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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을 열어두고 계신 예수님(요한계시록3:7-1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874 추천수:5 220.120.123.244
2020-08-16 09:19:46

교회문을 열어두고 계신 예수님

요한계시록3:7-13

 

어제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빼앗긴 주권을 다시 찾은 날을 기념하는 제 75주년 광복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는 데는 외국의 도움과 나라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 중 미국인으로 우광복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인으로 인천에서 태어났는데 우리나라의 해방을 바라고 아버지가 광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윌리엄 선교사(한국명 우리암)인데 한국 선교사로 와 1906년 공주에 영원한 광명이란 뜻으로 “영명학교”를 설립하신 분입니다. 이 학교는 유관순열사와 같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학교입니다. 윌리암 선교사는 인천에서 1907년 첫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을 한국의 광복을 기원하며 우광복이라고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올리브라는 딸을 또 낳았는데 11살에 풍토병에 걸려 죽어 영명동산에 묻었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에 항거하다 추방당하기도 했답니다. 우광복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한국에서 다녔고 그 후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여 의사가 되어 해군 중령 군의관으로 그의 이름처럼 광복과 함께 한국에 다시 왔다고 합니다. 해방이 되어 하지 장군은 미군정 책임자로 24군단 1만명을 이끌고 한국에 왔는데 그 병사 중에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미군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우광복은 인천에서 태어나 14살까지 공주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답니다. 하지 장군은 자기 부대원은 아니었지만 그를 육군 보좌관으로 특채했답니다. 그래서 우광복은 하지의 참모가 되어 정부수립에 관여하였는데 그 때 하지는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답니다. 하지 장군의 부탁을 받고 우광복은 어머니와 상의하여 50명을 추천해 주었는데 그중 48명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부 수립할 때 요소요소에 기독교인들이 들어가서 나라를 세웠고, 문교부 장관에 기독교인이 되어 미신 타파를 시작했고, 국방부장관이 기독교인이 되어 군대 안에 군목제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작은 수였지만 한국 교회는 일제 시대 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민족의 고난을 대신 지고 국민을 계몽시키는 교육과 백성의 삶을 윤택게 하는 의료 선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에 의해 많은 학교와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해방되면서 신앙의 지도자들이 많이 나와 활동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로였고 김구 선생님도 기독교인이었고 건국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여운영 선생님도 신학을 공부한 전도사였고 건국 준비위원회 지방 위원들은 대부분 목사나 장로가 할 정도였답니다.

장로인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제헌 국회에도 다수의 국회의원이 기독교인이어서 첫 국회를 열 때 기도로 시작을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기도로 국회를 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 개회 때 임시의장인 이승만은 단상에 올라가 사회봉을 잡고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개회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일동 기립한 가운데 이윤영 의원(목사)가 기도하였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誠心)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 만방에 정시(呈示)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塗炭)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福樂)과 아울러 세계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無力)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 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 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아멘."

 

