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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6) 타인의 장점을 보는 마음(삼하1:23-24)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709 추천수:3 112.168.96.218
2018-11-04 16:04:18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6) 타인의 장점을 보는 마음

사무엘하1:23-24

다윗의 일생을 통해 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 여섯 번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드디어 사울이 죽은 후에 그에 대한 다윗의 마음이 표현된 것입니다. 10여 년 동안 사울은 다윗을 괴롭혔습니다.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딸을 아내로 주어 그를 죽이려고 하다가 뜻이 성취되지 못하자 다른 남자에게 재혼을 시켰습니다.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도망을 갔지만 3000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면 잠시 고맙게 생각했지만 다시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나라를 구해 주었는데, 자신의 생명을 구원해 주었는데 끝까지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자신을 위협하고, 협박한 사람입니다. 미워하고 적대시하며 가슴 깊은 곳에 상처를 준 사람입니다. 고통을 주고 해를 끼친 자입니다. 고향과 집을 떠나 도망자로 살게 만든 사람입니다. 제정신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악령 귀신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목회자 흠잡으러 다니는 사람처럼 왕으로 다윗 죽이는 것이 마치 사명처럼 생각하고 집요하게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이런 사람을 한 두명은 만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장인입니다. 자신이 목숨을 바쳐 도와준 사람입니다. 대부분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TV 프로그램에 나온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부부가 한 팀 되어 손짓과 몸짓으로 단어 알아맞히기를 하는데 출제 단어는 "천생연분"이었답니다. 할아버지가 손짓과 몸짓으로 설명을 하지만 알라 차리지 못하자 "당신과 나 사이"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즉각 튀어나온 말이 "웬수"였답니다. 황당한 할아버지가 "그게 아니고, 네 글자, 네 마디로…"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바로 "평생 웬수"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남편을 남의 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 알고 속을 부글부글 끌이며 평생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가까운 “시씨와 친씨와 동씨”가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시누이, 친구, 친척, 동서, 동지, 동기가 원수가 될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평균 통화시간이라는 유머 글을 보니까 아들이 어머니에게 전화 거는 시간은 평균 50초고, 아버지에게는 평균 30초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친이 생기면 1시간 23분 59초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하여 아내에게 전화 거는 시간은 3초라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전화걸면 부재중 14통이라고 합니다.

서양 속담에 “사람이 원수를 가장 사랑할 때는 그가 죽었을 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 대적자와 원수가 죽었을 때 가장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대적이 쓰러졌을 때 내심으로는 큰 쾌재를 부르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 본성입니다.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 죽이고 처자를 찾아온지 이틀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얼마나 통쾌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었다고 간증할 만한 일입니까? 사울의 죽음은 그 모든 고통에서 해방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왕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얼마나 통쾌하고 고소하겠습니까?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어떤 마음을 가졌습니까?

11절을 같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행위를 보십시오.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렇게 했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면류관과 팔찌를 보자마자 곧바로 옷을 찢었습니다. 자신의 슬픔과 심적 고통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저녁때까지 슬퍼하며 울며 금식하였습니다. 슬픔의 정도가 얼마나 깊었는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큰 소리로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보십시오. 그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활의 노래가 17-27절까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애가입니다. 일명 ‘다윗의 궁가’(활 노래)라고 하는데 구약의 가장 뛰어난 애가 중 하나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어떤 점을 보면서 이렇게 슬퍼하고 있습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을 어떻게 칭송하고 있습니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였다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관계였습니까? 사무엘상 14장 44절을 보십시오. 블레셋과 전쟁에서 사울이 군인들에게 아무것도 먹지 말고 싸우라고 어리석을 명령을 했습니다. 그리고 먹는 자는 죽이겠다는 어리석은 맹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그 말을 듣지 못했고, 수풀에서 꿀을 조금 먹었습니다. 사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기 아들에게 반드시 죽을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벌을 내릴 것을 말씀합니다. 이게 아버지가 할 말입니까? 사무엘상 20장 3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까 다윗을 죽일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죽을 만한 일을 한 일이 없다고 하자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단창을 던졌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보호해 준 사실을 알고 ‘패역 부도한 계집의 소생(삼상20:30)’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관계입니까?

