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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도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예레미야애가3:18-2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756 추천수:0 220.120.123.244
2020-07-12 14:27:02

절망의 끝에도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

예레미야애가3:18-22

 

지난 금요일 인권을 강조하며 살았던 한 유명 정치인이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였습니다. 2018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라고 합니다. 한 해에 총 1만 3670명이 자살했고 인구 10만명당 26.6명, 하루 평균 37.5명 꼴이라고 합니다. 40여 분마다 1명이 자살하는 꼴입니다. 요즈음 코로나 19로 감염된 사람이 매일 보도되고 문자로 주의보가 매일 핸드폰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만약 자살하는 사람들을 매일 코로나 정보처럼 매일 누적 숫자와 사례가 보도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살의 원인은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경제적 파산, 우울증, 죄책감, 스트레스, 명예를 위한 것으로 수치를 면하기 위해, 허무, 갑작스러운 충격과 변화, 처벌이나 견디기 힘든 환경, 유전적 소질, 만성적 신체 질환, 정신병, 사회통합도 약화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자살은 현실의 고통을 중단시키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문제해결의 한 방법입니다. 막다른 골목, 피할 수 없음, 소망이 끊어짐 등이라는 느낌이 자살 행동에서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정의롭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 자기 의가 강한 사람, 명예를 중요시한 유명인에게는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이 전부 부정당할 만한 사건이 벌어지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특히 정치인에게 있어서 요즈음같이 언론과 사람들이 진영으로 갈라져 상대의 흠을 잡아 죽이려는 상황에서는 어떤 의혹이 제기되는 것 자체가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저열한 진흙탕 싸움에서 심각한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을 견디며 생명을 유지하는 정치인도 있고 스스로 목숨을 던져버리는 정치인도 있습니다.

