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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켜 주시는 그리스도(누가복음7:11-1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65 추천수:0 220.120.123.244
2020-10-18 15:38:24

일으켜 주시는 그리스도

누가복음7:11-17

 

얼마 전에 우리 교회 한 권사님의 아들이 미국에서 코로나19 양성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집안의 믿음의 가장으로 늘 기도하시는 권사님인데, 권사님에게 너무 염려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며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다 해 줄 수 있을 것 같지만 부모도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도 열심히 기도할 터이니까 기도하자고 위로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저도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권사님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미국 형편상 병원을 가지 않고 그저 집에서 격리되어 있었는데 음성 판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감사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겠지만 기도를 열심히 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응답해 주었다고 믿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누구나 자식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자식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도 우리가 잘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경우를 만나든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나가면 예수님이 일으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일으켜 주시겠습니까?

 

1.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

오늘 성경에 보면 외아들이 죽어 장례식을 치르는 홀로된 여인이 나옵니다. '귀여운,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나인성에서 자랐습니다.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훌륭한 청년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리라는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다 결혼을 하였을 것입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동양권 사회는 아들을 선호하는데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백일잔치도 하고 돌잔치도 하고 기뻐합니다. 부부는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남편이 죽었습니다. 질병으로 죽었는지 사고로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남편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애정과 의존의 대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미국의 워싱턴 의과대학의 홈즈와 레히에 의하여 고안된 생활 사건 척도 표에 의하면 스트레스 값이 가장 큰 경우는 첫째가 배우자의 사망, 둘째가 이혼, 셋째가 배우자와 별거라고 합니다.

지금과 달리 농경 사회에서 남편의 죽음은 모든 것의 상실과 같은 때였습니다. 바로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구제와 긍휼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그래도 자식 잘 길러 판사나 의사 만들어 손자 손녀 보며 사는 희망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마저 죽은 것입니다. 어떻게 죽었는지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지금 식으로 말하면 아침에 출근한다고 나갔는데 경찰에서 연락이 온 것입니다. 교통사고 아들이 죽었다는 비보를 들은 것입니다. 아들이 몸이 아파 병원에 갔는데 암이라는 통보를 받고 일년 치료받다 죽은 것입니다. 아들이 직장에서 산재로 죽은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모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일한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독자는 인생의 기둥이요, 소망이요, 삶의 의미요 삶의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여인에게 있어서 독자는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을 것입니다. 행복했던 날은 끝나고 이제 불행과 근심이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던 즐겁지 않고 사는 것이 재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먼 산만 바라보아도 서글퍼지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는 희망의 끈이 사라진 것입니다. 옛말에 "부모는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갔으면'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이렇게 절망으로 쓰러져 가는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첫마디가 무엇입니까?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그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망의 눈물을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슬픔의 눈물을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이 울지 않도록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선포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행렬에 참여하였지만, 이 불쌍한 여인의 불행을 막아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울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인간에는 슬픔을 그치게 할 능력도 없고 울음을 멈추게 할 길도 없으면서 말로만 위로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울음을 변하여 웃음으로 바꿔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염려 근심을 해결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므로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 밖으로 향하는 장례 행렬은 절망의 행렬입니다. 울음의 행렬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의 행렬은 어차피 울음의 행렬입니다. 그러나 성안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행렬은 소망의 행렬입니다. 울음을 그치게 하는 행렬입니다. 예수님 만나면 누구라도 소망의 행렬에 편승할 수 있습니다. 눈먼 자가 눈물을 거두고 눈을 뜨고, 문둥이가 눈물을 거두고 깨끗함을 입고, 앉은뱅이가 눈물을 거두고 일어나고, 병든 자가 눈물을 거두고 낳음을 얻고, 귀신들린 자가 눈물을 거두고 참 자유를 얻는 소망의 행렬이 됩니다.

