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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남(2) 일어나 먹으라(열왕기상19:1-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729 추천수:5 220.120.123.244
2020-01-12 09:29:09

일어남(2) 일어나 먹으라

열왕기상19:1-8

 

2020년 둘째 주일입니다. 새해가 시작되었는데 의욕과 기대를 가지고 힘차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희망과 기대도 없이 무기력하게 보내고 있습니까?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던질 텐데 그것이 나에게 맞으면 주보에 o 표 틀리면 x 표를 해 보십시오. 한 번 정직하게 10가지 질문에 대답해 보십시오.

(1) 요즈음 일하는데 매사 의욕이 없다 ( )

(2) 요즈음 매사 세상이 어둡게 보인다 ( )

(3) 요즈음 사람 만나는 것이 싫다 ( )

(4) 요즈음 몸이 나른하고 활력이 없다 ( )

(5) 요즈음 산다는 것이 의미가 없고 가끔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 ( )

(6) 요즈음 성경을 읽은 적이 거의 없다 ( )

(7) 요즈음 일 주일 동안 기도한 일이 없다 ( )

(8) 요즈음 예배드리는데 기대도 감격도 없다 ( )

(9) 요즈음 신앙 생활하면서 왜 내가 신앙 생활하는지 모르겠다 ( )

(10) 요즈음 나의 믿음이 약해졌다.( )

