고 말하고, 신앙인들은 주님 오시기 전이라는 뜻으로 ‘주전’이라고 말합니다. AD는 Anno Domini 로 ‘In the year of the Lord 즉, 주님의 해’란 뜻입니다. 이 땅의 주님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의 시대를 말하며 일반 역사에서는 ‘기원후’라고 하며 신앙인은 주님 오신 후라는 의미로 ‘주후’라고 말합니다. 기원전과 기원후를 나누는 기준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인생의 분기점이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의인, 삶과 죽음, 노예와 자유인, 영생과 영벌, 천국과 지옥, 축복과 저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승자와 패자, 기쁨과 슬픔의 분기점이 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사업도, 국가도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죄의 노예에서 모든 죄를 용서받고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으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부활의 소망으로 죽음을 초월하여 이 땅에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불안과 두려움, 고독과 모멸, 좌절과 상실, 죄책과 분노에서 벗어나 참 행복과 기쁨, 참 평안과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크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역사의 분기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는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역사의 분기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역사와 자신의 인생의 주관자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며 예수님은 내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심지어는 내 인생에 방해가 되고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당시 왕이었던 헤롯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무릎 꿇고 경배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절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3절에 보십시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은 예수님 탄생 소식을 듣고 소동하였습니다. 소동만 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아이를 찾아 죽이려고 합니다. 마음만 먹는 것이 아니라 실제 실행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때를 기준하여 두 살 아래는 다 죽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역사의 분기점으로 오신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자신의 구원주로 믿지 않고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주는 경쟁자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왕권을 빼앗길까 봐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노이만에 의해 소개된 ‘게임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익이 상반된 경쟁자들이 승리하기 위해 써먹는 방법입니다. 게임이론 중에 '백워드 인덕션(Backward Induction)'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현재에서 미래의 순으로 생각해나가지 말고, 미래의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한 후 현재의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역순의 사고 방법입니다. 게임 상황에는 세 가지 구성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게임의 참가자들(players), 둘째, 참가자들의 전략(strategy), 셋째, 게임이 끝나면 참가자들이 획득하는 보상 또는 이득(payoff)입니다. 첫 번째 쓰는 방법이 게임을 이기려면 첫째가 게임 상대자를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둘째가 게임 법칙을 바꾸는 것입니다. 셋째가 게임의 기대를 0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이론을 알던, 모르던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하는 자들은 모든 분야에서 이 게임이론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게임 상대자를 제거하기 위해 첫 번째가 상대의 약점, 도덕성을 드러내어 매도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정치인들 헤롯처럼 자기 마음대로 무력을 통해 제거할 수 없으니까 법이라는 것을 통해 상대를 고소하여 합법적으로 죄인을 만들어 제거해 버립니다. 법치주의와 법률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법을 절대시하여 그 법을 최고로 하여 자신의 편리에 따라 임의로 상대를 제거하는 도구로 법을 사용하는 것을 법률주의라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잘 알고 있는 4절에 나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가 이데올로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로 모는 것과 같습니다. 좌파, 우파로 몰아 제거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가 친한 사람, 같은 부류를 들어 올무에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선후, 상관, 인과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게임 상대자를 구경꾼으로부터 기대 0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독감 백신을 맞은 후 몇 사람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계속합니다. 그러면 그런 보도를 듣거나 보는 사람들은 ‘나도 독감 백신 맞으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 독감백신을 맞지 않습니다. 작년에도 제 작년에도 똑같이 그 시기에 그만큼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이 죽었는데 대조군을 비교하지 않고 선후관계로 보도하여 사실을 왜곡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은 가치보다 중요한데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실을 왜곡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사용하여 정치인으로 말하면 지지도 0으로 만들어 버리고, 교회로 말하면 목사에 대한 기대를 0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탄절이지만 코로나19 방지를 위해 정부는 성탄절 대면 예배를 금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기독교인들은 반발하겠지요? 그러면 이런 반발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회가 코로나19의 집단 감염원이라고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교회 예배= 감염”이라고 인과관계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감염되는 경우는 천분의 1, 만분의 1, 백만 분의 1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가는 독립변인이 코로나 걸리는 종속변인이 될 때 교회 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어떤 질병에 감염되었다고 해서 병원 가지 말라고 한다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말입니까?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분해야 하는데 게임이론에 충실한 자들은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호도하여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상관관계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지 원인과 결과를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해변 리조트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수와 그 기간에 팔린 아이스크림 수가 비례한다고 하여서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리면 사람이 많이 죽으니 아이스크림을 팔지 못하게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입니까? 얼마나 사실관계를 왜곡한 정보입니까? 원인은 날씨가 더운데 있는 것이고, 무더우면 아이스크림도 많이 먹고 수영도 많이 하므로 익사자도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이스크림이 원인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가 제 3의 변수인 기온이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은 방문자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누락 변수라고 합니다. 누락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어떤 사실에 대하여 인과관계를 잘못 설정하여 잘못 예측하면 사실관계를 왜곡한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녀온 분이 코로나19에 걸렸다고 하면 누군가 교회에 감염된 사람이 있었고, 그 접촉자를 통해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지 교회 예배드리면 코로나에 걸린다는 원인과 결과 관계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감염집단이고 비난받아야 할 집단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만들어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자꾸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코로나 걸리지 않도록 하는 예방 수칙이 중요한 것입니다. 천명이 모여 예배드려도 그곳에 코로나19에 걸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아무리 예배에 참석해도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습니다. 교회는 밀폐된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대면 예배를 자제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지 교회가 코로나 감염원이고 가장 가지 말아야 할 곳 1위로 언론을 통해 계속 보도하는 것은 게임이론을 이용하는 사실을 왜곡한 악의적 방법입니다. 새빨간 거짓말 통계를 이용하여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마스크를 쓰지 않고 설교한다고 언론에서 비판합니다. 그러면 그 방송을 하는 앵커 자신도 마스크를 쓰지 말고 방송해야 합니다. 연속극 배우들도 다 마스크 쓰고 연기해야 합니다. 촬영할 때 수많은 관계자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교회 예배 때 요즈음 20명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그 인원보다 관계자가 더 많습니다. 왜 자신들은 마스크 안 쓰고 방송하면서 교회 목사님들은 설교할 때 마스크 안 쓴다고 비판합니까?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게임이론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언론을 통해 성탄절이 되었는데 성탄절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부 기독교인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전부인 양 부각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탄절을 지키고 있는 자들의 일부 비도덕적 행위를 크게 부각시켜 대중의 기대를 0으로 만들므로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방송 거리, 기사 거리 중 선택권은 편집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왜 이 시점에 그런 기사를 내겠습니까? 어려운 때 일수록 상대를 적으로 삼지 말고 함께 동지가 되어 코로나19를 극복하고 함께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렇게 게임이론에 충실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에돔 사람으로 권력을 돈 주고 산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큰 영향을 끼쳤던 제사장 가문인 하스모니아 가문에 속한 사람들을 다 처형했습니다. 그는 10명의 아내를 거느렸는데 첫째 부인 첫 아들, 두 번째 부인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장모를 처형했습니다. 다 역모로 처형한 것입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 아리스토불루가 대제사장이 되었을 때, 오순절 행사 때 백성들이 그를 환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를 초청하여 파티를 열었는데 그 날 무더워서 목욕 파티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자기 처남이었는데 그는 부하를 시켜 장난처럼 대제사장을 머리를 물속으로 처박고 익사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어떤 인간보다 부도덕한 인간입니다. 그런 그에게 동방박사들이 와서 왕으로 나신 이를 찾으니 속이 뒤집힌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용학자들입니다. 권력에 빌붙어 허위의식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있었지만, 성경에서 예언한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역사의 분기점으로 실제 믿지 않는 불신자, 무신론자, 이신론자, 적대적 무신론자에게는 오늘날도 성탄절은 의미가 없는 날입니다.

