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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화평 예수 그리스도(엡2:11-2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55 추천수:0 220.120.123.244
2020-09-20 14:56:39

우리의 화평 예수 그리스도

엡2:11-22

 

요즈음은 대부분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데 우리 성도님들 스마트폰에 몇 명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습니까? 제가 설교 준비하면서 제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보니까 1183명이었습니다. 아마 한 번쯤 전화했기 때문에 저장된 번호일 것입니다. 이 중에서 1년에 12번 이상 전화를 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우리 성도님들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전화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어려울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진짜 도와줄 친구는 몇 명이나 될까요? 불길 속에서 가족 빼고 마지막 전화를 하고 싶은 친구는 몇이나 됩니까?

 

옥스퍼드대학의 진화인류학 교수인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한 사람이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최대 150명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던바 넘버(dunbar's number)라고 합니다. 그에 의하면 신석기 시대 수렵·채집 공동체 인구수는 15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던바가 인구 기록을 구할 수 있는 20개 원주민 부족의 규모를 확인했더니 인구수가 평균 153명이었다고 합니다. 던바의 고향인 전통적 영국 시골 마을의 평균 인구수 역시 공교롭게도 150명이었답니다. 그에 의하면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의 수가 그 정도이고 그 중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진짜 친구’의 수는 5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친한 친구’ 15명 정도, ‘좋은 친구’ 35명 정도, ‘그냥 친구’는 150명 정도, ‘아는 사람’ 500명 정도, ‘알 수도 있는 사람’ 15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옥스퍼드 대학 연구팀은 3500만 명의 60억 건의 전화 통화 기록을 분석해 본 결과 평균 4명이 매우 친한 친구였고, 11명이 친한 친구, 30명이 그럭저럭 친한 사람, 129명이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한국의 조사 결과도 비슷합니다. 한 가지 소개하면 'friday' 섹션이 20~60대 성인 남녀 1038명을 조사한 결과, 친한 친구는 5명 이하(69.4%)였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설령 내가 나쁜 짓을 했을 지라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주어 나를 도와 줄 정말 친한 친구가 몇이나 됩니까?

 

사람은 세상에 살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장수하는 비결 중의 하나가 바로 좋은 친구를 가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돈독한 우정이 정신건강은 물론 신체적 건강, 경제적 풍요, 인생의 행복 그리고 생존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미국 미시간대학의 심리학자인 윌리엄 챱픽 (William Chopik)은 100개국 27만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았답니다. 결론은 가족과 친구 관계에서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좀 더 건강하고 높은 행복을 유지하더라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가 있는 사람이 병에 덜 걸리고 잠도 더 잘 자고,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나 자녀교육을 잘시키는 것이나 사회적 성공도, 경제적인 부도 친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좋은 친구와 평생 같이 어울리며 사는 것 참 중요합니다.

 

1. 우리가 어떻게 진정한 화평을 누리며 서로 도와주고 위로해주고 세워주는 친구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화평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4가지 조건에 의해 친해지고 친구가 된다고 합니다.

첫째가 근접(proximity)입니다. 사람들은 먼 곳에 있는 사람보다 가까운 데 있는 사람과 친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주 만나면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자주 만나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사성(simlarity)입니다. 사람은 비슷한 사람끼리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을 한 방에 살게 하고 서로 친해지는 것을 조사해 보니 비슷한 사람끼리 친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성격, 기질,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 학교 동문, 같은 지역 출신 등이 더욱 친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셋째가 보상(rewardingness)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곳에 살며 늘 접촉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항상 나에게 친절히 대해 준다든지 칭찬의 말을 던져 준다든지, 도와준다든지 또는 어떤 다른 모양으로 보상을 주면 우리는 그런 상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가 외모(physical attractivess)입니다. 성격이나 지능보다 상대의 용모에 따라 친해진다는 것입니다. 대학생들 남녀에게 댄스파티를 열게 하고 다시 데이트를 하는가를 조사해 보았답니다. 그런데 외모가 가장 많은 영향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후광 효과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가지 좋은 점을 가지고 모든 것을 좋게 보는 것이 후광 효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화평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얼마든지 친한 친구도 한평생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되지 못하고 원수가 되고,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고 분열되어 원수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막힌 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는 막힌 담들이 있어 그것을 폭파하지 못하기 때문에 친구가 되지 못하고 원수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서로 두 진영으로 나누어 상대를 죽이여 자신이 이익을 보고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기록된 당시 막힌 담은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의 담이었습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때란 그리스도께서 막힌 담을 허시기 전을 말합니다. 그 담은 무엇입니까? 할례라는 담입니다. 할례받은 무리는 유대인이고,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방인입니다. 삶 속에서 이 할례라는 담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고정관념, 신분, 사상, 태어난 나라, 남녀, 재산, 지식, 지역 등 다양한 형태의 담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담(partition-wall)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이방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구분하고 그 담벽에는 '이방인으로서 이 담을 넘어오면 죽임을 당한다'라는 글을 써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이 담을 헐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부술 수 없었던 거대하고 견고한 담을 예수님이 헐러 버린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막힌 담, 인종과 인종의 막힌 담, 사람과 사람의 막힌 담, 지역과 지역의 막힌 담, 진보와 보수의 막힌 담, 이데올로기의 담, 신분의 담, 남녀의 막힌 담,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막힌 담, 자유인과 노예의 막힌 담,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의 화평이 되신 예수님을 구제주로 믿으면 얼마든지 영남사람과 호남 사람이 5명 안에 드는 친구가 될 수 있고 진보와 보수가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2.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님이 무엇으로 막힌 담을 헐러 버렸습니까?