o 표가 8개 이상 되신 분 있습니까? 심한 영적 침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o 표가 다섯 개 이상 되신 분이 있습니까? 영적 침체의 위기를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경기의 침체, 일의 침체, 마음의 침체, 영적 침체, 삶의 침체가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가족을 위해 살던 사람들이 가족도 싫고 집에 들어가기도 싫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뻔한 것같고 감동도 의욕도 살아집니다. 열심히 교회를 위해 봉사하던 사람들이 매사 의욕이 없어집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회사 일에 매진하던 사람이 회사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가 싫어진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던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도 싫고, 기도하기도 싫어지고, 예배 드려도 예배의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도 싫고, 몸은 나른하고 활력이 없어집니다. 무력감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집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이 없어집니다. 조그마한 서운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고 찬양을 드려도 기쁨과 환희가 없습니다. 경건생활에 관심이 없어집니다. 죄에 대하여 두려움이 적어집니다. 믿음 상실되고, 의욕도 상실되고, 무력감에 쌓여 모든 세상이 어둡게 보입니다. 사명감 상실되고 자신을 파괴시키는 중독에 걸려 신음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 침체에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1. 올 한 해 일의 성취로 일어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신앙인에게 영적 침체가 일어나는 이유는 하던 일이 계획대로 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대로 순조롭게 되면 승승장구하며 일어납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안 되면 의욕을 상실하고 우울증에 빠져 침체됩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연예인도 어느 순간 대중의 인기에서 살아지면 침체되고 우울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자신의 성과를 보며 누군가 인정해 주면 기가 펄펄 살아 살만한데 성과없어 인정해 주지 않으면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십시오. 엘리야 선지자가 나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신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과 대항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그들을 죽이고, 3년 6개월 비가 오지 않았는데 그가 기도하니까 비가 내려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을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7대 왕입니다.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입니다. 왕이 자기 아내에게 엘리야가 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무엇입니까? 그 내용이 18장에 나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린 일입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인 일입니다. 엘리야기 기도하여 3년 6개월 비가 오지 않았는데 비가 온 일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습니까? 얼마나 백성에게 좋은 일을 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했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을 했다고 모두가 좋아하고 자신을 지지해 주고 인정해 주고 환호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이세벨이 어떻게 합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신을 엘리야에 보내어 내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루 시한부 인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회사 생활도 모두가 좋아해도 한 사람만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면 힘이 빠져 버리고 회사 나가기 싫은 것입니다. 목회도 수많은 교인들이 환호해도 한 사람만 집요하게 괴롭히고 비난의 편지를 쓰고, 원수시하고, 사사건건 시비하면 힘이 빠지고 사임하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에서 헌금하여 커틴을 만들어 달아 놓았는데 누군가 누가 저런 커틴을 해 놓았냐고 한 사람이 비난하면 “다시는 교회일 안한다”고 마음 먹고 하나님의 일을 멀리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힘이 있는 자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자 엘리야는 어떻게 합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서 어떻게 합니까? 도망을 갑니다. 어디로 도망을 갑니까? 유다 땅 브엘세바로 도망을 갑니다. 유다의 남단입니다. 엘리야가 머물렀던 이스르엘로부터 무려 142km 정도나 떨어진 곳입니다. 이세벨의 권세가 미치는 북이스라엘을 떠나 유다의 남쪽 국경 지대까지 멀리 피신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어떻게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홀로 하룻길 쯤 광야도 더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왜 도망했습니까?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도망하여 엘리야는 무엇을 합니까?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라고 죽여달라고 절규를 합니다. 조상보다 못하다고 자기 처지를 비관하며 낙담하고 자살 지향적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패배감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우울증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한때 갈멜산에서 불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던 기도의 영웅이, 용맹스럽게 왕의 수레보다 앞서 달리던 엘이야가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민망한 헛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다스리는 이런 불의한 세상, 이런 모순된 세상,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성과를 인정해 주지 않는 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이 세상과 이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구는 엘리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킨 모세도 그랬습니다(민11:15).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렘20:14-18), 고난의 종 욥도 그랬습니다(욥3). 단 순간에 12만명을 하나님께 돌아오게한 요나도 그랬습니다(욘4:3). 구약 시대 최대의 영적 부흥을 일으킨 주인공도 깊은 침체에 빠져 죽여달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보기는 보았는데 현실 인식을 잘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부정적 생활사건과 긍정적 생활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생활 사건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켜 스트레스 호르몬을 계속 분출하게 만들고 걱정과 근심, 불안에 사로잡히게 하여 결국 정신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 여인에게 집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왜곡된 현실인식을 한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자신을 따르며 존경하는 많은 성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자신을 비난하면 흠만 찾아 적대시하는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모든 에너지를 다 소비하고 기진맥진하여 엘리야처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하는데 잘 못된 것을 보며 집착하면 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 전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아무리 거대한 힘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체험했는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다가온 이세벨의 말이 그대로 될 줄 알고 도망간 것입니다. “나를 죽인다는 이세벨의 말이 현실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비난하는 저 사람의 말이 현실이 되겠구나하고 침체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병이 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을 믿지 않고 의사의 말에 더 집착하여 곧 죽겠구나 하고 침체에 빠져 버립니다. 현실 경기를 보고 내 사업 망하겠구나 하고 깊은 슬럼프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울증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깊은 영적 침체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엘리야를 보고 어떻게 하십니까?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천사를 보내어 지친 육신을 만져 주십니다. 육체적 탈진과 정신적 우울증이 극에 달해 깊은 잠에 빠져있는 그를 깨우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실패와 좌절로 죽기를 원하는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만짐은 악인에게는 심판이 되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권위를 부여해 주는 상징입니다. 그를 위로하고 격려할 뿐 아니라 사명감을 회복하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능을 부여해 주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준비해 놓고 일어나 먹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전에도 도피 중에 있는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서 먹여 주었습니다.(17:6). 가난한 과부를 통해서(17:13-16) 먹여 주었습니다. 이제는 천사를 통하여 먹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먹여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음식을 먹지 않고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일어나 먹고 다시 누웠습니다. 영육간에 지치고 지친 상태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시 어떻게 하십니까?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시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고 합니다. 왜 일어나 먹으라고 했습니까? 죽지 않고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살아서 갈 길을 가게 만들기 위해섭니다. 그 갈길이 어디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산 호렙입니다.

