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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까지 붙들 핵심 세 가지가 있다면(갈6:11-1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619 추천수:3 112.168.96.218
2018-06-10 11:46:31

 

마지막 까지 붙들 핵심 세 가지가 있다면

갈6:11-18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습니다. 1월 첫주부터 시작한 갈라디아서 강해가 오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삶도 언젠가 이 땅에서 마지막에 이를 때가 오는데 그 때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하겠습니까?

제가 오래 전에 <마지막 기도>라는 시를 썼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이 땅의 삶을 마지막 끝내는 순간 기도하며 죽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이 시를 썼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기도로 마감하게 하옵소서.

 

기도할 시간조차 없이 떠나는

인생이 되지 말게 하시고

 

세상에 파묻혀 살다 가

기도마저 잃어버리고

어느 날 문득 떠나는 인생이

되지 말게 하옵시며

 

기도하는 것이 부끄러워

지인들 앞에서 속으로 중얼거리다

마지막을 마감하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하소서

 

살면서 마지막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기에

불편하지 않게 하시고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부끄럽지 않게 하옵소서.

 

인생의 마지막은

기도이게 하소서

 

기도하다 문득 떠나면 더욱 좋고

그렇지 못한다 할지라도

마지막이 다가온 것을 알 때는

무릎꿇을 만한 의식과

힘이 있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마감하면서 무엇을 했을까요? 역시 기도합니다.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바울은 모든 서신을 마감할 때 기도를 합니다. 갈라디아서 바로 앞에 있는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을 보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뒤에 있는 에베소서 6장 24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역시 기도합니다. 바로 다음에 있는 빌립보서 4장 23절을 보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역시 기도로 마감을 합니다. 골로새서도, 데살로니가서도, 디모데서도, 디도서도 기도로 마감을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의 삶, 마지막을 기도로 마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마지막 죽음 앞에서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마지막 세 가지만 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축복 기도로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16,18).

신앙생활하면서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핵심 세 가지가 있다면 그 하나는 기도입니다. 끝까지 기도를 놓지 않고 기도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세가지 기도를 드립니다. 첫째는 심령에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은혜가 심령에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심령에 은혜를 받아야 제대로 살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심령에 은혜가 넘치면 천사처럼 살지만 은혜가 떨어지면 마귀처럼 변합니다. 강도도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성자도 은혜가 떨어지면 마귀로 변합니다. 천사도 은혜 떨어져 교만해 지면 마귀로 변하지만 살인자도 은혜를 받으면 성자가 됩니다. 심령에 은혜가 있을 때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고, 겸손해 지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넘칠 때 풍성해지고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낙엽도 바람 타면 강을 건너가듯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은혜를 받으면 38년된 병자도 치유되고 은혜 받으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도 믿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확신하게 되고 죽음 후의 천국도 믿으며 인생을 힘있게 살 수 있습니다. 평생 은혜로 살았던 사도 바울은 은혜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이런 고백을 하는 우리는 마지막까지 이 은혜를 붙들고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두 번째 기도제목은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평강입니다. 평강을 기원해 주는 것입니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는 할례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복음으로 새롭게 된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 같은 말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이들을 향해 바울은 무엇을 합니까? 평강(에이레네)을 빌어 줍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빌어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평강은 예수님 탄생시에 약속하신 것입니다(눅2:14). 예수님 교훈때도 강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 주님께서는 평강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평강은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평강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긍휼(엘레오스)을 빌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한결같이 불쌍이 여김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 살면서 이 세가지 기도 제목을 붙들고 살다가 마지막에도 이런 기도를 드리고 주님 앞에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늘 잎술을 가지고 남을 저주하고 비난하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남을 위해 기도하다가 기도로 끝마치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죽어도 우리가 한 기도는 죽지 않습니다. 기도는 허공을 떠도는 메아리가 아닙니다. 기도는 단지 자기최면이나 정신 수양, 심리 효과, 위약 효과(placebo effect) 정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어려울 때 포기하지 않고 극복의 비전을 가지고 믿음으로 생각과 말을 기도로 심으면 아름다운 꽃이 피고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기를 원하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민족과 교회가 잘 되기 원하면 비판과 불평만 하지 말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위한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계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하버드 대학에 자녀를 보낸 8명의 부모의 이야기를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나왔습니다. "하버드 부모들의 자녀 교육법"입니다. 그 중 두 아이를 하버드 대학에 입학시킨 성호영 목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국에서 수학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컴퓨터 공부를 더 심도 있게 하고 싶어 미국 유학을 떠났답니다. 생계를 위해 아내와 함께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지인의 제의로 세탁소를 열었답니다. 세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임심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알게 된 큰 딸은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어떻게 살아?"라고 걱정하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동생들도 덩달아 울었고 저자도 순간적으로 '아기는 누가 돌보지, 가게 일손은 누가 덜어주지.'라는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저자의 형편을 아는 사람들은 '셋도 많은데 넷째를 낳아서 어떻게 키우려고 하느냐.'며 근심어린 시선을 보내었답니다. 그런데다 의사는 "지금 나이가 좀 많아서 정상아라고 보장은 못합니다. 건강도 안 좋은데 뱃속 아이를 검사해보고 수술합시다."라고 권유했답니다. 셋째를 낳은 지 10년이나 지났고 더군다나 한국에서 남성 불임수술을 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아내가 구역질이 나고 속이 거북하고 소화도 안 된다고 하여 암이 아닌지를 의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임신을 한 것입니다. 그 때 저자는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증거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저자는 유학생활이 너무 힘들어 어처구니없는 불평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십니까? 만약 살아 계시다면 아내에게 아기를 갖게 해 보세요. 그러면 내가 당신의 존재를 믿겠습니다." 도저히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내뱉은 망령된 기도였는데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던 아내의 임신이 사실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고민을 뒤로 하고 축복의 선물로 받아들였답니다. 넷째를 가지고 식구들은 정신적으로 훨씬 강해졌고, 모든 일은 쉽게 풀렸다고 합니다. 넷째로 인해 쉽게 영주권을 받았고 붕어빵처럼 꼭 닮은 딸은 결국 언니를 따라 하버드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자신의 아들도 목사가 되었고 자신도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인생 살면서 꼭 붙들어야 할 것이 기도이고 마지막까지 기도로 마감하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우리는 끝까지 십자가를 붙들고 자랑하여야 하겠습니다(14).

