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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신앙생활(4) 성취와 싸움, 충성(고전4: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211 추천수:2 112.168.96.218
2019-01-27 06:53:26

 

승리하는 신앙생활(4) 성취와 싸움, 충성

고전4:2

 

새해에 들어서서 우리는 승리하는 신앙생활에 대한 말씀을 계속 듣고 있습니다. 첫 주에는 사단과 영적 전쟁에서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둘째 주일에는 인간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셋째 주인에는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자기 통제력(절제)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서 성취와 싸움에서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일평생 살면서 늘 성취와 싸우고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학업 성취를 위해, 회사 다닐 때는 업무 성취를 위해 불철주야 싸우고 있습니다. 세상은 일과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환호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성취를 통해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성취가 무엇보다 중요한 회사에서는 어떤 일을 이루어낼 인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재가 회사의 전 재산이고 인재 확보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는 회사일수록 회사는 인재 발굴을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재가 모였다는 세계적인 기업 구글은 인재채용을 위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투입한다고 합니다. 직원이 5만여 명일 때 인사 채용 담당자는 2500여 명에 이르렀답니다. 최고경영자(CEO)는 대부분 주 5일 중 하루를 인재 채용에 할애한답니다. 아무나 뽑는 것이 아니라 직원을 한 명 뽑는 데 적게는 150시간, 많게는 500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다소 업무에 지장이 있다할지라도 적임자를 찾을 때까지 기다린답니다. 직원의 수준이 떨어지다 보니 회사는 직원들의 교육 훈련에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투입해야 했답니다. 과거에 해마다 직원 채용보다 기존 직원 교육에 더 많은 돈을 써야 했답니다. 구글은 사람을 잘못 뽑으면 교육 훈련을 포함해 백약이 무효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직원을 뽑아 수많은 사람을 채용하지만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났답니다. 구글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연구와 조사를 했답니다. 직원의 역량이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초기부터 적합한 인재에 집중했답니다. 그래서 직원의 교육보다 채용을 가장 중요시 여기며 회사의 역량을 채용에 집중하였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똑똑한 사람을 최대한 많이 뽑으려고 애를 썼답니다. 그러나 가치관이나 철학, 품성이 직무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매력적인 프로젝트를 맡아도, 회사가 아무리 높은 수준의 자율성을 부여하고 창의성을 유발하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답니다. 그래서 똑똑하기만 할 뿐 인격을 겸비하지 않은 사람은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겸손하고 성실해 다른 사람의 성공을 도울 수 있고 역경을 극복하는 능력과 끈기를 갖춘 사람이 장기적으로 큰 성과를 만들어 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 직원’의 입사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답니다. 불량품을 걸러내듯이 문제 직원을 찾아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성과가 좋고 창의성이 뛰어나도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절대 뽑지 않는다고 합니다. 문제 직원 한 명이 조직 전체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을 뽑느니 차라리 충원 없이 어려움을 견디는 게 구글의 인재 관리 원칙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회사가 핵심인재를 뽑을 때 성과와 역량평가를 기준으로 한 인사고과를 반영하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 경험, 자격 등의 경영능력을 봅니다. 전문지식은 기본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충성도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역량이 있다고 해도 회사 기밀 자료를 경쟁사에 빼돌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오래 두면 둘수록 회사는 손해가 됩니다.

<충성의 힘(구경검 저)>란 책에서는 세계 500대 기업의 인재 선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은 충성이라고 말합니다. 충성은 의무이고, 충성은 능력에 앞서며, 충성은 출세의 기본이고, 충성의 최대 수혜자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회사와 나는 같은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충성하는 사람은 회사와 함께 커가고 CEO와 한배를 타고 충성할수록 기회는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명예도 팀워크도 충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CEO처럼 회사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온 힘을 다해 성취하라고 말하며 충성이 실천의 가장 큰 원동력이며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가장 큰 충성이라고 말합니다.

