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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믿는 사람(누가복음24:25-3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529 추천수:0 220.120.123.244
2020-04-12 17:46:59

부활을 믿는 사람

누가복음24:25-35

 

세계는 지금 보이지 않는 코로나 19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유명인도, 부자도, 권력자도, 노인도, 젊은이도, 남자도, 여자도 죽었고, 의학적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료인도 200명 이상 죽었습니다. 인간은 콜로나 19가 아니어도 100% 죽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일까요. 죽음 이후의 세계는 없을까요?

이것에 대하여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죽음 이후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레이몬드 무디(Raymond Moody)박사는 원래는 철학과 교수였다가 의과대학에 다시 들어가 의사가 된 분인데 임사체험을 한 163명의 사례를 모아 <사후의 세계(Life After Life>란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사고나 질병으로 잠깐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갑자기 영혼이 자신을 떠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밝은 빛을 향해 날아간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기이한 존재를 만나거나 강렬한 행복감, 희열을 경험한 뒤 갑자기 환영이 살아지고 현실 세계로 다시 돌아와 살아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과거의 어두웠던 삶을 청산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였는데,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을 도우려고 했다고 합니다.

10여 년 동안 1300여 명의 임사 체험자를 조사한 미국의 종양학 전문의 제프리 롱 박사도 <죽음 그 후>라는 책에서 임사 체험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의식이 몸 밖으로 나오는 유체이탈 체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인생을 새로운 관점으로 살아갔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죽음 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25:46)"

예수님은 분명하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활을 믿습니까? 우리는 죽는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재림할 때 죽음에서 일어나 영화로운 몸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무엇인가 믿음에 근거하여 살아갑니다. 두 가지로 나눈다면 계시 의존 사색을 하는 사람과 이성 의존 사색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성 의존 사색을 하는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어제 모 일간지 신문을 보니까 부활절을 앞두고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꼽힌다는 85세 모 신부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성서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이스라엘로 건너가 도미니크 회 성서연구소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어ㆍ독일어ㆍ영어는 물론이고 아람어와 히브리어,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능통하다고 합니다. 기자가 왜 부활이 중요한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신부님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이승의 현실이라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지만 부활로 들어가면 말을 잃게 십상이다.”라고 말합니다. 부활 신학은 유대교 묵시 문학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며 묵시 문학에서 육신 부활이 있으리라는 강렬한 희망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과학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이 ‘육신 부활’을 이해하기는 나날이 더 어렵다고 말하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다 죽었는데 그런 예수의 인생을 추수해 가신 것을 부활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생을 살다가,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내가 익으면, 하느님께서 내 인생을 거두어가신다. 수확하신다. 나는 거기에 부활의 깊은 뜻이 있다고 본다.”라고 자신의 부활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의 제목을 기자는 "기독인, 사도신경 오해 말라···부활이 육신소생 아닌 까닭"이라고 붙였습니다.

