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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앞에 나오면(10) 지식인 니고데모(요3:1-1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252 추천수:0 112.168.96.218
2018-07-29 16:14:37

 

예수 앞에 나오면(10) 지식인 니고데모

요3:1-15

 

지난 7월 23일 노회찬 정의당 원내 대표가 정치 자금 4천만 원을 받았으나 대가성은 아니었다고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많은 것을 알고 알고 있는 지식을 비유로 쉽게 설명해 주는 지식인이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대중을 잘 설득하는 달변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는 것만큼 살려고 노동자, 약자, 소외된 자를 대변하며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애썼던 문학과 음악을 아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덕성에 상처를 입자 그 죄책감과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깨끗하고 정의로운 이미지가 그의 재산이었는데 도덕적 우월감에 엄청난 내상을 입어 그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진보적인 지식인에게 있어 도덕성이 무너지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이비 진보요 생계용 진보라고 비난받기 쉽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는 민중을 위해 희생과 봉사로 걸어온 당이 도매금으로 부패와 탐욕스런 집단으로 매도될 피해를 스스로 짊어지고 투신했을 것입니다. 한 시대를 사이다같은 발언을 통해 서민의 아픔을 달래주었던 깨끗하고 정의로운 이미지를 가진 한 지식인이 이 땅에서 살아졌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노의원 같은 지식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을 진지하게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리장 삭개오 같은 사람도 예수님 앞에 나와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미 다섯 명의 남편과 살았고 예수님 만날 때도 남편도 아닌 남자와 살면서 갈가리 찢긴 상한 마음을 가진 여인도 예수님 앞에 나와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현장에 간음하다 잡혀 수치심에 자결하고 싶어 했을 만한 여인도 예수님 앞에 나와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사는 신앙인들은 어떤 절박한 처지에 있어도 극단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면 주홍같이 붉은 죄일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고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우리 하나님은 기억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떤 한계 앞에서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일어나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일어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많은 지식인들 중에서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하고 이 세상만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외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이 땅의 정의만 부르짖다 쓰러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밤에 예수님 앞에 나온 당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한 지식인을 볼 수 있게 됩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를 선생이라고 부르는데 헬라어 정관사 “호”가 앞에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쇠트겐이라는 학자는 산헤드린 의장 또는 특수한 직책을 가진 자로 해석합니다. 그 이름은 “백성의 정복자, 백성의 승리자”라는 뜻을 가진 니고데모입니다. 당시 바리새인이 6천여 명 되었다고 하는데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의 일원이었습니다. 율법 학자입니다. 그는 유대인 상층 계급의 지식인입니다. 부와 권력, 명예와 지식을 갖춘 사람입니다. 오늘 날도 어릴 때는 교회에 다니다가 대학을 가 조금 지식이 쌓이면 교회를 떠나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 니체, 흄, 러셀, 사르트르, 쇼펜하우어, 볼테르, 프로이드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교회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릴 때 교회에 다녔지만 조금 지식이 들어가니까 교회를 떠나 버립니다.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을 지고의 존재로 만들었고, 마르크스는 신을 물질로 대체하였으며,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함으로 인간이 신이 되고자 신이 없기를 원하는 몸부림을 했습니다. 조금 배우면 무신론자들은 한결같이 신이 있으면 증명해 보라며 신은 인간의 산물이니 자유롭게 살려면 신을 믿지 말라고 외칩니다. 이런 지식인이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지식인들이 예수님께 관심가지고 나오려면 표적을 보아야 합니다.

