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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겨 주시는 그리스도(마가복음 1:40-4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719 추천수:0 220.120.123.244
2020-11-01 12:22:14

불쌍히 여겨 주시는 그리스도

마가복음 1:40-45

 

얼마 전 친한 목사님으로부터 기도 부탁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과학과 의학이 많이 발전했는데도 고치지 못하는 질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밝힌 바에 따르면 지난 18세기까지의 인류질병은 총 2천 4백 여 종이었는데 1934년에는 3천 5백여 종으로 늘어나고 20년 후인 1954년에는 배가 늘어난 7천여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약 3만 가지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중에는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는 난치병도 있고, 현대의학으로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도 있습니다. 가족 식구 가운데 어느 날 이런 난치병이나 불치병에 걸리면 잔치집이 초상집처럼 변해 버립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같지 않고, 아무리 좋은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도 웃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있지만 너무나 힘들다고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의 딸은 어릴 때 외국에 나아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을 나와 외국에서 취직했습니다. 그러다 좋은 사람을 만나 작년에 결혼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낸 아이이기 때문에 저도 결혼식에 참석해 제 딸이 결혼하는 것처럼 좋아하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결혼하여 외국에 살고 있는데 병이 걸려 한국에 들어와 치료를 받고 있다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아버지로서 너무나 마음이 괴롭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딸 대신에 자신이 그 병을 앓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딸은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려고 씩씩하게 견디는데 머리가 다 빠지고 가발을 쓰는 딸이 너무나 불쌍히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까지 어렵게 배운 것을 활짝 펼쳐야 하는데 그 날개를 펴기도 전에 접어야 할 위기에 처한 딸을 보는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나이인데 그 행복의 맛을 보기도 전에 다시 집에 돌아와 불행의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딸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1. 예수님은 연약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불치의 병에 걸려 사람들로부터 냉대받는 환자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불쌍히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를 사람들은 역겹게 여기고 부정하게 여겼지만, 우리 예수님은 연민의 정을 가지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나병 환자의 고통을 예수님의 고통으로 여기셨습니다. 마8:17절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예수님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구약성경 이사야를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 것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며 “불쌍히 여기다, 민망히 여기다, 측은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라는 마음을 가지시는데 복음서에 이런 말이 40번 정도 나옵니다.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었습니다(마14:14). 굶주린 백성들을 보며 불쌍히 여겨 주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보았을 때 예수께서 불쌍히 여겨 주었습니다(마 20:34). 귀신 들린 사람을(막5:19), 죽은 나사로를(요11:33), 독자가 죽은 나인성 과부(눅7:13), 꿈도 희망도 없이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들,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 멸시받는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었습니다.

 

긍휼이 풍성한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며 예수님의 본성입니다. 원어적 의미에는 내장이 아프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자가 타들어가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너무 안타까울 때, ‘애간장이 탄다’고 말하는데 “마음 내면에서 나오는 동정 어린 깊은 감정 표현”입니다. 값싼 동정이 아닙니다. 영어에서는 compassion이라고 번역하였는데 com은 ‘함께’라는 뜻이고, passion은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즉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문제를 나눈다는 것이 ‘불쌍히 여기다’의 의미입니다.