그는 그 음식물을 먹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물(하아킬라 하히)의 힘을 의지하여 40일을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일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방법을 발견합니다. 40일을 광야를 지속적으로 일어나 완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공급하는 바로 그 음식입니다. 이처럼 강조하고 지시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40일간의 광야 여정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자가 두 번째로 공급한 그 음식물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천사표 음식입니다. 힘에 의지하여는(뻬코아흐) “힘 안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즉 40일 간의 여정 동안 엘리야가 섭취한 음식은 단지 하나님의 사자가 두번째로 공급한 그 식물밖에 없었고, 따라서 여행하는 40일 간 금식을 하였다고 하는 사실이 본문의 표현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은 브엘세바에서 호렙산까지는 대략 350km 정도인데 하루에 대략 35km 정도로 걸으면 10여일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인데 40일이나 걸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금방 우리로 하여금 40일간 금식한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하고(신9:9.18; 마4:2) 40년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 광야 생활에서 그들을 살리고 일어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만나입니다. 이 만나를 예수님은 직접 자신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이것을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중요한 말씀이니까 요한복음 6장 4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8절에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합니다. 51절에서는 산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떡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먹고 살라는 말입니다. 먹고 힘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먹고 자기 것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죽은 인간에게 자신을 먹고 살라는 것입니다. 먹으면 죽지 않고, 먹으면 영생을 얻고, 먹으면 주리지 않고, 먹으면 결코 내어 쫓기지 않고, 먹으면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먹으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먹으면 영원히 산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을 곧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 47절을 보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능력을 나타내고, 자기 인정을 받고, 자기 성취, 자기 성공을 이루려면 어느 누구도 엘리야와 같은 침체와 우울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일하면서 침체와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일어나는 비결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27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러자 28절에 그들이 물어 봅니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님을 이들의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이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라고 했습니다. 올 한 해 일의 성과를 보며 자신이 원하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우울과 침체에 빠지지 말고 믿음으로 하여 항상 일어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 믿고 사는데 인생의 궁극적인 답은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자꾸 일로 인생의 승부를 보려고 하지 말고 예수 믿는 것으로 인생의 승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보리 이 또한 지나가리라 주어진 내 삶의 시간 속에 주의 뜻 알게 하소서

고단한 인생길 힘겨운 오늘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지나간 아픔도 마주할 세상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고단한 인생길 힘겨운 오늘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지나간 아픔도 마주할 세상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하루를 살아도 기쁨으로 가리 예수 늘 함께 하시네 후회도 염려도 온전히 맡기리 예수 늘 함께 하시네”