1945년 해방 당시 우리 나라 신앙인은 30만 명에 불과했지만 20년만에 5백만이 되고, 30년 만에 1천만 성도가 되었습니다. 인구 성장에 비하면 엄청한 부흥의 역사입니다. 1949년 인구가 2018만이었는데 2004년에는 4820만이 되었으니 인구 성장은 약 2배쯤 성장했는데 기독교의 성장은 33배의 성장입니다. 총인구의 20%가 기독교인이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큰 50개의 교회들 중에 23개가 한국에 있게 되었습니다. 6.25로 온 나라가 초토화되었는데 그야말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2019년 한국교회 선교사 171개국에 2만8,039명을 보내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쥐를 잡아 먹어야 했던 가난한 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3만 2천 달러가 되었고 경제 규모가 1조 6천 421억 8천만 달러로 세계 10위로 진입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다른 신생 독립 국가에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이념대결, 동족상잔의 비극과 남북분단의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8·15 광복, 6·25전쟁, 4·19의거, 5·16쿠데타, 유신체제 발동, 10·26, 12·12사태, 5·18 광주민주화항쟁, 대통령 탄핵 등 프랑스 혁명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잇달아 터졌습니다. 어려운 가운데도 우리 민족은 지난 75년 간 식민지잔재 청산, 동족상잔과 분단, 독재, 부정부패, 가난 등의 문제를 풀기 위해 온 힘을 쏟았습니다. 잘 살아 보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하였습니다.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1953년 13억 달러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액(GDP)은 지금은 1조 6천421억 달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재기와 성장에는 정신적 동력을 부여해 준 교회와 교인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이 사실은 단순한 주장이나 견해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를 사실적으로 정직하게 보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 우리 교회의 모습, 신앙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제 신문을 보니까 이런 제목이 있습니다. “사랑제일, 우리제일…수도권 덮친 '교회발 코로나' 공포”, “서울 코로나 폭증 위기 '최고조'…교회발 '집단감염'에 집회까지 ...” 드러난 일부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이념적으로 나누어진 정치의 도구가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평화의 복음으로 양진영을 품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 서다 보니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코로나 19를 감염시키는 광신적 반사회적 집단으로 기사화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조그마한 문제만 발생하면 언론은 가차 없이 가시가 돋친 제목을 잡아 기사화하며 국민의 마음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는 몰염치한 집단. 교회세습과 성추행을 하는 비도덕적 집단, 포과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비지성적 비문명적 집단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교회는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고 국민 안녕과 행복에 저해가 된다는 의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믿을 수 없는 곳이 아니라 교회에 가면 안전하고 어려울수록 교회에 나와 위로와 평안을 얻고 소망을 얻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코로나 상황에서도 교회는 감염 청정지역이 될 수 있도록 매사 조심하고 방역수칙을 잘 지켜 가족과 이웃을 보호해야 합니다. 다 믿을 수 없어도 교회만은 믿을 수 있는 안전한 곳이 되도록 교회 구성원들이 노력해야 합니다. 사단은 시대마다 핍박과 유혹을 통해 교회의 문을 닫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권세, 세상은 결코 교회의 문을 닫게 할 수 없습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역사속에서 교회의 문은 그 누구도 답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열어놓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 문을 열고 계시는 예수 그리도를 믿는 우리 신앙인들은 이 시대에 어떤 교회를 만들고 어떤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계시록 2장과 3장에 7교회가 나오는데 그 중 칭찬만 받은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은 형제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Φιλαδέφεια)라는 뜻은 헬라어 “필로스(φίλος 사랑)”와 “아델포스(ἀδελφός 형제)라는 말의 합성어로 ”형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칭찬만 한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하여 몇 가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작은 능력이지만 말씀을 지키는 교회와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교회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신 주님께서 빌라델비아의 어떤 점을 칭찬하고 있습니까? 8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이 네 행위를 알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겉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으로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타인을 속이고 자신을 속일 수 있지만 예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이 무엇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빌라델비아 교회와 교인들의 행위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행위입니까? 작은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작다는 것은 아주 작다는 말입니다. 보잘 것 없다는 것입니다. 교인의 수가 아주 작고, 재정적으로 아주 작고, 영향력도 아주 작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당시 화려한 궁전, 어마어마한 신전에 비하면 세상적으로 볼품없는 초라한 교회입니다. 당시 빌라델비아 도시는 로마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시아로 통하는 관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평원 한 끝에 위치한 비옥한 땅이어서 유명한 포도주 생산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호신이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술과 환락을 즐기는 쾌락의 도시였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지배하는 식민지이기 때문에 황제 숭배를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일본이 교회와 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얼마나 많은 교회가 핍박을 받았습니까? 이런 때 진짜 말씀대로 살면 불이익을 받는데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당시에는 지금의 노동 조합같은 길드 조직이 있었습니다. 그 길드에 가입하고 그들이 섬기는 신전에 가서 신전 제사를 드리고 타락한 문화에 어울려야 장사하여 부자가 될 수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합니다. 그런 때 누가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그리고 9절에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ad70년 디도 장군에 의해 유대가 망하니까 유대인들이 소아시아 흩어져 회당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 회당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탄의 회당 곧 자치 유대인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은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고 추방하고 황제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로마 권력에 고발하여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에 소수이지만 나온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도 적고, 돈도 없고 영향력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세상과 비교할 때 너무나 미미한 능력, 초라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극히 작고 작은 능력으로 무엇을 했다는 것입니까? 내 말을 지키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로마 황제 숭배, 유대인의 종교적 핍박, 길드라는 조직에 가입하지 않음으로 당하는 불이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에게 동화되지도 않고 그들에게 굴복하지도 않고 인내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어떤 불이익과 어려움과 고난과 핍박이 있어도 끝까지 말씀 붙들고 견디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10절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10절 전반절만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 즉”이라고 말씀을 소개할 때 나의 인내의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을 때(마4:4,,7,10) 말씀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고난과 멸시와 천대를 받을 때도(막9:12),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알고도(마26:24), 감란산에서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죽음의 문전에서도(눅22:37; 마26:39) 인내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가 작은 능력이지만 말씀을 끝까지 지키며 인내하며 버텼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해도 말씀을 잃어 버린 교회는 역사 속에 그 교회에 말씀이 살아짐과 동시에 살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대단한 힘을 가진 세상에서 말씀지키며 인내하며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말씀대로 직장생활하고 말씀대로 사업하고, 말씀대로 사회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그러나 끝까지 말씀 붙들고 인내하며 버텨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말씀 듣기를 싫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공학을 가르치고, 처세술을 가르치며, 부담 없이 귀를 즐겁게 하며. 이익과 편리, 즐거움을 주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데 십자가의 지고 가라고 하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으라고 하면 부담없은 교회로 교회를 옮겨 버립니다. 가나안 교인 안나가 교인이 되어 버립니다. 조금만 거슬리는 말만 들어도 귀를 닫아 버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1-27)”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내 말을 지키었다는 의미는 9절 말씀과 연관을 지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그들을 괴롭혔던 유대인 중 몇을 네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온다는 것입니다. 네 발 앞에서 절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사랑하는 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8절을 보면 더욱 확실하게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열린문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 했습니다(요10:1-2). 구원의 문이신 에수님 자신을 말씀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문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복음 전도의 문”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고후 2:12).