이성 의존 사색을 하는 바르트와 브르너를 대표로 하는 신정통주의는 예수의 부활을 비역사화 시키고, 하나님의 완전한 지배가 이루어지는 것을 죽은 자의 부활로 봅니다. 불트만은 육체적인 몸의 부활은 신화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에른스트트뢸치(Ernst Troeltsch)는 역사의 진정성 여부는 개연성의 원리, 유비의 원리, 상관의 원리에 의해 진위가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이 원리에 비추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신빙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허구에 대한 열정적인 자기 신념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네 가지를 들어 의심을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의 역사성, 둘째, 부활 기사의 신빙성, 셋째는 빈무덤의 역사성, 넷째는 부활 후 출현의 역사성입니다. 기절설, 도난설, 환상설, 신화설을 말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과연 기절했다가 살아났겠습니까? 죽음의 역사성은 확실합니다.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초기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 유대인들 중의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도록 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 이름의 창설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중에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이겠습니까? 기록된 내용이 역사적으로 신뢰성이 있으려면 첫째는 구전 전승 기간이 짧을수록 사실에 가깝습니다. 불교의 경전은 230-600년, 공자는 약 400년이지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약 30-60년입니다. 둘째는 원본과 필사본의 시간 간격이 짧을수록 진짜입니다. 시저의 갈리아 전쟁은 900년 요한복음은 30-50년 차이가 납니다. 셋째는 사본의 개수가 많을수록 신뢰성이 높습니다. 시저의 갈리아 전쟁은 10개, 플라톤의 4부극은 7개이지만 신약성경은 무려 2만 4천여개가 됩니다. 넷째는 사본들 사이의 내용의 일치성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75%이지만 신약은 99.5%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가서 빈무덤이라고 했겠습니까? 개인 무덤입니다. 만약 꾸며낸 이야기라면 여인들을 증거로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간 제자들이었습니다. 거짓을 위해 순교할 수 있겠습니다. 환상을 보았겠습니까?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를 보십시오. 믿지 않았고(요7:5) 미쳤다(막3:21)고 했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했습니다.(행1:14) 야고보서 기록했고, 유다서를 기록하면서 형이 아니라 주라고 고백했습니다. 유대교의 희생제사, 율법, 안식일을 기반으로 하는 유대 사회가 변했습니다. 1500여 년 동안 이어온 안식일이 예수님이 부활한 날로 예배가 바뀌었습니다. 사실적 역사는 증인에 의해 진위를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부활의 증인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진실성을 입증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듯이 우리도 부활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 믿음도 헛것, 금생뿐만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고전15:16-19)”

이것은 이성 의존 사색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 의존 사색을 해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학을 평생 동안해도 이성의존 사색을 하면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부활을 신학화시키고 합리적 철학화를 시키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사람들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니까 죽음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그날 이후 곧바로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로 생각합니다. 21절을 보니 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권능을 가지고 로마 군인들을 멸절시키고 이스라엘 왕으로 정권을 잡았으면 좋았을텐데 무기력하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을 것입니다. 말과 일에는 능한 선지자였는데 역시 사람에 불과했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망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가 그들을 만나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라고 말합니다(25). 예수님을 살아계실 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 것이라고 여러차례 이야기했지만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어떻게 변했습니까?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주께서는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였습니다. 우리도 부활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부활의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변할 수 있습니까?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말씀을 듣고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계시 의존 사색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하여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내려가는 삶을 살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누가복음 9장 22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누가복음 18장 33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누가복음 24장 7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명백하게 부활을 예언해 주었는데 더디 믿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

부활은 과학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활은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증거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게 나게 한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특별 계시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믿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나 여기 있다 보라 부활 했어"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사도신경은 신학적 사유나 과학적 실험을 통해 나온 믿음이 아닙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나오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요한복음20:29에서 “그때 예수님이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성경 말씀을 믿고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 다가와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천국이 있고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산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사명 붙들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부활의 소망으로 뜨겁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끝난 것으로 안 이들은 절망하며 엠마오로 내려갔습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으니까 확신이 없으니까 무기력하고 슬프게 합니다. 기대가 없습니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으로 삽니다. 그들을 보십시오. 안식 후 첫날 바로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모든 된 일”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죽은 슬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14). 비관적인 대화를 합니다. 부정적인 대화를 합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어 보니까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더라고 했습니다. 낙심한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왜 예루살렘에서 되어진 일을 혼자만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그 밑에 있는 내용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죽었고 무덤에 가보았자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교회 다니며 사업하던 사람이 사업 망하고, 가정이 파탄나고, 건강이 이제 끝났고, 인생 종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3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속에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열정이 생긴 것입니다.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미지근한 상태에 있던 사람이 뜨거워졌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눈이 밝아져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저희 눈이 가려져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영안이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 밑에 기록된 제자들을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십니까?