세상이 자꾸만 사나워지고 있습니다. 살벌해지고 있습니다. 긍휼이 메마른 시대입니다. 언론에 나오는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대통령을 했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감옥 생활을 합니다. 조금만 약점이 보여도 하루 아침에 매장됩니다. 비정하고 잔인한 시대입니다. 남의 아픔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때는 그래도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조금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면 눈빛이 달라집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요소를 가지게 되면 경계를 하고 멀리합니다. 요즈음 코로나 19로 인하여 사람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코로나에 감염될지 모르니까 그 사람에게서 감염되지 않기 위해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학문적 용어로는 “행동 면역 체계”라고 합니다. 잠재적 병원체와 접촉을 줄이기 위해 사람이 자동적으로 가지는 첫 번째 방어선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혐오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단체에서 확진자가 나오면 그 단체를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격리합니다. 가족도 만나지 않습니다. 미안함보다 안전함이 중요하다는 반응입니다. 전염병이 발발하면 사람들은 관습에 따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한 환자는 나병 환자입니다. 당시 나병은 불치의 병이었고, 접촉하면 전염되는 병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을 하며 죽어갔습니다.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는 병이었습니다. 외로움으로 원망하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가족이 있지만, 함께 살 수 없고 친구들로부터 세상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외롭게 살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결절이 생기지만 점점 아름다운 모습은 잃어버리고 눈썹이 떨어지고 성대는 궤양으로 쉰목소리가 나고 신경은 마비되고 손가락이 떨어지고 발가락이 떨어지고 나중에는 손발 전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20-30년 간에 걸쳐 서서히 육체가 죽어가고 나중에는 뇌에까지 침범하여 혼수상태에 빠지다가 결국 죽게 됩니다. 이 병은 몰골도 무섭지만, 전염성이 있어 아무도 상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안에 들어갈 수도 없고 사람을 만나면 멀리서 손을 입에 대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소리를 질러 자신이 나병 환자임을 밝히며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도록 머리털을 밀고 찢어진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와 같이 있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겨 주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불쌍히 여겨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내 힘으로 하려 해도 풀 수 없는 문제도,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불치의 병도, 끝없이 이러지는 두려움과 고통이 있는 난치병도, 아무리 발달한 문명과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과 어려움이 있습니까? 불쌍히 여겨 주시는 예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오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만 하면 해될 되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불쌍히 여겨 주시는 예수님을 만난 나병 환자를 보십시오. 어떻게 합니까? 40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께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모험적인 신앙입니다. 당시는 건강한 사람에게 나아가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레13:45,46). 어차피 죽을 것, 돌에 맞아 죽던 병으로 죽던 매 한 가지니까 죽을 각오를 하고 당시의 관습을 다 벗어던져 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생을 살 바에야 차라리 예수님께 나아가다 죽겠다는 마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결단하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자신을 깨끗게 할 수 있는 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마태복음 8장 3절에는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은 것입니다. 세상의 주인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주님으로 믿은 것입니다.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고 지배하시는 주인으로 믿은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믿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려고 하면 불치의 병인 나병도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저에게” 우리 성도님들의 이름을 넣어 다시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 주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만 하면 질병도 깨끗해지고, 경제적 문제도 해결되고, 자녀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부부의 문제도, 인간관계의 문제도, 이제까지 한 번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풀리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과 같이 죄로 마비된 우리의 양심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처럼 전혀 회복되지 않고 서서히 무너져 가는 기업과 우리 인생을 회복시키시고 살려 주실 수 있습니다. 문둥병에 걸려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가는 것처럼 하나하나 상실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상실감의 깊은 신음 속에 있는 우리에게 생기와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되어 삶에 기쁨과 환희가 없는 자도 예수님께 나오면 삶의 목적을 찾고 기쁨과 환희를 맛볼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적인 문둥병에 걸린 사람도 예수님께 나와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아 진정한 평안함이 임할 줄 믿습니다. 주님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주님에 대한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나는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함을 주고 우리 삶의 수렁에서 건져내 줍니다.

