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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창세기17:15-2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259 추천수:0 220.120.123.244
2019-12-29 14:49:23

마지막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창세기17:15-22

 

독일 속담에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다(Ende gut alles gut)'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이 반이면 끝은 전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이 좋아야 시작도 빛이 납니다. 끝이 좋아야 과정도 교훈이 됩니다. 끝이 좋아야 공로도 인정이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끝이 좋아야 합니다. 정치도, 사업도, 직장생활도, 연애도, 공부도, 대인관계도, 결혼도, 만남도, 신앙생활도 끝이 좋아야 합니다. 물건도 끝이 좋아야 명품이 됩니다. 영화는 끝이 좋아야 명화가 됩니다. 좋은 소설은 결말이 아름답습니다. 끝이 좋아야 명품도 되고, 명인도 되고, 명가도 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동생이 조카 하나를 남겨 놓고 죽었습니다. 자신은 결혼하였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당시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은 웃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의 본이 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벼랑 끝에서 웃게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 21장 6절 말씀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게 웃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 나이 100살 때입니다(창21:5). 사라의 나이 90세 때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을 보십시오.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고 75살에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은커녕 아들 하나도 사라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자식을 주겠다고 할 때 속으로 비웃은 사람입니다(창18:12). 자식을 낳지 못하자 종으로부터 멸시를 받았습니다(창16:4). 그런데 누가 사라를 웃게 하였습니까? 누가 아브라함을 웃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은혜를 베풀어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렇게 웃게 하신 것은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완전 불가능한 상태에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웃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삭이란 이름의 뜻은 웃음이라는 말입니다. 웃음을 허락함으로 웃게해 주신 것입니다. 연말이 되었습니다. 웃을 일이 없습니까? 내년을 바라보면 근심과 슬픔만 있습니까?

오늘 날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기업에, 우리민족에게 얼마든지 우리의 인생은 웃게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너무나 합리와 논리, 과학주의의 사고로 추론하면서 시험에 실패했다고 “내 인생은 끝났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연말인데도 사업이 잘 안된다고 “내 인생에는 웃을 날이 없다”고 속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못된 인간관계로 원수가 된 사람이 있다해도 “이제 그 사람과는 끝이다”라고 단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25년 동안 슬픔이 사라지고 한 순간에 웃음이 찾아 옵니다.

세계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하버드 대학에 자녀를 보낸 8명의 부모의 이야기를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든 <하버드 부모들의 자녀 교육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두 아이를 하버드 대학에 입학시킨 성호영 목사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국에서 수학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컴퓨터 공부를 더 심도 있게 하고 싶어 미국 유학을 떠났답니다. 생계를 위해 아내와 함께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아는 사람의 제의로 세탁소를 열었답니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유학 생활이 너무 힘들어 어처구니없는 불평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십니까? 만약 살아 계시다면 아내에게 아기를 갖게 해 보세요. 그러면 내가 당신의 존재를 믿겠습니다." 셋째를 낳은 지 10년이나 지났고 더군다나 한국에서 남성 불임수술을 한 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계시면 왜 이렇게 힘드냐는 망령된 기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구역질이 나고 속이 거북하고 소화도 안 된다고 하여 암이 아닌지를 의심하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답니다. 진찰 결과는 암이 아니라 임신이었답니다. 이것을 알게 된 큰 딸은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어떻게 살아?"라고 걱정하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동생들도 덩달아 울었고 목사님도 순간적으로 '아기는 누가 돌보지, 가게 일손은 누가 덜어주지.'라는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어려운 형편을 아는 사람들은 '셋도 많은데 넷째를 낳아서 어떻게 키우려고 하느냐.'며 근심 어린 시선을 보내었답니다. 그런 데다 의사는 "지금 나이가 좀 많아서 정상아라고 보장은 못합니다. 건강도 안 좋은데 뱃속 아이를 검사해보고 수술합시다."라고 권유했답니다. 그런데 본인이 원망의 기도를 한 목사님은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증거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고민을 뒤로하고 축복의 선물로 받아들였답니다. 넷째를 가지고 식구들은 정신적으로 훨씬 강해졌고, 모든 일은 쉽게 풀렸다고 합니다. 넷째로 인해 쉽게 영주권을 받았고 붕어빵처럼 꼭 닮은 딸은 결국 언니를 따라 하버드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자기 아들도 목사가 되었고 자신도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마지막은 슬픔이 변하여 웃음이 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25년이라는 기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2년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10년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40년이 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이제까지 웃지 못한 인생도 한 순간에 웃음의 인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죄의 올무에 걸려 신음하고 고통받는 인생을 구원하여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사53:5). 지금 어떤 슬픔과 고통에 있을 지라도 우리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우리 인생은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는 인생으로 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사12:3; 35:10). 올 해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올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우울해 하고, 슬퍼하며 낙심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웃게 해 주실 날이 반드시 옵니다. 다윗은 17년 동안 기다리면 쫓겨 당하고 초조하게 살았는데 결국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편 30:11)”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우리 인생은 어느 때든지 얼마든지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은혜로 약속해 주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심으로 결국 마지막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나이가 몇 살입니까? 99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5세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24년이 지났는데도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남자로서 더 이상 아이를 낳게 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라도 경수가 끊어져 더 이상 임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가능성은 인간적으로 100% 없어진 때입니다. 가정에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업에 희망이 없습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양육하는 자식의 앞길에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질병으로 치료될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17장 17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웃습니다.