 

2. 예수님을 역사의 분기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예수님을 역사의 분기점, 만왕의 왕,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은 성탄을 어떻게 맞이합니까?

1) 역사의 분기점으로 오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동방박사들을 보십시오. 10절을 큰 목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은 충만이 넘치는 상태입니다. 큰(메가덴) 크고 놀랍고 장엄하다는 뜻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9절을 보니까 그들이 기뻐한 것은 단순한 별이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 별이 자신들을 인도하다가 아기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그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성경에서 정확이 밝혀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누구로부터 메시아 예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러 먼 길을 찾아온 것입니다. 험하고 먼 길을 오직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만나 기뻐하고 기뻐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메시아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번주는 성탄 주간입니다. 코로나로 우울하고 염려와 걱정이 산사태처럼 밀려오는 시절이지만 죽음을 이기로 부활로 승리하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메가톤급 기쁨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성탄절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다는 사실 하나로,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라는 사실 하나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분기점이 된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죽음에서 구원을 받고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참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 주님을 통하여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안감과 모멸감, 고립감과 좌절감, 그리고 상실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기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록 올해 코로나19로 인하여 사업이 잘 안되고, 건강치 못하고 모든 것이 소원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만왕의 왕 예수님을 만난 기쁨,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기쁨 그 기쁨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기뻐한 것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기 때문입니다(민24:17)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구세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승리해도 기뻐할 수 있고, 실패해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병들어도 기뻐할 수 있고, 건강해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감옥에 가도 기뻐할 수 있고, 핍박을 받아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단순한 육신적 기쁨이 아니라 영혼의 기쁨입니다. 외적인 기쁨이 아니라 내적인 기쁨이고 맑은 날이나 흐린 날이나 언제든지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일시적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죽음도 빼앗아 가지 못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기쁨을 회복하는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괴로웠던 것, 슬프고 고달팠던 것 다 십자가에 묻어 버리고 희망의 메시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쁨을 회복하는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모두 다 나를 떠난다고 하여도 우리 주님만은 나를 지켜 주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2) 역사의 분기점으로 오신 예수님을 경배합니다(2).

