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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요8:1-1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18 추천수:0 220.120.123.244
2020-08-02 09:34:46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

요8:1-11

 

지난 주 신문을 보니까 국회의원이 장관 아들 군 복무 시절 ‘휴가 미복귀 의혹’ 제기했을 때 그 질의를 듣던 장관이 혼잣말로 “소설을 쓰시네”라고 발언했다고 소설가 협회 이사장은 이사장 외 회원 일동으로 장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습니다. 한 나라의 법무부 장관이 소설을 ‘거짓말 나부랭이’ 정도로 취급하여 소설가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문학도 진보와 보수로 갈라 있고 이런 내용을 크게 보도하는 언론도 너무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있다고 비난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애견 축산협회는 “개나소나”라고 발언하면 사과하라고 하고, 농민협회는 “가지가지 하네”라고 발언하면 사과하라고, 화가협회는 “발로 그렸냐”라고 발언하면 사과하라 하고, 개그맨 협회는 “개그하고 있네”라고 발언하면 사과하라고 하고, 시루떡협회는 “개떡같네”라고 발언하면 사과하라고 하고,체조협회는 “달밤에 체조하네”라고 발언하면 사과하라고 해야 하냐고 써 놓은 글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무서울 정도로 소용돌이 정치 사회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들판에 소용돌이가 치면 주변의 것을 빨아 올리려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향해 양 패로 나누어 소용돌이처럼 권력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정치인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언론인이나 검찰이나, 학자나, 의사나, 문학인이나 심지어는 종교인까지 좌우로 나누어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국민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피 터지는 싸움을 매일 하고 있습니다. 상대의 조그마한 약점만 드러나면 그것을 드러내고 확대하고 공론화하여 매도해 버립니다. 경찰과 검찰을 이용하고, 언론을 이용하여 상대의 조그마한 흠만 드러나면 다시 일어날 수 없도록 완전히 짓밟아 버립니다. 한 시장의 죽음을 놓고도 지금도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유익을 얻기 위해 공격과 방어로 싸우는 모습이 무섭게 보입니다. 당사자와 가족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약점만 보이면 자식이든 부모든 철저히 파헤쳐 들추어냄으로 상대를 파렴치한 인간으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매장해버리고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용합니다. 이런 오염된 물결이 경제 문화 교육 분야로 흘러가고 심지어는 종교에까지 이런 더러운 물결, 추악하고 악한 물결이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무섭고 질식할 것 같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기 등등한 시대입니다. 이빨 가는 시대입니다. 흠을 잡는 숨 막히는 세상입니다. 수치를 드러내고, 정죄하고, 파멸시키고, 죽이는 시대입니다. 배우지 못하고 없는 사람들은 어쩌면 순진한 죄를 짓습니다. 어느 시대나 배우고 가진 자들이 너무나 무례한 사회를 만들고, 세상이 무섭고 질식할 것 같은 세상을 만듭니다.

 