사람은 좀 더 좋은 세상을 추구하고 있지만 정글의 동물보다 더 지배욕 확장과 탐욕으로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 자기 것 아니고 다 놓고 가는 세상인데, 천년 만년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고 잠깐 사는 인생들인데 서로 사랑하고 서로 연약한 인간들이니 실수를 용납하고 용서하며 허물을 덮어주고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며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것이 매주 주보에 올려 놓고 있듯이 “성숙한 성도,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짧게 살다 가는 인생이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나의 삶을 통해 미약하지만 조금은 가정이 행복해지고, 교회가 건강해지며 좀 더 좋은 세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살을 통해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실질적으로 범죄를 저질렀거나 누명을 쓸 만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자살을 하게 되면, 정에 약한 한국인들의 특성상 ‘오죽 했으면…’하는 시각으로 받아들이고, 상대적으로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도록 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이 있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도 자살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절망의 끝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마지막 정의로운 판단은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세상 살면서 억울함을 자살로 해결할 필요도 없고, 절박한 문제를 자살로 풀 필요도 없고, 자신의 정당함을 자살로 증명할 필요도 없고, 자신의 명예를 자살로 지킬 필요도 없고, 자신의 잘못을 자살로 속죄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온다고 해도 그곳에도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다시 일어나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1. 우리가 절박한 문제를(고초와 재난) 당할 때 문제의 포로가 되면 낙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예레미야는 어떤 극한 절망의 끝자락에 있었습니까?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를 보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힘이 끊어졌다. 내힘으로는 안돼, 불가능해, 하나님께 대한 내 소망도 끊어졌다. 하나님도 소용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40년 동안 선지자로 살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몰락한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20여 세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요시야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유다의 마지막 비극의 왕 시드기야 5대에 걸쳐 선지자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바람 앞에 서있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나라 백성을 향해 그는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멸시와 박해를 하였습니다.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렘 20:8). 예레미아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태워 버립니다(렘36:23).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멸망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항복을 권유하자 결국(렘 27:12)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렘37:15). 한 때 풀려나지만 그는 다시 채포되어 구타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멍에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는데 무엇이 그를 그렇게 절망하고 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내 고초와 내 재난”입니다. 고초와 재난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보지못하고, 고초와 재난에 집중한 것입니다.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심각한 질병에 걸렸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부도를 당했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죄와 수치가 폭로되었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심각한 질병과, 부도와 죄와 수치에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수정에 갇히면 누구나 소망이 끊어졌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고초와 재난의 수렁에 빠지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그것을 계속 기억하면 낙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이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렁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움직이면 움직인 만큼 더 빠져들어 가는 것이 수렁입니다. 99가지 잘해왔어도 한 가지 잘못하면 진영논리로 아귀다툼을 하는 인간들은 그 한 가지로 삶의 초원에서 제거시켜 버립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받기 위해 상대의 허물이 드러나면 과도하게 추측하고 확대 왜곡하여 완전 매장을 시켜 버립니다. 교회 내에서도 중직자로 열심히 섬기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중에는 사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교회를 떠나면서 그렇게 하면 이제까지 같이했던 교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 같으니까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교회의 잘못을 들어 비난하고 목회자의 흠을 잡고, 없으면 만들고, 실체적 진실과는 상관없이 추측하고 상상하여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확인도 해 보지 않고 교회가 나쁘고, 목회자가 나쁘다고 단정해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고소 고발을 하여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중에 무죄가 나와보았자 이미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빛을 잃어버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함께한 교인들은 양 진영으로 나뉘어 피흘리는 싸움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 허물 많은 짧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타인을 정죄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내가 검사가 되어 고소하지 않고 내가 재판장이 되어 심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공과 실이 있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나 더 신앙생활 잘하기 위해 좀더 나에게 맞는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 해야 겠다”고 교회 옮기면 됩니다. “아이들이 성장하여 결혼 대상자도 찾아야 하고 이사 하여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면 힘들어 떠나야 하겠다”라고 다른 건강한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단이 아니면 어느 교회나 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한 것이 있고 못한 것이 있습니다. 다 기준이 다릅니다.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공도 될 수 있고 과실도 될 수 있습니다. 공은 공대로 보아 주고 과실은 과실대로 보아주어야 하는데 상대를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99가지 공이 있다고 해도 하나의 잘못만 나타나면 그것을 전부로 하여 운동장에서 제거해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일수록 지금 드러난 한 가지 문제를 전부로 생각하며 집착하면 그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낙심하게 되고 심하면 스스로 목숨을 파괴함으로 그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절망하게 만드는 내 고초 내 재난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3장에 구체적으로 잘 나와 있습니다. 바벨론에게 나라가 망했습니다. 민족의 고난과 자신의 고난을 일체화시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심각한 고난에 처한 것입니다. ①어둠 가운데 처했습니다.(2) ②잠시가 아니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오랫동안 흑암에 거하게 하시고(6) ③흑암 속에 가만히 두신 것만 아니라 종일토록 자주 치시고(3) ④화살로 허리를 맞추시고(12,13)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⑤조약돌로 이를 꺾으시니(16) 먹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⑥그의 살과 가죽이 쇠하며 뼈가 꺾였다(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육신적 고난에 처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2)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①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시고(15), ②고통과 수고로 쌓아 그를 에우시되(5), ③그를 둘러 싸서 나가지 못하게 사슬을 무겁게 하시고(7), ④쌓되 다듬은 돌로 쌓기 때문에 무너뜨릴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9). 절망적 상황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3)그런데 그렇게 의지했던 하나님마저도 기도의 응답마저 하지 않고 도리어 맹수같이 대하십니다. ①기도를 물리칩니다(8), ②도리어 하나님은 그에게 곰과 사자로 대해 주십니다(10,11).

(4)백성들은 그를 조롱을 합니다(14).

 

(5) 평강과 복을 잊어버립니다(17).

(6) 절망에 빠집니다(18-20).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나라가 망했으니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런 때 고초와 재난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이런 고초와 재난, 쑥과 담즙에 갇히게 되면 절망하고 낙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생각을 여기에 맞추면 결국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집착하면 엘리야처럼 하나님 죽여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비멜렉처럼(삿9:52-54).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 처럼(삼하31:4) 자살해 버릴 수 있습니다. 압살롬을 도와 부왕 다윗을 배반하고 정권을 잡게 했지만 자신의 모략이 수포로 돌아가자 자살한 아히도벨처럼 자살할 수도 있습니다(삼하17:23).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7일만에 성이 포위되자 절망가운데 불을 지르고 자살한 시므리처럼 자살할 수 있습니다(왕상16:18). 은 30에 예수님을 인신매매한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한 유다처럼 자살할 수도 있습니다(마27:5). 이방 여인과 바람이 나서 결국 노예가 되어 마지막 자살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했던 삼손처럼 자살할 수도 있습니다.