그러나 아버지 사울과 요나단의 삶에는 이런 것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더럽고 나쁜 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아들이기 때문에 요나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도 다윗을 죽이려고 한 이유도 자기 아들 요나단을 사랑해 왕위를 요나단에게 물려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무엘상 20장 3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요나단 역시 그렇게도 모질게 했던 자기 아버지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죽음의 위기를 당하면서까지 전쟁터에 나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삼상31:2). 당시 고대 전쟁에서는 왕위를 계승할 왕자왕 왕이 함께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관습입니다. 요나단이 얼마든지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위해 전쟁터에 나간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장점, 좋은 점을 보고, 타락하기 전의 사울의 신실성과 용맹성, 그 부자가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 장렬하게 전사한 것을 칭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칭송합니까? 사울과 요나단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투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전투 능력이 없어 전쟁에 패해 전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공중의 왕 독수리와 지상의 왕 사자로 그들을 비유하여 민첩함과 강함을 칭송합니다.

 

그리고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딸들에게 사울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라고 말합니다. 당시 사울의 폭정으로 인하여 다윗의 인기는 사울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어쩌면 악독을 저지른 무능력한 왕이 잘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망하게 한 장본인이 죽었으니 슬퍼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장본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퍼하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울이 백성들에게 입히고 좋은 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선정을 베풀지 못하여 백성들을 위기로 몰고 간 단점도 있지만, 사울 왕은 한편으로는 그가 왕으로 있는 동안 전쟁에 이겨 전리품을 얻어 화려한 옷과 금노리개를 가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마지막 전쟁에 패해 죽었지만, 그전에 많은 전쟁에서 이겨 물질적 안정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다윗은 전쟁 때 실패한 단점을 보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성공한 장점을 보며 칭송하고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자신을 죽기 얼마 전까지도 괴롭혔고 죽이려고 했던 원수같은 사람이 불행을 당하고 죽었을 때 다윗이 가졌던 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자기의 뜻을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저는 “타인의 장점을 보는 마음”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다윗은 타인의 장점을 보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삼무엘하 3장 31절이 이하를 보면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이 때 다윗은 역시 그가 대인이고 방백이었다고 아브넬의 장점을 들어 슬퍼합니다. 사실은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데리고 도망간 다윗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았습니다. 누구나 다 장단점은 있습니다. 그런데 장점을 보고 사느냐 단점을 보고 사느냐는 개인의 선택입니다. 타인의 장점을 보고 칭찬해 줄 것인가 타인의 단점을 보고 깎아내릴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입니다. 교회에 화려한 옷을 입고 들어오시는 권사님을 보고 “아유, 몸매가 이렇게 늘씬한것을 보니 아직도 처녀같아요!”라고 말할 것이가 “아유, 나이들어 주책이야”라고 말할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입니다.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이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좋은 교회를 만들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인으로 함께 살아갈 때, 세상에서 대인관계를 가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마음은 타인의 장점을 보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타인의 장점을 보고 칭찬하는 것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점보다 장점을 보는 눈이 밝아야 합니다. 늘 단점을 찾아 비판하는 사람은 지성인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나다나엘은 회의주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보고 ‘참 이스라엘 사람(요1:47)’이라고 그의 장점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베드로는 변덕스럽고 다혈질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베드로에게 ‘반석(요1:42)’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을 끊임없이 장점보다는 단점을 찾고 정죄하고 그 단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삼으려고 합니다. 타인의 실패가 내게는 승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숨겨진 단점과 허물을 들추어내고 보이지 않으면 만들어서라도 단점과 약점을 공개함으로 상대를 매도하고 자기 잘남을 선전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부패한 속성상 99가지 장점보다 1가지 단점을 더 크게 봅니다.

엘리자베스 루카스라는 심리학자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딸기 실험을 했답니다. 딸기 바구니에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상한 딸기가 15% 정도 섞었답니다.