1. 정죄하는 사람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자들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진보적이었고, 바리새파는 보수적이었습니다. 정치적 권력은 주로 진보적인 사두개파 사람들이 잡고 있었고, 종교적 권력은 보수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이 잡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사렛 출신 30대의 젊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여론 지지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종교와 정치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권력 지향적인 사람들은 상대의 약점을 잡아 찍어 내리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인기와 권력, 이익을 빼앗아 갈 만한 사람의 싹이 트기 전에 완전히 짓밟아 버리려고 했습니다. 권모술수를 동원합니다. 군중심리를 이용합니다. 언론과 검찰, 학자를 패거리로 만들어 함께 뛰어 권력을 잡아 나누어 먹기를 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제거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유력한 사람을 아무런 명분없이 제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분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명분은 수치스러운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덕적 흠을 찾아 대중에게 알려 대중의 지지를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도덕적 결함만큼 사용하기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저를 이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어떤 방법을 쓰겠습니까? 저의 죄를 찾아내어 드러내는 것입니다. 헌금 도둑으로 만들 수 있고, 성추행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정죄를 통해 상대를 매장하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 써먹는 방법입니다. 확실히 드러나지 않아도 의혹만 제기해도 교인들과 저와의 관계는 깨어지게 됩니다. 얼굴을 다시는 내밀지 못하게 하는 잘못을 드러내어 매장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무엇을 사용합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첫째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자기에게 유리한 올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아 왔습니다. 우연히 잡아 온 것이 아닙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2절에 보십시오. 아침입니다. 예수님은 집도 없으니까 감람산에 가서 저녁에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강남 좋은 아파트에 푹 자고 경찰과 검찰을 통해 정보를 받고 기자들을 동원하여 아침에 가서 지키고 있다가 여인을 잡아 온 것입니다. 간음하면 남자 상대 남자도 있을 터인데 남자는 잡아 오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들이 이용하고 자신들이 유리한 것만을 이용하는 것 입니다. 공부 잘해 각종 시험에 합격하고 영리하고 머리 잘 굴리는 상대를 정죄함으로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녀의 죄를 문제 삼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한 시장의 죽음을 놓고 정죄하는 권력 지향적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사회 공의를 지키고자 한 것도 아닙니다. 그녀를 정말 돕고자 한 것도 아닙니다. 그녀를 미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전날도 그들은 예수님 제거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7:45). 그녀를 미끼로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잡아 처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판을 떨어뜨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그들의 공동체에서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신19:15절에 보면 여인의 범죄가 재판 요건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남편을 제외한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간음한 남자나 증인은 없습니다. 돈 없고 힘이 없는 여인만 끌고 온 것입니다. 다소 조작된 사건인 것을 우리는 금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상대의 잘못이 드러나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라디아서 6:1)”라고 말씀합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고 합니다. 그것을 정죄 거리로, 그것을 정쟁거리고, 그것을 드러내 놓고 상대를 매장하기 위해 사용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살펴보아 자신도 그런 죄에 넘어지지 않도록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누구나 인정하는 법을 상대를 제거하는데 이용하는 것입니다.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이들은 가장 거룩하게 산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수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율법을 잘 알고 가르치는 랍비라고 추겨세웁니다. 율법의 교사, 율법에 정통한 자로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출신이라고 무시하였던 사람들입니다(요7:52). 이제 예수님을 올무로 엮기 위해 "율법에 정통한 자"로 치켜세우는 전략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 그 법을 정당하게 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정죄자들은 자신들만이 나라를 살리고, 법을 수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기소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너그러우면서 타인의 죄에 대하여는 엄격합니다.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법조문을 들이댑니다. 자신들이 서기관이고 바리새인들이니까 자신들이 조용히 법에 따라 집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 미쉬나의 규정에는 약혼한 여자나 유부녀의 간음 현장을 발견했을 때는 그 현장에서 처형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2:22-24절에 보면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침 일찍 수많은 백성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있는 예수님 앞에 와서 모세의 법 운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판장이 아닙니다. 오늘날 상대를 정죄함으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들은 국민의 알 권리라고 해서 아직 재판도 받지 않았는데 언론에 흘려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하여 언론 재판을 받게 만듭니다. 그것을 통해 상대는 나쁜 놈들이니까 우리를 지지하라고 선량한 국민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결집합니다. 법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자들은 법대로 조용히 법의 공정한 집행을 통한 질서와 정의의 실현하면 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죄만 있어도 침소봉대하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들어내어 언론 재판을 하고, 법을 상대를 제거하는 수산으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법은 남을 정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이 지켜야 할 규율이고,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회정의를 실현의 공정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죄하는 자들은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유다서 1장 7절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건이 나면 자신을 비쳐보는 거울이 되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는 함정을 파 상대를 함정에 처넣어 버립니다.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배우고 바르게 산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중성을 보십시오. 남의 잘못을 승냥이처럼 이용하는 비인간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한 여인의 불행을 한 여인의 죄를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최대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교활합니다. 겉으로는 율법에 열심이고 공의를 세우기에 열심인 정의파 같았지만 속은 정적을 제거를 위한 음흉한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정말 현장에 간음한 여인을 잡아 왔다면 예수님께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저 그들의 방식대로 집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찾기 위해 그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함정을 파 놓고 음흉한 술책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인용합니다. 허위의식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딜레마라고 합니다.