고린도전서 16장 8,9절에서도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7,28절에서도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의 문을 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히 닫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핵심가치를 복음 전도로 삼고 사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을 예수님께서 열어 놓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며 위로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이 지킨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전도하기가 정말 힘든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마지막 부탁하신 전도의 말씀을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교통의 중심지에서 작은 교회이지만 전도의 사명, 선교의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까지 강조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마지막은 어떻게 끝납니까?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제자 삼는 사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권세를 주었고 이 권세를 가지고 이 사명을 완수할 수있도록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유언의 말씀으로 남긴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입니다. 죄로 얼룩진 이 땅이 아직 멸망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받을 수가 차기까지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수가 완성되면 인류의 종말이 오는 것입니다. 실제 역사 속에서 복음을 유일하게 지키며 전한 빌라델비아 교회는 1차대전때까지 남아서 복음을 전하다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로 떠났다고 합니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의 영광이 떠났는데도 마지막까지 그 교회를 하나님은 사용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아무리 미미하다고 해도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쓰임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핵심가치가 있습니다. 돈이 핵심가치인 사람이 있고, 권력이, 쾌락이, 건강이, 명예가, 지식이 핵심가치인 사람이 있습니다. 일평생 그것 붙들고 살아갑니다. 우리 신앙인과 교회의 핵심 가치는 복음 전도입니다. 정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교클럽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재림하신다는 사실, 이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한 죄와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전하는 복음을 핵심가치고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을 가지고 평생 이 가치를 붙들고 사는 교회,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칭찬만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는 바로 이런 교회, 이런 신앙인이었습니다.

 

