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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요한계시록1:9-2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12 추천수:0 220.120.123.244
2020-08-09 10:08:12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

요한계시록1:9-20

 

1. 교회는 좋은 곳

지난 주 친한 목사님께서 저에게 “할머니만 좋은데 가요?”라는 글을 보내 왔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 주일학교 예배를 지난 3월부터 7월 초까지 현장예배를 드리지 못했답니다. 일부 아이들이 부모들과 함께 주일예배에 참석했지만 부모님이 믿지 않는 아이들은 혹시라도 교회에 가서 코로나에 감염되는 것을 우려해 보내지 않았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명예권사님은 코로나 이전에는 손자, 손녀를 데리고 주일날 교회에 오셨는데, 코로나가 터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혼자 주일예배에 참석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 권사님은 손자 손녀를 집에 두고 교회에 가기 위해 혼자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유치부에 다니는 손자가 할머니에게 대뜸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할머니만 좋은 데 가요?” 유치부에 다니는 아주 어린 아이이지만, 그의 마음에는 ‘교회가 좋은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교회는 어떤 곳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는 좋은 곳입니다. 교회는 영혼을 살리는 곳입니다. 교회는 인생을 새롭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좋은 곳입니다. 교회는 가정을 행복하게 하는 좋은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좋은 곳입니다. 교회는 부패한 세상을 정화시키고 살리는 좋은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통해 영이 살아나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드리는 좋은 곳입니다. 교회는 죄많은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회개하고 용서받는 좋은 곳입니다. 교회는 홀로 살기에 힘들고 지치는 세상에서 힘겨운 문제를 가지고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여 위로받고 응답받는 좋은 곳입니다. 교회는 각종 복잡한 사상이 난무한 세상에서 설교를 통해 진리의 말씀을 듣고 기준을 잡는 좋은 곳입니다. 교회는 사심없이 서로 봉사하고 사랑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며 섬기는 좋은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만나 한평생 행복하게 사는 세상의 어는 곳보다 좋은 곳입니다.

 

2. 교회는 나쁜 곳이라는 프레임

요즈음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나쁜 교회 프레임 네가지를 들라면 첫째는 세금은 내지 않은 몰염치한 집단이라는 프레임입니다. 둘째는 교회 세습, 성추행을 하는 비도덕적 집단이라는 프레임입니다. 세째는 코로나 19를 감염시키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광신적 반 사회적 집단이라는 프레임입니다. 넷째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비지성적, 비문명적 집단이라는 프레임입니다. 지금 국회에서 이 법을 통과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가장 반대 세력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동성애를 합법화하여 며느리 남자를 얻고, 사위 여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겠다는 것입니다. 동성애가 나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헌법적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법으로 막아 죄를 죄라고 말을 못하게 하고, 교회도 동성애자를 채용하지 않으면 처벌하겠다는 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는 반지성적, 반문명적 차별주의자라는 프렘임을 만들어 교회는 나쁜 곳이라고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교회에서 걸리면 교회가 코로나 19의 발생지도 아닌데 6만여 교회 중 몇 교회가 걸리는데 모든 교회가 코로나 19 감염의 온상지처럼 교회가면 코로나 19걸린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800만이 넘은 교인 중에 소수의 교인이나 교역자가 성추행을 하고, 일부의 목사가 목사 세습을 하면 그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교회는 나쁜 곳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버립니다. 요즈음 홍수로 사람들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물이 다 나쁘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물을 보지도 말고, 물을 먹지도 말라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사탄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는 나쁜 곳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멀리하게 합니다. 프레임 전쟁을 통해 손쉽게 교회를 핍박하게 합니다.

“교회는 코로나 병 걸리는 나쁜 곳이다. 교회는 목사를 세습하는 나쁜 곳이다. 교회는 손해를 보는 나쁜 곳이다. 교회는 즐거움을 빼앗는 나쁜 곳이다. 교회는 자유를 빼앗는 나쁜 곳이다. 교회는 헌금하라고 돈을 빼앗는 나쁜 곳이다. 교회는 포괄절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는 인권을 무시하는 나쁜 곳이다. 교회는 세금을 내지 않는 나쁜 곳이다. 교회는 성추행하는 나쁜 곳이다. 교회는 서로 고소고발하는 나쁜 곳이다. 교회는 독선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나쁜 곳이라” 등 프레임을 만들어 교회를 세상 속에서 제거하려고 합니다.

