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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며 감사 권하며 살기(골1:3-5; 2:6-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444 추천수:5 220.120.123.244
2020-11-15 14:30:15

감사하며 감사 권하며 살기

골1:3-5; 2:6-7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해마다 추수 감사 주일에 행하던 추수 감사 주일 축제를 하지 못하지만, 감사절이 되어 지난주에 이어 다시 한번 감사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지난주에는 예수님의 감사를 3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가 예수님은 지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감사로 해석했고, 지금 이루어지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감사로 반응했으며, 다가올 미래에 대하여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질 것을 보고 감사로 선택하며 기대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어떤 경우나 이 땅에 사는 동안 감사 생활할 수 있는 원리는 늘 기준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놓고 내 뜻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 이루어진 것을 늘 감사하고, 지금 내 뜻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해도 지금 하나님의 뜻 이루어지고 있으면 감사하고, 미래에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감사해야 한다는 진리를 지난 주 예수님의 감사에 대한 기록된 말씀 네 곳을 통해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감사 생활을 가장 잘 본받고 산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 바울일 것입니다. 바울은 평생 예수님처럼 살려고 애를 쓴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평생동안 결혼도 하지 않았고, 마지막도 순교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할 정도로 철저히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전생의 삶은 그리스도 외에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소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지식을 버렸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 때문에 자신의 사사로운 삶도 다 버렸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소망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빌립보서 1:20)”하는 것 있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일평생 예수님을 멘토로 삼고 예수님을 모델링하면서 살았는데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며 살면서 감사 생활에서도 그랬을까요?

 

1. 우리도 감사를 본받으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감사 생활에서도 예수님을 본받아 그래도 실천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누리는 혜택만 바라지만,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건강을 얻고, 천국에 가고, 풍요를 누리고, 자식이 잘되고, 출세하고 부자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처럼 살고, 어떤 경우도 예수님처럼 감사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과거에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몇 사람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보기 위해 다시 만났답니다. 거리에서 거의 폐인이 된 한 주정꾼을 만났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당신의 절름발이를 내가 고쳐주지 않았소?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라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고쳐주셨소. 그러나 걸어 다닌들 내게 무슨 소용이 있소. 먹고 살 직업이 없는데…”라고 불평하더랍니다. 거리에서 한 창녀가 남자들 틈에서 희롱을 당하는 것을 보고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당신이 나를 창녀 생활에서 건져서 새 사람을 만들어 주셨으나 이곳에서 나온 내게 무슨 행복이 있겠소. 나는 더욱 고독해져서 다시 이 길을 택하게 되었소.”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한숨을 쉬시며 가시다가 한 불량자가 이웃과 죽자 사자 싸우는 것을 보고 “아아니, 당신은 전에 소경이었던 자가 아니요?” “그렇소, 그러나 눈을 뜨고 뭘 보라는 거요? 보이는 것은 모두 화만 나는 것뿐이오, 짜증스럽게만 만드니 마구 치고받으며 싸우는 생활이 내게는 알맞은 길이라 생각했소.”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로 주어진 것이 감사의 도구가 아니라 불평과 원망의 도구가 되어 불행한 삶을 만든 것입니다.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도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하게 되어집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라고 말씀합니다.

말세가 되면 감사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2)”라고 말씀합니다.

 

큰 은혜를 받는 바울을 평생 감사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3절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되어진 일에 대하여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랑했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십자가 죽음 앞에서 제자들이 인신매매하고 배신할 때도, 장정만 5천명이 있는데 먹을 것이 어린아이 도시락 하나밖에 없는데도, 복음을 전하였지만 실패했는데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 지금 바울이 어디에 있습니까? 4장 3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매임을 당하였습니다. 4장 18절을 보십시오. 매여 있는 것입니다. 실패했습니다. 억울함을 당했습니다. 요즘 사업으로 보면 망했습니다. 건강으로 보면 병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사기 치고 도둑질하다가 갇힌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만 그렇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을 보면 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매년 한 해를 돌아보면서 감사를 생각하고, 감사를 표현하고, 감사를 기대하는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지금 되어진 일에 대하여,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언제 감사하고 있습니까?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현재 분사형으로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한 번 기도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늘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했는데 그때마다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생각할 때,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 분노하거나 원망하거나 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할 때, 부부를 위해 기도할 때, 장인 장모, 시어머니 시아버지, 민족과 나를 위해, 교회 목회자와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 감사하고 있습니까?