직장 일도 믿음으로, 가정일도 믿음으로, 교회 일도 믿음으로, 자녀교육도 믿음으로, 전도도 믿음으로, 봉사도 믿음으로, 헌금도 믿음으로, 사회 봉사도 믿음으로, 선교도 믿음으로 하여 침체와 우울에 빠지지 않고 항상 일어나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올 한 해 나 홀로 밖에 없다고 침체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침체에 빠지는 이유는 자기 홀로 밖에 없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홀로 있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을 때입니다. 나를 도와주고 이 힘든 시기에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나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굴에 들어갑니다. 현실을 도피하고 은둔 생활을 합니다. 이세벨과 바알선지자 아세라 선지자들이 주도하는 현실을 피하여 동굴로 숨어 들었갔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가도 목사님과 교회 주도적 일을 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까지 열심히 했던 모든 것을 그만 두고 싶은 것입니다. 그냥 도피해 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sns도 끊어 버리고, 전화도 꺼 버립니다.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그냥 화장실에 들어가 목을 맬 생각을 하고 옥상에 올라가 뛰어 내리면 평안할 것같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주시는 천사표 음식을 먹고 새 힘을 얻어 호렙산에 갔는데도 그런 것입니다. 요즈음 언어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는데도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실제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영적 침체에서 일어나는 것을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강력한 은혜를 주면 한두 번의 천사표 음식으로 해결될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쉽게 잘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한 번 마음 먹은 것 잘 바꾸지 않습니다. 새벽 기도 안나간다고 다짐하고, 봉사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직장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이제 절교한다고 다짐해 버리면 쉽게 누가 뭐라해도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어떻게 합니까? 9절 하반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합니다. 아무도 없는 굴에 자기 홀로 있었던 것같았는데, 자기 홀로 라고 생각하고 골방에 처박혀 죽을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에게는 없었던 것같은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현실을 도피하고 떠나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물어보십시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이 몰라서 물어보는 말이 아니다. 네게 있어야 할 곳이 이곳이냐는 말입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사명감을 망각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와 사명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때 엘리야는 무슨 말을 합니까?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이 갈멜산에서 바알 신 450명을 물리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유별났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특별히 하나님을 잘 섬겼고 자기 백성들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알아 주지 않고 자신을 이렇게 방치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주의 언약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주의 제단을 헐었다는 것입니다. 주의 선지자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만 남았는데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포악한 박해도 힘들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과 변절이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갈멜산에서 능력이 나타날 때 분명히 엘리야을 환호하며 하나님은 여호와라고 외쳤지만, 힘 앞에서 엘리야를 배척하고 하나님을 떠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세벨이 문제가 아니라 백성들이 더 그를 침체하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살았는데 그들이 알아주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초라한 도망자 신세로 은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백성들은 그곳에서 아무일없이 살고 있는데 자신 홀로 하나님께 헌신하였는데 쫓기는 신세가 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원망입니다. 나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도 없고 사람도 없고 나 홀로 있다는 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동일하게 나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살다가 우울증에 빠지고 침체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나 홀로 남아 일이 계획대로 잘되지 않기 때문에, 나 홀로 남아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비난을 받기 때문에, 나 홀로 남아 능력의 부족을 절감하기 때문에, 나 홀로 남아 부정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침체 되고 우울해 지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를 찾아 가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나만 남았다고 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15절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며 광야을 통하여 다메섹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우울한 현장에, 침체의 동굴에 있지 말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너를 통해 하고자 하는 사명의 땅으로 하나님과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에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어떻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안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7천’이라는 수는 문자적 의미로 볼 수도 있지만 완전수인 7의 배수로서 미래의 이스라엘 역사를 담당하기에 충분한 숫자를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만 남은 것같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남겨 놓고 일을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이 역사는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갈멜산 전투에서도 아합과 이세벨의 박해에 대항하여 엘리야 홀로 남아 있었던 같았지만 그 때에도 오바다가 숨겨둔 100명의 선지학교 생도들이 있었습니다(18:4). 우리는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 모세가 홀로 인 것 같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의 아론을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비록 형이지만 비서처럼 그의 일을 도와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늙어 감옥에 있을 때 홀로 인 것같았지만 디모데 같은 아들이 곁에 있었고 자신의 주치의인 누가가 같이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홀로인 것 같았지만 만군의 여호와가 다윗과 함께 하여 골리앗을 무너뜨렸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까지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우리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광야를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행하여 하나님은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명기 31:6)” 이 말씀을 우리에게 유효한 말씀입니다.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올 한해 홀로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일어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3. 올 한 해 보이는 큰 성과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침체되지 말고 말씀대로 사명 붙들고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외적을 보이는 큰 일을 해야 기가 살고 침체되지 않습니다. 원하는 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성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침체되고 우울해 집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인생에 계속 일어나지 않습니다. 갈멜산의 기적이 계속 일어나면 좋을 것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그렇게 기도하니까 3년 6개월 동안 가물었던 대지가 단비를 내리는 것같은 기적이 계속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영원한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장관이 영원한 장관이 될 수 없고, 담임목사가 영원한 담임목사가 될 수 없고, 부자가 영원한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10대의 건강을 죽을 때까지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나 갈멜산의 기적만 바라보고 그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침체 되어 버립니다. 이제 내 능력의 한계는 왔고 더 이상 미래를 좋아지지 않을 것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더 심해지면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게 났겠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한 때 대단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지금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죽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배척입니다.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먼저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서라고 말씀합니다. 너가 이렇게 인생의 깊은 골짜기에 쳐 박혀 있다고 해서 내가 너를 폐기 처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골방에 쳐 박혀 있지 말고, 부정적인 생각의 늪에 빠져 있지 말고 동굴에서 나와 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서라는 것은 여호와의 종으로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과 복종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17장 1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종인 것을 선포하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신앙에 회의가 드는 것입니다. 산은 그 산입니다. 그 호렙산입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신 그 산입니다(출3) 하나님의 위험을 보이셨던(출19:16-25) 그 산에 엘리야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 기적을 보여 줍니다. 강한 바람, 지진, 불의 시위입니다. 여호와의 현현 때 수반되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출19:16-20).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고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까?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세미한 음성 가운데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 말씀은 침묵이라고 보기에는 소리에 가깝고 소리라고 보기에는 침묵에 기깝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소리와 침묵의 중간이고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고 들림과 안들림의 중간이라는 특이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세미한 소리이기에 엘리야가 자칫하면 못들을 수도 있는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듣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은 그 화려한 기적에 비하면 보일까 말까하는 세미한 것입니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소리로 지나치는 듣지 못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설교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여기서 죽은 자가 살아나면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전하는 말씀은 귀 기울이지 않으면 단지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불과합니다.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저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 있습니다. 현실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재미도 맛도 즐거움도 편함함도 주지 못하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침체에 빠져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교훈하고자 하는 것이겠습니까?

