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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관계의 자유함(갈6:1-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939 추천수:1 112.168.96.218
2018-05-27 04:37:22

 

대인관계의 자유함

갈6:1-5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가 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사람의 사회적 성공과 출세에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보스톤 대학의 연구에 의하면 대인관계 능력이라고 합니다. 보스톤 대학에서 7세 어린이 400명을 40년 동안 추적 조사하였는데 성공과 출세에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끼친 요소로는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는 능력이었답니다. 우리는 공부만 잘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버드대학교의 위건(A.E.Wiggan) 박사는 직장, 가정, 사회생활 등 각 분야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까 전문지식이 모자라 실패한 사람들은 불과 15%밖에 안 되었답니다. 나머지 85%의 사람들은 모두다 인간관계를 잘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지능지수나 학창시절의 성적은 인생에서의 성공을 예언하는 정도가 20%정도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가도 나와 있습니다(Gibbs). 공부를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대인관계 지수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데는 더 중요하다는 자료입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최고 경영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CEO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덕목으로 '대인지능'을 꼽았답니다. 인간관계를 잘 맺고 인맥관리를 잘 해야 직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MBA 과정에서 유수 기업 CEO들을 상대로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조사했답니다. 그 결과 응답자의 85퍼센트가 '원만한 인간관계 및 다른 사람과의 공감 능력'을 꼽았답니다. 미국의 카네기재단에서도 5년 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1만 명을 대상으로 '성공비결'이 무엇이었는지를 질문 했는데, 85%의 사람들이 다양한 사람들과 골고루 인간관계를 잘했기 때문에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효과적으로 자신이 맡은 업무를 수행하고 직업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세 가지 기술이란 기능적 기술(technical skill), 개념적 기술(conceptual skill) 그리고 인간관계기술이라는 것입니다. 기능적 기술이란 자기가 맡은 전문분야의 업무를 말합니다. 개념적 기술이란 거시적으로 조직 전체의 목표달성과 생산성 향상을 꾀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합니다. 인간관계 기술이란 문자 그대로 일보다는 직장의 다른 동료, 상사, 부하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관계 기술이 직업적 성공을 거두는데 85% 정도이고, 기술적인 지식은 15% 정도라고 밝혀지고 있답니다. 직장에서 해고된 대부분의 사람들 중 66% 정도는 대인관계의 실패 때문에 해고되었던 것이고, 단지 34% 정도가 일과 관련된 기술이라든가 지식부족 등의 원인으로 해고된답니다. 인간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한다면 학교 공부도 중요하지만 대인관계 능력을 높여 주어야 합니다. 대인관계를 높이는 데는 가정생활, 학교생활도 중요하지만 소그룹이 모이는 교회생활도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또래 그룹에 참여하여 부딪치고 갈등을 겪으면서 대인관계의 능력을 높이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교회에서 친구와 조그마한 문제가 있어 교회에 나가기 싫다면 “그래 나가지 마”라고 하거다 “큰 교회로 옮겨”라는 식으로 하면 아이들의 대인관계 능력은 향상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갈등과 충돌, 아픔을 통해 대인관계의 능력이 높아지면 어디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인간관계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인간관계의 자유함”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직장 생활에서 보기 싫은 사람이 있고, 원수 맺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직장에서 대인관계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직장에서 성공할 확률이 적습니다. 학교에서 피하고 싶은 사람, 기분 나쁜 사람,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학교생활에서 대인관계는 자유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 학생은 성공적인 학교생활을 할 확률이 줄어듭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보기 싫고 장로의 얼굴을 피하고 싶고, 구역 식구들이 보기 싫으면 교회생활을 성공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내가 싫어하면 상대방도 싫어하는 것이고 내가 좋아하면 상대방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면서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높은 대인관계 지수를 가지고 대인관계의 참 자유함을 누리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근거로 세 가지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먼저 대인관계를 단절하는 요소(범죄)가 드러난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대인관계 지능의 핵심 요소는 첫째, 다른 사람의 기분, 감정, 관점에 대해 민감하고 이해하는 "타인 이해"입니다. 둘째, 타인과 어울리기입니다. 셋째, 사람들 사이에서 지도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리더쉽"입니다.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면 원만한 대인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살다보면 좋아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적대시하고 내 일을 방해하는 이해 못할 사람을 만납니다. 잘 지내던 사람도 약점이나 잘못, 실수가 드러납니다. 결혼 생활 행복하게 하다가 때로는 아내가 남편 몰래 계하다가 돈을 날린 것이 드러나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용납하기 힘든 남편의 과거가, 아내의 과거의 잘못이 들어나고, 부모님을 존경하며 행복하게 살다가도 받아들이기 힘든 부모의 결점이 드러나면 “어찌 그러할 수 있냐”고 이해못하면 관계가 절단 나버립니다. 목사님을 존경하며 교회생활 잘 하다가 용서하기 힘든 목회자의 실수가 들어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녀를 신뢰하며 행복하게 살다가 때로는 아들 딸이 부모님 몰래 돈을 훔친 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구역 모임에서 행복하게 신앙생활하다가 때로는 가정의 복잡한 문제들이 구역식구들에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대인관계의 자유는 없어집니다. 만나기 싫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정죄합니다. 오물 보듯하며 관계가 멀어집니다. 같이 살지만 이미 심리적으로 이혼하게 되고 잘 관리하지 못하면 다시는 만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중고등부에 참여하지 않게 되고 구역 모임을 피하고, 교회를 떠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슨 범죄라는 것은 고의적으로 악한 행동을 저지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결함, 결점, 잘못, 실수라는 말로 무의적으로 혹은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지은 죄를 말합니다. 살다 보니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님 없이 주님을 망각하고 주님을 거역하는 삶의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니까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 않고 육체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5장 26절처럼 헛된 영광을 구하고 서로 노엽게 하고, 서로 투기하는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드러나거든”이란 말은 마치 병속에 손을 넣고 움켜쥔 손 때문에 손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궁지에 빠져 쩔쩔매게 된 상황을 말합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의 힘으로 그 궁지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관계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이런 처지에 놓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인간의 연약함과 인간의 부패성과 인간의 한계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타인의 느낌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없으며, 또래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타인이 감추고 있는 욕망이나 의도까지 읽어내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대인관계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러 사람이 각각 공유하고 있는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에 근거하여 유려하고 세련된 의사소통의 방식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 반응,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과 적절하게 교류할 수 없으며, 큰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적절한 위치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게 됩니다. 대인관계 지능이 높은 사람은 타인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고, 타인 의견에 공감하며, 타인의 특징을 인식하고, 타인의 동기, 분위기, 의도를 고려해 타인의 관심을 인식하며, 타인과 효과적으로 상호 작용을 잘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신령한 너희는”이라고 시작합니다.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갈5:6). 성령 충만한 사람들,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허물과 실수, 약점과 죄로 말미암아 궁지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 주라고 말합니까?