절망에 처한 과부 아들의 죽음의 행렬 앞에 문득 나타난 예수님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연히 그 과부를 만났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우연히 예수님 만나 횡재를 만났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연한 방문이 아니라 의도적인 방문입니다. 예수님은 절망과 고통에 처한 자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 절망하는 자를 찾아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혹시 경제적 문제로, 질병으로, 자녀 문제로, 가정 문제로, 직장 문제로, 진학 문제로, 취업 문제로, 결혼문제로 절망하며 울음의 행렬을 이어가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오늘날도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절망으로 쓰러져 가는 자를 소망으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면 소망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문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의 인생은 절망적인 인생이었답니다.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이었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살해되어 고아처럼 자랐답니다. 청년기에는 혁명당에 가담한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답니다. 사형집행 전에 그의 천재적인 문학성 때문에 황제의 특사로 사면이 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났답니다. 4년 뒤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했지만, 그의 아내는 결혼 전에 사귀던 사람과 계속 불륜관계를 맺었답니다. 어린 자식이 하나 있었지만, 추위와 배고픔으로 견디지 못하고 결국 병이 들어 죽었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일평생을 그를 쫓아다닌 천형과도 같은 간질병이 있었답니다. 이처럼 도스토옙스키는 일평생은 절망적인 삶이었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의 이 고통스러운 삶을 연명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이 읽을수록 인생의 깊이와 고뇌, 그리고 용기를 얻게 되는 그런 작품들을 쓸 수 있었습니까? 그는 절망 가운데서도 소망을 주는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고통스런 자신의 인생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의 고통을 '거룩한 병'으로 불렀답니다. 그 고통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발견하였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예수님은 그를 좌초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영혼의 돛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는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 때문에 자서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라는 작품으로 그 고통스러운 인생을 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어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소망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성도님들이 헌금을 하여 필리핀 학교에 강단을 지어 준 학교가 있습니다. 그때 강단 헌당식을 하면서 제가 찾아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그 선교사님이 자신이 왜 목사가 되었는지 왜 선교사님이 되었는지 간증해 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청년 시절 교회를 건축하는데 몸으로 봉사하면서 현장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러다 추락을 하여 크게 다쳤답니다.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걷지도 잘 못하고 젊은 날 절망 가운데 처했답니다. 당시 병원 가는 것도 어려울 형편이고 교회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엉덩이뼈를 누군가가 치더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만져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아프던 엉덩이가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지고 깨끗이 나았답니다. 그 경험을 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손은 여전히 치료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났는데 목사님께서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손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목사님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곧 나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그 후에 손 역시 깨끗하게 나아 정상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절망 가운데 소망을 주십니다. 소망의 두 가지 주성분은 '믿음'과 '기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기대하여야 합니다.

왜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보시고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절망적인 문제를 모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사정과 아픔과 고통을 다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긍휼 때문에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무엇을 해 드려서가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남의 결핍을 통해 돈을 벌고 살아갑니다. 불쌍히 여길 만한 것이 생기면 부담스러워 도피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인간의 결핍을 불쌍히 여기시며 아무런 조건 없이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손을 내민 것입니다. 그 여인의 조건이나 믿음을 본 것이 아닙니다. 성품을 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긍휼 때문에 그녀를 찾아간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있습니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다. 계속해서 쓰러져 가는 인생을 보며 낙담하시는 분 계십니까? 사업에 대하여, 미래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가정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 삶의 현장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우리의 절망의 현장에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아니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절망하고 있을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소망으로 일으켜 주십니다. 이 시간 “울지 말라”고 우리를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진짜 구세주로 믿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2. 죽음에서 생명의 부활로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

근본적으로 여인이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남편의 죽음, 아들의 죽음, 죽음 때문입니다. 폴틸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그 첫째가 죽음과 자기 숙명성, 둘째는 허무와 무의미성, 셋째는 죄책감에 대한 불안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찾아가셔서 어떻게 하십니까?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가까이 가십니다. 그리고 그 관에 손을 대십니다. 유대인은 관에 손을 대면 부정해지기 때문에 손을 안 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관에 손을 대고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합니다.

슬픔과 절망과 눈물과 통곡의 소리 나는 안타까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어 기쁨과 환희와 감격의 행렬로 바꾸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 십니다.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지옥으로 가는 행렬을 천국으로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우리 인간을 불행케 하고 슬프고 고통스럽게 하고 모든 것을 헛되게 하는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할 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은 죽음에 대하여 손을 대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온 인류가 가는 죽음의 행렬을 바꾸기 위해서 역사 속에 뛰어들어 오셨습니다.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바꾸셨습니다.