감옥에서 바울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앞에 있는 빌립보서 1장 3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역시 감사합니다. 에베소서 1장 16절을 읽어 보십시오. 역시 감사합니다. 빌레몬서 1장 4절에 보면 역시 감사합니다. 바울은 감사 생활도 예수님을 본받아 살았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감사라는 말을 검색해 보니까 188번이 나옵니다. 신약성경에서 검색해 보니까 62번이 나옵니다. 바울 서신서에 46회가 나옵니다. 감사 표현의 70% 이상이 바울 서신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편지를 보낼 때마다 감사합니다. 문제 많은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십시오. 바울을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돈만 좋아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못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은사를 놓고 서로 잘났다고 자랑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교회에서 편지할 때 어떻게 합니까? 고린도전서 1장 4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현재의 문제가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왜 늘 감사를 했습니까?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이라는 말은 “왜냐하면”이라는 말입니다.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구한테서 들었습니까? 7,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에바브라에게 들은 것입니다. 무엇을 들었습니까?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들은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들었습니까?

4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당시 그리스 철학과 로마의 문화가 지배한 때였습니다. 골로새는 무역 중심, 교통 중심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였습니다. 헬라문화가 발달되어 있고 혼합주의 사상이 팽배해 있던 곳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아가페)을 있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신분과 계층을 초월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계급 사회입니다. 신분사회입니다. 신분이 다른 사람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셋째는 복음에 기인한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 있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소망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전에 복음의 진리의 말씀을 들어서”입니다. 복음에 기인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당시에도 이 땅이 전부라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 소망이 생기니까 믿음도 견고해지고, 사랑도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골로새 교인들에게 감사할 만한 일만 있었겠습니까?

골로새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이 들은 것이 좋은 소리만 들었겠습니까? 골로새 교회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을 같이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8절을 보십시오. 천사 숭배 문제가 있었습니다. 금욕주의(골2:21)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그들 가운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는 것을 보고 감사한 것입니다. 감사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감사로 해석하고, 감사로 반응하고, 기대를 가지고 감사를 선택했듯이 바울도 감사로 해석하고, 감사로 반응하며, 기대를 가지고 감사로 선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믿음과 사랑, 소망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15절을 보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감사합니다.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영광의 주님을 비방했던 사람, 주님과 교회를 핍박하고 폭행하는 사람, 죄인 중에 괴수이었는데 도리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 모든 것을 감사로 해석하고 감사를 선택하며 사는 것입니다. 새의 날개가 짐이 아니듯, 기차에게 레일이 속박이 아니듯, 물고기에게 물이 부담이 아니듯 우리에게 감옥같은 고통과 고난은 얼마든지 감사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무좀 때문에 늘 고생하면서 불평을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믿는 의사 선생님에게 갔더니 “목사님, 무좀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면서 불평하지 마세요. 이제 나이 많아지면 무좀이 저절로 없어집니다. 무좀도 먹을 것이 없어서 다 도망갑니다. 발에 땀이 나지 않을 때가 되면 무좀이 다 없어질 텐데 뭐, 미리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무좀 있는대로 감사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시험도, 문제도, 고통도 없습니다. 가족 간의 갈등, 남편과 아내,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장인과 장모, 교회, 직장, 정치인 등 불평과 원망을 찾으면 끝이 없습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며 늘 원망하고 불평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만 손해입니다. 불평 원망한다고 내 마음대로 되어지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도, 내뜻대로 되어지지 않아도, 잘 되어도, 못되어도, 성공해도, 실패해도, 건강해도, 병에 들어도, 부자가 되어도, 가난해져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항상 감사로 해석하고, 감사로 반응하고, 감사를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교단 중 ‘그리스도 연합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단에서는 하루에 열 두 번 감사할 것을 강조한다고 합니다. “아침, 새로운 시간을 주심에, 아침 식사에는 음식을 보며, 일터에 가면서 움직이는 기쁨에, 일하면서 일하는 보람에, 비판이나 압력을 받을 때는 도전을 주심에, 칭찬을 받을 때는 만족함에, 점심에는 대화할 수 있는 동료에, 일과 후 작은 성취에, 귀가 후 가족을 보며, 신문, 텔레비전을 보면서 여가를 주심에, 잠을 주신 은혜에, 꿈속에서는 생명을 주신 은혜에”

 

2. 우리도 감사를 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는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게 무엇을 권면합니까?