A 팀에게는 싱싱한 딸기를 골라서 그릇에 담게 하고, B 팀에게는 상한 딸기를 골라서 그릇에 담게 했답니다. 선별 작업이 끝나고 나서 아이들에게 '싱싱한 딸기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라고 물었답니다. 싱싱한 딸기를 골랐던 A 팀은 거의 정확한 답을 냈으나, 상한 딸기를 골랐던 B 팀은 싱싱한 딸기의 양이 훨씬 적다고 대답했답니다. 실제 싱싱한 딸기는 85% 정도였는데 B팀은 50%도 안 된다고 대답했답니다. 엘리자베스 루카스는 이 실험을 성인을 대상을 해서 수차례 반복시험을 했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답니다. 이런 것을 심리학에서는 부정성 효과라고 합니다. 성적표를 가지고 시험해 보았답니다. 영어 수, 사회 수, 과학 미, 수학 가 점수를 맞은 성적표를 보여 주고 '어디에 눈이 가장 먼저 가는지'를 물었는데 77%가 수학 '가'라고 답했답니다. 어떤 부정적인 정보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긍정적인 정보보다 부정적인 정보를 더 중요하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상을 결정짓는 것도 긍정적인 특징보다 부정적인 특징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살 때도 부정적인 정보는 긍정적인 정보보다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남의 단점에 더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에게 수많은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의 단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사울의 장점에 집중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인간 다윗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정치적 목적과 계산으로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다윗이 믿는 하나님을 제외해 놓고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부터 발생된 고상한 인품과 신실한 믿음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활의 노래에서는 인간의 본능에 의한 세상 귄력에 대한 강한 집념이나, 사적인 원한, 옹졸한 마음 등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왜 다윗이 이런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1. 다윗은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울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단점을 들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들어 칭송하는 것은 사울에게 존중할 만한 고매한 인격과 놀라운 업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지금 사울은 이방인과 전투에서 죽임을 당한 실패한 왕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장점을 들어 존중하고 칭송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어떻든 한 편이라는 말입니다. 진영논리로 생각하여 다른 편으로 상대를 보면 허물만 보고 단점만 보는 것입니다. 요즈음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남북문제도 자기들이 하면 다 좋게 보지만 상대가 하면 다 단점만 지적하며 나쁘게 보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지만 사울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보는 것입니다.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사울이 고통스러워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해서 자기가 죽이고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가지고 왔다고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세상적인 권력과 명성을 보장해 주는 왕의 면류관과 팔고리를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짓말로 다윗에게 아부하는 것입니다. 그때 다윗을 원수를 죽였으니 잘했다고 포상을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를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했다고 그를 처형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업신여기는 태도로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를 과감하게 처형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마음입니다. 부족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왕이지만 하나님이 세운 자로 본 것입니다. 많은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 그를 왕으로 세워 그의 장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게 하시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목사가 부족해도, 남편이 부족해도, 자녀가 부족해도, 사장이 부족해도 한 시대 하나님이 세워서 같이 일하게 하는 사람으로 보면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포용력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삼하 22장과 시편 18편을 보면 다윗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볼 때 자기 상처에 주목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한 것입니다. 자기 상처에 주목하면 자신에게 피해를 준 상대방의 단점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시선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한 형제자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잠24:17,18)”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25:21)”