<성취심리>라는 책을 쓴 브레이언 트레이시는 세상에는 인간이 만든 법칙과 자연의 법칙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 법칙에는 물리법치과 정신법칙이 있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성공도 공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공공식을 (IA+AA)xA=IHP라고 말합니다. IA은 선천적 특성(inborn attributes), AA는(acquired attributes) 성장하면 과정에서 습득하고 계발한 지식, 기술, 재능, 경험, 능력입니다. A는 태도(attitude)입니다. IHP(indivisual human performance)는 개인적인 성과입니다. 결국, 타고난 선천적 특성에 후천적으로 습득한 특성을 더한 다음에 태도를 곱하면 개인적인 성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태도는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무제한이기 때문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성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충성도 하나의 태도라고 생각하면 충성도에 따라 인생의 성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시대마다 인재를 뽑아 사용하십니다. 노아 시대 때는 노아, 아브라함 시대 때는 아브라함, 모세 시대 때는 모세, 여호수아 시대 때는 여호수아, 다윗 시대 때는 다윗, 느헤미야 시대 때는 느헤미야, 베드로 시대 때는 베드로, 바울 시대 때에는 바울 등 시대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인재를 뽑아 한 시대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재를 뽑는 가장 중요한 기준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2절을 다시한 번 읽겠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충성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깁니까?

디모데전서 1장 12절을 한 번 찾아 읽겠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신약 시대 때 직분자를 세울 때 충성된 자를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디모데전서 3:11)”

하나님께서는 충성을 보시고 직분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충성스럽게 십자가에서 구원 사역을 성취하신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6장 11절에서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충성된 자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데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인재를 뽑을 때 어떤 사람을 뽑으라고 말씀합니까?

디모데후서 2장 2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에서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제자를 뽑을 때 공부 잘하는 사람이나 뛰어난 사람이나 부자나, 배경이 좋은 사람보다 더 우선순위가 충성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도 충성된 자를 찾고 있습니다.

시편 101편 6절에 보면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말씀 2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오직 한 가지 충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충성이란 충(忠)은 가운데 중(中), 마음 심(心)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誠)은 말씀 언(言)과 이룰 성(成)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말대로 사는 사람 즉, 신실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신약의 원어인 헬라어로는 ‘피스티스’입니다. 피스티스는 '믿음, 신실, 진실, 성실, 충실, 신의' 등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피스티스는 주로 '믿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충성으로 번역한 곳은 신약 성경에 17회(구약까지 35회)가 나오는데 갈라디아서 5장 22절의 성령의 열매를 말할 때 피스티스를 개역개정에서는 '믿음'으로 번역하지 않고 '충성'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개역 개정에서 주로 어느 때 충성으로 번역했는가 살펴보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번역할 때 문맥 속에서 충성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 충성된 종을 말할 때 믿음의 종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충성된 종"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으로 번역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충성된 종으로 소개하고 있는데(고전7:25; 딤전1:12) 믿음의 사람라고 번역하지 않고 충성된 사람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충성이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환란과 역경이 다가와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변절하거나 배신하지 않고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시행하는 것입니다. 억울 할 때도 인정받을 때도, 비난과 핍박을 받을 때도 존경받을 때도, 대우를 잘 해 주든 잘 해주 않든, 작은 교회에 다니든 큰 교회에 다니든, 가난할 때도 부자일 때도, 장로로 섬기든 평신도로 섬기든, 병들었을 때도 건강할 때도, 실패했을 때도, 성공했을 때도 상황과 관계없이 신실하고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 성도님께서 회사에서, 교회에서 직책과 직분을 받았을 것입니다. 올해도 성과를 내야 합니다. 퇴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과와 전쟁을 통해 승리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충성입니다. 성과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요소가 많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충성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충성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과를 이루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민족을 해방시키는 일을 모세에게 맡겼습니다. 왜 모세에게 맡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민수기 12장 7절을 통해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는 충성스럽게 그 일을 감당하여 민족을 애굽의 손아귀에서 구원해 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습니까? 강력한 바로가 장애물입니다. 백성이 배신합니다. 억울한 오해를 당합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적들이 가는 길을 방해합니다. 홍해가 앞에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충성으로 극복하고 민족해방을 성취합니다. 충성 스런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조상으로 영적 민족으로 만들게 했습니다. 충성을 다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했습니다. 충성을 다한 모르드개를 통해 민족을 죽지 안고 살게 만들었습니다. 충성을 다한 느헤미야를 통해 성벽 재건을 완성하게 했습니다. 충성을 다한 바울을 통해 세계 복음화를 초석을 놓게 했습니다.

잠언 25장 13절에서는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올 한 해 우리도 맡겨준 직책과 직분을 가지고 직장과 교회, 가정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성도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충성에 있어 첫 번째 중요한 것은 맡긴 자가 누구이냐는 것입니다.