프레임 전쟁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정치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개념을 주도적으로 이론화한 사람은 미국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사람들에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더 자주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교회는 나쁜 곳이라는 프레임을 만들면 사람들은 교회는 나쁜 곳이라는 프레임으로 매사 교회를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프레임이라고 말합니다.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빨간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다 빨갛게 보이고 파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다 파랗게 보이는 것처럼 어떤 생각의 틀로 보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달라지고 선택의 판단 기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권력을 취득하기 위해 늘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선거철이 되면 어떤 당은 상대 당을 종북 좌파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상대를 공격하고 백성의 지지를 끌어내고 어떤 당은 차떼기 정당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상대를 공격함으로 백성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합니다. 이런 프레임 전쟁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법안을 만들 때마다 수시로 사용하고 있고 프레임 전쟁에서 이기는 정당이 지지도가 높아지고 권력을 차지합니다. 레이코프는 프레임이 의식이 아닌 무의식적인 과정이며, 이성보다는 감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각자의 프레임으로 자신의 프레임에 부합하는 사실만을 선택적으로 취하고 진실과는 상관없이 반대의 사실은 무시한다고 합니다.

 

3. 교회는 나쁜 곳이라는 프레임은 사단이 사용하는 방법

이런 것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사탄이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지복을 누리면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탄이 감성적인 하와에게 와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프레임을 바꾸어 버립니다. 프레임을 부분을 전체로, 개별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과도한 일반화를 시켜버립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모든 나무라고 말합니다. 요즈음 말하면 일부 목사가 교회를 세습했는데 그것은 기독교 전체가 세습하는 것처럼 프레임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이 교회에 와서 코로나 전염이 되었는데 교회가면 다 코로나 걸리니까 교회 가지 말라고 프레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자가 사단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걸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까? 먹지 말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언제 죽을까하노라 했습니까 정령 죽는다고 했지요?

그러자 사탄이 어떻게 말합니까? 결코 죽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완전히 프레임을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확대, 축소, 왜곡하는 프레임을 사용합니다. 그것 따먹고 죽지 않는다는 프레임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선악을 분별하여 하나님처럼 될 것 같으니까 먹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쁜 하나님이라는 프레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독제자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이 던져주는 프레임으로 선악과를 보니까 어떻게 보입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먹게 됩니다. 사탄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런 방법으로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4. 사도 요한 시대에 교회를 제거하기 위한 프레임

교회는 우리가 믿는 것을 믿지 않고, 우리가 행하는 것을 행하지 않는 나쁜 집단 프레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진영논리의 틀에 가두어 버리면 적이 되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핍박해도 정당화되고 지지층의 환호를 받게 됩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이런 프레임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는 교회 공동체를 역사 속에서 제거하려했습니다. 그때마다 사용하는 공통적인 프레임은 교회는 나쁘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의 황제 도미티안이 통치할 때입니다. 그는 자신을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숭배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인사할 때 “황제는 주님이시다”라고 인사하게 했습니다. 살아있는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게 했습니다. 자신이 통치하는 땅에 자신을 숭배하는 신전을 짓도록 경쟁을 부추겨 예산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권력자의 지시와 통치이념을 충실히 따르며 무조건 지지하고 복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쁜 교회입니다. 자기 편에 서지 않으면 제거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세계는 그렇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편이나 네 편이냐가 중요합니다. 전쟁을 할 때 아군이냐 적군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의 신분이나 그의 외모나 그의 인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무조건 적군이면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교회는 없어져야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무참하게 핍박하고 처형했습니다.

그들의 도덕적 행위 중 대표적 타락한 행동이 동성애였습니다.

