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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하는 삶(빌립보서20, 빌4:10-1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998 추천수:0 220.120.123.244
2019-11-24 13:38:15

자족하는 삶

빌4:10-13

 

미국의 한 여론조사 기관이 “당신의 외모를 바꿀 수 있다면 바꾸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답니다. 그에 대해 남자 응답자의 94%, 여자 응답자의 99%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 뿐 아니라 삶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얼마나 만족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

문화체육관광부는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국민 삶의 질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10점 만점에 6.4로 나타났습니다.

국제 조사에서는 OECD의 36개 회원국 가운데 한국인의 한국인의 삶 만족도 순위는 27위 정도입니다. 잘 산다고 하는 나라 중에서는 하위권에 속합니다.

2018 세계행복지수에서는 10점 만점에 5.88점이 나왔습니다. 삶의 만족도가 그렇게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모든 일에 자족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족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스스로 넉넉함을 느낌”라고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데도 스스로 넉넉하다고 느끼고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로마 감옥에서 언제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데도 두려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같은 사람이 서도 권력투쟁을 하는 교회를 보면서도 그들과 협력하라고 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돈도, 자식도 집도, 노후 보장도 없는데 감옥에 갇혀 질병 가운데 있는데도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어디에 있든 어는 교회에 다니든 어떤 가족 식구와 살든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어 배부르다고 태만하고 교만한 것이 아니라 배고프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궁핍한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 잘되는 모습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기뻐하며, 좋지 못한 환경이라고 불평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는 능력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바울처럼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그리스도와 인생의 체험을 통해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율법학자로 살았습니다. 유대 나라는 제정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대법원장과 같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율법으로 심판하는 최고사법의결기관이었습니다. 즉 행정집행권은 헤롯이 가지고 있었지만 입법 사법권은 산헤드린 공의회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형집행권은 로마 총독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판결 후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스데반을 죽일 때 증인들이 사울에게 옷을 맡긴 것을 보면(행7:58) 바울이 고위 공직자인 형집행관(검사)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겉옷을 맡는 것은 최종책임이 형집행관에게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형집행 중 무고가 입증된 경우 겉옷을 흔들어 중단을 시켰습니다. 그는 제사장으로부터 권한을 받아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고, 타국 도시에까지 가서 그 임무를 감당한 것으로 보아 그는 율법학자였고 검사였으며 외국에 가서도 영장을 집행하는 것을 보면 국제검찰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학부인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경제적 궁핍함이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 남의 후원금을 의지하며 살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스스로 장막을 제작하는 일을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선교하는데 넉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가 선교헌금으로 바울을 후원했습니다. 바울이 여러 교회를 개척하여 세웠지만 그를 후원하는 교회는 빌립보교회밖에 없었습니다. 15,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마게도냐를 갑자기 떠날 때 빌립보교회는 이제 막 세워진 연약한 교회였지만 바울을 선교헌금으로 지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선교할 때도 두 번이나 바울이 쓸 것을 보내어 주었습니다. 그러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선교 후원금이 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에바브로 디도가 선교 후원금을 가지고 로마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 안에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번역에는 빠져 있지만 이유를 말하는 ‘호티’로 그 다음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배려와 돌봄 때문입니다. 바울을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났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선교비를 보내지 않았는데 다시 후원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투옥되었자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 선교비로 후원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멀고 먼 로마라는 좋지 않은 환경, 이단이 틈타고, 교회 내 분열이 있는 교회의 사정, 그곳에 갈 만한 자원자가 없는 것 등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비를 보낸 것입니다. 누가 가져왔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에바브로 디도 편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역시 돈만 좋아하는 구나” 그래서 바로 11절에 그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궁핍한 상태에서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모든 것에 자족하는 것을 배웠으므로 경제적 궁핍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선교비를 보내 주든 보내 주지 않던 자족한 삶을 사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이 자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족이라는 말은 ‘아우타르케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넉넉하고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외부의 환경이나 사람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넉넉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무엇을 통해 배웠습니까?

어떤 형편에서든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은 "일이 되어 가는 상태나 경로 또는 결과"입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가난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후원금을 보내다가 끊을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설교를 못한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이중인격자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태장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 어떤 형편에 처해도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합니까? 이 말은 곧 그가 전에는 자족하는 법을 몰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고통과 가난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자족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번 실팼을 것입니다.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어 로마의 감옥에서 복음과 함께 살면서 마침내 그것을 배우고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족이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건의 훈련과 배움에서 터득되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이론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속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신앙 경험을 통해 그가 풍부하든지 궁핍하든지 늘 만족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낼 수 있는 자족하는 마음을 배운 것입니다.