충성의 대상 문제입니다. 누가 왕이냐의 문제입니다. 자신이 왕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사장으로 왕노릇하고 내가 목사로서 왕노릇하고 내가 가장으로 왕노릇하면 누구에게 충성을 하겠습니까? 타인이 왕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 왕조 시대 때는 충성이 핵심적 가치였습니다. 그래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충신불사이군, 忠臣不事二君)'라고 했습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가 정몽주에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라고 하니까 정몽주가 "이 몸이 죽어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일편단심을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이 충성입니다.

성과는 그 맡긴 분의 의도에 맞는 성과를 내야 합니다. 맡긴 분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성과는 참된 성과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파당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다음 순서로 반드시 누가 크냐는 경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 충만 받기 전에는 이 싸움에서 실패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50년 다녀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충성과는 먼 사람들입니다. 자기 하고 싶으면 하고 자기 하기 싫으면 그만둡니다. 자기 기호와 선호에 따라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1달란트 받은 종처럼 주인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서로 같이 교회에서 일을 맡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과를 이루어야 하는데 고린도 교인끼리 분열되고, 분쟁하는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나누어졌겠습니까? 첫째는 소속문제였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충성의 대상이 누구냐는 문제입니다. 누구의 줄을 잡느냐는 문제입니다. 바울에게 속했는냐, 베드로에게 속했는냐 아볼로에게 속했느냐는 문제입니다. 둘째는 “어떤 지도자가 더 똑똑하느냐? 지혜가 있는냐?” 세 번째는 “누구의 역할이 더 중요하냐?” 네 번째는 “누가 더 나은 지도자냐?” 결국 일하여 성과를 내는데 누구에게 충성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과와 전쟁을 할 때 승리하려면 우리의 충성의 대상에 대하여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충성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마땅히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누구의 일꾼입니까?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와 같은 사람의 일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충성의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일꾼삼아 일을 맡겨주신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복음을 말씀합니다. 맡은 자는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 라는 단어인데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하우스 매니저, 혹은 하우스 키퍼로 집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청지기라는 말입니다. 누구의 청지기입니까?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의 청지기기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우리의 충성의 대상은 우리에게 일과 직분과 직위와 직책을 맡겨주신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인들은 직장에서 어떤 일을 맡았던, 회사에서 어떤 일을 맡았던, 가정에서 어떤 일을 맡았던 그것이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할 때 우리 삼위일체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충성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 성취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께 충성을 하여야 진정한 성취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없는 성취는 아무리 큰 성취를 이루었다고 해도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집짓는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을 짓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은 지은 사람과 같은데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는 아무 상관없이 집을 짓는 자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같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오면 그 집은 쉽게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자신이 왕이 되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해도 주님 앞에 서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말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인신매매한 유다도 처음부터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회계를 맡을 만큼 신뢰를 받은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예수님의 뜻을 헤아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다가 결국 배신자가 되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충성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주어진 일을 자신이 왕이 되어 성과를 거둔다고 배신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공부의 성과도, 사업의 성과도, 자녀교육의 성과도, 가정생활의 성과도, 교회 생활의 성과도 모두 하나님께서 맡겨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충성해야 진정한 승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를 보십시오. 이들은 지금 말하면 고등학생 정도 되는 나이입니다. 풀무불이 앞에서도 하나님께 충성을 합니다. 그들은 주어진 일에 성공합니다. 다니엘은 정권은 바뀌어도 총리 자리를 유지합니다.

 

둘째로 성과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언젠가 주님 앞에서 결산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충성해야 합니다.

일의 성과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결산할 분은 누구입니까?

바울은 사람의 판단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4:3상반절)