그는 내세를 믿는 바리새인이지만 권력과 명예, 돈과 지식을 취득한 사람이기 때문에 니고데모와 같은 지식인은 세상 재미와 이익에 영혼이 빼앗겨 세상 낙에 흠뻑 빠져 살만한 사람입니다. 막연한 내세보다 확신한 현실을 보며 권력과 명예, 부와 지식을 가지고 즐길 것이 너무나 많았을 것입니다. 체력이 부족하고 돈이 없어서 즐기지 못하지 밤에 너무나 즐길 것이 많이 았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무엇이든 재미가 없으면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강의도, 광고도, 설교도, 교회도 재미가 없고 지루하면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살아남지 못합니다. 재미, 쾌락, 선정성, 이익에 길들여 있는 지식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부와 권력, 명예와 지식을 지닌 세상에 성공한 지식인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예수님에 대해서도 내세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지식인의 전형인 사르트르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선언했듯이 현실 상황이 당위성보다 더 우선이 되기 때문에 배부른 지식인은 예수님이나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내적으로 타는 목마름이나 자기 존재와 삶의 깊고 근원적인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왜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재미를 찾아 떠나야 할 밤에 그가 왜 예수님께 관심을 가졌습니까? 예수님의 표적입니다. 어떤 표적이겠습니까? 2장 11절을 보십시오.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입니다. 2장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성전에서 소와 양과 장사꾼들을 몰아내고 성전을 헐라고 외친 표적입니다. 당시 바리새인 지도자들이 상인들과 야합하여 돈을 벌기 위해 성전을 장사꾼으로 소굴로 만들었는데 이것을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와 소와 양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고 장사꾼의 상을 엎어버리고 성전을 청결하게 한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이런 표적을 보고 니고데모든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반 사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랍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나 요한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의바르고 정중하게 부르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인데 자신과는 다른 특별한 선생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지자와 같은 선생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여 아무나 할 수 없는 이런 표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와 다른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 지성인 중의 한 분인 이어령 교수님은 인문학적 소양이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신론자였습니다. 이어령 교수께서 [지성에서 영성으로] 라는 책을 냈습니다. 딸을 통해 나타난 표적을 보면서 예수님께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딸이 전 캘리포니아주 검사를 거쳐, 청소년 범죄 전문 변호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손자가 자폐증에 걸렸고 딸이 암에 걸리고 시력이 상실되어 앞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신비하게도 기도하면서 15년 동안 앓아 왔던 암에서 치유되고 손자의 자폐증이 낫는 기적과 시력이 회복되는 능력을 체험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실제 옆에서 경험하게 되고 결국 “사랑하는 내 딸아, 너의 기도가 높은 문지방을 넘게 했다. 암에 걸렸던 너의 아픔과 어둠이 나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70평생 살아온 내 삶이 잿불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라고 그 책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짐을 지는 자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날을 수 있는 날개가 된다”고하였습니다. 세상에는 1차원의 세계(점의 세계), 2차원의 세계(선의 세계, 평면의 세계), 3차원의 세계 (입체적인 세계), 4차원의 세계(영의 세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4차원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개가 어떻게 인간의 아파트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차원이 다른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인식의 한계, 능력의 한계, 시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예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조금 지식이 있다고 오광남 박사처럼 [예수는 없다]라고 하지 말고, 피터 갠디 처럼 "예수는 신화다"라고 하지 말고 리차드 도킨스 처럼 ‘만들어진 신’이라고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10:3)”라고 말씀합니다.

 

2. 지식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볼려면 거듭나야(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말을 듣고 무엇이라고 말을 합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으로 보고 예수님을 선생,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 하나님이 함께하는 선생 정도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듣고 진정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본질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니까 그저 선생이나 선지자 정도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무엇이라고 질문합니까?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거듭나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노덴’이라는 말로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위에서부터” 등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을 말하고 있지만 니고데모는 이 땅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는 것만 보고 듣는 것입니다. 모르면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림도 미술을 아는 사람이 보고 교향곡도 음악을 아는 사람이 듣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다 전향하지 않는 미전향 장기수를 보십시오. 이 좋은 세상에 살면서도 공산주의가 좋다고 합니다. 운동권 학생들도 세뇌되면 자기 안경으로만 세상을 봅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에 세뇌된 사람들은 말씀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신천지같은 이단 교리에 세뇌되어 교리 중독이 된 사람들은 기성 교회 목사의 설교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듣고자 하고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로 인해서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의 시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어서 어떻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가 낳을 수 있냐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안이 있고 심안이 있고 영안이 있습니다. 육적이 눈이 아무리 좋아도 어린 아이가 삼각함수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고차원 방정식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눈이 아무리 좋아도 자동차가 고장 나면 고칠 수 없습니다. 자동차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자동차를 고칠 수 있습니다. 영적 세계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이솝우화에서 나오는 "개구리와 메뚜기, 하루 살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메뚜기는 봄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일이 없고 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차원의 문제이지 비이성 비논리가 아닙니다. 초이성입니다. 초논리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보는 차원, 알 수 있는 차원을 넘어 들어가는 차원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배운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양이나 지식의 축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 지식은 거듭난 자만 가지는 것인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은 무엇이겠습니까?

