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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은혜(누가복음 23:39~4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805 추천수:1 220.120.123.244
2020-04-05 04:37:02

십자가의 은혜

누가복음 23:39~43

 

이번 주간은 예수님께서 구원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격었던 십자가의 고난과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오늘은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군중의 환호 속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공식적으로 메시아를 선언하시는데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바닥에 종려나무잎을 깔았기 때문에 종려 주일(palm Sunday)이라고 합니다. 고난주간이 언제부터 지켜지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롬 6:3-5, 고전 11:23-26의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이 전 교인의 공식적인 절기로 공개적으로 지켜진 것은 A.D.313년 콘스타티누스 대제의 신앙 자유령이 포고된 이후부터입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에 예루살렘 입성, 성전 숙청, 감람산 강화,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십자가 처형과 장사 등 그야말로 인류구원을 위한 예수님 공생애의 절정적 사건이 전개되었는데 다양한 방법으로 고난주간 행사들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해마다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를 하면서 고난주간에 일어난 기록된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를 하였고 성찬식을 했습니다. 부활주일 감사헌금을 통해 해외에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종려 주일에 백성들이 외투를 벗어 바닥에 깔고 나귀가 그 위를 걸어오도록 했는데 그것을 기념하여 외투 기부하는 행사를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목요일에는 예수님께서 발을 씻긴 것처럼 세족식과 성찬식을 하고 대부분의 교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은혜에 동참하기 위해 금식하고 그것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섬기는 데 사용합니다. 고난주간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는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용서하는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사랑하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평안과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자유와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사랑과 소망을 누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영광과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살게 하려고, 우리를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하려고, 구원받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고 사는 사람과 이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그 대표적인 사람 둘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둘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십자가의 은혜를 누렸고, 한 사람은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려야 할 십자가의 은혜는 어떤 은혜입니까?

 

1. 우리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는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누린 사람과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한 사람이 무슨 차이가 오늘 본문에는 명확히 들어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지옥에 간 강도를 보십시오. 같이 십자가를 달리면서 예수님께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3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그는 행악자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달릴 정도로 악행을 저지른 죄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조롱합니다.

이 비방과 조롱의 소리를 듣고 있던 한쪽 강도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4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정죄”란 “판결, 선고”를 뜻하는 말로 “동일한 사형선고를 받고서도”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꾸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4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그는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인정했습니다. 천국에 간 한 강도는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자기가 사형선고를 받아야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는’이라는 단어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보십시오. 자신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 죄의 댓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지옥 가고 지옥의 형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아무나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동일하게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고 죽고 하나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며 구원을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지만 평생 믿음으로 살았던 파스칼은 인간을 두 종류로 분류했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과,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죄인이다. 즉 희망이 없는 죄인과 희망이 있는 죄인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정신과 의사 스캇 펙 박사는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일관된 고집을 부린다고 말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지은 죄보다 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완고성과 경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악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입장이나 권익을 포기할 마음은 조금도 없고 남에게 죄를 덮어씌우며 책임을 전가한다고 합니다. 악한 사람은 자아도취에 빠져 “고집 의지‘가 있어 죄를 끝까지 인정하지 하는다고 합니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죄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면 될텐데 책임을 전가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고발은 잘하지만 죄의 고백을 잘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믿는 은혜받은 강도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40절에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비방하는 강도를 향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 우리가 죄인인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절대적인 죄의식보다는 조금 잘나면 우월의식이 생기고 조금 못나면 열등의식이 생깁니다. 감옥가면 모두가 억울하다고 한다고 합니다. 자기만 들켜서 억울하게 감옥에 왔다는 것입니다.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나와 사람 앞에 서 있는 나는 똑같은 사건이지만 차이가 납니다.

사람 앞에 서 있는 나는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는 “당연하다. 죽어 마땅하다. 죄인이다. 억울하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몰라서 그렇게 드러난 것이 그정도이지 바울처럼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십시오. 왕족입니다. 경건하고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이사야 6:5)”라고 고백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는 포장하면 포장할수록 더욱 곪아 터지게 되어 있고, 죄는 덮어 높고 위장하면 더욱 인생은 죄의 깊은 늪에 빠져 무기력해져 버립니다. 죄는 회개하고 고백해야 사죄의 길이 열리고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야 구원받은 강도처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고 있는 사형수 같은 죄인일지라도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구원은 죄 없는 자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회개하는 자가 받는 것입니다. 천국은 죄가 없는 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는 자만 들어가는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2:14)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1서 1:9)”

