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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앞에 나오면(12) 지역주의에서 벗어난 나다나엘(요한복음1:43-5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143 추천수:1 112.168.96.218
2018-08-12 10:31:59

 

예수 앞에 나오면(12) 지역주의에서 벗어난 나다나엘

요한복음1:43-51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녔을 때였습니다. 주일 저녁에 기숙사에 왔는데 고향이 광주인 선배 한 분이 울분을 토하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불러 교회를 그만 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전라도 광주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선배는 자신은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고 앞으로 선생님이 되겠다고 말하며 그 길로 가는 분을 보았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교회내에 참 지역주의가 심한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제가 아는 모 목사님은 모 교회 장로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 장로님은 경상도 사람이었고 그 목사님은 전라도 목포 분이었습니다. 딸이 좋아해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은 시켰지만 명절만 되면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이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선생님이라고 말하고 장인이 장로님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말하며 말 싸운다는 것입니다. 중매를 할 때도 목사님이고 장로님인데도 불구하고 부모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봅니다. 그리고 어느 지역 사람이라고 하면 그 다음에는 말이 없습니다. 무조건 어떤 지역 사람은 싫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특정 지역 사람들끼리 모이는 교회를 선택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지역주의의 벽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사람들이고 한 가족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니라(갈3:28).” 이 말씀을 믿습니까?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3-19)” 믿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지역주의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1. 우리가 지역주의에서 벗어나려면 부분을 노예가 되지 말고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지역주의에 사로잡혔던 사람은 오늘 본문에 나온 나다나엘입니다.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바돌로매와 동일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4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타날 수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비천한 나사렛에서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냐고 어이가 없다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지역주의 발언입니다. “00지역 사람은 사기꾼이다. 00지역 사람은 배신을 잘 한다. 00지역 며느리를 두면 집안 망한다.” 등과 같이 낙인찍기를 하는 것입니다. 조롱하는 어투입니다. 출신 지역을 폄훼합니다. 지역 혐오증을 갖는 것입니다. 교회로 말하면 “이 교회에서 어떻게 00지역 목사가 될 수 있어. 이 교회에서 어떻게 00지역 장로가 될 수 있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충청도 교회, 전라도 교회, 경상도 교회 등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가 못되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지연, 혈연, 학연을 중시하며 끼리끼리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했습니까? 4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빌립이 전도하면서 예수님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라고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를 말씀했는데 이 말 중에 나사렛 예수라는 말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에 능한 사람이었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와야 하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미 5:2, 마 2;6). 그러니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지역주의적 사고가 고착화되고 평생 지역주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까? 왜 한국인들이 특히 교회에 다니는 신앙인임에도 불구하고 평생 투표 때마다 같은 당을 찍습니까? 자기중심적 편협한 사고로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을 보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본질을 알지 못하니까 지역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있으면서 다 아는 것처럼 그것을 일반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Allport는 "어떤 사람에 대한 심리적 범주가 형성되면 그 범주의 속성들은 쉽게 바뀌지 않으며 그에 반대되는 증거는 거부된다"고 말합니다. '불신'이라는 부정적 느낌을 실제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지역 사람으로부터의 불신을 경험한 경우 그 지역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편견과 합치되어 이 편견이 유지,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편견은 편견을 가지게 된 사람 스스로 직접 그것을 경험하였다는 '경험적 믿음'으로 인하여 더욱 변화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떤 지역에서 태어나면 부모들이 만들어준 지역주의에 맹목적으로 죽을 때가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파란 썬글라스를 쓰면 상대방이 빨강 옷을 입든 노랑옷을 입든, 흰 옷을 입든 상관이 없습니다. 파란 안경을 벗기 전에는 모두가 파랗게 보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파랗다고 주장하고 행동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나다나엘도 그 시대의 조류에 편승한 것입니다. 나사렛이란 동네는 갈릴리 지역에 속한 동네입니다. 예수님 당이 갈릴리는 이방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므로 순수한 유대인들에게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지역주의가 심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지옥의 땔감 정도로 생각했고, 순수 혈통을 보존하지 못한 사마리아 사람들은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지식인이지만 지역주의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나다나엘도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 사람이라고 요한복음 21장 2절에 소개해 놓고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한 10km 떨어진 동네입니다.