사도 바울은 사랑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마치면서 친히 큰 글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눈이 나빠서 일수도 있지만 마지막 부탁을 하고자 비서의 손에서 붓을 받아 쥐고 힘 있게 강조하기 위해 큰 글자로 쓰고 그것을 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1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진리의 본질, 삶의 목적과 동기를 십자가라고 선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라는 말은 바울에게 있어서의 세상이 죽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한 때 세상의 영광과 인간적 성공을 바라보고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부터는 세상적인 명예와 성공의 기준들을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빌3:3-8)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는 말은 바울 역시 세속적인 것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할례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외면적 할례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너희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못받는다(행15:1)"고 하였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입니다. 인간적인 겉치레를 중요시여기는 자들입니다. 둘째는 13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까?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첫째는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면하기 위해섭니다. 할례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전하면 전통적인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고" 할례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따르는 할례당이 얼마나 많은 가를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이 멸망으로 가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해서라도 자기들의 이익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였습니다. 십자가만이 우리 인생을 정확히 진단해 줍니다. 십자가만 우리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우리는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인생이 왜 죽는지를 모르지만 십자가는 인생이 왜 죽은 지를 알려 줍니다. 그 어떤 것도 죽은 후 어떤 세상이 있는지 알려 주지 못하지만 십자가는 죽음 후 천국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대체물이 있지만 십자가는 다른 대체물이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요즈음 자기 상품화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기 PR, 자기를 최대한 선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켜도, 신문을 보아도 자기 상품을 사라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상품이 최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우상화 시대입니다. 자기를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이용하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 신앙인 마저도 십자가를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가 기업을 닮아가고 있고 신앙인이 세일즈 맨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을 브랜드화시켜야 무한 경쟁 시대에 환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만들며 일생을 삽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얼마나 돈을 벌었고, 무슨 일을 하였고, 아이들을 어떻게 출세시켰고 등등 자신의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 일평생 살아갑니다. 일부 교역자 중에서는 십자가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업적만 자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인들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몇 명 교인이 모인다는 것만 자랑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들을 끌어 모으는 본질을 잃어 버린 교역자들과 같습니다. 얼마나 주님처럼 살고 있느냐가 문제가 압니다. 얼마나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느냐에 관심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장사의 순단으로 사용하고 장식품으로 활용합니다. 십자가를 성공과 출세, 명예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얼마나 많은 헌금이 모이고 얼마나 많은 숫자가 모이고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 앞에서도 십자가를 자랑하였습니다. 바울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 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표현이고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이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근거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대속과 속죄의 상징이며 구원의 상징이기 때문에 십자가만 자랑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념비가 아니라 자신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바울도 얼마든지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학벌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통 유대인이었고 베냐민지파 사람입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이적을 행하였고, 무수히 많은 교회를 세웠으면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 선교사가 인도에서 사역을 하다 안식년을 맞이하여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현대선교의 창시자라 불리며 성공적 사역을 마치고 은퇴한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선교사를 자주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캐리의 업적을 자랑하였습니다. 더프가 자신을 칭찬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윌리암 캐리가 그를 불러 타일렀습니다. "더프 선교사, 이제 나에 대한 자랑은 그만하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그러나 더프는 계속해서 캐리의 사역을 칭찬하고 다녔습니다. 캐리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 더프를 불렀습니다. "더프 선교사, 내가 죽은 후에는 제발 나에게 대해서 말하지 말고 윌리엄 캐리의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세요." 캐리의 간절한 부탁을 듣고 그는 더 이상 캐리의 업적을 칭송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선교사가 되었답니다.