오늘 성경은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육체로 헐어 버렸습니다(14).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어 헐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담은 결국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진노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공중권세 잡을 자를 따르고, 세상 풍조를 따르고, 욕심에 다라 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끼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화목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둘째는 계명의 율법을 폐지해 버렸습니다.(15上)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헬라인들은 헬라인대로 그들의 법조문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즉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화목제물이 됨으로 죄를 지으면 용서받는 제사법을 폐지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다시 죄의 댓가로 치르는 동물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의식상의 법을 폐하였습니다. 정결 부정에 관한 규정들 구약 제사제도 등을 폐하였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예수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하나가 되게 한 것입니다.

 

셋째는 십자가를 통해 원수된 것을 소멸해 버렸습니다(16)

십자가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갈3: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니라." 하나님 앞에서 불평등은 폐지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연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허물어 버린 담을 동종의식으로, 잘못되면 패거리 의식, 지역주의를 만들어 서로 싸웁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된 선민의식, 국수주의, 그릇된 민족주의, 혈통 우월주의, 인종주의를 만들어 담을 쌓고 갈등하고 분열하여 다툼과 전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패권주의 군국주의가 되어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피해를 줍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속에서 종교가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정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론을 보면 코로나 19로 어려운 이때에서 정치인들은 하루도 정쟁을 그치는 날이 없습니다. 모장관의 아들 휴가를 놓고 끝없는 정쟁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조선시대의 정치는 의리와 명분, 이념에 목숨을 건 끝없은 정쟁이었고 결국 나라는 일본에 의해 망했습니다. 오늘날 정치인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진영대결을 부추기고 신문 1면을 보면 날마다 싸우는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교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교회 내에서도 진보와 보수로 진영이 갈라져 진정한 친구가 되어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싸우는 것을 봅니다. 언론은 계속 싸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갈등관리 비용만 매년 240조나 들어간다고 합니다. 지금 4차 추경 7조 8천억 중 1조쯤 되는 돈으로 통신비를 지급할 것인가 무료 예방접종을 해 줄 것인가 싸우고 있는데 240조면 얼마나 갈등 비용이 얼마나 큰 비용입니까? 인류가 예수님이 이미 헐어버린 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담을 쌓으며 치루는 비용이 얼마나 큽니까? 1, 2차 대전으로 지불한 고비용말고도 지금 군비 경쟁을 하며 갈등과 불신으로 치루는 비용은 천문학적 비용입니다. 개인도 이미 주님이 헐어버린 담을 스스로 더 견고히 쌓으며 치루는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어갑니까?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병들어가 고 있고 죽어가고 있습니까? 지난 주 신문을 보니까 어떤 주부가 분노로 차를 몰고 가계로 돌진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미 모든 막힌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화평이 된신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헐어 버렸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용서해 주지 못하는 문건 폐지해 버렸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원수된 것을 소멸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미 끝내 버린 것을 가지고 계속 신앙인은 다시 담을 쌓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3. 우리의 화평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힌 담을 허심으로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 가지 결과를 말씀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13)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던바가 말한 알 수도 있는 사람 1500명 정도가 아닙니다. 아는 사람 500명 정도가 아닙니다. 그냥 친구 150명 정도가 아닙니다. 좋은 친구 35명, 친한 친구 15명 정도가 아니라 가족처럼 가까이하는 진짜 친구 5명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습니다(18)