이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죄를 깨닫고 통곡하고 회개했습니다(눅22:62) 다윗도 간음하고 살인하는 죄를 졌지만 애통하며 회개했습니다(시51:17). 어거스틴도 방탕한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께 나와 참회하며 용서를 받고 성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 1:18)”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인이 은사를 받아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아 맞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람 앞에 가면 두려워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은 진짜인지 알아 보기 위해 그 교인을 만났답니다. 그 목사님은 과거 젊은 시절에 지은 죄로 항상 고민하고 회개했는데 마음은 여전히 개운치 못했답니다. 그래서 그는 교인에게 물었답니다. '제가 젊은 날에 지은 죄로 늘 마음이 괴로운데, 제가 무슨 죄를 범했는지 알아맞힐 수 있겠습니까?'

그 교인은 자기가 기도해보면 알아맞힐 수 있다고 장담했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목사님을 찾아와 놀라운 답변을 주었답니다.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셨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나지 않으신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며 우리를 정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십자가의 보혈로 다 씻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25)”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것이 믿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아무나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압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통해 이 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고난 주간에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죄용서의 은혜를 누리시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참된 구원자로 믿는 은혜입니다.

이 강도들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만남의 결과가 십자가형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죄의 대가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두 강도가 동일하게 만났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만남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삶을 역전시킬 수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비방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라면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그를 꾸짖으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1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무죄하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인간이 무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죄합니다.

자신이 형벌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예수님의 형벌을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죄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여 형벌을 받는 자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 강도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도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 보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그의 마음이 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34절 말씀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지식은 있었지만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치적으로 매도당하면 억울하게 죽으면서 십자가에 달려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하며 죽이는 자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용서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사람은 죽음 직전에 모두가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짜라면 그들을 저주고, 욕하며,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 가운데서도 용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진짜구나’ ‘진실은 다르구나’라고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자기 경험의 한계 속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허수아비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비난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짜 모르니까 사람들이 메시아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선포하시는 용서의 메시지, 구원의 메시지, 사랑의 메시지를 들으면 예수님이 구원주라는 사실을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사랑하시는 예수님, 저주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예수님,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구원사역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을 진짜 알게 되면 인간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에 밀림 속에 있는 마을을 찾는데 알지 못해 아프리카 원주민 한 분을 가이드로 고용을 했답니다. 그런데 전혀 길 같지 않는 길로 계속 갔답니다. 그래서 가다 말고 선교사님이 정색을 하고 당신이 가는 길은 길이 아니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원주민은 빙그레 웃으면서 선교사님에게 말했답니다. “선교사님, 제가 길이에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구원받는 길입니다. 죄를 해결받는 길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입니다. 천국으로 안내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거짓말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사기를 쳤겠습니까? 아니면 정신병자였겠습니까? 정신병자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원수까지고 사랑하라고 말씀하겠습니까? 사기꾼이 정신병자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누가복음 6:31)”하라는 고상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진실로 알게 되면 십자가에서 은혜받은 강도처럼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모든 과정을 진행하던 로마 백부장이 마지막 다 이루었다고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어떤 고백을 합니까?