 

3.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흔적을 남겨야 하겠습니다.(17)

바울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마감하면서 어떤 말을 남기고 있습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할례의 흔적이 아니라 예수의 흔적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타”입니다.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를 나타내는 자국을 말합니다. 불도장입니다. 사람에게도 노예에게 낙인을 찍었습니다. 이 의미는 첫째는 그리도께 속했다는 의미입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할례냐 무할례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으로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인맞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냐 가난하냐? 남자냐 여자냐? 많이 배웠는냐 적게 배웠느냐? 무슨 교회에 다녔느냐? 무신 교파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새 사람되었느냐 아직도 옛사람이냐가 문제입니다. 지옥 가는 백성이냐 천국 가는 백성이냐가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으로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으로도 벼슬로도 지식으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목사냐 장로냐는 직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 자녀가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 믿어 구원받은 흔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흔적입니다. 믿는 사람의 열매 즉 성령의 열매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흔적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 이하에 나타나는 육신의 열매만 맺힌다면 천국 백성이 아니라는 흔적입니다. 새사람되었으면 성령의 열매가 흔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예수님께서 손짓을 하시며 왔느냐고 하더랍니다. 잠시 후에 권사님이 오니까 손을 흔들며 반갑게 환영하더랍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장로님이 오셨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일어나서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영접하더랍니다. 집사님이 은근이 속이 상해서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세상에서도 우리 집사들은 일만하고 봉사하고 헌금했는데 장로님들은 교회에서 인정받고 대접받고 하셨는데 천국에 와서까지 왜 이렇게 차별하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더랍니다. "야 이사람아! 집사는 너무나 자주 들어오고 권사는 종종 들어오고 장로는 아주 가끔 들어오니 내가 반가워서 그랬지" 목사가 들어 왔답니다. 일어나 춤을 추며 환영하더랍니다. 집사는 예수님에게 화를 내며, "예수님, 천국에서도 목사를 집사보다 더 환영하니 이런 인간차별이 어디 있습니까?"했더니, 예수님은, "김집사, 오해 하지 마시오. 천국에 집사들이 하도 많이 와서 희소가치가 없지만, 요즘 목사들이 천국에 오는 사람이 너무 희귀하여 오랜만에 목사가 천국에 온 걸 보니, 너무 놀라고 반가워서 그랬소."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집사가 천국을 돌아보니, 공중에 사람 입처럼 생긴 것이 동동 떠 있었답니다. 예수님께 "사람 입처럼 생긴 것이 왜 공중에 떠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아, 저 입들은 목사들의 입인데, 목사들이 좋은 말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아서, 입만 천국에 오고, 몸뚱아리는 다 지옥갔소"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비아냥하기 위해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중요한 것은 목사냐 장로냐 권사냐가 문제가 아니라 천국 갈 새사람인가 지옥 갈 옛 사람인가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흔적은 종으로서의 흔적입니다. 전쟁이나 가난으로 노예가 된 사람에게 인을 찍습니다. 주인의 소유라는 낙인을 찍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에게 주재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종으로서의 흔적은 예수님을 내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종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예수님을 종으로 부리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유를 부르짖으며 주님의 뜻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살면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종으로 살았습니다. 서신서마다 초두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흔적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종 중에는 희년이 되었는데도 자발적으로 주인 집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와같이 바울은 종으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종된 것을 수없이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빌1:20)”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없어도 당신이 곁에 계시면 나는 언제나 있습니다. 나는 있어도 당신이 곁에 없으면 나는 언제나 없습니다. 당신이 있으므로 나도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물므로 나는 부를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종으로서 받은 상처 때문에 바울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 문신이 수치와 조롱과 멸시의 표시였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종된 흔적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아이들이 조금 자라면 부모를 부끄러워하고 부모의 말을 잔소리를 생각하여 자유를 부르짖으며 부모의 뜻을 거역하려고 하는 것처럼 조금 배우고 세상을 알게 되면 주님을 떠나 방종이고 방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기차는 레일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비행기는 하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 살 때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흔적은 주님을 전하다가 당한 고난의 상처를 말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무척 괴롭힘을 받았습니다. 