대단한 신전을 지어 놓고 신전에 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행위가 성적 환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동성애가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동성애는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폼페이의 유적들은 로마 사회가 얼마나 동성애가 만연되어 있고 성적으로 타락해 있는 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토마스 하버드의 저서 <그리스 로마 시대의 동성애>에 의하면 각 집마다 세워져 있는 현판이나, 조각상들, 그리고 심지어 그릇에까지 남근이 그려져 있었고, 도로 바닥에도 남근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전에서도 동성애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만인의 스승으로 자처하던 철학자들도 동성애를 추구하고 그것을 당연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크레테스는 신념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을 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아 동성애를 사람이 추구할 가치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소크라테스가 체육관을 찾아 갔답니다. 미소년 카르미데스를 만나 소크라테스 그 소년의 몸에서 눈을 땔 수 없었다고 합니다. “모든 이들이 그를 조각상처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소년을 얼핏 보고 더 이상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야수에 사로잡힌것 같았다.”라고 고백했답니다. 노인이 되어버린 철학자가 약 14세 전후의 미소년을 보고 마음에 일어나는 욕정을 감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식사와 술을 겸한 연회를 하면서 특정 주제를 이야기하는 <향연>에서 그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소년 애인”과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정도 늙은 돈과 젊은 몸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초기 12명의 황제 중에 동성성행위를 하지 않은 사람은 유일하게 글라우디오 황제 뿐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황제가 소년들과 동성애를 즐긴 것입니다. 자신의 어린 동성애자가 죽자 동상을 세워준 황제도 있고, 섬에 자신의 전용 휴양지를 만들어 동성애를 즐긴 황제도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2명의 남자와 동성 결혼을 한 황제도 있습니다. 이처럼 최고 통치자인 황제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존경을 받는 정신적 지도자들인 대부분의 철학자도 공공연히 동성애를 행하며 옹호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순결을 강조하며 절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세계관,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윤리관을 따르지 않으니까, 자기들 편에 서지 않으니까 자신들과 같이 살지 않으니까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미티안 황제는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화형을 시키고, 십자가형을 시키고, 사자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 부모와 자신과 남편을 죽이고 전토를 빼앗았습니다.

 

5. 교회를 승리하게 하시는 예수님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 철학 시대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이 만들고자 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니까 교회는 나쁜 집단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동성애를 조장하려는 세력들은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짐승과 똑같은 진화의 산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유물론자들입니다. 그리스의 인본주의 철학, 헬레리즘으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입니다. 영국 옥스퍼드, 켐임브리지, 미국의 하버드, 예일, MIT, 버클리 등 소위 명문대학일수록 동성애 정당화 이론을 만들어 내고, 동성애를 반대하면 반지성적, 반문명적 차별주의자로 낙인을 찍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성과학, 정신분석학, 여성학, 사회학, 언어학, 법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의 이름으로 동성애를 정당화하고 있고 심지어는 신학에서도 퀴어신학을 만들어 동성애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를 나쁘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교회를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힘으로 제거하려고 해도 교회는 결코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전멸되지 않았고 교회는 결코,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 바벨론은 망하지만 교회는 존속하여 세계 곳곳에 서 있고 마침내 새하늘과 새땅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승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18절 말씀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살이 있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끝이 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세토록 살이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의 열쇠, 통치권과 권세를 주님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황제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말씀을 해 주십니까?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사도 요한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요한이 교회는 나쁘다는 프레임에 걸려 나쁜 교회의 주범으로 밧모섬에 유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는 어느 주일날 환상을 본 것입니다. 얼마나 패배감에 빠져 있었겠습니까? 성도들이 원형 극장에서 사자들에게 잡혀 먹히는데 자신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장로님이, 권사님이, 집사님이 어느날 잡혀 처절하게 화형을 당하는데도 자신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같이 죽었으면 좋았을테데 자신은 홀로 살아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죄책감도 들고, 무력감도 들고, 회의감도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방치해 놓고 계시는가 질문도 했을 것입니다. 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저렇게 처참하게 죽게 만들었는가 자책감도 들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과 어울려 황제 숭배를 하고 동성애를 즐기면 살았다면 저렇게 처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후회도 했을 것입니다. 교회란 권력 앞에 너무나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때 예수님을 그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일곱 촛대를 보았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오른 손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일곱 별이 있습니다. 오른 손을 힘, 권능을 상징합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님이, 죽음과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인간을 지옥과 천국의 문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 그 권능의 손으로 일곱 초대와 일곱 별을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곱 촛대와 일곱 별은 무엇이겠습니까?