<피아노 치는 변호사>라는 책을 낸 박지영 변호사의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5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답니다. 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음악대학에서 작곡이론을 전공한 분입니다. 아버지의 부도로 단칸방에서 살면서 피아노까지 처분해야 했었고 어렵게 어머니가 피아노를 다시 마련하여 피아노를 놓을 곳이 없어 주인집 마루에 놓고 피아노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생겼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만 19세에 림프암에 걸답니다. 지옥 같은 항암치료를 받을 때 몸 안의 장기가 모두 입으로 딸려 나올 것 같은 토악질을 10시간씩 해댔답니다. 물을 넘기기도 어려웠답니다. 주삿바늘을 하도 많이 꽂아 혈관이 모두 숨어버렸고 잠만 자면 가위에 눌렸답니다. 기도했답니다. 주기도문을 계속했답니다. 어느 정도 인생 여정이 아직도 남아 있으리라는 이상한 확신이 생겼답니다. 항암치료를 중단했답니다. 병원에서는 경고했지만, 집에서 현미와 채소 등 자연식을 먹으면서 1년여 동안 암세포와 싸워나갔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놓기까지 하신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깨끗이 치유된 것입니다. 그 이후 15년 동안 감기나 타박상 등을 치료하러 병원에 간 일 외에는 림프샘 종양과 관련해 병원을 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기나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늘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뒹굴고 울부짖으면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서울대 음대를 들어갔다고 합니다. 한시적 삶 한정된 시간 동안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분명해졌다고 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입니다. 선교단체 '한시미션'에 들어가 농촌 오지, 도시빈민, 소년소녀 가장, 장애우 등을 구체적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담임목사님께서 부르시더니 "지영아, 사법시험에 도전해보면 어떻겠니? 건강만 받쳐주면 정말 좋겠는데 그건 함께 기도해보면서 말이야." 구체적으로 섬기기 위해 법대에 다시 편입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법무법인 로고스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변호사로서 직업적 소명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의 궁극적 소명을 분리하지 아니하고 세상 한복판에서 사랑을 외치신 예수님을 닮고자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소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잘 변론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 내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을 법과 음악을 통해 잘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2.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나아가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해 주십니까? 두 가지 행동을 하십니다. 첫째는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은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가족도 아내도 남편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율법에서 금한 일입니다. 스스로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모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게 다가와 손을 내밀어주십니다. 우리를 안수해 주십니다.

 

둘째는 불쌍히 여기는 실효성 있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말을 한다 해도 비난하는 말을 합니다. 조롱의 말을 합니다. 험담합니다.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긍휼히 여기는 예수님은 그 나병 환자에 무슨 말씀을 하였습니까?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한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님들께서 지금 주님 앞에 나와 원하는 소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 말씀합니다.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말이 아닙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하면 살아나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면 관에서 일어나는 실효성 있는 말씀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는 예수님이 손을 대시고 예수님이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니까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4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 떠나고 깨끗하여졌습니다.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한 것입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은 다음날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즉각적으로 떠났습니다. 중풍 병자는 즉각 일어나 그 침상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한 편 손마른 자는 즉시 회복되었습니다. 죽었던 야이로의 딸은 한순간에 일어났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니까 나병 환자가 깨끗이 치료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면 못 이룰 것이 없습니다. 이제 부모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운 친구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고 사람답게 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손을 입에 대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지 않아도 됩니다.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천대와 소외, 모든 고통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나병처럼 서서히 우리의 몸을 죽이고 있는 습관적인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능력으로 이 시간 곧 떠나고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나병처럼 서서히 죽여가는 잘못된 사고방식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곧 떠나버리고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나의 신앙생활의 진전을 가로막는 나병처럼 나쁜 습관이 곧 떠나버리고 깨끗하여질 줄 믿습니다. 내 인생을 나병처럼 붙들고 수렁으로 끌고 가는 장애물이 곧 떠나버리고 정상적으로 회복될 줄 믿습니다.

오래전에 우리 교회에 다녔던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몸이 이상하여 병원에 갔는데 위에 종양같은 것이 있다고 진단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성도님들이 병이 들고 사업이 잘 안되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목회자도 무척 마음이 아프고 괴롭습니다. 예수님처럼 능력이 있으면 해결해 주면 좋을 텐데 목사에게 그런 능력이 없어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목회자로 오직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자고 하고 다른 병원에서 다시 진단을 받아 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병원에서 검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은 젊은 나이인데 수술을 받고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선 수술하지 말고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부부가 새벽에 나와 열심히 기도하고 저도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일산 암센타에서 집으로 가는 중인에 암검사 결과 괜찮다고 이제 의사가 오지 말라고 한다고 감사하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메시지를 받고 무척 기뻐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이 원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어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깨끗함을 받으라고 선포해 주시면 문제가 풀리고 치료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우리 스스로 풀 수 없는 문제가 우리에게서 떠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오늘 날도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3.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예수님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정상적으로 회복된 나병 환자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부탁하였습니까?