우리 사이의 모든 적대감을 십자가를 통하여 죽으심으로서 새롭게 연합된 인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지고,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은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 고백을 할 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에게 국가가 아닌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 공동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민족이나, 피부나, 신분이나, 학력이나, 외모나, 경제의 정도에 관계 없이 함께 우리의 화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주 가까워지고 함께 천국을 향해 가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통해 화평케 된 교회 공동체에서 가까운 친구도 평생 살다 영원한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4.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화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화평케 해 주었으니까 이런 형태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야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담을 헐어버림으로 이제는 유대인, 헬라인이라고 칭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친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같이 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친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이런 공동체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냥 미국 사람, 한국 사람, 일본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하나님의 시민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자유자나 종이나 이방이나 헬라인이나 하나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화목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것이 화목하게 되었고 인간까지 원수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다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외인, 손이었습니다. 외인이라는 말은 헬라어 크세노스는 12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본질이 어떤 것에 비교해서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되 본질이 전혀 다른 인간입니다. 살아 있는 것같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사단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낮선 사람 외국인을 말합니다. 집안에 당당히 사는 사람이 아니고, 집 곁, 집주변에서 서성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살기는 살되 아무런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의무만 있지 아무런 특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마치 미국의 영주권 가진 사람처럼 정치적 참여권, 투표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치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 3:15)"

진리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17:7).

 

우리는 진리를 드러내 놓고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와 함께 살고 진리와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통하여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로 교제하며 진리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진리를 떠난 친구는 친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4)”라고 말씀했는데 말라기서에 보면 진리를 떠나 하나님이 받을 만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시대 교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기 보다는 종교적 출세주의, 물량주의, 화려한 공연주의라는 담을 쌓고 있지 않았나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중세 교회가 그러다 무너졌습니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말씀에서 이탈하는 곳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사람의 머리를 만족시켜 주는데도, 사람의 감정을 만족스럽게 하여 주는데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에 합치하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친구가 된다고 해서 교회가 세속주의적 친교 단체기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친한 친구입니다. 배는 물 위에서 떠 가는 것입니다. 물을 떠나서는 배는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배 속에 침수하여 들어오면 그 배는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 세상의 세속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결국, 교회는 교회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되고 침몰하고 맙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 사는 친한 친구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천국이란 어떤 곳입니까? 죽음도 죄도, 슬픔도 눈물도 없는 곳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천국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땅의 삶이란 가난도, 병도, 고통도 눈물도 죽음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우리는 천국적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영적 치유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배드림으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기도함으로 질병에서 치유되는 역사를 체험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배움으로 참 자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신 걱정이 물러갑니다. 증오와 미움이 변하여 용서와 화평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때, 말씀을 배울 때, 찬양할 때, 기도할 때, 봉사할 때, 전도하며 친교할 때 삶이 치유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능력을 체험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막 11:17) 이런 것을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화평케 하시기 위애 화목제물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드림으로 탄생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가족으로 살아야 가야 합니다.(19下)

우리는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계급공동체가 아닙니다. 이익공동체도 아닙니다.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참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끼리 형제라고 부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신분이 상승한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통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중세 교회는 가족보다는 구조, 제도, 조직으로 교회 생활을 하다 망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가문에 권속"이라고 말씀합니다. 권속(오이케이오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특별한 관계, 생명, 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법률적 관계를 넘어서서 생명적이고 살아있는 피의 관계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일3:2)"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롬9:26)" 이 사실을 믿습니까? 아들이란 대단한 특권이며 유업을 받을 자입니다.

우리가 한 가족이 되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교회가 가족같아야 한다는 말은 가족같은 친밀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가정같이 포근해야 합니다. 가족처럼, 한 식구처럼 한 시대를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도와주고 기도해 주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보십시오(행2:42-47).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통용합니다. 서로 필요를 나눕니다. 말씀을 통하여 교훈받고 그 교훈에 따라 삶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가족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건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체는 다릅니다. 자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는 책임이 따르고 거래 관계가 아니라 생명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유기적 생명체입니다. 비록 성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재력도 다르지만, 교회의 영적 용광로에 들어와 영적 한 가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가족은 서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 교회의 대표적 특징 중의 하나가 책임감의 상실입니다. 수시로 교회를 옮깁니다. 조금만 감정적으로 충돌되면 바꾸어 버립니다. 문제가 있다고 가족을 버리는 것 아닙니다. 서로의 단점을 받아주고 세워주고 존경해주고 용서해주고 격려해 주면서 사는 것이 가족입니다.