20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교회의 사자와 교회입니다. 일곱 교회는 11절에 나와 있는 일곱교회입니다. 상징적 의미가 강한 수입니다. 완전수로 지상에 있는 오고 오는 모든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어떤 교회든 주님이 세운 교회이고 주님이 주인이시고 주님이 붙들고 지키시는 교회입니다.

힘없고 무기력하고 쉽게 쓰러지는 것 같지만 교회 공동체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19)”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하는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곳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알지 못하느뇨(고전3:16)”

 

로마 황제가 주님이 아니라 자본이 주님이 아니라 공산주의가 과학주의가 인본주의가 주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교회가 아닙니다. 내 교회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6. 교회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 주시는 예수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사단을 교회를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요한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한이 환난을 받았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참여함으로 환난을 참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밧모섬에 유배되어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진리라고 증언하고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교회 공동체에 속했기 때문에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역사속에 계속 있어 왔습니다. 사단은 핍박과 유혹이라는 도구를 통해 교회를 죽이려고 수없는 시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헤롯은 어린 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고 유대교는 유대교라는 거짓 프레임으로 스데반을 처 죽였습니다. 로마의 10 황제는 황제 숭배라는 거짓 프레임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수많은 신앙인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 자들은 물질이 전부라는 거짓 프레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5분에 1명씩 세계에서는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주의 자들은 오직 과학만이 인간의 모든 답을 말할 수 있다는 거짓프레임을 만들어 신앙을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릇된 인본주의, 타락한 자본주의가 바알신의 거짓 프레임을 만들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국 궁극적으로 승리합니다.

이미 창세기부터 하나님께서는 말씀해 놓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 말씀입니다. 유명한 말씀입니다. 원시 복음이라고도 말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사단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 승리합니다.

역사의 결론은 어떻게 끝이 나는지 계시록 18장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단의 지배를 받으며 세속적 권력을 가지고 교회는 나쁘다는 프레임을 짜서 교회를 괴롭혔던 바벨론은 어떻게 됩니까?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그 화려한 성이 어떻게 됩니까?

요한계시록 18장 10절을 찾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계시록 18장 21절을 보십시오. 완전히 망해 버립니다.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멸망하게 합니까?

요한계시록 18장 20절을 보십시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세속적인 권력을 통해 주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단은 어떻게 됩니까?

계시록 20장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교회를 대적하는 세상은 건축물의 거푸집과 같은 것입니다. 건축물이 다 지어지면 다 치워버리고 건축물만 우뚝 서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망하고 새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만 남고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져 영원한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세속사와 구속사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속사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중심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구속사입니다.

십자가에서 힘없고 나약하게 돌아가신 것같고, 세속적 권력 앞에 조롱당하고 수치를 당하면 침뱉음을 당하는 것같지만 부활하여 인류를 구속하신 그 예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 되어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계시며 교회를 붙들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13절을 보십시오. 인자로 오신 예수님은 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중보자로 속죄자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금띠를 띠었다는 것은 제자장의 복장이 아니라 왕의 복장이므로 왕적 권세를 가졌다는 말씀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머리와 털은 희다는 말은 황제 숭배를 강요하고 있는 부패한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성을 상징하고, 눈은 불꽃 같다는 말은 예수님의 전지성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고통, 눈물을 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15절에 발은 주석같다는 말은 악의 세력을 밟아버리는 예수님의 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지키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음성은 말은 물소리 같다는 말은 예수님의 위엄입니다. 말씀으로 교훈하고 책망하고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모습입니다. 입에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심판을 말슴합니다. 우리가 심판하시지 않아도 주님이 심판하십니다. 얼굴이 해같은 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예수님이 심판주이시고, 예수님이 구속주이시다는 말씀입니다.

 

7. 프레임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무슨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까?