만약 율법의 규정에 따라(레위기20:10; 신22:22) 그 여인을 쳐 죽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분명 예수님을 용서하라 사랑하라고 가르친 자신의 가르침을(마5:43,44) 어기는 이율배반적인 사람으로 매도할 것입니다.

부동산 정책을 쓰면 권력 지향적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권력자들이 강남에 얼마나 많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도합니다. 언론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동산은 보도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파가 가지고 있는 부동산을 보도하지 않습니다. 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면 예수님을 사랑이 없는 사람 무자비한 사람, 위선자로 매도할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세리의 친구가 될 수 있느냐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이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있느냐고 조롱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3:17)"라고 가르쳤는데 그 말씀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한다는 말씀이나 용서하라는 말씀이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진보 지지층은 이탈될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고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 황제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총독 이외에 그 누구도 사형 선고를 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여인을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에 따라 처형하지 말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레위기 20장 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신명기22 장 23절 이하에 보면 "약혼한 여자가 성읍 중에서 간음하였을 때에는 그 여자와 그 남자를 함께 성문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모세의 법을 깨뜨리는 파괴자라는 공격을 받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조심스러운 것은 “간음 죄를 조장하고 비호(庇護)하는 자다”라는 소문이 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의 파괴자로 예수님을 정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고 하신 말씀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율법을 최우선으로 했던 보수 지지층을 예수님으로부터 이탈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인기를 잃을 수밖에 없고, 올무에 잡힐 수밖에 없는 신의 한 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2. 용서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죄를 이용하여 정죄하며 자신의 목적을 교활한 방법으로 성취하는 정죄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취합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정죄하지 않습니다. 용서하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용서하십니까?

 

첫째는 형 집행을 유예합니다.

형을 집행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6절에 보면 예수님은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알고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그들의 말을 듣고 정죄하고 돌을 던져 형을 집행하려는 성난 군중들의 분노를 식히는 시간을 갔습니다. 당장 죄의 대가에 대하여 바로 형을 집행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보복하고 싶을 때 잠깐 앉아 글을 써 보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부도 용서 못 하고 분노가 폭발하려고 하면 잠깐 앉아 글을 써 보면 후회할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을 쓰셨다는 내용은 유일하게 여기에서 한 번 나오는데 성경이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는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무엇인가 쓰신 사건이 십계명을 쓰신 출애굽기 31장 18절에 나옵니다.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것을 상기시켰는지도 모릅니다. 율법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율법으로 형을 집행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율법을 쓰신 분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바로 율법의 제정자라고 사실을 가르쳐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쓰셨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함으로 흥분된 모든 사람의 분위기를 정돈하게 하고 정죄하는 자들이 형을 집행하지 못하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도 용서하기 위해서는 첫 단계가 내가 집행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처벌하고, 내가 복수하고, 내가 대가를 치르게 하면 용서와는 멀어집니다. 집행 유예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집행을 맡겨야 합니다.

 

둘째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합니다.