정확히 알면 지역주의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가가 기록한 그이”라는 말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놋뱀이라는 모형으로(민 21:9)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18:18)”라고 직접적으로 소개를 하였습니다. 구약의 여러 선지자가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올 것이며(삼하 7:12-13, 마 1:1), 그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7:14, 마 1:23).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고(미 5:2, 마 2;6) 은 30에 배반을 당할 것이며(슥 11:1-13, 시 41:9) 옆구리가 창에 찔릴 것이고(슥 12:10, 시 22:16)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을 것이고(사53) 셋째 날 다시 살아날(욘 1:17, 마 12:39-40, 창 22:4, 히 11:19) 것을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마5:17; 행3:22; 롬1:2). 그러면서 빌립은 예수님을 또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육신적으로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신지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햄에서 탄생하셨지만,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일반적으로 ‘나사렛 예수’라 불렸습니다(마2:23; 눅 18:37) 이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지역주의에 사로잡힌 옹졸한 신앙이이 되지 말고 정확한 지식을 같는 올바른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정확한 인간에 대한 지식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막힌 담을 허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 12:46-50) 예수님은 남자나 여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노예나 자유자나 상관없이 예수님 안에서는 다 한가족 한 형제입니다. 우리는 선입견과 편견에 의한 지역감정이나 지역주의의 담을 헐어버리고 한 형제 자매로 쓰임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인들이 사용하는 "갈라놓고 지배하라"는 통치 수법에 신앙인들이 부화뇌동해서는 안 됩니다. “쟤 하나만 없으면 우리 모임이 잘될 겁니다.” “저 집단만 없다면 우리나라가 조용해집니다.”라고 특정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나치 시대의 유대인,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유럽에서는 집시, 서방세계에는 알카에다나 헤즈볼라, 중동의 수니파에는 시아파, 중국에는 티베트 위구르족 등 소수민족들, 미국의 백인에게는 유색인종들이 그런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남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오와 적개심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막힌 담을 허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6) 혈연과 지연 학연으로 자꾸 담을 쌓으면 안 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엡 1:10)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주안에서는 국경도 민족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둘로 나뉘어서로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고 하였고,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편견, 섭입견, 지역 감정, 사상, 관습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새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5)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6-27)

 