천국같은 가정일 수도 있지만 지옥같은 가정일 수도 세상같은 가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가정이든 분명한 것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입니다. 피의 관계를 그 무엇으로도 단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책임을 지고 돌보아야 할 관계입니다. 연약한 교인들 보면서 실망하거나 비난할 필요없습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눈으로 교회 식구들을 보아야 합니다. 심한 정신병자 아내를 둔 사람이 있었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과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아내 자랑을 해보자고 제안하였답니다. 이것은 정신병자 아내를 둔 친구를 놀리기 위한 것이었답니다. 사람들 농담을 섞어가면서 자신의 아내를 자랑하였답니다. "내 아내는 절세 미인이야." "내 아내가 우리 가정에 들어온 후 가정이 화목하게 되고 화기에애하게 되었어." "내 아내는 내 마음이 녹을 정도로 나를 사랑해." 각자 차례대로 이야기를 마치자 정신병자 아내를 둔 사람만 남게되었답니다. 모든 친구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저 사람은 과연 무슨 말로 아내 자랑을 할까?라고 궁금해 하면서 집중되었답니다. 그러나 정작 불행한 아내를 둔 그는 활기있는 얼굴로 대답하였답니다. "나는 감사가 넘친다네. 자네들이 아는 바대로 내 아내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 없지. 그러나 나의 큰 행복은 이런 아내로 인해 내가 기도의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네. 만약 내 가정에 고통이 없고 화평하기만 했다면 기도와 신앙이 지금같이 뜨겁지 않았을 거라네. 그렇지만 나는 불행한 아내로 인해 항상 기도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막힌 담을 헐어 버리고 우리의 화평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가족이 되었으니 서로 연약한 부분을 감당하는 책임을 가진 식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교회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금은 불완전하여도 서로 가족같이 섬기고 사랑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져야 합니다(20-22).

19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화평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이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이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그 성도들이 모여 무엇을 이룹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성전을 만들어 갑니다. 그 성전의 기초는 누구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성도의 모임이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성전의 기초는 이제 모리아 산이 아닙니다. 기초(20)는 사도들 선지자들의 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들의 교훈을 말합니다. "(고전3:11)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그들이 가르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교훈을 기초로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모퉁이돌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통해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은 교회의 주인은 삼위 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건물이 되어 서로 연결하여 우주적인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어져 간다(21)는 말은 한 번 짓고 끝난다는 말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지어저 간다는 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구속의 역사가 계속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성도들 속에 역사하시므로, 성자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성전의 모퉁이 돌로, 성부는 성도들로 구성된 성전에 거하시는 분으로 교회의 주인이 되어 교회를 이루어 가십니다.

혹시 물질이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지 않았나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중세 교회는 성직자가 교회의 주인 행세를 했습니다. 다 흘러가는 나그네에 불과한데 주인 행세하다 교회가 어려워졌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하여 주인의식은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갈등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자기 소유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업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이익집단도 아니고 사기업도 아닙니다. 목사가 회장도 사장도 아니고 장로가 이사도 아니고 교인이 주주도 아닙니다.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값으로 세운 이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딤전 1:17)"

교회는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다 불완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교회입니다. 그 성전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21절 22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일치와 성장(21)이 이루어 집니다. 새성전의 목적(22)은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모인 교회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교회를 세우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이루어가야 합니다.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세상을 교회처럼 만들어내야할 사명감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교회 다니면서 교인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같이 살 하나님 나라 백성, 한 가족, 같이 성전을 지어가야 할 성도로 좋은 친구로 생각해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

 

함석헌 선생님은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시를 통해 친구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대는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양보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리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 '아니오'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고/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를 화목제물로 드림으로, 원수된 것을 다 소멸하시고 막힌 담을 헐어 버린 예수님께서 우리가 좋은 친구로 성도로 동일한 시민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살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여러 조건이 맞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님 때문에 좋은 친구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도시에서 부유한 한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의 재산을 물려 줄 상속자가 없었답니다. 아내도 자식도 없었답니다. 그는 죽기 전 변호사에게 자신이 죽으면 새벽 4시에 장례를 치러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리고 유서 한 통을 남기고는 장례식이 끝나면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뜯어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새벽 4시에 치러진 장례식에는 그 많은 사람 중에 불과 네 사람만 참석하였답니다.

고인에게는 많은 친구와 지인들이 있었지만 이미 죽은 친구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정말 귀찮고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 4시에 달려와 준 네 사람은 진정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장례식을 경건하게 치렀답니다. 드디어 변호사는 유서를 뜯어 읽었답니다. "나의 전 재산 40만 달러를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유서의 내용이었답니다. 만약 나의 장례식이 새벽 4시에 치러진다면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부 명단 중 과연 몇 명이나 올까요? 우리의 화평이 되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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