주님은 그에게 엄히 경계하였습니다. 무엇을 엄히 경계하였습니까? 세 가지입니다. 44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제사장에게 나병에서 깨끗이 나았음을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율법에 따라 예물을 드려 나병에서 치유되었음을 입증해 주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정한 예물은 산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입니다(레14:4). 8일 후에 다시 흠 없는 어린 수양 둘과 암양하나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레14:8).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치료받은 나병 환자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급했는지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여 널리 알렸습니다. 40절에 “주님이 원하시면”이라고 고백했던 사람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는 주님의 긍휼로 치료를 받으니까 “주님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 악의가 있거나 예수님의 사역을 고의로 방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세월 고통 가운데 있던 그가 아무도 고칠 수 없고 그 병으로 결국 처절하게 죽어야 하는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단숨에 고침을 받고 너무 놀랍고 기뻐서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는 못 견디는 강한 충돌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를 다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 때문에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한적한 곳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 사역은 심하게 위축을 받고 방해를 받았습니다. 갈리리 여러 마을 회당에 들어가 전도하는 사역이 방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깊으신 뜻이 있어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소문을 냄으로 일반인들이 예수님을 오해하여 메시아적 사역을 방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오해되고 정치적 메시아로 드러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주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인류를 구속하는 메시아적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것입니다. 병이 치료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땅에 잠깐 치료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치료하시는 주님을 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여 천국 가는 것입니다. 이적을 행하는 것이 복음 전파와 인류 구원 사역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열광으로 정한 때가 이르기 전에 위기를 당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으라는 것은 유대 공동체에서 그가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나병에서 치료되었다는 것은 제사장이 판단을 해 주었고 정상인이라는 판단을 받으면 이제 나병으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제사장의 인정을 받아야 법적 효력을 가지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제사장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병고침을 받은 산증인을 통해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심을 논박할 여지가 없도록 증거하길 원했을 것입니다.

 

제물을 바치라는 것은 문둥병 환자가 정결케 되는 법적 절차였습니다.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손해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예수님의 사려 깊은 의도는 치유받은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모두 무시되었습니다. 그는 질병 속에서 "주님이 원하시면"이라는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고 치유의 은혜를 받고는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할 텐데 주님의 원하심과는 무관하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긍휼함을 받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사는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늘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자동차 액셀러레이터가 속도를 내는 것이 제일이라고 자동차 운전사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무 때나 속도를 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에서 기도의 능력이 있다고 찬송하는데 기도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운동선수가 코치의 말을 듣지 않고 코치의 작전과는 전혀 상관없이 골을 잘 찬다고 풀백도 하다 골키퍼도 하다 윙도 하다 자기 맘대로 뛰어다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담임 목사님께서 어떤 일을 시켜 놓으면 다른 교회 목사님과 상의하여 그 일을 한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아내가 집안일을 남편과 상의하지 않고 앞집 남자와 상의한다면 얼마나 웃기는 집안이겠습니까? 내 체험이 아무리 감동적이고 내가 위대한 체험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일은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남이 할 수 없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쉽게 법하기 쉬운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경험, 자기 생각에 우선권을 둡니다. 자기 열심 자기 전략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시길 원치 않습니다. 긍휼함을 받은 사람들은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 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열심, 하나님께서 주신 전략에 따라 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사십 년간 방황한 까닭도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들 마음대로 주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사사시대의 불행도 자신의 소위대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불행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며 자기 소위대로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침 받은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축을 나에게 둠으로 오히려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 말씀 붙들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함으로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내가 중심축이 아니라 주님이 중심축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원해서 불쌍히 여김을 받은 우리에게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대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 원하는 것 세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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