그들은 예수님을 진정 메시아로 경배하였습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까? 메시야를 만나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크리스마스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산타크로스의 날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점점 성탄절 예수 지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인권이란 말로 성탄절을 차별금지법을 통해 막으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크리스마스는 구세대의 문화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공연계엔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콘서트나 뮤지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설치된 성탄 트리 꼭대기에 달린 십자가를 두고 "특정 종교의 상징물이므로 철거해야 한다"는 민원이 이어지면서 십자가 크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독교 안티들이 인권이라는 명목으로 예수님 이름 지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색채가 드러나는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대신 '해피 홀리데이스(Happy Holidays)'라는 인사를 건네자는 캠페인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 없는 성탄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탄절은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 경배하는 날입니다. 그들의 지위에 비하면 마구간 초라한 곳에 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겸손하게 경배한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주님을 보는 눈이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배웠다고 조금 가졌다고 예수님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위 때문에 주님께 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 찾으시고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우리의 인생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헤롯은 제사장 서기관은 주신 것으로 경배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기뻐하는 기쁨은 필수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함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왕되시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왕되신 예수님께 예배로 그 기쁨을 표현해야 합니다.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모두 무릎 꿇고 다 경배해 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엎드려 절하세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하나님의 영으로 경배 드리리 "

 

3) 역사의 분기점으로 오신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11).

이 보물은 당시에는 제일 귀한 것이요 가장 값진 것입니다. 이 예물은 의미가 있습니다. 황금은 왕에게 드리는 예물로써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유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므로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레2:1,2)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약품으로써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것입니다.(요19:39,40) 그 예물은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에 남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예수님 재림 때까지 회자될 헌신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건강이 주어지면 건강으로, 지식이 주어지면 지식으로, 명예가 주어지면 명예로, 권력이 주어지면 권력으로, 재물이 주어지면 재물로 그리스도께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이 참으로 인생을 기쁘게 사는 방법입니다.L 우리 주님께 드리는 기쁨이야 말로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일시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생이 다할 때까지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만난 기쁨을 계속적으로 간직할 수 있는 비법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헌신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4) 역사의 분기점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습니다(12).

12절을 보십시오.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하니까 그대도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도 경배하도록 꼭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가면 많은 이익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호화로운 잔치에 참여할 수도 있고, 상급도 받고 좋은 교통수단으로 귀국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왕이 아니라 영적인 왕을 따랐습니다. 말씀이 가라는 대로 가고 멈추라는 대로 멈추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비록 이익이 없고, 편리가 없고 인간적인 기쁨이 없다고 하더라도 말씀 붙들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모순투성이고 부조리와 불안과 불만이 가득 찬 세상에서 말씀 붙들고 기대를 가지고 용감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역사의 분기점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해마다 하였던 성탄 전야 축하 잔치도 하지 못하고, 성탄절 칸타타도, 성탄절 축하 예배도 같이 모여 드리지 못하지만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해 우리의 진정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기쁨을 회복하는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할지라도 역사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우리는 모든 불안감을 벗어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의 분기점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세상 사람들이 어떤 모멸감을 준다 하여도 우리는 재림하여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드러낼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과 환란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분기점, 인생의 분기점으로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초라한 조건일지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코로나19로 자주 만나지 못하고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고립감에서 벗어나 한 형제자매로 어디에 있든지 함께 기쁨을 누리면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 모든 상실감에서 벗어나 기쁘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족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 모든 죄책감에서 벗어나 주홍같이 붉은 죄도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용서를 받고 참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년을 보내었고,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왕과 구세주로 모시고 불안감과 모멸감, 고립감과 좌절감, 그리고 상실감과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참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힘겹게 살아온 한해였지만 성탄절을 맞이하여 역사의 분기점이시고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예수님께 경배하고, 예수님께 인생을 드리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걸어가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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