“나는 여러분이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나도 나 자신을 판단하지 않습니다(현대인의 성경번역).”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을 판단한다고 해서 절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성취와 싸울 때 주변 사람을 보고하면 금방 시험에 들어 버립니다. 부족하면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고, 잘하면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교만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와 평판에 따라 사는 사람이 되면 타인 주도적 체질되어 버립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여론에 휩쓸립니다. 기회주의 자가 됩니다. 위선자가 되고 원칙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옛날이야기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나귀를 타고 아들이 나귀 고삐를 잡고 가니까 동네 사람들이 "아이고, 아니 어린아이를 저렇게 고삐를 잡게하고 자기가 떡 타고 가면 되나"라고 말하니까 애를 태우고 자기가 고삐를 잡고 갑니다. 어떤 사람들이 보고는 "저런 불효자가 있나, 제가 타고 아버지를 저렇게 고삐를 잡게 하다니"라고 말합니다. 둘이 다 나귀를 타고 갑니다. 그러자 "저런 나쁜 놈들이 있나, 저 어린 나귀를 두 사람이 타고 가다니" 그래서 할 수 없이 나귀를 둘러메고 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판은 다 자기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 평가하실 분은 우리의 충성의 대상인 하나님이십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에서 집사 한 분이 주일예배가 시작되기 바로 전 연세가 많은 목사님에게 불평을 했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목회는 뭔가가 잘못됐습니다. 어째서 한 해 동안 겨우 어린 소년 한 명 밖에는 늘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은 가슴 아파 사임하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한 해 동안의 유일한 새 신자였던 어린 소년이 목사님에게 “목사님, 저도 목사님처럼 목회자나 선교사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답니다. 그 아이가 자라 아프리카에서 많은 야만인과 추장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유명한 선교사 로버트 마펫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충성할 때는 세상 사람들의 평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평가자이신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이 판단기준이 되지 말야야 합니다(4:3하반절-4상반절) 자기가 판단기준이 되면 내 고집 내 주장, 자기 독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람들 머리 속엔 누구나 자기 나이만큼 키워온 개 두 마리가 있다고 합니다. 개의 이름은 '편견'과 '선입견'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생각의 틀’을 쓰고 세상을 봅니다. 이 생각의 틀을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프래임(Framing Effect)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주님이 주신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판단입니다(4:4하반절)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성취를 최종적으로 평가하실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한 자는 하나님이 칭찬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은 포도원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 일꾼이 일하러 가는데 요즈음 말로 하면 어떤 사람은 새벽에 가고, 어떤 사람은 9시에 가고, 어떤 사람은 12시에 가고, 어떤 사람은 오후 3시에, 어떤 사람은 오후 5시에 갑니다. 그런데 주인이 일을 맡치고 임금을 줄 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래서 불평합니다. "우리는 하루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디며 일했는데 왜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겁니까?" 그때 주인이 말합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너와 약속한 게 한 데나리온인데 다른 사람에게 더 주든 말든 네가 왜 신경을 쓰느냐는 것입니다. 심판은 내 기준이 아닙니다. 댓가는 내 기준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 기준입니다. 세계적인 거부 록펠러가 어느 시골의 작은 호텔에 투숙했답니다. 호텔에 비상이 걸렸고 잘생긴 청년을 시켜 특별하게 모셨답니다. 며칠 머물고 나갈 때 팁을 주는데 다른 손님과 똑같이 팁을 주었답니다. 그러나 청년은 뒤에서 "아니 세계적인 재벌이 쩨쩨하게 요게 뭐람."이라고 말했답니다. 록펠러가 이것을 들었답니다. 다시 돌아와 "이 사람아, 네가 정당한 팁을 받으면 너는 당당한 호텔 직원이다. 내가 네게 팁을 더 많이 주면 너는 구제 받는 거지가 되는 거다. 나는 너를 거지로 대할 수 없었노라"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 했답니다. "네가 하도 정직하고 진실해서 내가 회사에 가서 너를 특채해서 데려올까 했는데 그만 두노라" 충성을 대가를 미리 계산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만날 하나님을 바라보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과 조건, 과정을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정은 과정일 따름입니다. 끝을 보지 못하고 과정을 전부로 보니까 어려움이 다가오고, 위기를 만나고, 자신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충성하지 못하고 변질되고 배신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간이, 사울이, 엘리 제사장, 유다가 그 부분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끝이 있고 결산의 때가 있습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진짜 충성의 결과로 이루어진 성과에 대한 평가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중국 내지 선교에 충성을 다했던 허드슨 테일러 목사님이 임종을 몇 달 앞두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그의 절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답니다. '여보게 나는 지금 몸이 너무 쇠약해서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라네. 그리고 나는 성경을 읽을 수도 없고 심지어 기도도 못하고 있네. 단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와 같이 누워 있는 것이라네. 그리고 그 어린 아기가 하나님을 믿듯이 나도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있을 뿐이라네." 어떤 과정에서도 마지막 만날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어진 조건에서 충성을 다해 평생 삶의 과정에서 주어진 성취와의 전쟁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은 충성된 종에게는 합당한 상급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충성해야 합니다.