십자가에 못박힌 손과 발을 보여 줌으로 인간의 완전한 육체로 부활하였음을 보여 주십니다.(39) 시각을 통한 이성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만져 보라고 말씀합니다. 촉각을 통해 영이 아니라 확실히 육체를 입고 있으시는 예수님인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 보여 주면 믿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41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직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씀에게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다. 45절 같이 읽겠습니다. 45절 말씀에 보면, '마음 문을 열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열어줍니까? 예수의 영, 성령님이 마음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영안을 열어 주어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여 영안을 열어 주시면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안도 있고 심안도 있고 영안도 있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영적 세계를 알 수 있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 성도님들은 영적인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며 지금 되어지는 일을 보며 실망하고 슬퍼하지 말며 영원한 세상을 보고 열정적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임사 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보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가 부활의 능력을 체험받고 얼마나 뜨겁게 살았습니까? 역사사 요세푸스가 기록한 12 제자의 순교에 의하면 베드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주님과 같은 모습을 할 수 없다며 거꾸로 못박혀져서 순교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살았고, 안드레는 헬라에 가서 부활을 전하다가 아가야 성에서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순교했고,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가 되었으나 헤롯 아그립바왕의 칼에 순교했으면 빌립은 소아시아 브르기아에 가서 부활을 전하다 기둥에 매달려 찢겨져 순교했다고 합니다. 바돌로메는 알메니아에 가서 부활 전하다 수 없는 매질을 당하 다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고, 도마는 인도에 가서 부활을 전하다 현장에서 군인들이 던진 창에 맞아서 순교했답니다.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부활을 전하다 칼에 순교했고, 야고보는 군중들이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밀어 떨쳐, 시몬은 이디오피아에서 칼날에, 다대로는 파사에서 활에 맞아, 맛디아는 이디오피아에서 군중들이 수없이 던지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영안이 열려 부활을 확신하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바울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얼마나 뜨겁게 살았습니까? 부활의 신앙을 가진 우리는 가정생활도 교회 생활도 직장생활도 뜨겁게 열정을 가지고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남북 전쟁 때 대령으로 참전하여, 전세가 불리해 후퇴를 하던 한 지휘관이 그만 자신의 지휘도를 놓고 왔습니다. 장교가 지휘도를 놓고 왔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가지러 다시 적진 속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한 소년 병사가 그 지휘도를 찾아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지휘도를 찾습니다. 하지만 거의 다 돌아올 무렵 그만 소년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죽어가던 이 소년이 대령에게 지휘도를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령님,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대령님은 죽는 것이 두렵습니까?"

당시 무신론자이자 회의론자였던 콘웰 대령은 소년의 시체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오! 하나님, 이 어린 병사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부활을 믿는 한 소년의 죽음 앞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코넬은 부활의 주님을 위해 남은 인생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영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니까 인생이 달라진 것입니다. 예일대를 졸업한 사람입니다. 군인이었습니다. 변호사였습니다. 언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학교에 들어갔고 뒤늦게 38세때 목사 안수를 받아 40년 동안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1925년 82세로 타계할 때까지 6000번 이상 대중강연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 템플대학을 세운 러셀 콘웰입니다. 병원 2개를 건립해 가난한 자를 무료로 진료해 주었답니다.

 

3. 우리는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죽음으로 끝난 줄 알고 그들은 슬픈 빛을 띠고 어디로 갔습니까?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엠마오라는 마을로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22-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믿지 않고 엠마오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3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곧 그 시"는 "바로 그 때"라는 뜻입니다. 29절을 보면 그때는 이미 저물었을 때입니다.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려면 적어도 10km 이상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열한 제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신들의 체험을 생생하게 증거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한 것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자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떡을 주니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떡을 받아먹은 것입니다. 직접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보십시오. 말씀을 들을 때 더디 믿고 미련한 자들입니다(25). 그런데 눈이 밝아진 후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32).

