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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4)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사무엘상24:1-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173 추천수:7 112.168.96.218
2018-10-21 15:10:40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4)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

사무엘상24:1-7(구449쪽)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네 번째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입니다.

다윗의 어떤 마음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마음이 되었겠습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왕을 죽일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죽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신 것이니”입니다. 우리 성도님 같으면 이런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을 따르는 사람은 6백명입니다. 정예부대가 아닙니다. 오합지졸입니다.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자(삼상22:2)가 다윗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정예병 3천명을 거느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에게디 광야에 왔습니다. 한 번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얼마나 집요하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지 성경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삼하18:11) 두 번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는데 피했습니다. 자신이 죽이지 못하자 딸을 미끼로 블레셋들의 손에 죽게 만들기 위해 전쟁터에 보냈습니다(삼상18:21,25). 그러나 다윗은 죽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모든 신하에게 공개적으로 살인면허를 주고 다윗 제거령을 내립니다(삼상19:1) 들로 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이 쳐들어오니까 다시 전쟁터에 나가 적들을 물리칩니다(삼상19:8) 그러자 사울이 어떻게 합니까? 나라를 구한 영웅을 대접해 주는 것이 아니라 또 창을 던져 죽이려고 합니다(삼상19:10). 다윗은 죽지 않기 위해 그 밤에 창문을 타고 도망을 했습니다. 사울이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삼상19:15).

사울이 왜 이렇게 집요하게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사무엘상 20장 31절을 읽어 보십시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그가 살아 있으면 그가 왕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자기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피하였습니다. 제사장이 그와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떡을 주어 도와주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어떻게 합니까? 사무엘상 22장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 85명을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한 가지 이유로 그렇게 자기를 죽이려고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숨어 있는 굴속으로 혼자 용변을 보러 들어 왔습니다(3) 다윗과 그를 따르는 군인들이 같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절호의 기회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죽이지 않습니다.

한 번 추격한 것이 아닙니다. 1차는 기브아에서 십 황무지로 갔으나 죽이려고 추격합니다. 2차는 기브아에서 십 황무지를 거쳐 마온 황무지까지 추격합니다. 3차는 엔게디 황무지까지 추격합니다. 이렇게 쫓겨 다니는데 가만히 놓아둔다는 것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절호의 기회에도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달린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행전 13장 22절에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뜻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맡으면 자기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편의 뜻을 이루고, 아내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평생 이루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애를 썼는지 사도행전 13장 3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그의 죽음에 대하여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참된 관계를 맺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음 22:42)” 내 뜻은 순간적이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인생살이는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성도님이나 저는 이런 말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 뜻 이루려고 목회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이루어야 합니다. 장로가, 안수집사가, 권사가, 집사가 자기 뜻 이루려고 교회 봉사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이루기 위해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 이루려고 봉사하니까 교회에서 서로 죽이려고 싸움 벌이고, 법정 고소하고, 교회 앞에서 데모하고 멱살 잡고 싸우는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는지는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할 때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난하였습니다. 그 때 사울의 친척인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길가에서 저주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16:7)"라고 저주합니다. 그 때 아비새라는 다윗의 신하가 당장 처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이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라고 말합니다. 저주를 해도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습니다. 나라가 안정된 후 그가 성전을 지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는 성전 건축을 위해 금 10만 달란트, 은 100만 달란트, 놋과 철과 돌과 목재를 그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준비했습니다. 은 1달란트(talent)는 6000드라크마(drachma)이고 금 1달란트는 은 1달란트의 15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은100만 달란트는 60억 드라크마에 해당하고 금 10만 달란트는 90억 드라크마에 해당합니다. 1드라크마는 노동자 하루 품삯이므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6만 원씩만 잡아도 금 10만 달란트는 5400조에 해당하고 은 100만 달란트는 3600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라고 계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확이 얼마인가를 계산하는 데는 무리가 있지만 어마어마한 것을 준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는 피를 흘려 안 된다 하니까 다윗은 두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대상17:16-27).

다윗은 추한 마음도 가졌지만 이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평생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마음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결혼하기 위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직장을 선택할 때, 진학을 위해 대학을 선택할 때, 이사할 때, 교회를 정할 때 등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며 살겠습니까?