2장 6-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너희가 그분 안에서 행하라”라고 권면합니다. 그 안에서 행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 자체를 말합니다. 말로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로 모방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모방하라는 것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초점은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입니까?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으며입니다. 혼합주의, 율법주의, 돈, 쾌락에 뿌리를 박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뿌리, 사람의 뿌리, 소망의 뿌리, 삶의 뿌리, 감사의 뿌리는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나무 비유해서 문법적으로는 수동태,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어 뿌리를 박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세움을 입어는 건축물에 비유하여 계속 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은 말씀에 근거한 믿음을 가지고 쌓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개는 다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감사를 넘치게 하라는 말은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능동적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스스로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근육과 같은 것입니다. 근육을 계속 훈련해야 튼튼해지는 것처럼 감사 근육을 튼튼하게 하려면 매일 매일 매 사건 사건 마다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에 인색하지 말고 감사에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감사의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감사 지수를 높여야 합니다. 감사가 곧 신앙 수준입니다. 영적 수준입니다. 옛날에 목회했던 어떤 목사님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옛날에는 감사절에 감사헌금을 하시면 봉투의 이름과 금액까지를 일일이 읽어주었답니다. 지금은 성도들이 시험에 든다고 해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목사님이 계시면 천연기념물이 된 시대입니다. 헌금 바구니를 돌리는 교회도 거의 없습니다. 다 뒤에 헌금함을 두고 자유롭게 헌금하게 하고, 온라인으로 헌금을 합니다. 헌금 생활 잘하게 하는 것이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이 땅에서 의미있고 가치 있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인데 부담이 되니까 장로님이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아도 헌금 가지고 권면하는 목사님은 찾아 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대부분 교회가 의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그 시대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목사님이 차례대로 이름과 헌금액수를 발표하다가 작은 실수를 했답니다. 교회 장로님 한 분이 30만 원을 추수 감사헌금을 하셨는데 300만원을 하신 것으로 잘 못 읽어 버렸답니다. 지금 같으면 목사님을 찾아가 항의하던지 교회를 떠나든지, 목사가 돈만 좋아한다고 비난하든지 할 터인데 장로님은 깜짝 놀라며 당황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다음 주에 270만 원을 더 감사헌금으로 드렸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목사님은 장로님께 죄송하다며 사과했답니다. 그러자 장로님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목사님, 저는 제가 30만 원짜리 감사 인생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입을 통해 300만 원짜리 감사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감사의 수준을 기쁨으로 높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감사하는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을 부담으로 생각하지 말고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는 것이 감사의 신앙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감사생활하면 자식들이 행복하게 됩니다. 자식에게 하나님께 감사를 권하는 것 부담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시간으로, 재능으로, 물질로, 말로, 글로, 몸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자식에게 가르쳐야야 할 중요한 교육 중에 예수님처럼 과거를 감사로 해석하고 현재를 감사로 반응하고 미래를 감사로 선택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가장 행복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비결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며 사는 인생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중요한 교육입니다. 너무나 받는 것에만 익숙하게 만들고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만 사는데 익숙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아들 딸 하나씩만 기르다 보니까 너무나 아이들을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로 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타인의 희생만 강요하고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부모님이 몇 번이나 깨워야 하고 밥을 먹고 옷을 입고 학교에 등교할 때까지 끊임없이 부모님께 요구하고 더 많은 것을 챙겨주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감사 불감증에 걸립니다. 현대인의 질병 중에 만연하여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감사 불감증입니다. 풍요 속에 나타나는 질병입니다. 부족함 없는 풍요 속에 살다보니 안락한 부모의 집에서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살면서도 부모의 말 한마디에 불평합니다. 감사한 것 99개가 있는데 그것은 보지 못하고 불평거리 하나를 찾아 원망합니다. 어릴 때부터 감사를 모르고 불평과 원망을 하고 자라는 아들 미래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어디에 가나 불평과 원망만 하는 사람들 환영받지 못합니다. 사람은 막장에 갇혀 물이 없어 봐야 물의 고마움을 알고, 공기가 없어 보아야 산소의 고마움을 알게 되는데, 결핍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감사를 모릅니다.

자녀교육에 올인하는 어느 어머니가 일곱 살 난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에 놀러 갔답니다. 이웃집 부인이 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니까 아이는 “고맙습니다.”는 인사도 없이 얼른 받았답니다.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아이의 어머니는 바로 “다른 분이 사과를 줄때는 뭐라고 해야 되지?”라고 말했답니다.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껍질을 벗겨주세요.”라고 말하더랍니다. 집에서 하는 버릇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진리를 잘 알고 있던 바울은 얼마나 감사를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감사 교육을 어떻게 시키고 있습니까? 골로새서에서만 찾아 보겠습니다.

1장 12절을 보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성도가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장 1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로 권면해야 합니다.