죄를 인정하게 합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과 죄를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 쓰고 난 후 어떻게 합니까?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그들이 계속 물어 봅니다. 다그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합니다. 그 여인이 죄가 없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간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이 틀렸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율법을 통하여 남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죄 없는 자는 죄짓지 않은 무흠한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에 죄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롬3:23). 고소자도 율법 앞에 정죄하고 판결할 만한 사람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의 양심에 화살을 던져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을 말씀합니다. 형식 준수를 문제삼는 그들에게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본질이 이웃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남의 눈속에 있는 티를 볼 줄 알았으나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올무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독선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책략을 그리스도의 빛 앞에는 감추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악한 계획은 실패하였습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어른부터 나갑니다. 말씀의 위력 앞에서, 예수님의 영적 권세 앞에서 늙은이나 젊은이나 정죄의 심판을 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정직하게 생각하면 죄 않짓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살면 살수록 죄가 더 많아집니다. 젊은이도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은 자도 다 간음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런 기준으로 보면 세상에 간음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야고보서 2장 10-11절에서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킨 죄인과 들키지 않은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들키지 않은 권력자들은 권력 쟁취를 위해 철판을 깔고 애써 자신의 죄를 숨기며 위선을 떨고 있을 뿐입니다. 군중은 “모두다 그런 데”하고 말하며 다수의 범죄에 양심을 마비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들킨 죄인은 비난과 처벌 앞에 괴로워하며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면 수치심으로 괴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보아야 합니다. 나도 저 자리에 가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도망가지 않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며 정죄하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 앞에 엎드린 자리가 바로 회개의 자리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주님의 자리를 떠나는 사람은 회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처분만 기다립니다.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생각하고 엎드려 주님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보십니다(시51:7). 주님이라는 말에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이고 예수님이 구속주이며 속죄주라는 말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아니면 내 죄의 문제가 청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죄는 죄하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돌로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 것입니다. 음란을 부추기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는 음란을 부추기는 시대입니다. 언론 매체만 보십시오. 미투 기사를 실으면서도 광고는 음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법은 인권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간통죄를 폐지함으로 지금은 간통은 형법으로 처벌하지도 않습니다. 간통을 법으로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통해 동성애가 잘못이라는 말도 못 하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했다고 간음죄에 대하여 무조건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은 죄이기 때문에 철저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라고 인정해야 합니다(고전6:18-20). 예수님은 무조건 용서하여 양심 없는 도덕적 무감각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무율법주의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방종하며 무조건 용서받는다고 회개 없는 상황윤리주의 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죄인을 여자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호칭은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에게 사용했던 정중한 호칭입니다(요2:4).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어 봅니다. 예수님은 ‘고소’와 ‘정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마귀가 고소와 정죄의 명수입니다. 사탄은 "너는 살 가치가 없다. 어떻게 죄를 짓고 뻔뻔스럽게 살고 있니? 차라리 자살해 버려라"고 계속해 우리를 고발하고 정죄합니다. 무거운 죄책감을 가지게 합니다. 이 죄책감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우울증에 빠지게 하고 삶을 포기하게 합니다.

그녀는 “주여 없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그녀는 예수님이 범상하지 않은 사람인 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녀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죄를 용서하는 자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데 예수님을 죄용서를 해 준다고 예수님이 참람죄를 저질렀다고 시비하였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친구 네 명에게 들것에 실리어 예수님 앞에 나아온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실 때 거기 있던 서기관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막2:7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죄인을 심판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진정 정죄하시는 분도, 공의를 심판하는 분도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사죄의 은혜 선언하실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구원의 은혜 선언하실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모른 것입니다. 믿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을 정죄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자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여인을 향해 자신이 정죄하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다고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요한 복음의 핵심을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면 산 만큼 죄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의 모습을 보면 누가 그것을 다 알고 친구가 되어주겠습니까? 우리를 낳아 준 부모도 우리의 내면의 죄까지 다 알면 우리를 외면할 것입니다. 그런 친구 그런 자식을 둔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의 모습을 다 알고 계신 전능한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순덩어리고 죄악 덩어리인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주라고 부르면 주님 안에 거하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해 완벽하게 순종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이 지실 것이기 때문에 공의로우신 예수님은 죄용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저주와 치욕, 비극과 죽음, 정죄와 심판이 떠났다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평생 살면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데 용서의 복을 누리려면 서로 상대를 볼 때 율법을 통해 정죄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나만 손해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신실하게 사역을 하시던 담임목사님께서 목회하면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교인을 위해 기도하며 섬겼는데 남몰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먹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버렸답니다. 목사님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해 성도들에게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라고 고백하며 더 이상 목회를 못하겠다고 사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교인들은 공동회의를 열었답니다. 한 쪽에서 목사가 어떻게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그것을 속이며 이제까지 목회했느냐고 비난하며 정죄하였답니다. 그러나 한 장로님 발언했답니다. “목사님이 이제까지 우리을 위해 기도해 주고 섬겨주며 봉사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목사님을 위해 기도해 주고 섬겨주어야 할 때입니다. 재활치료를 할 수 있도록 우리가 섬겨줍시다. 목사님이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용서해 주고 도와줍시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고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겠습니까?” 다수의 성도는 동의했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재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다시 그 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게 되었답니다. 상대의 죄만 드러나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없는 죄까지 만들어 정죄하는 무서운 세상, 감시의 눈에 질식할 것같은 무서운 세상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를 잘 믿는다는 한국교회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여준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숨쉴 수 있는 교회, 아름답고 향기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죄인들이 들어와 용서받고 참 자유를 누리면 미래를 꿈꾸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해주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모님 끝까지 증오하며 용서하지 못하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용서 못 하며 원한과 분노를 품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그 사람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용서하지 못하면 나만 손해입니다.