그 중 참으로 괴로운 것은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12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는데 바울은 그렇지 못하다고 바울의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무시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도 그랬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더 그랬습니다. 설교를 못한다고 하고 못생겼다고 하며 돈을 좋아하고 위선을 떤다고 했습니다. 사울은 당당하게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말을 들으면 십자가를 떠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이 주는 상처를 극복한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흔적을 통해 증명해 주어야 합니다. 누가 “예수 믿으면서도 그 따위로 사냐”고 조롱하면 당당하게 그 문제를 예수님의 능력으로 극복하여 바로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흔적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상처가 만들어낸, 상처가 아문 다음에 생기는 것이 흔적입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당했던 멸시, 예수 믿기 때문에 당했던 손해, 예수 믿기 때문에 당했던 십자가,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며 당했던 상처들이 세월이 지남과 더불어 흔적으로 사도 바울 몸에 있었단 말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수많은 괴로움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40에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은 줄 알고 시체처럼 밖에 내던졌는데 다시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무수한 항해를 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모릅니다. 그는 광야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산의 위험과 강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이것들에 의해 포기하고 꺾이다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극복하고 승리한 예수님의 흔적은 가져야 합니다. 이혼하고 이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교회를 떠나고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기고 예수님의 흔적을 지니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가난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극복하여 예수님의 흔적을 가문에 남기는 것입니다. 가난했지만 내가 예수님 믿고 이렇게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난을 극복했다는 흔적을 자손들에게 남겨놓는 것입니다. 심각한 질병을 당하여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기도하면서 치유받아 이렇게 건강하게 되었다고 간증함으로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들어 쓰심' 의 저자이면서 아프리카 케냐 35만 마사이 부족 전체의 명예 대추장으로 추대된 안찬호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했답니다. 강원도 도계 탄광촌 광부였던 아버지는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방학 때마다 탄광에서 일해야 했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처럼 광부가 되었답니다. 고된 광부 일에 지친 그는 날마다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답니다. 어느 날, 탄광에서 일하던 중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를 당했답니다. 함께 갱 속에 갇힌 광부가 그에게 물었답니다. "자네, 예수를 믿나?" 어이가 없었답니다. 갱이 무너져 죽게 생겼는데 갑자기 왠 예수 타령인가? "안 믿어요!" 소리치자 그가 침착하게 말했답니다. "내 경험상 우리는 여기서 살아나지 못할지도 몰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너는 죽어서 어디로 갈 거라고 생각해? 지금도 늦지 않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어떻게 하겠니?"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꿇고 영접 기도를 했답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면서 급기야 대성통곡을 하다가 의식을 잃었답니다. 깨어났을 때 병원에 누워있었답니다. 그러나 자신은 기적처럼 구조되었으나 복음을 전해 주었던 광부는 죽고 말았답니다. "나를 살리고 정작 자신은 죽었구나" 라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답니다. 그 광부가 죽어가면서 전했던 십자가를 선교사가 되어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전했답니다. 케냐에서 22년째 사역하며 마사이족 거주지에 24개 교회를 세웠고, 44개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3개의 중,고등학교, 1개의 신학대학을 세웠답니다.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 예수님의 흔적을 남긴 것입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너무나도 무능하고 우둔한 저에게 구원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 재능, 물질을 통하여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열린 교회를 개척한 1대 목사로 제가 이 교회를 떠난 후 무슨 흔적이 남아야 하겠습니까? 바람피우다 더러운 흔적만 남긴다면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자식에게 무리하게 교회 물려주려다가 더러운 흔적만 남기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냄새나는 제 흔적만 남는다면 저는 인생에 실패한 사람이 됩니다. 가정생활,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죽음도 가난도, 질병도, 각종 장애물도 극복하고 일하시는 예수님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마지막 까지 붙들 핵심 세 가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끝까지 은혜와 평강, 긍휼을 구하는 축복 기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끝까지 십자가 자랑을 붙들어야 합니다.

셋째는 끝까지 새 사람되게 하고, 종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하게 하는 예수님의 흔적을 붙들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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