3장 1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양할 때도 감사함으로 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배도, 새벽기도도, 헌금도, 선교도, 전도도, 봉사도,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부부 생활도 감사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3장 17절을 보십시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무엇을 하든지 예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합니다.

4장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감사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특히 자녀들에게 감사하는 생활을 이렇게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감사의 중요성을 망각해서, 혹은 부담 스러우니까, 혹 권면해도 듣지 않으니까 감사 생활을 권면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감사생활을 권면해야 합니다.

저의 부끄러운 간증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성실함이고 사람 대할 때 계산하고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과 관계도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대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무심하고 정이 없고 무색무취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장인 장모님에게 마찬가지였습니다. 생신도 챙기고 결혼기념일도 챙기고 전화도 자주 해야 하는데 성격상 그런 것을 잘못합니다. 제 생일도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부교역자 시절 어린 아들 딸, 교회에서 교인들 앞에서 “자기 자식만 사랑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안아주지도 못하는 성격입니다. 교회 개척 초기에 금요일 철야기도를 마치고 같이 차를 타고 집에 가는 중이었습니다. 아내가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장인 장모에게 잘못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물질로는 못하지만 그래도 아침마다 기도해 드리고 마음은 늘 잘해드리려고 생각하니 그만하면 됐지라고 생각하며 불만 사항이 무엇이냐고 이야기 해보라 했습니다. 요지는 시시때때로 장인 장모님의 도움을 받는데도 전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화해서 사소한 것에도 감사를 표현하면 될텐데 못한 것입니다. 맞는 말인데고 기분이 나빴습니다. 감사한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괜히 결혼하였구나? 그냥 홀로 살 것인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 마귀 좋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평, 불만의 덩어리들을 열심히 마음으로 찾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 많습니까? 목사에게 시집와 제대로 결혼기념일 한번 챙기지 못하고 생일 축하 한 번 받아 보지 못하고 묵묵히 아들 딸 길러 준 것 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목사라는 이유 때문에 도망가 다른 남자하고 결혼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남편 설교 듣기 싫다고 다른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사모도 있고, 남편 목회 잘 못한다고 본인이 남편 교회 옆에 개척하여 목회하는 사모도 있는데 그래도 한 주도 빠짐없이 나와 예배드리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싫더라도 권면해 주고 권면을 받으면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 목사님인 윤인수 목사의 간증입니다. 북한 김정일과 북한에서 주일학교를 같이 다녔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북한에서 목사님이셨는데 공산당에게 잡혀갔답니다. 11살 때 아버지 면회를 갔다 공산당에 잡혔고 모진 고문으로 그 후 실명이 되어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남한으로 내려 왔지만 뇌졸증으로 앓아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시절에 그는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기를 시작했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으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답니다. 어느 날 그는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을 집으로 가지고 와 어머니에게 그 돈을 내놓았답니다. 돈을 받아든 어머니는 그의 등을 두들겨주며 “십일조를 먼저 떼자.”고 하자 그는 버럭 화를 냈답니다.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나의 눈은 멀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는 것입니까?” 하며 항변했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이런 아들의 손을 꼬옥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회개하고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면서 32년 동안 재소자들을 불우한 청소년을 돌보았는데 재소자만 5만 명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 함이로다(시136:1)” 믿습니까?

 

감사는 은혜의 선순환을 일으키게 합니다. 감사는 평안을 주고, 감사는 기적을 보게 합니다. 감사는 자족하게 합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을 통해 들어오고, 감사는 축복의 그릇이고, 감사가 최고의 백신이고, 감사가 인생을 춤추게 하고, 감사가 미래를 보장하고, 감사 생활이 만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고, 감사 생활이 직장 생활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고, 감사 생활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길이고, 감사 생활이 생활의 활력을 주는 보약이고, 감사 생활이 대인관계의 윤활유고, 감사 생활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감사생활을 할 것을 권면해야 합니다. 토머스 J. 네프(Thomas J. Neff)는 그의 책 <최고 경영자가 되는 길>이라는 책에서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성격을 연구 분석한 결과 그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마음속에 "넘치는 감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의과대학팀이 1937년부터 72년 동안 '잘사는 삶의 공식'을 찾아내기 위해 하버드대학교 2학년 학생 약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 연구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이고 잘사는 삶의 공식이 바로 '감사하는 자세'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매일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감사하고 사느냐가 행복의 척도가 되고 미래 성공의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해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진정한 감사는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도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69:30,31)”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감사하는 자에게 더 주신다고 했습니다(눅17:11-19).

바울은 권면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8)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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