2. 우리는 작은 능력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교회와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무엇을 알았다고 말씀합니까?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가에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신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천국과 지옥이 있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가는가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의 문제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는가에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사탄은 세상적인 힘을 통하여 끝없이 이 신앙 고백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 숭배를 강요하며 황제가 주라고 말합니다. 황제가 먹을 것을 주고 집을 주고 행복을 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북한은 김일성 삼대가 구세주라고 고백을 해야 잘 산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자들과 자본주의 자들은 돈이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다른 것같지만 결국 바닥을 보면 자본이 돈이 물질이 주인이고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자들은 인간이 주인이고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과학주의 자들은 과학이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과학에 모든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황제 숭배를 해야, 길드조직에 들어가 그들과 어울려야, 유대교와 야합하고 그들의 사상을 받아들여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9절을 통해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단이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들의 가장 큰 거짓말을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양보하면 그들과 함께 사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으니까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아브라함의 후예가 아니라고 회당에서 쫓아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면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권력자에게 밀고당하여 어려움도 당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만 부인하면 적당히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그들의 힘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많은 것같고 교인들은 많아지는 것같지만 점점 세상을 이 믿음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도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로 세상은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말세에 칭찬 받을 교회의 모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장차 온 세상에 임할 시험의 때를 말씀합니다. 성경은 큰 환란(7:14; 마24:21)의 때, 잡히고 칼에 죽임을 당하는 때(계13:10), 우상 경배를 강요하고 짐승의 이름이 쓰인 표를 사라고 강요하는 때(계13:17)가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는 전무후무한 큰 환란의 때가 있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 때 특징 중의 하나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24:5)”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24:9)”라고 했습니다.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를 알려 주고 있지 않지만 그 때가 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있으리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뽐내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감사할 줄도 모르고, 거룩하지도 않으며, 사랑이 없고, 용서하지 않고, 남을 헐뜯고, 자제하지 못하며, 사납고, 선한 것을 싫어하고, 배반하고, 조급하며, 거만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겉으로는 신앙심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능력은 거부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들과 같이 되지 마시오. 남의 집에 슬그머니 들어가서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여자들은 무거운 죄를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 항상 배우나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딤후3:1-7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은 이런 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 보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욱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과학문명이 아무리 발달된다고 해고 인류에게 종말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징조를 보고 대비하는 자에게 미래는 보장됩니다. 코로나 19, 홍수, 가뭄, 폭염, 지진, 태풍 등 잇따른 이상기후 현상이 지구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환경위기시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구 환경의 악화 정도를 시간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측정된 시각에 따라 0~3시는 ‘양호’, 3~6시는 ‘불안’, 6~9시는 ‘심각’, 9~12시는 ‘위험’ 수준이고 12시는 환경 파괴에 의한 지구 종말을 의미합니다. 2019년 전 세계를 기준으로 한 '세계 환경위기시각'은 9시 45분으로 위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근대 물리학과 천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이작 뉴턴은 2060년 세계 종말을 예언하였습니다.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는 <2050 거주불능 지구>라는 책에서 최신 연구 자료와 통계적 근거를 바탕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12가지 암울한 기후재난의 실제와 미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코로나 19를 비롯한 전염병은 시작에 불과하고 2도가 오르면 적도 지방의 주요 도시가 거주불능 지역으로 변화하며, 3도가 오르면 남부 유럽이 영구적인 가뭄에 돌입하고, 4도가 오르면 아프리카, 호주, 미국 등이 거주분능 지역으로 변화하며, 5도가 오르면 전 지구가 거주불능 지역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저널리스트 마크 라이너스는 <6도의 악몽>이라는 책에서 6도가 오르면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대멸종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저자는 "지구의 평균온도가 3도 이상 오르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가 되면 사람들이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구를 치료하는 법>이라는 책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느 곳에 연못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연못에 수련 한 포기가 돋았습니다. 이 수련은 참으로 이상한 수련으로 다음날에는 그 크기가 두 배로 커졌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다시 두 배로 커졌습니다. 하지만 연못 전체 크기로 보면 아주 작은 수련이었습니다. 그래서 연못의 주인은 수련이 조금씩 커지는 것올 보면서 '뭐, 커져봤자 얼마나 커지겠어. 연못의 절반쯤 커지면 그때 손을 써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수련이 등장하고 28일째 되는 날 수련이 연못의 절반을 덮었습니다. 다음 날에는 현재 양의 두 배가 될 터이므로 연못은 모두 수련으로 뒤덮이게 됩니다. 20일째가 되어도 수련이 연못을 덮은 면적은 전체의 0.2%에 불과했습니다. 25일째가 되어도 고작 6.4%입니다. 하지만 '그러니 괜찮겠지, 별일 없을 거야'한다면 28일째는 연못을 지키기 위한 시간이 단 하루 밖에 남지 않는 위급한 상황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임할 때도 사람들을 경고를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홍수가 임하였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도 어느날 문득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눅12:40)".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는 교회, 교인이 될 때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권력의 힘, 경제의 힘, 학문의 힘 등 아무리 강력한 힘이 예수님을 부인하게 한다할지라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을 끝까지 붙들고 예수님을 배반하시 않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우리는 작은 능력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말씀을 지키고 전하여 상급받는 교인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았던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까?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면류관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면류관 빼앗기기 않도록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 굳게 잡고 계속 살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8절에서 말씀한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작은 것같지만 그것이 상급을 주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 세상의 명예, 세상의 물질, 세상의 학문, 세상의 즐김이 천국에 가서 상급받는 도구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상급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하는 것이 상급받고 믿음으로 하는 것이 상급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습니까? 교회에 와서 휴지 하나 줍는 것도 말씀으로, 믿음으로 하면,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도 말씀과 믿음으로 하면 다 상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뭐 천국에 상급이 있느냐고 냉소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상급은 불공평이 아닙니다. 상급이 있어야 오히려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처럼 열심히 교회에 나와 봉사하고 헌신하며 구제하고 선교하며,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똑같다면 오히려 불공평한 하나님이시지요. 예수님 말씀합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10:41)”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분명히 상급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비유 설교를 통해 천국의 상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 보화 비유, 포도원 일꾼 비유, 달라트 비유, 열 므나 비유, 게으른 종 비유,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종의 비유, 열 처녀 비유, 문지기 비유, 혼인잔치 비유,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 부자와 나사로 비유 등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늘에서의 영광스런 승리와 상급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고난주간에 경륜장에서 사는 사람과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새벽 기도하는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순교의 현장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순교하는 사람과 현실적 삶을 위해 신앙을 접는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하늘나라 상급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요한 계시록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빌라데빌아 교회에서 무슨 보상을 해 주십니까? 무슨 상급을 약속하고 있습니까?