누가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고 죽의 관에서 일어나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과학의 발달로 죽음을 역사 속에서 제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생명을 조금 연장할 뿐이지 죽음 앞에 두려워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했듯이 죽음은 인간의 본질적 문제입니다. 코로나 19를 통해 하나님의 고유영역에 도전하며 유전자 조작을 하며 과학으로 교만해져 생명과를 따먹으려 하는 인간에게 경고장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에이즈를 통해, 사스를 통해, 메르스를 통해 경고해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계속 경고장을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과 계시록을 보면 더 무서운 경고장이 인류에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고를 무시하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고 생각하며 애써 죽음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니 살아 있을 때 "먹고 즐기고 놀자"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옥도 천국도 없다고 하며 내세에 대하여 어떠한 희망도 기대도 품지 않고 죽음 앞에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세상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으며 천국과 지옥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를 강하게 비판했던 사르트르도 죽음 앞에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는 노년에 '폐수종'으로 죽음에 임하자 품위 있게 죽는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욕을 하면서 물건을 던졌고 죽음이 두려워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발버둥을 쳤다고 합니다. 1883년 3월 14일 카를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날, 그의 하녀가 다가와서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시끄러워, 나가!" 라고 소리치며 죽어갔고,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 이라며 초라하게 숨졌다고 합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생을 향한 애착과 죽음 앞에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죽음 문제를 기피한다고 죽음의 문제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심리학자 헤르만 파이펄은 심상 투사 테스트를 해 본 결과 "쉰을 넘은 사람에게 잠재해 있는 가장 기본적인 관심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몰두"였다고 합니다. 예측이 가능한 불가항력의 원천적으로 다가오는 자연사든, 예측 불허의 사고사든 인간은 언젠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죽음은 차별이 없고 신분의 귀천이나 지위 고하가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으면 죽는 것은 잠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죽음으로 절망하지 않고 생명으로 일어납니다. 요한 웨슬레는 88세로 죽음에 임했을 때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했으며 유명한 19세기의 미국 부흥사 D.L 무디는 임종을 당하여 슬퍼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내일 아침에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정말 내가 죽은 줄로 생각지 마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은 이의 묘비에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새로운 생명에 들어간 것이다."라고 새겼답니다. 우리도 언제가 죽을 것입니다. 죽음 가운데 일어날 믿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죽은 자에게 명려하시는 분이십니다. 살아 있는 자에게 말할 수 있지만 죽은 자에게 말하여 듣게 하고 그 말에 따라서 일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져 가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하자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하시면 죽은 소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기적을 보여 주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이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말씀 한마디로 죽음에서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으면 누구든지 죽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행렬에 참여할 뿐 죽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슬픔과 절망과 눈물과 통곡의 소리 나는 안타까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어 기쁨과 환희와 감격의 행렬로 바꾸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 십니다. 죽음을 행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운명 주의 관속에 드러누워 있지 말아야 합니다. 청년의 때에 허무주의 관속에 드러누워 있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 앞에 죽음을 부정하고, 분노하며, 타협하고, 우울해하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삶이 끝나면 그 후 또 다른 영생의 삶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25:46)"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한 예수 그리스도, 죽음에서 일어나게 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3. 동정받는 인생에서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으로 일으켜 주신 예수님