과거에는 배우지 못했는데 지금은 배웠다는 것입니다. 배웠다는 말은 ‘아마돈’을 번역한 말입니다. 행동이나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바울이 삶을 통해 이미 이를 체득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잘 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것은 배우지 않으면 하지 못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을 통해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한 생활을 하는 비결을 배운 것입니다. 그는 비천에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또한 배웠습니다. 그는 또한 풍부한 생활에 처할 줄 아는 비결도 배운 것입니다. 가난을 겪으면서 가난 속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우는 것입니다. 가난에 처해 보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궁핍하다면 지금 이때는 바울처럼 자족할 줄 아는 것을 배우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언젠가 가난이 지나가면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가난할 때 자족하지 못하면 나중에 부자가 되어도 자족하지 못합니다. 지금 부유하게 살면서 자족을 배우지 못하면 다음에 가난해질 때 자족을 배운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요 실제로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배웠겠습니까?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렴과 목마름과 추위와 헐벗음과 육체의 고난과 정신적 박해를 겪는 갖가지 비천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잘 적응해 나가면서 자족함을 배웠습니다.

사역자로 살아갈 때 물질적으로 부요했던 때가 있었지만 그것으로 교만하거나 방종하지 않고 자족한 삶을 배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외적 풍요로움에 목표를 두고 살았지만 바울을 복음 전하는 사명으로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살았기 때문에 비천하든 풍부하든 그 환경에 연연하지 않고 자족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운 것입니다. 비결을 배웠다는 말은 “메뮈에마이”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을 비법을 전수시키다. 성스러운 비밀을 가르치다는 의미입니다. 문법적으로 수동태로 사용되어 있는데 그 비법을 전수시킨 분이 예수님이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1절의 배우다의 에마돈은 체험을 통해 배운 것을 의미하고 여기에서 말하는 배움은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전수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환경에서 자족하는 모든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족한 삶을 사신 것입니다. 태어날 때도 마굿간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고, 장사 지낼 때도 남의 무덤에 들어갔지만 자족하며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게서 ‘그 멍에를 메고’ 배운 것입니다. 자족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일, 쉽고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깨닫고 바로 잡아가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환경과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자기 충족감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온도계가 아니라 온도 조절계같은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환경 종속적인 삶이냐 아니면 환경주도적인 삶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사람은 높은데 있다고 교만하지 않고 낮은데 있다고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웬만한 평지 풍파가 다가와도 끄떡도 하지 않고, 웬만한 유혹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고 웬만한 시련이 다가 와도 거뜬히 극복하고 살아갑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자기 마음을 비우고 무소유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족하는 마음이 환경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자기만족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주의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체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에서 자족이 아닙니다. 욕구를 충족하거나 욕구를 비움으로 얻는 자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풍족하게 내 안에 채움으로 얻는 자족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과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2.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자족하는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가능합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힘이나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환경에 적응해 나간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줄 아는 능력은 사람의 힘도, 자연의 힘도, 돈의 힘도, 권력의 힘도 아니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힘’입니다. 이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으면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밖에 거하면 자족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을 통해서 어떤 경우에도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초월적인 전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행동도 하나님 안에서 다 용납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능력으로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와 힘과 용기의 원천이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족하려면 어떤 경우든 절대적인 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자족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어떤 여건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능력 주시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괴로움과 궁핌,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족할 수 있었던 능력의 원천은 예수님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조엘 오스틴의 긍정적 사고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최면이나 사고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믿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믿었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 이하여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믿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 때문에 나의 배경 때문에 나의 환경 때문에 자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족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는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자족하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상상 빈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서도 거지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빌 리온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로 살았답니다. 극도의 영양결핍상태에 빠진 그는 병원에 실려 와서도 다른 환자들을 상대로 담배나 초콜릿을 구걸하곤 했답니다. 놀라운 건 그가 60만 달러(약 7억)를 지닌 재산가였다는 것입니다. 영국 브링튼의 앤터니 클라크박사는 상상빈곤 환자 30명을 관찰해 보았답니다. "이들 환자들의 대부분은 지적 수준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었답니다. 매우 높고 훌륭한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존경받는 직업을 가졌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 세상 주인입니다. 주님 한 분으로 우리는 자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정수입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저기 서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 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분만으로 나는 만족 하겠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때 만족함이 없겠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때 나는 만족 하겠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3. 우리는 은혜 안에서 결핍의식이 아니라 풍부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게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있고라는 말은 이미 받았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이미 받았다는 말입니다. 풍부한지라도 이미 풍족하다는 말입니다. 남아 돈다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 준 선교헌금이 이미 풍족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기보다는 바울이 느끼는 주관적 생각입니다. 상대주의가 아니라 절대주의입니다. 그들이 보낸 헌금이 얼마나 풍족했겠습니까? 보내 주다 보내지 않으면 얼마나 불평을 하겠습니까? 10번 도와주다 한 번 거절하면 원수가 되는 세상입니다. 100번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 번 틀어지면 그것으로 끝내는 세상입니다. 바울도 인간적으로 얼마나 서운하게 생각했겠습니까? “내가 감옥에 갇히면서까지 복음을 전하다 세운 교회인데 내가 로마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니까 선교헌금도 보내지 않아”라고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기뻐하면서 모든 것에 풍성하다고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과거 선교헌금 안 보내 준 것 보며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에바브로 디도 편에 보낸 선교 헌금으로 인해 이미 가득 채워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무엇을 합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 담긴 물질적 후원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탐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풍요함이나 유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도들의 풍요함에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유익하도록 영육간에 풍성한 열매를 위해 기도합니다.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풍족하게 채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쓸 것 역시 풍성하게 채 워주시리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18절 하반절에 보십시오. 그들이 보낸 선교헌금은 단순하게 인간에게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풍요롭게 채워달라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영광 가운데 풍성함입니다. 하나님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풍성히 채워주시는 가운데 나타나는 이 땅에서의 영광스러움을 말합니다. 받았으니 마지 못해 주는 풍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풍성함을 따라 마음껏 부어 주시는 풍성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으로 확신을 합니다.