넷째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신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과거의 정죄와 고소의 현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유와 해방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가서 마음껏 신나고 멋진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제 2의 인생을 살 기회를 주십니다. 그날 정죄의 현장에는 어쩌면 그녀와 어릴 때 같이 자란 친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를 너무나 잘 아는 친척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혼했다면 본 남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 새롭게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클린턴이 추문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부인 힐러리가 취한 행동은 참 잘한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미국 남자들 바람 많이 피운다고 합니다. 시카고 대학과 뉴욕 대학이 50세까지 남자들을 대상으로 94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의 보통 남자들은 평생에 평균 6명의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고 합니다.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고 하여도 힐러리 여사가 세계인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의 간음이 드러났을 때 오장육부가 뒤틀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대변인 마샤 베리를 통해 “용서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결혼서약을 지킬 것이며, 남편에 대한 사랑은 자비롭고 확고하다. 용서했으며, 남편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대배심이 아닌, 나 자신이다. 내가 비틀거리면 남편은 당장 넘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잘 모르겠지만 대단한 것입니다. 상대가 그렇게 용서해 준다고 치욕스런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의 상처를 죽을 때까지 껴안고 살지 않을까요? 차라지 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자기의 약점이나 열등감을 드러내지 않고 위장하고 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합리화하며 살지 않았겠습니까? 현실에서 도피하여 산속에 들어가 속죄하며 홀로 살지나 않았을까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찾아가 복수하지나 않았을까요? 찾아가 폭행하고, 욕설하고, 비난하며 조소하지나 않았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성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한 번 이런 범죄에 넘어지면 재기하기 힘듭니다. 많은 사람은 그 소용돌이 같은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녀는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자유를 얻었을까요? 주변의 비난과 정죄의 화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의 비난과 정죄의 목소리, 자신의 내부의 비난과 정죄의 목소리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세상이 무섭습니다. 조금만 허물이 들어나면 짓밟아 버립니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먼 훗날 이 여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우리 주님은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 주십니다. 지난날은 실패하였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상처 난 인간을 버립니다. 이 세상은 전과자를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상처받은 자, 상한 심령을 버리지 않고 기회를 주시고 큰일을 맡기십니다. 과거로부터 자유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과거보다 그 장래에 관한 관심이 큽니다. 세상은 과거를 묻지만 예수님은 미래를 묻습니다. 사탄은 과거를 정죄하지만 예수님은 미래의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들의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의하여 미래의 삶이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출발 하여야 합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와 간통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과거의 상처에 억매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으나 회개하고 새출발하여 위대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147:2-3)" 믿습니까? 우리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어떤 죄인이 온다고 해도 치유받고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면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받은 상처가 예수님을 통하여 만나는 성도를 통하여 깨끗이 치유되고 월요일 시작할 때는 또 새로운 힘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주일 예배드리러 와서 더더욱 상처를 받고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남편을 다섯명이나 두었던 수가성 여인도 용서해 주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해 주었습니다. 490번이라고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내가 용서한다고 패해를 준 사람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용서한다고 아픈 기억에 붙어 있는 미움, 분오, 공포, 불쾌한 감정을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농도는 희석되고 용서하면 감정이 증폭되어 자신을 더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면 “용서하지 못해서 내가 참 힘들었구나”라고 속삭이는 자신의 진실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에게 아픔을 준 사람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고, 나와 같은 상처를 받은 사람의 아픔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요셉은 용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용서를 통해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미래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라는 것은 용서했다는 것을 전하는 것도, 정당치 못한 과거를 잊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나의 과거가 내 인생의 발목을 잡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서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자신이 삶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미 일어난 일 인정하고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내려 놓고 세상에 대한 앙갚음, 자기 혐오, 증오, 울분, 미움, 원망 등을 내려놓고 그것을 통해 삶의 진리를 배우고 예수님 안에서 더 나은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유영철에 의해 가족 셋이 죽임을 당했지만 용서하시는 신앙인을 신문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용서하신 예수님처럼 용서하니까 남은 인생이 새로워졌다는 것입니다. 증오와 미움, 원망 가운데 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주기도문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을 외우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복수의 수단으로서 용서가 아닙니다. 도피의 수단으로서 용서가 아닙니다. 상대보다 우위에 있는 용서가 아닙니다. 감정의 문을 닫아 버린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라는 이름으로 희생하는 용서가 아닙니다. 남을 대신하는 용서도, 사회적 압박에 의한 용서도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 남은 인생을 위해 십자가에서 욕하고 저주하고 죽이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용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고발합니다. 상처난 새의 가슴에 총을 쏘아 댑니다. 교회에서 완벽주의자일수록 바리새인처럼 상처가 난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용서받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는데도 상종을 하지 않고 비난의 화살을 쏘며 정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3-38)” 믿습니까? 우리는 완전히 십자가를 통해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죄에 발목잡히지 말고 현재의 죄에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하면 미래의 죄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마 여인은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받고 자신도 용서하면 참된 자유와 해방, 감동과 환희,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헌신하며, 봉사하고, 전도하며, 구제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결국은 성화되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아무도 치유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일지라고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상처를 치유시켜 주십니다.