 

첫째 명백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과 보여주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명백하고 객관적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에게나 수긍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명백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기름 부은 자를 죽이지 말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 “살인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등과 같이 십계명을 통하여 계시된 말씀은 하나님의 명백한 뜻입니다. 그래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에 있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은 명백합니다. 만고불변의 원칙입니다. 사울은 기름 부은 자도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서슴없이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85명을 죽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에게 당장 이익이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도덕적이고 명령적이고 교훈적인 것입니다. 십계명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십계명을 요약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서로 제거하기 위해 싸우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것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살인하고 사기 치는 직업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직장에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행을 도적질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며 잘 해주고 사랑한다고 아내가 있는 유부남과 결혼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면 안 됩니다. 원칙적으로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성경이 말씀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불신자와 결혼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끝까지 고집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단이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가면 미래가 활짝 열린다고 이단을 멀리하라는 하나님의 보여주신 명백한 뜻을 어기고 그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에 고민하거나 망설임 없이 단순하고 단호하게 순종하였습니다.

빌립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대로 순종합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에 보면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합니다. 그 때 순종합니다. 사도행전 8장 29에서는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하니까 그대로 순종합니다. 바울이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니까 그 말씀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행16:9). 자기의 뜻과는 맞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가기 싫었지만 그에게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이성, 내 상식, 내 이익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 감정, 내 욕심, 내 뜻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며 우기면 안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 기뻐하지 못하는 것, 감사하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거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라"(살전 4: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빵집 앞에서 저 빵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기 싫다고 편협한 애국심을 발휘하여 도망가는 요나처럼 피하면 그만큼 고생합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보여주지 않으신 섭리적 하나님의 뜻에 순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도 있지만 보여주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도 있습니다.