 

이런 풍요의식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면서 삽니다. 마땅히 누려야 할 재물이나 권리, 자격 따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면 만족하지 못합니다. 절대적 박탈감으로 불만족하며 삽니다. 절대적 박탈감은 객관적인 상태에, 상대적 박탈감은 주관적인 느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런 발탈감은 준거 기준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기준은 0을 기준으로 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사는 사람들의 기준입니다. 본래 우리가 아무것도 없이 적신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말할 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자가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운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기준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과 실라가 붙잡혀서 매를 맞고 발에 사슬이 묶인 채로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도 행16:25절을 보면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경을 초월하여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했던 것입니다. 고후 12장에도 보면 바울의 육체에 큰 가시가 있었습니다. 질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께 3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그 말씀을 들은 후에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문제거리로 삼지 아니하고 육체의 가시를 품고 자족하였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어느 성도님의 간증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언니가 동생의 돈을 오천만원 빌려갔답니다. 그런데 형부의 사업이 풀리지가 않는다며 갚지를 않답니다. 그러면서 언니네는 자기들보다 돈을 더 잘 쓰고, 차도 더 좋은 것을 타고, 외식도 자주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 가서 다투기도 하고 그런 언니는 없는 것만 못하다고 화풀이도 했답니다. 그래서 돈을 돌려받는 방법은 기도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했답니니다. 언니가 돈을 갚으면 딱 잘라서 절반 이천 오백 만원을 헌금하겠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마음 속에 “딸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니라.”라는 음성을 들었답니다. 그 때 “하나님 아버지, 섭섭하옵니다. 어찌 돈을 못 받는 것도 은혜이옵니까?”라고 항변을 했답니다. 그 때 잠잠히 가슴을 울리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져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디모데전서 6장 5절에서 8절의 말씀이었답니다. 그날 자매는 ‘내 돈을 떼먹어도 그런 언니라도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른 사람이 쓰지 않고 언니가 쓴 것이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고 나니 마음에 자유가 생기고 평화가 생기게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언니애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언니, 이제 돈 갚지 않아도 괜찮아. 그동안 내가 돈 받으려고 자주 괴롭힌 것 미안해….” 그 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늘 성경을 통해 바울은 인생 말년에 풍족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 정도록 자족하였습니다.

나이들면서 자족하기를 배우면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풍족하게 잘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습니다.

 

자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인생의 체험을 통해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결핍의식이 아니라 풍부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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