 

고든 맥도날드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훌륭한 아내와 함께 훌륭한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목사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안락하고 풍파없는 그의 삶은 권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교인 중 한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여인은 목사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한 교인에게 토로하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은 즉시 당회에 전해졌고 당회원들은 이미 그 교회를 떠나 다른 선교 단체의 총재로 봉사하고 있는 그를 소환해서 징계하였습니다. 그는 당회의 징계에 순복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토설하고 회개하였습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당회원들의 지도하에 징계를 받았습니다. 3년이 지난 후 당회원들은 그가 충분히 회복되었다고 판단하고 그를 다시 목회 일선에 복귀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그 후 뉴욕시의 어려운 지역에 들어가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의 목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당회는 다시 그를 자신들의 교회로 불러 담임 목사직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충성스럽게 다시 그 교회에서 목사의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이미 다른 곳에 가있는 사람을 과거의 문제로 불러 치리한다는 것도 보통일이 아닙니다. 오리발을 내밀며 버틸 수도 있을 것이고 교회 교인들도 과거사이니 그저 덮어 버리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듭을 확실히 풀었습니다. 그저 묵인하고 손가락질하고 혐오하며 비방한 것이 아니라 확실히 정리하고 용서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들의 담임목사로 모셔 정상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용서입니다. 과거의 문제, 그것은 과거의 사건입니다. 과거의 허물 그것 역시 지나간 사건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과거에 얽매여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용서란 과거를 마음에 품고 덮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하고 사람들과도 정상적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수가 현재와 미래의 정상적 관계를 갖는데 거침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용서하였습니다. 그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 어떤 실수를 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고 정상적 관계를 맺게 합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요한복음 8장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32절을 보십시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빛되신 예수님을 따르면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면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용서해 주시고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면 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합니다. 죄많은 세상에서 살면서 주님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면 됩니다.

 

죄로 상대를 죽이는 무서운 세상, 조그마한 허물만 드러나면 돌팔매질을 당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의를 수호한다고 하면서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어 잔혹하게 처벌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다 같은 죄인인데도 서로 의를 드러내면 서로를 정죄하고 고소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 안에 살면 인생이 최고의 인생이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빛 안에 머무는 교회가 최고의 교회가 됩니다. 그 빛 안에 머무는 세상이 최고의 세상이 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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