보통 하나님의 뜻하면 하나님의 의도, 생각, 섭리, 계획, 비전 등을 가리킵니다. 보여주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주권적 섭리로 첫째는 우주적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우주를 운행하십니다. 둘째는 개인적 섭리입니다. 우주 안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즉 하나님의 섭리적 뜻입니다. 이 계획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던 계획이며 아무도 이것을 간섭하거나 막을 수 없는 주권적인 계획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나라가 망하고 어떤 나라가 흥하고 누가 왕이 되고 누가 전쟁에서 이기고 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관을 하시지만 그것을 우리가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내려고 점칠 필요 없습니다. 산에 가서 예언 기도 받을 필요 없습니다. 다 알면 이 땅에서 못삽니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죽는다고 자신의 죽을 날을 알고 살아 보세요. 우리 꼭 알아야할 것은 알려 주셨습니다. 시작과 끝, 창조, 타락, 구속, 재림 등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도 우연히 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개괄적으로 알지만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 세미한 부분을 어떻게 실행해 가시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요나나 욥이나 다니엘이나 모세나 요셉처럼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므로 섭리적인 하나님의 뜻은 점치듯이 찾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고난 가운데 불평하고 원망하며 의심품고 회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신명기 29장 29절에서는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서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행18:21)”습니다.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아 수없는 고생을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된 것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핍박을 받을 때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라고 했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 수많은 고난을 겪은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갈 때 왜 사울을 제거하고 왜 고생시키면서 나를 세워 왕으로 세우려 하느냐고 투덜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기름을 부었으면 바로 왕이 되게 하여야 하지 수없이 도망 다니게 하고 자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죽고, 이 난리를 치면서 왕이 되게 만드냐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사울 같은 인간을 만나게 했냐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해 놓고 왜 이런 인간을 만들었느냐고 날마다 불평불만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결혼해 놓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힘으로 결국 간수와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행16:24-34) 불신 남편과 결혼했다면 그 결혼을 통해 남편과 자식 가문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부모를 만나 생고생을 하느냐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이런 교회에 등록하여, 왜 이런 나라에 태어나, 왜 이런 직장에 다니며 라고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섭리적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섭리적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작전 계획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인도하십니다. 영화감독이 감독이 원하는 대로 배역을 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에게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생깁니다. 구덩이 들어갑니다. 노예로 팔립니다. 감옥에 갇힙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냥 고난을 참고 견디며 순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가운데 한 부분으로 쓰임 받는데 연출하시는 하나님이 배우를 지정하여 사용하시는데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상황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수도 있고 불리하게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유리하게 전개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불리하게 전개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사명 붙들고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에 순응하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에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고 순응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지나가서 뒤돌아보면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라고 우리는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 개인을 향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보여주지 않으신 섭리적 하나님의 뜻에는 우주적인 것도 있지만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되어진 일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누구와 결혼하고, 어느 학교에 들어가고, 어느 직장에 들어가느냐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사울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분별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실행합니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겉옷자라를 베라고 성경에 기록하여 다윗이 베었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은 왕의 겉옷을 베는 것도 양심에 찔렸습니다(5) 그럼에도 겉옷을 베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신이 왕을 죽일 마음이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거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지도자로써 백성에 대한 책임과 사명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신하로서 마땅한 의무이고 도의입니다. 한 인간으로 마땅한 도리입니다. 어쩌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장로로 임직 받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이어령 비어령식으로 해석하지 말고 상식 수준으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목사의 아들이, 장로의 아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것 역시 성경이 무엇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도 양심과 상식 수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아디아포라 윤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담배를 피울까 말까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 않는 윤리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에서는 그런 경우 덕이 되는가를 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린도전서 10:23)” “모든 것들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에게 나침반은 주시지만 네비게이션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암살로 왕이 된 자가 되어 정권의 정당성을 잃어버리기 싫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상황을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다윗의 결심을 보십시오. 12절에 자기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2장 2절을 통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롬 2:18)”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상황에 대하여 백화사전처럼 구체적인 삶의 청사진을 말씀해 주시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잘 분별해야 합니다. 퍼즐 맞추기 식으로 옷자락만 베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주팔자 보듯, 궁합을 보듯, 점을 치듯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안 됩니다. 사주팔자(음력 생년, 월, 일, 시)에 의해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정론적 인생이 아닙니다. 신앙인도 자칫 잘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말하며 하나님의 인격성을 무시한 비인격적 숙명론자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나의 현재, 과거, 미래를 다 아시고 지금 뭘 할지도 다 아시기 때문에 내가 할 앞으로 일은 다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아신다고 하나님이 강제로 로버트처럼 그 일을 하도록 하시지 않습니다(단순선지식이론).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에 있는 나무 실과를 모두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일만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과를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감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복숭아를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옥수수를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사과만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면 안 됩니다. 사과를 먹든, 감을 먹든, 복숭아를 먹든, 옥수수를 먹든 그것은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A대학에 들어가든 B대학에 들어가든, C대학에 들어가든 선악과가 아니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A와 결혼하든 B와 결혼하든 C와 결혼하든 선악과가 아니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A직장에 들어가든 B직장에 들어가든, C직장에 들어가든 선악과가 아니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윗이 옷자락을 잘랐던 옷고름을 잘랐던, 신발을 잘랐던 상관없이 사울의 목만 베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윗이 옷자락을 자른 것은 양심에 따라 지혜롭게 판단하여 자신의 진정성을 입증해 주고, 후에 왕을 죽인 사람이 왕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분별하여 선택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대하여 성경에 백화사전식으로 나열하여 로버트로 살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유의지를 주어 100%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며 살도록 했습니다. 말씀을 주어 말씀의 원리에 따라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양심을 주어 양심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로 했습니다. 이성을 주어 이성적 판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는 말씀의 원리에 따라 상황을 잘 분별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한 마음으로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의 상담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개인적인 비전을 이루는 방향으로 잘 분별해야 하고 상식을 잘 활용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드온이 사용한 양털뭉치 방법처럼 초자연적 방법으로 분별하기 위해 기도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기 위해 베드로에게는 환상을 통해,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알려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도 초자연적 하나님의 인도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모두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직통계시를 받아다고 40년이나 같이 산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개인적인 구체적 계획을 찾아내라고 말씀하지도 않고 그것을 찾아내었다고 해도 그것이 개인의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무당에게 점치는 것처럼 숙명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할지 알고 계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맞아 잘 분별하여 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퍼즐 맞추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도덕적 문제가 없는 경우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충분히 자료를 수집하고 평가하여 타당한 근거로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이 일을 지혜롭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삶의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이성, 양심, 상황을 통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초점을 맞추고 잘 분별하여 살면 되는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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