첫째는 교회는 나쁘다는 프레임 전쟁으로 핍박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영광스런 환상을 보았을 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졌습니다. 마치 죽은 자 같았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교회를 붙들고 있는 그 오른 손으로 요한에게 얹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현현하신 예수님을 두려워 하지 말로 해석할수도 있지만 핍박하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실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여호수아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싸워주시며 하나님이 앞서 가시며 승리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시대마다 교회는 나쁘다는 프레임 전쟁에서 싸우는 하나님의 전사들에게 하나님은 공통적으로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에게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31)”,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에게도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에게도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 27:24)”라고 하셨습니다.

 

역사는 예수님 손 안에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일 뿐 아니라 역사의 궁극적인 통치자이십니다. 우리 인생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궁극적으로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한 시대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 가지고 세상 살기 얼마다 두렵고 힘이 듭니까? 그러나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계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우리 인생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둘째는 말씀의 프레임을 지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본 것, 지금 있는 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말씀합니다.

기록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일곱 교회에게 보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말씀의 프레임을 가지고 승리해야 합니다.

왜, 시대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가 핍박과 고난을 당합니까? 9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중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는 거짓 프레임을 방어하여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끊임없이 사단을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진리가 아니다는 프레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것을 믿도록 해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같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면 쾌락을 즐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진정한 문명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가 초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종속되지 말고 독립하여 네가 선택권과 주제권을 가지고 참 자유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으니 네 인생 네가 주인이 되어 마음껏 즐기라는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이 계시다 하여도 잠자고 침묵하니 쓸데없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말고 세상 풍습대로 마음되는 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상대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왜곡하고 축소하고 확대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확하게 동성애는 죄라고 말씀하시는데 동성애를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니 죄로 여기지 말고 오른손 잡이 왼손잡이처럼 인정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냅니다. 블랙 수면방을 만들어 하룻밤 질펀하게 무차별적으로 동성애를 즐기는데 그것을 소수 인권이고 성적 지향이니 차별하거나 폄하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적 취향이고 행복권 추구이니 죄라고 드러내 놓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성 평등이 이라나 성평등이라고 말하며 성에는 여러 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만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화하면서 여러 성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신학자 가운데서도 교묘하게 성경을 해석하여 동성애 금지를 성경 해석의 문제로 돌려 동성애를 지지하는 프레임을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돔 고모라는 동성애가 문제가 아니라 성폭력으로 망했다는 프레임을 만듭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레20:15).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프레임을 끝까지 붙들고 그 프레임으로 세계를 보고 인생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라는 거짓 프레임을 방어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집을 빼앗기고 목숨을 빼앗긴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 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는 것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우리 나라도 일부 목사 중에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종교 다원주의 자들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아니고 여러 구원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석가도 무함마드도, 공자도, 자신도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혁한다고 타락한 한국교회를 비판합니다. 교회 세습을 비판하고, 목사의 타락을 비판하며, 교회 시장화를 비판하고, 교회가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교회가 예배를 강행하는 것은 헌금을 걷기 위한 것이라고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합니다. 목사의 말을 믿지 말고 목사의 돈줄을 끊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 언론에 확산시키는 자들을 보면 대부분이 종교 다원주의 자들입니다.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교에도 있고 불교에도 있고, 이슬람교에서 있다는 것입니다. 왜 편협되고 독선적으로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있냐는 것입니다. 진짜 목적은 변질되고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여 치유하고 회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망하게 하고 파괴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목표가 교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교회의 문을 닫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동성애를 찬성하 하고, 비호하며 옹호하는 것은 소수 인권보호 보다는 그것을 통해 교회를 비상식적이고 편협한 집단으로 만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는 바쁜 곳이라는 프레임을 심어주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구원자는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여러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입니다. 계시록을 마감하면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까? 계시록 22장 18절 이하를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말씀과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성경 계시를 마감을 합니다.

왜 말씀을 프레임을 기록하고 지키고 확산시켜야 합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복이 있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고, 진짜 복 있는 것은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으로 삶의 프레임을 만들고, 세상 사람들이 말씀으로 프레임을 가지고 살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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