18장 11절을 보십시오. 웃습니다. 이 웃음이 비웃음의 웃음이겠습니까? 기쁨의 웃음이겠습니까? 말같지 않는 말을 하면 사람들이 “코미디 코미디”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코미디인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말이 되지 않는 약속을 또다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라는 약속을 100% 믿고 떠났지만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은 실제 살아 보니까 믿을 수 없는 약속인 것입니다. 큰 민족이 되고, 이름이 창대해지고, 복의 근원이 되겠다는 약속은 한갓 공수표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올해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법,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내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그저 종교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실제 사라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아브라함이 86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창16:15-16) 그 사건으로 하나님은 13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침묵하였습니다. 16장과 17장 사이에는 13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자연의 이치대로만 생각하고 이성의 법칙대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르밧 과부처럼 당장 먹을 것이 없는데 웃으면서 기뻐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의 아내처럼 부채가 산더미처럼 있는데 기뻐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약속을 믿지 않는 아브라함에게 13년 만에 찾아오신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7장 1절을 보십시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다시 언약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4절을 같이 크게 읽겠습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강조점이 “내 언약”입니다. 너는 지금 그 언약을 부정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부정하는 너에게 계속 유효하게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은 현실에 근거한 자신의 생각의 문제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각을 언약에 근거한 생각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너 지금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다 끝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이 그 언약을 이루어 너를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약속한 것은 꼭 지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해 주시고 있습니다. 19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이나 함께 살았으면 한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변질되는 언약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문제는 생각의 문제였습니다. 자신은 열국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5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사래”를 “사라”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생의 중대한 사건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뜻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사래는 ’왕비‘라는 뜻이고 사라는 ‘열국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언약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매일 말을 통해 고백할 수 있도록 이름을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들의 이름을 부를 때 “그래 하나님이 언약한 그 언약을 반드시 성취될 거야”라는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자신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래 나는 열국의 아비야. 그래 나는 열국의 어미야”를 수없이 되뇌였을 것입니다. 말은 각인력이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저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을 때 “목사님은 고집불통이다”라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각인이 되어 목사님은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한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말은 견인력이 있습니다. 말해 놓으면 그 말이 자신을 끌고 갑니다. 말은 성취력이 있습니다.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고 하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리고 말씀하십니다.