이것이 바로 원수같은 인간들과 대인 관계를 가지고 살 때 우리가 선택해야 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수많은 단점이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단점을 보고 우리를 지옥에 집어넣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믿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잠시라도 내버려 두시면 간음과 살인을 하며,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백성의 숫자를 헤아리는 짓을 할 인간입니다. 다윗도 그 단점에만 집중하면 상종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병든 나뭇잎 하나 붙들고 비난하고 한숨 쉬며 핑곗거리 찾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가을의 아름다운 큰 나무를 보며 감상하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검은 점 하나를 전체라고 생각하며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흠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 단점을 보면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에 가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붙들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장점을 붙들고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괴테는 “타인의 장점에 대해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장점도 저절로 알게 되는 법이다.”라고 했습니다. 초일류 리더는 '장점을 보는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그 많은 먹으라는 과일을 외면하고 먹지말라는 선악과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사탄의 전략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생활이나,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에 있어 계속 단점을 보고 불평하고 원망하게 하여 공동체를 파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보기에 아주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지도적 역할을 하는 공동체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단점이 많은 사람들과 살아갈 때 변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단점을 지적하고 정죄하며 비난한다고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면 상대도 변하고 공동체도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너무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글을 써 놓은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인간이란 철들어 보면 귀한 존재, 마음을 열고 사귀고 보면 불쌍한 존재라고 써 놓았습니다. 성장 과정에 가난, 질병, 폭군 아버지, 술, 도박 등 온통 상처로 얼룩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차 허물을 덮어주고 싸매줘 야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인이란 첫째 존귀한 존재, 둘째 웃기는 존재, 셋째 더러운 존재, 넷째 무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공감하고 이해가 되면 철든 종이요 쓴 맛을 본 종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 말을 읽은 어떤 목사님이 교인 중에 더러운 존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목사를 엄청 사랑하셔서 목사 속에 숨어있는 더러운 것을 뽑아 버리게 하시기 위해서 붙여주신 보배로운 파트너이고 존귀한 존재는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기 위하심이고, 무서운 존재는 목사가 깨어있게 하시기 위하심이요 웃기는 존재가 있음은 목사의 마음을 포근한 인품의 소유자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목사를 향한 선물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때론 밉워하고, 저 개 돼지보다 못한 저 인간을 왜 마귀는 안 잡아가냐고 막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골에서 목회하는 데 교인들의 단점이 보여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교인들에게 의해 그래도 인격적으로 원만하다고 뽑힌 장로님이 왜 그렇게 사는지, 수십 년 동안 신앙 생활했다는 권사님이 왜 저 정도밖에 되지 않는지? 아무리 설교해도 변하지 않으니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작정하고 혼자 철야 기도를 했답니다. 아침 새벽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오더라는 것입니다. “나도 그들을 못 고쳐 그래서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라는 음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후로 자신이 죽은 목회를 했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조금씩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단점을 보지 말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로마서 12장 17절에서는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5,36)”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2. 단점을 드러내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앞에서 그들의 단점을 들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장점을 들어 칭송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죽었을 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블레셋의 성읍인 가드나 아스글론 거리에 전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 것 같아서입니다.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 것 같아서입니다. 이스라엘을 원수로 여겼던 블레셋 사람이 통쾌하게 기뻐하고, 이방 사람들이 할례받는 언약 백성을 모독하게 하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을 이겼다고 기뻐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진짜 원수는 사울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들어가 믿는 사람끼리 다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파당을 지어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탄에게 있는 것입니다. 진영논리를 만들어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고, 단점만 밝혀 투쟁하게 함으로 스스로 자멸하게 하는 사탄, 마귀가 진짜 적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울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고 블레셋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신을 확인하고 그 시신의 못을 벤 후에 벧산 성벽에 못박았습니다(삼하31:10). 이미 알고 있는 그들에게 사울의 죽음을 알린다고 다윗에게 손해될 점은 없습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이익입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오히려 자신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리는 효과도 거둘 수 있습니다. 왜 알리지 말라고 했을까요? 사울의 죽음이 자기 개인에게는 유익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명예의 손상은 곧 하나님의 명예 손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교회를 비난하는 일을 밥먹듯하며 본인은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명예의 손상은 곧 하나님의 명예의 손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모독당하기 때문입니다. 기름 부은 받은 자의 죽음이 곧 하나님의 패배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입으로 사울과 다윗의 비참한 죽음에 대하여 소문을 내고 다니면 그들을 도우신다는 여호와 하나님도 자기들이 믿고 따르는 우상에 비교하여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앞에 단점을 드러내지 않고 장점을 드러내어 칭송하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매사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고 믿는 사람의 단점보다는 장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목사 허물을 드러내어 동네방네 소문내기보다는 목사의 장점을 드러내어 말해야 합니다. 성도의 단점을 드러내 서로 비난하기보다는 성도의 장점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님의 장점, 안수집사님의 장점, 권사님의 장점을 드러내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의 단점을 진돗개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부각하고, 험담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타인의 장점을 확대경으로 보지 않고 타인의 단점을 현미경으로 보고 부풀리기를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가장 사탄이 좋아합니다. 자꾸 험담하며 자신도 더 더러워지지 말고, 타인을 나를 비춰주는 거울로 보며,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비난함으로 감정은 해소될지 몰라도 상대는 변화되지 않고 관계를 절대 좋아지지 않습니다. 사실 상대의 단점을 보고 트집을 잡고 비난할 때보다 상대의 장점을 보며 칭찬하고 격려할 때 자신의 기분도 훨씬 안정되고 좋아지는 것입니다. 