첫째 주신 것 가지고 끝까지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 상급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빼앗긴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훔쳐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면류관을 쓸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그 지위를 빼앗겼습니다. 사울은 왕위를 다윗에게 빼앗겼습니다. 셉나는 그 직위를 엘리아김에게 빼앗겼습니다. 아비아달은 그의 제사장직을사독에게 빼앗겼습니다. 유다는 사도의 반열을 맛디아에게 빼앗겼습니다. 유대인은 그 지위를 이방인에게 빼앗겼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천국의 상급이 있습니다.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고 시험을 참은 자들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계2:10)이 있습니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의의 면류관(딤후4:8)이 있습니다. 주의 양무리를 위하여 충성한 자들에게 주시는 영광의 면류관(벧전5:4)이 있습니다.

 

둘째는 작은 것 붙들고 살았지만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 주십니다.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빌라델비아 시는 지진이 많아 발생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AD17년에 대 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초토화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장기간에 걸쳐 되풀이 되는 미진이 이 사람들을 참을 수 없이 괴롭혔다고 합니다. 스트라보는 "진동은 매일 일어난다. 집안의 벽에 커다란 틈이 생겼다. 이 도시의 한 쪽이 다 부서졌는데 나머지 부분까지 마져 부서져 가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도시밖에 오막사리에서 살면서 시내에 들어갔다가 혹시 떨어지는 돌이나 바위에 맞아 죽을까 보아 들어가기 조차 두려워했다. 그 시내에 아직도 남아 있겠다는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향하여 그들을 무더지지 않는 성전 기둥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다기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성전 기둥에 하나님의 이름,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예수님의 새이름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전하게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지진에 무너지는 건물처럼 그렇게도 화려하고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처럼 쌓아 올리는 바벨탑의 문명은 다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이 땅의 쌓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말씀 따라 살며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들은 별 화려한 것 쌓은 것 같지 않고 어찌 보면 참 미련하고 초라하고 무식하게 사는 것같지만 그날이 되면 성전의 기둥처럼 될 날 이 올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십니다.

9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를 괴롭힌 자들이, 우리를 대적한 자들이, 우리를 조롱한 자들이, 우리를 멸시한 자들이,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자들이, 우리가 전도한 자들이 옵니다. 우리 발 앞에 절합니다. 항복하는 것이고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고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을 알게 됩니다.

이 약속을 해 주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7절을 보십시오.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권력가진 황제들처럼 더러운 인간이 아닙니다. 권모술수를 써서 이용하는 분이 아닙니다. 진실하신 분입니다. 당시 황제나 유대인이나 길드 조직원처럼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거짓이 없고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 꼭지키시는 분입니다. 황제가 대단한 힘을 가진 것같지만 어떤 힘도 그 힘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면류관 주시겠다고,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주시겠다고, 사랑받고 있는 사람으로 증명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신앙인과 교회는 세상의 힘 앞에 참으로 미약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문을 열어 놓고 작은 힘이 지만 그것을 통해 말씀과 믿음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오늘날도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 교회도, 한국 교회도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쓰임받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 갈 때 8절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8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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