엘리야는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이세벨을 피하여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소리 가운데 말씀하심으로 외적인 이적을 넘어서는 말씀의 중요성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떼마마 닥카’는 ‘작고 평온한’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격동적인 바람이나 지진과 같은 외적 현상이 아니라 작고 평온한 소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임하셨다고 하는 것은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이적과 같은 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종으로서 불로 제물을 사르고, 비를 내리게 하는 등 크고 기이한 이적들을 수없이 행하였지만 이러한 이적을 통한 사역이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자신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한 놀라운 이적을 목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금 엘리야 자신은 이세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진실로 말씀만이 사람들의 강팍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엘리야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만이 영원한 것인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은 한 번 가는 길입니다. 봄도 있고, 여름도 있고, 가을도 있고 겨울도 있는 것입니다. 겨울에 꽃이 없다고 낙심하지 침체의 늪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봄에 먹을 과일이 없다고 불평하며 깊은 우울증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봄에는 봄에 주시는 말씀이 있고, 여름에는 여름에 주시는 말씀이 있고, 가을에는 가을에 주시는 말씀이 있고 겨울에는 겨울에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와 상황과 처지에 따라 주시는 말씀 붙들고 그 때 그 때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적을 본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았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았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가야 믿음도 생기고 믿음이 생겨야 마음도 변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가야 생각도 바뀌고, 말씀이 들어가야 감정도 바뀌고, 말씀이 들어가야 반응도 행동도 습관도 바뀌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가야 능력도 생기고, 말씀을 붙들어야 가치관과 태도도 바뀌는 것입니다.

13절 보십시오. 엘리야는 여호와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당시 여호와의 현현을 직접 대면하면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진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다시 물어 봅니다. 1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엘리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동일하게 물어 보십니다. 동굴에 있는 그가 아니라 사명의 산 그 산에 있는 그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 때 그는 동일한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위엄을 체험하고서도 아직도 자신의 소명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사명을 붙들고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러한 엘리야를 질책하신 것이 아니라 그 온유하신 음성으로 엘리야를 위로하며 앞으로 그가 감당해야 할 구체적인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죽기 전에 해야 할 세 가지 사명을 말씀합니다.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곳이 네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명자는 사명자의 땅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이 없는 것같은 땅이지만 그 땅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고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을 행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땅이지만 그 땅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아도 말씀 붙들고 사명의 땅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세가지 해야 할 사명 첫째는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라의 왕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람와 벤하닷의 군대 장관을 아람 나라 왕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북 이스라엘을 징계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에후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호와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악한 왕 아합의 가문을 멸할 왕입니다. 셋째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할 선지자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말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앞으로 일어날 일이지만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 가와 북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자들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사명의 땅으로 갑니다. 올 한 해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침체 되지 말고 말씀 붙들고 끝까지 주어진 사명의 땅에서 사명을 이루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침체에서 벗어나고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약물을 먹고 운동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근육이완이나 스트레칭, 유산소 운동, 달리기, 수영과 같은 운동 요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심호흡, 단전 호흡과 같은 명상 요법으로 완화할 수도 있습니다. 감사 일기 쓰기, 불안과 분노 등 감정을 다스리는 마음 훈련으로 잠재울 수도 있습니다. 호르몬을 조절하는 비타민, 미네랄 등을 섭취하는 음식 요법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에 근거하여 사명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해 있다고 해도 사명을 다 이루기까지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사명을 붙들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격 갈등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하고 침체된 부부도 어느 날 아이가 교통사고 당하면 아이 살리는 일이 중요하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것을 '칵테일 파티 효과'라고 부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칵테일 파티장에서는 음악소리와 시끄러운 잡담들, 현란한 불빛, 여러 가지 냄새와 예쁘게 입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감각은 자극을 받지만 그 중 한 사람과 대화하면 다른 것은 들어오지 않고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리고 그 사람에게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사명에 붙들리면 다른 요소는 스트레스 요인도, 우울증 요인도 침체 요인도 될 수 없습니다. 불이익도, 불편도, 불쾌도, 불인정도, 가난도, 질병도, 미래의 불확실성도, 격변하는 정국도, 불안한 경제 상황도 일어나는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올해는 일어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사명의 땅에서 주어진 사명을 다 이루시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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