 

제자들도 보십시오. 그렇게 눈으로 보고 만져 보았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42-43절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식사를 하며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체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 체험하고 내려가는 인생 도피하는 인생이 아니라 올라가는 인생 증거하는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죽음을 초월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냉혈적 신앙이 변하여 정열적 신앙으로, 불확실한 신앙이 확실한 신앙으로, 도피적 신앙이 참여의 신앙으로, 소극적 신앙이 적극적 신앙으로 변했습니다. 새 힘과 용기를 얻어 부활이 증인이 됩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내려가 도피하는 인생이 아니라 올라가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도 보십시오. 오순절 설교를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야 내가 봤어 믿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0-32)" 구약을 통해 예언된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보십시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할 때 "야 내가 보았어. 믿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말씀대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코로나 19사태도 일부 언론은 성당은 직영점, 절은 프랜차이즈, 교회는 자영업이라고 부당하게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답이 없는 자들은 영안이 없기 때문에 영원한 진리 영원한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막말을 합니다. 부활을 믿은 우리는 죽음 앞에 답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과학이 이성이 죽음 이후의 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로드니 스타크라는 사람이 썼는데 그는 종교사회학자이자 '불가지론자'입니다. 현대 사회학적 이론과 분석 방법을 동원해 초기 기독교(초대교회)의 급성장 요인을 분석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염병이 창궐할 때 기독교인들이 헌신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에 당대 사회의 인정과 지지를 받고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 공동체는 치사율 50%를 기록하는 전염병 앞에서도 서로를 돌보며 위험을 무릎쓰고 환자들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츠빙글리는 흑사병으로 인해 취리히 인구의 적게는 1/4, 많게는 1/3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고 자신의 자녀를 잃고 자신도 흑사병에 걸렸지만 목회자로서 죽음 이후의 부활을 전하며 매일 병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주님, 나를 도우소서. 나의 힘, 나의 반석이시여 문밖에서는 죽음이 문 두드리는 소리 나를 위해 못 박히신 당신의 손을 높이 들어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나 당신의 음성이 내 생애의 한낮인 지금이라도 내 영혼을 부르신다면 나는 순종하겠나이다. 신앙과 소망 안에서 이 땅을 포기하고 천국을 얻고자 하나니 나는 당신의 것이니이다.”

만약 "고전 사회가 이런 재난에 의해 지축이 뒤흔들리고 희망을 잃는 일이 없었더라면 기독교가 지배적인 신앙으로 부상하는 일은 없었을 것"라고 말합니다. 그는 “전염병은 이방 종교와 헬라 철학이 설명하고 위로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던 반면, 기독교는 왜 인류가 이런 끔찍한 시대에 봉착하게 됐는지 보다 만족스러운 해명을 제시했고 희망찬, 때로는 활력적인 미래상을 제시했다"고 말합니다. "초기부터 기독교의 사랑과 선행의 가치관은 사회봉사와 공동체 결속으로 현실화됐다. 재앙이 닥쳤을 때 기독교인은 더 훌륭하게 대처했고 그 결과는 '월등히 높은 생존률'이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매번 역병이 휩쓸고 간 후, 기독교인은 새로운 개종 없이도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입니다. "역병을 계기로, 이교도가 주류였던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기독교인이 주류인 사회적 네트워크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주장합니다.

재앙이 찾아왔을 당시, 이교도와 철학자들은 무기력했다고 말합니다. 죽음 이후의 답이 없는 것입니다. 전염병이 제국에 창궐할 때 그들의 말은 애매한 소리를 주절거릴 뿐 답이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설명과 위안을 제시했고 '행동을 위한 처방'까지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충격에 휩싸인 생존자들은 실종된 친족과 친지를 위한 천국이 존재한다는 비전에서 따뜻하고 즉각적인 치유와 위로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다른 이를 간호하고 치유하다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앗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던 이교도들은 아픈 자들을 내쫓았고 가장 가까운 자부터 도망쳤으며, 병자가 죽기도 전에 내다버리고 매장하지 않은 시신을 흙처럼 취급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이 없다고 세상이 전부라고 사는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 믿음도 헛것, 금생뿐만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고전15:16-19)“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우리가 부활을 믿는 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에 근거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시길 바랍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영안을 열고 영원한 내세를 바라보며 뜨겁게 사시길 바랍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나만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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