장점에 집중하며 그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오히려 감사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훈련시켜 큰 사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사울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큰 사람이 된 것입니다. 브닌나가 있었기 때문에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기도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그를 인신매매하는 형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유혹을 거절했다고 감옥에 가둔 힘센 여인이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것입니다. 고난은 영적 그릇을 넓혀 줍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상처가 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약이 되어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 줍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이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을 멸하고 새로운 민족으로 자신의 백성으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세는 개인적으로 유익합니다. 자신이 아브라함을 대신하여 하나님 백성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들을 죽이지 말고 용서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비난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조롱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침을 위로 뱉으면 결국 자기 얼굴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남편이 바람피웠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에서 부정한 일이 일어났다고 세상 법정에 나가고, 언론에 공개하고, sns를 통하여 불신자들에게 퍼뜨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새로운 신자들이 들어오면 목사의 단점을 들어 비난하고, 교회나 장로의 단점을 들어 비난한다면 그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단점을 드러내는 것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우리의 삶의 목적과 사명은 상대의 단점을 드러내 자신의 정당함과 잘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대인관계는 상대의 약점을 부각함으로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상황을 당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더럽고 추한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괴로움을 받고 살았던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모욕과 정죄를 당하고 결국에는 거꾸로 매달려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베드로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사랑하기 때문에 장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나단의 사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이하다는 말은 놀랍다는 뜻입니다.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다는 말은 여인의 사랑보다 월등하다는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사랑은 단순한 우정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다윗을 건져 주었습니다(삼상19:1-7; 20장). 아버지에게는 반역자이고 자신에게는 정적입니다. 그런데도 목숨을 건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아버지의 부당한 요구에 순종하지 않은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사랑의 모형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가지면 원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면 어떤 허물도 덮고 장점을 보며 새로운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자매의 글입니다. 아버지가 술꾼이었답니다. 너무나 힘들고 아버지가 보기 싫었답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술에 취해 새벽 시간에 집에 들어와 자기 방에 들어와 자신을 겁탈했다고 합니다. 그 후 아버지의 얼굴도 보기 싫고 짐승처럼 보였답니다. 어머니에게는 말도 할 수 없었답니다. 아버지는 너무 술에 취해 그것을 모를 것처럼 자신에게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대해 주었답니다. 그러나 자매는 오랜 세월 동안 복수심으로 산 것입니다. 그 한 가지에 인생을 걸고 산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성도님에게 심한 상처를 받았답니다. 며칠동안 잠 못 이루고 분노하다가 몇 주 후에 그 자매를 만났답니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괜히 자신만 아파하며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한 가지 단점을 그것이 전부가 인 것은 아닙니다. 이 자매는 아버지에게 말도 하지 않고 보는 것도 피했답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교회에 나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상처를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을 통해 치유된 것입니다. 멸시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버림받으며 하나님으로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 모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예수님을 통해 깊은 상처가 치유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도 풀 수 없는 자신의 상처를 용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조롱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자까지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했답니다.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큰 예수님이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 상처를 통해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깨달음으로 과거의 아픔이 오히려 감사의 도구가 되었답니다. 상처가 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향이 되고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예수님께 자신을 인도하게 한 것입니다. 상대의 단점이 때로 상처가 아픔이 되지만 그 아픔 때문에 우리가 더 십자가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어머니도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목회자도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을 뿐입니다. 자꾸 남편의 단점만 보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자꾸 아내의 단점만 보면 이 자매 저 자매 넘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남자가 그 남자고,그 여자가 그 여자입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좋은 목사 찾아 이곳저곳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목사가 그 목사입니다. 오래 지내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무엇으로 바라보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단점을 보고 살 것인가? 장점을 보고 살 것인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보면 장점을 보고 살 수 있습니다. 그 자매는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으니까 아버지가 불쌍하게 보였답니다.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의 장점이 보였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아버지의 사랑이 보였답니다. 자매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의 장점을 보며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계속해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을 살펴보면서 장점을 보는 마음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장점을 바라보느냐 단점을 바라보느냐 따라 크게 네 가지 인간관계 유형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의 장점을 보고 타인의 장점을 보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자기 자신의 장점을 보지만 타인의 단점을 보는 마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단점을 보고 타인의 장점을 보는 마음입니다. 넷째는 자신의 단점을 보고 타인의 단점을 보는 마음입니다. 가장 하나님이 싫어하는 마음은 자신의 단점을 보고 타인의 단점을 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마음은 자신의 장점과 타인의 장점을 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대인 관계를 가질 때 우리에게 원하는 마음은 “타인의 장점을 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상대의 장점을 드러내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상대의 단점보다 장점을 칭찬하고 드러내는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상대의 장점을 드러내고 칭찬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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