 

2. 절망의 끝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기대하며 소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절망의 끝에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으로 일어났습니다. 예레미야는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무엇을 마음에 두었습니까?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절망의 끝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인자가 끝이 없으신 하나님, 긍휼이 끝이 없으신 하나님, 그래서 어떤 과정을 거치든 절대로 진멸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혹시 지금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건강으로, 인간관계로 절망의 끝에 계시지는 않습니까?

대인관계를 가지면서 상대가 좋은 것 99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 잘못을 보고 한 가지 그것에 집중하며 절망하고 신음하지는 성도님 있습니까?

몸의 다른 부분은 다 좋은데, 성격 다른 부분은 다 좋은데, 한 가지 부족한 부분으로 인하여 그것에 집중하며 소망이 끊어졌다고 절망하시는 성도님이 있습니까?

직장 생활 하면서 직장이 99가지는 다 좋은데, 교회생활하면서 교회 99가지는 다 좋은데, 한 가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중하고 희망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나요?

자녀교육을 하면서 99가지는 다 좋은데 한 가지 거슬리는 것에 집중하고 희망의 끈을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절망의 문제에 집중하지 마시고 절망의 끝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넓은 품으로 우리를 안아 주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인자가 끝이 없으신 하나님에게 시선을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31:6)”라고 말씀하시는 끝까지 인자하신 하나님께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긍휼이 끝이 없으신 하나님, 그래서 어떤 과정을 거치든 결코 진멸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상대의 흠을 드러내고, 없는 잘못도 만들어 링에서 제거하려고 덤벼들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에게 있는 죄도 용서해 주시면 죽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25)”

세상에 흠 없고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짓지 않고 의롭고 완벽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브라함도 자기 살기 위해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습니다. 오늘날 이런 아브라함으로 어떻게 다룰까요? 이삭도, 야곱도, 노아도, 모세도, 솔로몬도 다 흠이 있는 인간에 불과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부하 부인을 간음하고 아이까지 갔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살인 교사하여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 자살을 수없이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자가 끝이 없으신 하나님, 긍휼이 끝이 없으신 하나님, 그래서 어떤 과정을 거치든 결코, 진멸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 자살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절망의 끝에도 계시는 하나님과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우리는 절망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고난의 현장에서 절망하지 말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1, 22, 25-26).

지금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레미야가 그 엄청난 고난의 현장에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진노의 매로 인하여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싫어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을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하듯 하나님이 징계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연단으로서의 고난입니다. 학생이 공부하고 군인이 훈련하는 것과 같은 고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과 같은 인물이 당한 고난입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그를 국무총리가 되게 하도록 훈련한 것입니다.

(2) 자발적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의를 위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피하면 얼마든지 당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자 굴 속에 들어가기도 했고 풀무 불 속의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 전하다 죽은 스데반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3)징계로서의 고난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당하게 되는 고난입니다. 다윗이 간음했다가 결국 아들이 죽습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습니다. 달콤합니다. 아름답습니다. 편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길지 못합니다. 먼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양심에 조용히 충고하십니다(요14:26). 그래도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채찍을 드십니다. 그 채찍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때로는 육신의 질병을 줍니다. 사업의 실패 줍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①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

②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잠3:12)"

③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히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히 12:10)"

그러므로 신앙인은 징계로 인한 고난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회개하며 하나님의 베풀어 주시는 구원을 바라보고 기다려야 합니다. 징계를 받을 때는 잘못을 빨리 회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변명할 것없습니다. 자살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가던 길을 돌아와야 합니다. 끝까지 고집하면 결국 망합니다. 죽음 밖에 없습니다. 험난한 길이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돌이켰는데도 바로 회복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회복 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참 소망은 인내의 기다림이 동반하는 것입니다.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근신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 절망의 끝에서 어떻게 해 주십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구하는 영혼에게 선을 베풀어 주십니다(25). 믿습니까?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은혜를 준비하셨을 것을 믿고 그 은혜를 갈망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선을 베풀어 주십니다. 기다리는 것은 바로 구원을 베풀어 줄 때까지 선을 베풀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둘째, 고초와 재난을 내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끝에서도 계시는 하나님이 기억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19-24).