이런 사람을 만나면 대인관계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죄하고 침을 뱉습니다. 자연스러운 관계에 이상이 생깁니다. 말도, 표정도 행동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부자유스런 인간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줄 몰랐다고 상종하지 않습니다. 위선자라 비난하고 다른 사람에게 소문을 퍼뜨려 매장해 버립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의 약점이나, 잘못, 실수가 들어나면 자신 스스로 수치를 느끼게 됩니다. 아담도 범죄한 후 부끄러워 숨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고 당당하고 뻔뻔한 사람도 있지만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은 대부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을 도망가고 싶어 합니다. 사람 만나기도 싫고, 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지는 것입니다. 심해지면 깊은 영적 우울증에 빠져 버립니다. 특히 의가 강한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제까지 의롭게 살았고 일평생 동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고 했는데 자기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죄받는 위치에 서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심하면 자살의 유혹을 받게되고 그 유혹에 지면 자살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오랜 전에 부 교역자로 봉사하고 있을 때 월요일과 토요일은 제가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총각이었을 때인데 월요일 그만 일어나지 못하고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그날은 종소리도 듣지 못하고 잠에 곯아떨어진 것입니다. 일어나 보니 6시가 넘었습니다.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교인들을 어떻게 보며 담임 목사님을 어떻게 볼까를 생각하니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합니까? 보는 교인들마다 “목사님 왜 오늘 새벽기도회 안 나왔어요. 회개하세요.”라고 반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담임 목사님이 불러 “경건 성이 부족하니까 우리 교회를 사임하고 기도원에 가서 40일 기도하고 내려오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때 담임목사님은 "괜찮아 목회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며 위로하고 힘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때를 잊지 못합니다. 그 일이 있은 지 3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그 목사님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와 허물로 교회를 옮기고 싶고, 신앙을 버리고 싶고, 낙심하고, 불안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바로 다음 문장을 보십시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잡는다는 말은 "돌이키다. 그물을 깁다(마4:21 막1:19), 인격을 완성하다(고후13:11)"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책망하고 나무라고 정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어성경에서는 'restore'라는 말로 번역하여 회복시킨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어로 본래 접골 즉 뼈가 어긋났을 때 뼈를 바르게 맞추는 일을 지칭합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깁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몸을 정상적으로 회복하게 하는 것이고 그물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상 회복을 한다는 말입니다. 일어 설수 없는 사람을 일어서게 해주는 것입니다. 상처난 부분을 드러내 놓고 후벼 파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상처난 신앙, 상처난 마음, 상처난 감정, 상처난 자존심, 상처난 인격을 다시 치유해주고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직분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을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사장으로, 직분자로, 남편으로, 아내로 도저히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어떠한 잘못으로 가정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잘못으로 직장에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실수로 교회에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들을 결코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정상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을, 그렇지 않아도 낙심한 사람을 더 밟고 짓누르고 정죄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회복시키되 어떤 마음으로 회복시켜야 합니까? “온유한 심령으로”입니다. 감정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온유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분노와 정죄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어떻게 합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정죄하며 죽이려는 사람들을 향하여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의 이중적이 속마음이 다 드러났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애굽왕 바로에게 들통이 납니다. 하나님께 들통이 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셔서 그를 정죄합니까? 아닙니다.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창13:14에 나타나셔서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과 땅과 복을 주겠다고 비전을 주십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만 그렇습니까?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 다윗, 모세, 엘리야, 요나, 베드로, 바울 모두 실수를 합니다. 그들의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그들의 약점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비난하며 정죄하지 않습니다. 희망과 용기를 주면 그들을 하나님이 원하는 사명을 일룰 수 있도록 이끌어갑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6)" 저는 이 말씀을 확실히 믿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이 실수하지만 신앙을 회복하게 하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하시고 위로해 주시고 직위를 회복케 하시고 잃은 것을 되찾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시적 실수는 있으나 영원한 실패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대인관계의 자유를 누리려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연약한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2. 연약한 사람 때문에 손해를 보아야 할(죄가 드러난 경우을 보고) 상황이 오면 믿음의 공동체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2)