47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마가복음 15장 39에는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두 강도가 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강도는 믿었고 은혜받지 못한 강도는 믿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참된 구원자로 만나면 인생이 역전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돈을 허비하고 시간을 허비했을지라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나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집니다. 모든 부끄러움 역전되는 인생이 펼쳐집니다. 슬퍼하던 인생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낙담하고 우울하던 인생이 희망과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참된 구원자로 만나 믿고 은혜를 누리는 고난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은혜입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메시아이면 지금 우리를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지금 구원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메시아라고 말하느냐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라면 억울함을 풀어 주어야 하고, 하나님이라면 병도 낳게 해 주어야 하고, 하나님이라면 부자도 되게 해주어야 하고 하나님이라면 지금 홍해도 갈라주고 여리고성도 무너뜨려야 믿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힘없고 초라하게 백성들과 군병들과 종교 지도자들 앞에 조롱당하고 처형당하는 예수님이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지극히 현세 중심이고 자기 중심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을 모르는 것입니다. 지극히 현세 기준, 자기 기준, 자기 이익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 자신이 왕이 되어 사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은 강도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을 붙이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는 에수님을 보고 그는 그것은 죄명에 불과하지 진짜 예수님이 말씀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이 땅이 아니라 지금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아마 그도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라를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를 통해 말씀하신 천국의 실제를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가는 길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예수님은 천국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 따라 가다보면 천국 가는 것인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요11:25-26)”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 나라의 왕은 예수님인 것을 믿었습니다. 그 나라가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나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내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한 사람은 영원한 세계 천국을 믿지 않고 있으면 한 사람은 영원한 천국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이 왕으로 죽어가고 있고 한 사람은 자신이 왕이 아니라 예수님이 왕인 것을 믿고 있습니다.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천국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자신이 왕으로 사는 사람과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왕이 되어 자신의 왕국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지막 죽음 앞에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자기 왕국은 신기루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무나 내가 왕이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상에서 은혜를 받고 그는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며 예수님을 통해 그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고 살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십자가에서 은혜를 받고 예수님께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구하는 그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에게 낙원을 약속해 주시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영원한 낙원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천국의 왕이십니다. 계22:1-6을 보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가 나옵니다. 그곳은 생명 나무가 있습니다. 다시는 저주가 없습니다. 계시록 21장 4절에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라고 말씀합니다. 슬픔도, 눈물도, 이별도, 죽음도 고통도 질병도 없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입니다.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며 예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십자가의 은혜는 받는 강도는 그곳에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씀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다 이런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순전히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단 신천지가 주장하는 것처럼 교주 이만희씨를 이긴자로 믿은 것도 계시록의 실상을 안 것도 아니고 안식교와 같이 안식일을 지킨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같이 유월절을 지킨 것도 아닙니다. 구원파와 같이 몇 년 몇월 며칟날에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안 것도 아닙니다. 요즈음 전염병으로 온 세상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죽음의 전염병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100% 사망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와 죽음의 전염병을 십자가에서 해방시켜 버렸습니다. 사탄의 저주와 멸망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죽음과 죄를 이길 수 있는 백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과 저주와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문제는 모든 철학과 종교와 윤리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유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나 라마교 등 모든 종교가 죄와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2) 믿습니까? 이것을 믿는 것이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2:21)”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우리는 천국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천국의 맛을 보며 살다가 천국에 가야 합니다. 강도처럼 구원받고 나사로처럼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지 말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한가지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 부부가 어느 휴일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다가 갑자기 그들의 가정이 작은 천국이라는 느낌이 들었답니다. 너무 감사해서 남편이 "하나님 저희 가정에 천국을 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감사 기도를 드리는데 아내의 마음속에 이런 천국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들이 경험한 천국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남편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니까 남편도 "그럼 오늘 누군가와 꼭 천국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지"하고 거들더랍니다. 그래서 오늘 누군가와 이 천국의 기쁨을 나누게 해달라는 기도로 아침 기도를 마무리했답니다. 그날 점심에 부부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한 중년의 여인이 혼자 쓸쓸히 식사하였답니다. 아내가 오늘 천국의 기쁨을 나눌 대상이 저 여인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떻게 하지?"하고 물었답니다. 잠시 묵도하던 부인이 제안을 했답니다. 자기가 엽서 한 장을 쓰겠으니 당신이 저 여인의 식사비를 지불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답니다. 부인이 오늘 하늘나라의 기쁨을 나누고 싶어 식사비를 지불하고 간다는 내용을 적고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시기를!"이라고 인사카드와 함께 남편은 그가 이 여인의 식사비를 지불한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잠시 후 식사를 끝낸 여인이 자신의 식사비를 누군가 지불하고 카드 한 장을 남긴 것을 받고 그 카드의 내용을 읽었답니다. 그 여인은 놀란 표정으로 카운터 옆자리에 앉아 무엇인가를 노트를 적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더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식사를 다 한 후 카운터에서 쪽지를 받았답니다. 그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신지 모르는 하나님의 천사에게, 저는 교회를 꽤 오래 다녔지만 요즈음 하나님도 천국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사랑이 없는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한 여인입니다. 사실 오늘 마지막 근사한 식사를 이 식당에서 하고 세상을 떠나기로 했는데 나는 여기서 다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고 다시 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신은 천국에서 보낸 천사입니다. 감사합니다. 교회로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올해도 매년 마다 맞이하는 고난주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고난 주간 부활 주일이 다가오고 있지만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함께 모여 정상적인 고난 주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식도 부활절 부활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축제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에 있든지 이 고난주간에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늘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겸손히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십자가를 통해 단번해 해결해 주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은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만 그 천국에 갈 수 있고 이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 천국 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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