예레미야는 절망의 늪에서 무엇을 합니까? 19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 고초와 재난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것을 기억하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이것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자신이 붙들고 고민하며 좌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께 의탁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 16:3)"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시 37:5)"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인생의 고초와 재난, 쑥과 담즙을 주님께 다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자꾸 내가 그것을 기억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맡긴다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길 원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 문제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더 잘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땅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문제에 집착하면 벗어날 길이 없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하는지는 바로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입니다. 자비는 ‘헤세드’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시는 무한하신 사랑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를 보고 사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계약에 의한 사랑입니다. 그 어떤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끈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적이나 위험이나 칼 그 어떤 것도 십자가의 핏값으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계약 때문입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아버지는 끝없이 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태에서 조성하여 부른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우리를 아시고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긍휼은 끝이 없습니다. 결코 우리는 진멸되지 아니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인간처럼 변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이 지속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꾸 상황을 보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입니다. 다 없어져도 하나님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우리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가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건강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땅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여호와 한 분으로 무인도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기업이란 부모 혹은 근친으로부터 상속받은 토지 등의 재산을 말합니다. 기업은 한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소유한 최고의 가치요 소망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만으로 예레미야처럼 우리는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를 고생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님을 깨닫고 이제 고난을 감수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27-33).

3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여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으로밖에 교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밖에 교훈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 해서 안 듣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주었는데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비참한 길로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옥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옥의 형벌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비참한 인생살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자들을 철저히 징계하셔도 그들을 일시적으로 고통스럽게 하신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그들을 향한 품고 계신 하나님의 선하신 마음은 절대 불변하십니다. 징계를 통해 더욱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징계는 택한 백성을 향한 영적 각성을 위한 일시적인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일시적으로 멍에를 메우게 했다는 사실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27-28, 30).

젊었을 때 멍에라는 말은 고난은 그것이 최종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 훈련으로 다가오는 고난을 좋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40년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징계로 다가오는 고난의 과정을 불평과 원망속에서 보낼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훈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주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련은 성장의 법칙이요, 우리의 인격은 이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서양 격언에 "냇물에서 잔잔한 돌들을 치워버린다면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시성 단테는 사랑하는 애인 베아뜨리체와 사랑의 파탄이 생기지 않았다면 저 유명한 단테의 "신곡"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짜르트는 가난과 굶주림과 죽음의 그림자가 위협하는 아래서 불멸의 작품 "진흥곡"이 나왔으며, 헬렌켈러의 눈, 귀, 입, 삼중고의 신체의 불구가 아니였다면 새 교육가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 라이스 여사는 '고난이야말로 변장된 축복'이러고 노래하였습니다. 고난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도록, 의지하도록 하는 축복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을 때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29).

티끌은 진흙이나 먼지를 말합니다. 입을 티끌에 댄다는 말은 티끌이 입에 닿을 정도로 하나님께 머리를 숙여 몸과 마음을 모두 완전하게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순종할 때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 성숙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을 때 순종해야 합니다. 그 때 고통은 열매를 맺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인물을 보십시오. 모세, 아브라함, 다윗, 욥, 요셉, 바울 이들이 이 고난의 간을 건너면서 배운 것들이 무엇이겠습니까?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않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잠깐 근심하게 하나 하나님의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징계를 하는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죄를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한 현실에만 집착하지 말고 약속하신 미래의 회복을 소망하고 현재의 고난을 인내해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사를 성취하는 한 과정인 것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인생이 고생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인격을 훈련시키고 결국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고난의 강을 건널 때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4:14)

피할 길을 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절망의 끝에도 그곳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고,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그 문제로 포기하거나 좌절하면 자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 인자와 자비가 무궁하신 하나님,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 끝까지 심판하여 처형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고 살려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어나야 합니다.

스스로 의롭다하며 교만을 떨며 자기 의를 입증하지 말고 하나님께 깨끗이 회개하고 절망의 끝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를 고생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님을 깨닫고 고난을 감수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아멘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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