대중가요 노랫말 연구회에서, 가수들을 분석해보았답니다. 결론은 가수들도 노래를 부른 대로 되더라는 것입니다. 가수들은 한 곡의 노래를 취입하기 위해, 똑같은 내용의 가사를 보통 2,000∼3,000번이나 반복해서 부릅니다. 그러다보면 꿈속에서도 부르고, 잠꼬대로도 부릅니다. 무슨 말이든지 3,000번 정도 반복하다보면, 그와 똑같은 일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가수 죽음을 찬미한 노래를 부른 윤심덕은 결국, 1926년 현해탄에 몸을 던져 죽더라는 것입니다. 목포 출신의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애절하게 부르다 49세에 눈물을 흘리며 죽었다는 것입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라고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열심히 불렀던 차중락씨는 뇌막염으로 낙엽 지는 가을, 29세에 요절했다는 것입니다. 김정호씨는 '간다 간다 나는 간다'라는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폐결핵으로 33세에 진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송대관 씨는 '쨍하고 해 뜰 날'을 즐겨 부르더니 정말 쨍하고 해가 떠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를 목청껏 부른 윤항기는 목사가 되어 갈수록 더욱 행복 넘치는 인생을 살고 있답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동생 윤복희와 외롭게 살면서도 '나는 행복합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 걱정 말아요' 같은 긍정과 희망의 노래를 부르다보니 행복한 인생으로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어떤 어려움과 시련과 유혹이 있더라고 살아야 마지막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며 웃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7장 21절을 보십시오. 내년에 이삭을 낳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름까지 시간까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한이 이를 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21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를 돌보시고 행하셨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언약이 25년 만에 성취되었다는 말입니다. 누가 성취시킨 것입니까? 하나님이 성취시킨 것입니다. 무엇으로 성취시킨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시킨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사라도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시키는 진실하신 분임을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히11:11)”

우리는 약속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에 근거하여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슬퍼하며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질병에 걸려있다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5)”라는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 현실을 보고 좌절하고 있다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빌4:13)”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일하다 피곤하여 지쳐 있습니까? 현실을 보며“성가대 못하겠다. 목자 못하겠다 구역장 못하겠다. 사업 못하겠다. 부모노릇 못하겠다”하지 말시고“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 붙들고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꾸 현실에 근거해서 “안 된다. 할 수 없다. 죽는다. 망한다. 끝났다.”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된다. 할 수 있다. 산다. 성공한다. 다시 시작이다”라고 약속붙들고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현실도 중요하지만 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약속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내용이 있습니다.