물을 태의 물, 세례, 말씀, 정화, 성령의 상징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하지만 물은 회개케 하는 말씀(벧전1:23-25; 약 1:18)으로 해석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자연스럽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자연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적 생명만 준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지식을 말한다고 너무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이히 여기다는 말은 “다우마세스”의 번역인데 이해력이 결여된 놀라움을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었지만 이것을 모른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성령의 역사를 예수님이 설명해 주십니다.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현상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현상으로 실제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받으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마음으로 구세주라고 믿게 되고 입으로 시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012년 10월 8일 자 뉴스위크의 표지에 "천국은 진짜다(Heaven is Real!)"라는 표지 글이 실렸습니다. 하버드 대학 메디컬스쿨 교수로서 3대째 반평생 뇌를 연구해온 저명한 뇌과학자인 이븐 알렉산더라가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7일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뇌사 상태에 빠져 있던 7일 동안 그가 천국에 다녀왔다는 기사였습니다. 대부분 임사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4분인데 그는 7일간 뇌가 정지된 것입니다. 죽었다 살아난 것입니다. 자신만이 단 하나의 사례가 된 '임사체험(臨死體驗)을 한 것입니다. 과학 학술지에 150여 편이 넘는 논문들을 게재했고, 국제의학컨퍼런스에서 200회 이상의 연구 발표를 하는 등 뇌와 의식의 작용에 관해 뛰어난 업적을 쌓은 세계적인 뇌의학 권위자입니다. 평생을 과학적 세계관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신이나 영혼, 천국의 존재는 믿지 않았답니다. 전원이 나갔는데 TV 화면이 나오는 신비한 천국 체험을 한 그는 하나님과 영혼, 천국을 확실하게 믿은 것입니다. 뇌가 의식, 즉 영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서 분리된 의식, 즉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후 체험을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으로 펴냈습니다. 뇌 과학의 전문가로서 물질주의적인 관점에서 부정해왔던 영혼, 신, 사후세계 등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임사체험은 뇌가 만들어내는 환각이 아니라 '완전한 실제(Ultra-Real)'라고 말합니다. 의학적으로 뇌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임사체험을 했다는 것은 임사체험이 뇌가 만들어내는 환각이나 망상이 아니라 뇌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하지 않아도 성령을 받으면 영안이 열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알지 못하는 신비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저서 ‘잘 되는 나’에 나오는 간증입니다. 오스틴의 친구가 말기 암에 걸렸는데 의사들이 다 포기했답니다. 하루는 집에서 요양을 하는데 네 살배기 아들이 성경책을 들고 나왔답니다. 글을 못 읽는 아이가 성경을 펼치고 손가락을 대며 “아빠, 뭐라고 쓰였는지 읽어 달라” 말했답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을 가리키고 있기에 그가 읽어주었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그 순간 그는 하나님 음성을 들었답니다. “네 살배기 아들이 죽음을 앞두고 절망에 빠진 자신에게 성경을 펼쳐 손가락으로 이 구절을 가리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답니다. 똑같은 말씀이지만 성령으로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는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는 구절을 부여잡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결과 절망적인 말기 암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답니다. 똑 같은 말씀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의미 없이 흘러가는 바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될 수 있습니다.

 

3. 지식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믿어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자 당시 최고 지식인 중의 하나였던 니고데모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어떻게 가능하겠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이제 어떻게 현실적으로 그것을 경험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하나님의 자녀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지 어떻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는 구약 성경 연구의 권위자요 율법학자입니다. 그런데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에스겔서 11:19절에 “새 신”을 주시겠다고 약속했고 겔36:25-28절에 새영을 백성들의 마음에 두시고 렘31:33절에 하나님의 법을 백성의 마음속에 두어 하나님의 백성을 삼겠다고 말씀해 주었는데 니고데모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니까 말씀을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영적 무지에 대하여 예수님을 니고데모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그(호, 정관사) 선생으로 부르신 것을 보아서 그는 분명히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산헤드린의 회원, 바리새인, 율법학자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직 영안이 안 열려 예수님이 성령의 역사와 활동을 말해도 표적을 통해 관심을 가졌지만 참된 영적지식을 가진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바람부는 현상도 믿지 않는다면 인간의 지식으로는 하늘의 실제를 직접 설명해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14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15절 같이 읽겠습니다.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16절 큰 소리고 같이 읽겠습니다. 믿는 자마다 다 영생을 얻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가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종교인의 공력으로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1절 상) 권력의 힘으로도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1절 하) 경험의 힘으로도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4절) 재력의 힘으로도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요19:39, 참고) 지식의 힘으로도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10절) 오직 믿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을까요 믿지 않고 그냥 세상 지식인으로 살았을까요? 요한복음에는 니고데모에 대하여 3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50절을 보세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속들을 파송햇
습니다. 그런데 하속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을 나무라자 니고데모가 하속들을 변호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에 대해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변하는가 보십시오.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고 질문했는데 바로 니고데모가 믿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9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100근쯤 가지고 왔습니다. 제자들까지 다 도망을 갔습니다. 예수 당으로 찍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물질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나드 한 근의 향유를 부었는데 가룟 유다가 그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의 1.5년 연봉에 해당됩니다. 그러면 니고데모가 드린 몰약과 향유의 값어치는 일반 노동자의 150년 치 연봉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황제 장례식에 사용되는 량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드렸는지도 모릅니다. 니고데모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황제가 진짜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유일한 황제라는 것을 고백한 행위입니다. 경제적으로 예수님이 그의 전부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변화된 지성인이 된 것입니다. 냉소적인 지성인이 아니라 예수님께 헌신한 지성인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의 변화는 물리적인 변화에 머문 것이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바뀐 것입니다. 삶의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과기처 장관을 지냈던 세계적 핵물리학자인 정근모 박사(장로)의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대단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열 살 된 아들에게서 '만성 신장염' 증세 나타났습니다. 한번에 4시간이 소요되는 투석치료를 하였답니다. 아들은 학교생활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답니다. 아들은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답니다. 교회에서 4일간의 부흥회가 열렸답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 다시 눈물샘이 터졌나왔답니다. 3일 동안 철야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기도하였답니다. 아들의 생명이 연장된 표적을 본 것입니다. 그는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라는 책을 세상에 내어 놓았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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