적은 일에 충성 한 자에게 큰 것으로 맡기십니다(마25:21)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주인이 먼 이국 땅에 가면서 종들에게 1달란트 2달란트 5섯 달란트를 맡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이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충성했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와 결산을 할 때 2달란트, 5달란트 남긴 자에게 동일하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23)”라고 말씀합니다. 5달란트의 성취를 이룬 사람은 더 칭찬해야 할 텐데 2달트 남긴자와 똑같이 칭찬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십니다. 충성은 성취의 크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큰 기업을 이루었느냐? 얼마나 큰 교회를 지었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전도했느냐? 얼마나 큰 인물이 되었느냐?의 문제가 압니다. 얼마나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충분히 개발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충성된 자들에게 아름다운 지위를 주십니다. 느헤미야의 동생 하나냐가 충성을 다하니까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지위를 주십니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느헤미야 7:2)”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르드개가 나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기도하여 민족이 죽음의 위기에 있을 때 민족을 살린 바사국의 왕후가 된 에스더의 사촌 오빠입니다. 멸망한 사울 왕국의 후손입니다. 당시 권력자 하만에게 절하기를 거부하여 유대인이 죽을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와 그 백성을 죽지 않고 오히려 하만이 죽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죽지 않고 산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에스더 7:9)”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의 경쟁자들이 끊임없이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 허물을 찾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떤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까?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다니엘 6:4)” 직분과 직책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성을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요즈음 일부 정치인들처럼 충성하지 못하니까 감옥에 가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 것입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3:13)”라고 했습니다.

 

충성된 자들이 다른 사람을 지도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2:2).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충성됨을 보시고 그 자손들에게 복을 주었습니다(느9:8). 하나님은 충성한 여호수아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여호수아14:9)”라고 말씀합니다.

충성된 자가 복을 받습니다(잠28:20).

하나님은 충성한 자에게 ①생명의 면류관(계2:10)을 주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했습니다. ②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9:25), ③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④의의 면류관(딤후4:8)을 주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부자가 섣달 그믐 날 종들을 불러놓고 볏짚 한 단씩을 주며 새끼를 꼬라고 했답니다. 새끼를 꼬되 새끼 손가락보다 가늘게 꼬라고 주문했답니다. 종들은 투덜대기 시작했답니다. "아무리 지독한 주인이지만 섣달 그믐날까지 이렇게 새끼를 꼬라고 할게 뭐람? 그것도 굵은 새끼가 아니라 손가락보다도 더 가늘게 꼬라고 하니 밤새도록 꼬아도 볏짚을 다 골 수 있겠나?" 이렇게 투덜대며 어느 종은 꼬다 말다 하는가 하면 다른 종은 아무 불평없이 주인의 요구대로 가느다랗고 보기좋게 꼬았답니다. 다른 종들은 요리조리 요령을 부려 일찍 끝내고 자는데도 이 종은 혼자서 밤새도록 새끼를 꼬았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커다란 주머니를 들고 나와서 "모두들 들어라, 작년 한 해는 다 나를 위해 너무나 수고가 많았다. 이제 너희들이 꼰 새끼로 이 엽전을 마음껏 끼어서 가져가라.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실컷 끼어 가도록 하라." 이 말을 들은 종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답니다. 자기들이 엉성하게 대충 대충 꼰 새끼로는 돈을 끼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하라는 대로 충직하게 밤새도록 가느다랗게 꼰 종은 그가 기울인 정성만큼 많은 양의 엽전을 새끼에 끼울 수 있었답니다.

우리 신앙인의 충성의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신 예수님을 계시록에서 소개할 때 충성된 증인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계3:14)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계1:5)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19:11)

히브리서에서는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히 3:5-6)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다 뿌리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라고 말씀하시면 하나님께 충성하였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변절되거나 배신하지 않고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막14:36)라고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충성스럽게 구속사를 이루는 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스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 우리는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소인은 크고 특별한 것에만 충성하고 위인은 평범한 것에도 충성하고 성자는 작은 것에 크게 충성한다"는 말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해야 큰 성취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성취의 전쟁터에 살고 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유혹과 핍박을 통해 우리의 충성을 변질되고 반역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지 못하도록 친한 사람을 통해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무시하고 도외시하게 합니다. 부정적인 모습을 보임으로 “교회 일이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상처를 당하게 함으로 "교회 일에 깊이 들어가지 말라 그러면 시험에 든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고 "적당히 하라 그러다간 몸 상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듭니다. 작은 일에 뭐 그렇게 목숨을 거느냐고 유혹을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통해 유혹합니다. 각종 핑계거리를 주어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살게 만들려고 합니다. 성경은 말세가 되면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3:4)"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 충성으로 성취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충성은 궁극적으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충만을 받아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진정한 충성으로 맡기진 일을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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