2. 우리는 지역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처럼 지역주의에 빠진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 칭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역주의 발언을 하는 나다나엘에 대하여 빌립은 논쟁하지 않습니다. 논쟁 해 보았자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역감정의 유래와 해결 방법을 이야기 한다고 편견에 사로잡힌 자가 순수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자신의 생각을 교정하겠습니까? 계속 꼬투리를 잡아 자신의 편견을 더 강화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빌립이 무엇라고 말합니까? 46절을 보십시오. “와서 보라”고 말합니다. 너가 직접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때 나다나엘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 때 선입견과 편견에 의한 지역주의에 사로잡힌 나다나엘을 보고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4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칭찬을 합니다. 참(알레도스)라는 말은 겉과 속이 일치한다는 말입니다. 간사(돌로스)라는 라는 말은 교묘한 말로 사람을 꾀어 올무에 처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간교한 성격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속에 간사한 것이 숨겨져 있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격적 투명성(透明性 Transparency)을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하는 유대 지도자들은 메시아를 대망하면서도 이중적이었습니다. 회칠한 무덤과 같았습니다. 위장술 포장술에 강했습니다.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메시아 대망을 충실히 기다리며 비록 그것이 잘못된 지식에 의한 것이지만 그가 지역적 편견을 숨기지 않고 그래도 드러낸 정직성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강점을 칭찬해 주시는 주님을 우리는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속마음과 그 속성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칭찬하는 것입니다. 지역주의는 오만에 뿌리는 두는 것입니다. 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죽음으로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은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주의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지역주의를 비판하며 정죄하며 논쟁할 것이 아니라 그의 강점을 들어 칭찬해 주시며 제자로 삼아 훈련시키는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누구나 약점이 있고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유전과 환경에 따라 특정한 지역 사람은 특정한 성격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고정관념이 생길 수 있습니다. 특정 집단의 구성원의 특성이나 태도, 성격 등을 일반화 시키는 것입니다. 출신지역이나 성별, 출신학교나 직업, 혈액형 등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정관념은 많은 정보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데 편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정관념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고 그 고정관념을 항상 신뢰할 수는 없지만 일정한 진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정관념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한 차별,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고정관념의 폐단은 '낙인효과'에 있습니다. 색 안경을 끼고 보는 것입니다. 한 번 정신병 환자로 낙인이 찍히면 편향 확증으로 매사 그 사람의 행동을 이상행동으로 보게 하여 고정 관념이나 편견을 더욱 더 견고하게 합니다. 그럴 때 다른 면을 보는 것입니다. 특히 그 사람의 장점, 강점을 보는 것입니다. 정치계나 언론계나 종교계나 경제계나 학계, 군대에 얼마나 지역주의가 고질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까? 굳이 정치적, 경제적 차별의 수치나 통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다수의 국민들이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각 분야에서의 진급이나 인사권, 예산 편성권, 대기업 임원진 분포, 언론사의 핵심 인사들, 각종 특권이나 혜택이 특정 지역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유는 쓸만한 사람이 그들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적 가치나 권위보다 출신지나 지역구도가 우위이고, 지역주의가 의식과 행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지역 사람도 강점과 장점은 다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면 얼마든지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차별받지 않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점이 있고 모순이 있고 부족한 점이 있지만 강점을 사용하십니다. 야곱은 거짓말 장이였지만 약속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살인자였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성질이 급했지만 우직한 실천력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살인자이과 간음자였지만 회개하기 잘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지만 그에게는 그래도 하나님의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남자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도 사용하고 에스더로 사용하고 룻도 사용하고 기생 라합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한 사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른 손 불구자 에훗을 사용하십니다. 성도착증 자 삼손도 사용했습니다. 기생 라합도 사용했습니다. 술주정꾼 노아, 노예 다니엘, 겁쟁이 기도온, 주부 드보라, 일찍이 홀로된 여인 룻도 사용하여 당 시대 하나님 나라의 인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습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얼마든지 주님께 붙들림 받으면 살인자도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너무 상대의 약점만 보면서 편견과 선입견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마커스 버킹엄(Marcus Buckingham)은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혁명>에서 "약점이 아닌 강점에 초점을 맞춰라 20여 년간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 한 결과,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약점의 지배에서 벗어나 강점을 재발견 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20% 정도 사용하고, 나머지 80%는 장점을 강화하는데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인생의 진정한 비극은 우리가 충분한 강점을 갖고 있지 않다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갖고 있는 강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데 있다."라고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강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지역주의 편견과 선입견을 초월하려면 상대방의 강점, 장점을 보아야 합니다. 약점을 보면 지역주의 고정관념,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3. 우리가 지역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을 칭찬하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48절을 보세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고 말씀합니다. 무화과나무는 무성하고 커다란 잎을 가져서 당시 랍비들이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을 묵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보았다(에이돈)라는 말은 단순하게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의지적으로 주의 깊게 주목하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나다나엘은 자신의 지역주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던 예수님에 대한 견해를 접어버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편견과 선입관에 의한 지역주의 지식이 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것입니다(시2:6,7). 그는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권위 앞에 압도당한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 뿐 아니라 말과 마음까지 다 알고 있는 분이 있다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5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2장부터 12장까지 나오는 일곱 가지 표적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이적과 권능으로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해 주었습니다. 또 무엇을 보게된다는 것입니까? 5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계속 열려있는 하늘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경험한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나라를 보고 그 나라를 소유하는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늘의 차원으로 시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시야가 좁기 때문에 지역주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천사가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이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 대신 인자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통해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이 중보자로 지상과 하늘을 연결시켜주는 통로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와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친교를 이루게 하는 중보자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지역주의, 지역감정의 편견과 아집, 지역 혐오의 노예가 된 사람이 엇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로 신앙고백하고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도로 세움을 받습니다(막3:18). 권능받아 이적 행하였습니다(마10:1).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연약하여 예수님이 체포되자 도망하였습니다(막14:43-50).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요21:1-2)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눅24:50-53)하고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고(행1:13; 행2:1-4) 완전히 지역주의를 벗어나 세계 선교를 감당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후 그는 변하여 브리기아, 헤라홀리스, 아르메니아와 인도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합니다. 우상숭배가 심한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16년간 전도하다가 바빌론의 왕 아스티아게스에 의해 곤봉으로 맞고 살갗을 벗기우고 십자가에서 머리를 떨구고 순교했으며, 시체는 자루에 넣고 묶이어서 바다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모든 담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을 앞에 온 사람들에게 화목의 직책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지역감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역주의를 초월해야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편가르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시대조류의 휩쓸려 아무런 성찰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특정지역 사람을 부정적으로 낙인찍는 지역 혐오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한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구원받은 사람, 너그러운 사람, 좋은 사람 정도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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