예수님 만나기 전 이 여인의 인생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고 하면 동정받는 인생입니다. 남편이 죽고 자식이 죽고 일가친척 이웃들로부터 동정받는 인생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장례 행렬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무더운 지방이라 당일에 장사를 지냅니다. 유대인의 장례식은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온 동네 행사가 됩니다. 장례에 참여하고 도와주는 것을 되돌려 받지 않으니까 가장 큰 선행으로 생각했습니다. 동네에서 장례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동네 사람들이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장례 때에는 피리 부는 자와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은 상여 앞에 가며 곡을 하고 또 상여 뒤에는 곡을 하는 사람들이 뒤를 따르며 울고, 조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들은 동정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렇게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어."라고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안타까워했겠습니까? 이제 자식이 죽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아는 사람마다 혀를 찼을 것입니다. "참 안되었다." "참 불쌍하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은 예수님 만나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아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이제 동정의 눈빛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부담스러운 대상이 아닙니다.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을 목격하신 것입니다. 큰 선지자가 일어난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녀는 이제 동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가정을 볼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가정을 볼 때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녀를 볼 때 큰 선지자가 자신들 가운데 일어난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본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그 절망스러운 가정 죽음의 행렬로 이어지는 가정에 임한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사방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볼 때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삶의 진보와 우리 삶의 기적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동정받는 사건을 영원히 동정받는 사건으로, 동정받는 환경을 영원히 동정받는 환경으로 동정받는 기업을 영원히 동정받는 기업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힘이 없고 실패하고 연약하면 사람들은 동정의 말로 무시합니다. 우리는 동정적 환경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 반전시키고 역전시켜야 합니다. 주님 만나면 절망적인 사건과 환경도 하나님의 큰 영광은 더욱 드러낼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삼손이 인생을 보십시오. 눈이 빼임 당하고 쇠사슬에 매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습니다. 그의 젊은 날은 부모에게 짐 덩어리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잘못 사용하였습니다. 동정받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끝 지점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삿16:28)" 하나님은 마지막에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16:30)"

성경에 보면 안나라는 여인을 보십시오. 출가한 지 일곱 해에 남편이 돌아가셨습니다. 짐 덩어리 같은 인생입니다. 동정받는 인생입니다. 84년 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고 금식 기도하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린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었습니다(눅 2:36-38). 짐 덩어리 같은 인생, 남의 동정만 받던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는 데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예수님 만나면 영광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에게 짐스러운 상황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오히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지옥 같은 집을 천국으로 바꿔 주신 예수님의 소문을 내는 인생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대지(大地)'의 작가 펄 벅 여사가 자폐증을 앓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차라리 이 아이가 죽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거듭 외친 적도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절망적인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의 삶과 죽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고통으로 위대한 작품이 나왔습니다. 진주는 보석입니다. 그러나 진주를 품고 있는 조개는 그것은 아픔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 아픔을 통해 진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동정의 행렬을 영광의 행렬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에 놓여 있는 수많은 고통과 문제, 장애 안에는 그만큼, 아니면 그보다 더 큰 이익이나 기회가 숨어 있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고난은 겸손하게 하고 고난은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줍니다. 몸의 열은 괴로움을 주지만 건강을 위한 희망입니다.

우리나라 강원도 태백 산골짜기에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를 세운 분은 아처 토레이 목사님입니다. 그의 아버지 루벤 토레이는 중국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1945년 중국 내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트럭을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병원에 와 보니 중상이어서 오른팔을 잘라 내야 했답니다. 그런 절망적 고통의 현실에서도 토레이 목사님은 원망하지 않았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두 팔을 주셔서 잘 살았는데, 이제 한쪽 팔을 가져가시니 감사합니다." 중국이 공산화됨으로 그는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1952년 한국에서 사역하기 위해 돌아오자 그는 6.25 전쟁 이후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을 수없이 많음을 목격하였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 팔이 없도록 하신 것이 한국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답니다. 그는 팔이 없는 사람들의 괴로움과 불편함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토레이 목사님은 의수, 의족 만드는 기술을 익혀서 서울, 청주, 대구에 재활 센터를 세우고 팔다리가 없어진 군인들과 사람들에게 팔(의수)과 다리(의족)를 만들어 주었답니다. 덴마크의 세계적인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쓰여 지는 동화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동화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입니다. 인생을 단편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의 죽음, 아들의 죽음 그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더 나은 삶을 통해 우리의 아픔과 실패를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님은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7)"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 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린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볼 때까지"

 

죽은 남편과 아들로 절망하는 과부를 찾아가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을 만나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 동정받는 인생에서 영광으로 드러내는 인생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사람은 넘어지고 쓰러지면 도망하고 피하지만 우리 주님은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손을 내미십니다. 절망의 행렬에서 소망의 행렬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동정받는 행렬에서 영광을 드러내는 행렬로 소문난 인생으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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