2019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지 못했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거니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꼭 붙들고 은혜로 약속의 말씀을 성취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로 약속해 주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심으로 결국 마지막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3. 우리는 은혜로 믿음 주신 하나님이 믿음으로 순종하게 해 마지막 웃게 하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17장 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도 그 언약을 지키고 후손도 언약을 지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자신을 믿는 신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언약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하나님이 그 언약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17장 23절을 큰 소리고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의 순종을 한 것입니다. 단순한 순종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을 증표를 보여주는 순종을 한 것입니다. 17장 24절을 보세요. 자신의 나이 99세인데 순종한 것입니다. 당시 뭐 마취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를 흘려야 합니다. 외적이 쳐들어와 다 죽일 수도 있는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믿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25년 동안 훈련시킨 것은 결국 이런 100% 순종의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25년은 결국 믿음 주시고순종하게 하는 믿음대로 순종시키는 순종의 훈련의 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 그랬습니다. 훈련하여 마침내 순종하게 하고 복을 주시기 위한 훈련의 장이 광양 40년이었습니다. 430년의 이집트 노예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 포로 70년의 세월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주시고 순종의 훈련을 시키는 훈련장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을 떠나라고 하면 떠납니다. 가뭄이 들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곳에 가면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 따라 옵니다. 아이을 주겠다는 약속을 거역하고 이스마엘을 낳으면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 따라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이름을 바꾸라고 할 때 순종하여 바꿉니다. 99세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면 이유 따지지 않고 순종합니다. 100세에 아들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모순된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 불문하고 100% 순종합니다. 순종의 믿음을 통해 약속의 축복을 누리고 기뻐하게 만드는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에 대하여 롬 4장 18-21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이제 끝난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습니다.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능히 하나님이 이룰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교훈이라 말씀합니다. 분명하게 로마서 4장 23-24절에는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은 우리를 위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순종의 믿음을 통해 마지막 웃게 되는 아브라함의 사건은 단순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8장 56절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즐거워하고 기뻐한 것은 나의 때를 보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히1:1-2). 예수님에 대한 예표적, 모형론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이삭의 출생과 그리스도의 출생이 모두 미리 선포되었습니다(창17:19; 마1:21). 이삭이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출생했습니다(갈4:4). 출생 전에 이름이 주어졌습니다(창17:19; 마1:21). 초자연적인 탄생이었습니다. 모두가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삭의 출생은 그리스도 출생의 예표가 된 것입니다. 이삭은 오실 그리스도의 확실한 증표요 언약의 첫 열매였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삭을 향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은 단순히 후사를 얻은 것에 대한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장차 언약을 쫓아 이 땅에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는 소망과 예언의 웃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통해 기뻐할 것을 이사야를 통해,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해 놓고 있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61:3)”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렘31:13)”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의 선물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에 대한 약속, 천국에 대한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아브라함이 당했던 것처럼 사람마다 수많은 일을 만나고 삽니다. 아브라함처럼 노아의 9대 손인데 아버지가 우상을 섬기고 사는 가정환경 속에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롯에게 배반을 당한 아브라함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그렇게도 아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이 아브라함처럼 살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 때도 있습니다. 동생이 젊은 나이에 먼저 죽어 괴로워하는 아브라함처럼 뜻하지 않게 사랑하는 가족이 먼저 죽어 고통을 받아야 할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동생이 일찍 죽어 조카 롯을 아들처럼 길러야 했던 아브라함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거운 짐을 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약속을 붙들고 아무리 기다려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아브라함처럼 기다리고 기다려도 풀리지 않는 문제로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적은 사람으로 연합군과 싸워야 하는 아브라함처럼 힘겨운 생활 전선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의 한결같은 공식은 믿음으로 순종하면 웃고 순종하지 않으면 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우리가 믿고 순종하며 나아가면 웃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내어 주신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결국 우리의 인생을 웃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고통과 탄식을 기쁨의 노래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출2:23-25 시30:5)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았으니 믿음의 순종을 통해 마지막은 웃는 인생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사라가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든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1:6)”라고 선포했듯이 믿음의 순종을 통해 우리도 우리 인생을 통해 이런 선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 과정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웃게 해주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라는 책을 보면 어머니에 대한 간증이 나옵니다.

목사님 어머니는 1981년 간암으로 몇 주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전에 한번도 아픈 적이 없이 누구보다 건강했답니다. 현대의학으로 포기하고 집에 돌아왔답니다. 온 가족은 어머니의 생명을 구해 달리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답니다. 목사님의 어머니도 불평이나 원망, 패배의 말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입에 두고 믿음 충만한 말을 했답니다. ‘나는 죽지 않고 살 거야. 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선포할거야.” 가장 좋아하시는 치유의 말씀을 3O~40개 정도 찾아내 종이에 적어 매일 읽고 큰 소리로 선포하셨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답니다.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답니다. 조금씩 병세가 호전되었답니다. 식욕이 돌아오고 몸무게가 불어나기 시작했답니다. 하나님이 어머니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상처를 치유하고 계셨답니다. 몇 달이 지나자 회복세는 더욱 빨라졌답니다. 몇 주밖에 살 수 없다던 어머니는 20년이 흘렀어도 천국에 가지 않았답니다. 지금도 어머니는 아침마다 치유의 성경 구절을 묵상하고 믿음과 승리, 건강에 관한 말을 하지 않고서는 집을 나서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어머니는 다리에 장애가 있었지만 언제나 밝고 긍정적이었답니다. 간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는 삶을 살았답니다. 그 신앙이 아들 조엘 오스틴에게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2019년 마지막 주일 예배입니다.

지금 형편과 상황과 관계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약속해 주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심으로 결국 마지막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믿음 주신 하나님이 믿음으로 순종하게 해 마지막 웃게 하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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