어떤 사람의 잘못이 드러나면 교회도 매정하게 그 사람을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를 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 사람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술 한 잔 먹고 풀어 버린다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술 안 먹고 안 풀겠다고 고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끝까지 정죄하고 적대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은근히 따돌리고, 가볍게 보고, "속마음을 알았다, 당신의 본모습을 알았다. 이제까지 꼬리만 보았는데 몸통을 보았다"라고 말하며 그 사람과 상종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로 비난하며 수군거립니다. 교회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다른 교회로 가든지 아니면 세상으로 빠져버립니다. 대인관계 지수가 낮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려면 첫째,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고 둘째, 내가 먼저 다가서고 셋째, 친화력을 갖추고 넷째, 다른 사람에게 배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가지 요소를 골고루 갖추지 못하면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자녀의 성공을 바란다면 어릴 때부터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타인과 어울리기에 능숙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대인관계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우리에 교훈하고 있습니까?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짐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2절의 짐과 5절의 짐은 원어적으로는 서로 다른 말입니다. 2절의 짐은 `바로스'로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말하며 5절의 `짐'은 `포르티온'으로 혼자 운반할 수 있는 작은 짐을 말합니다. 상대방이 지고 있는 짐이 자신 혼자 감당하기는 너무나 벅찬 짐일 수 있습니다. 이 때 대인관계의 자유함을 누리기 위해서 믿음의 사람들은 그 짐을 함께 져 주어야 합니다.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타인과 어울려 함께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간의 근원적인 이기심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이 손해를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사람과 잘 어울리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홀로 어쩔 수 없는 경제의 짐, 질병의 짐, 까칠한 성격의 짐, 어찌할 수 없는 습관의 짐, 장애의 짐, 죄의 짐, 고독의 짐을 함께 져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소유욕과 지배욕이 강하기 때문에 가까이 가는 고슴도치처럼 가까이 가면 갈수록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입장을 공감하고 상대의 짐을 많이 지면 지는 사람일수록 인간관계 지수가 높은 사람이고 인간관계의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들은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짐들을 져준 사람들입니다. 가장 인간관계의 자유함을 누리신 예수님은 인류의 풀 수 없는 죄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여 성령으로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성경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서로 짐을 지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곧 사랑의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우리의 죄짐을 지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의 짐을 지어줄 때 인간관계의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어제 동료 목사님 딸의 결혼식이 있어 가는데 같이 가는 목사님이 자신은 결혼을 할 때 학교 선생님이었던 부모님이 일찍 천국에 가서 결혼할 때 돈 백만 원이 없어 시골에 사는 부자인 고모님께 100만원만 빌려달라고 했는데 야박하게 그것을 빌려 주지 않아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딸이 결혼을 하는데 신랑감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예전의 자신을 생각하면서 그 짐을 지고 결혼을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 무거운 죄짐과 인생의 짐을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가지지 못할 짐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남의 짐을 진다고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9:41)”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니 너희에게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부어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것만큼 되돌려 받을 것이다.'(눅6:38)라고 했습니다. 썬다 씽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썬다 씽이 어느 추운 겨울 날 전도 여행을 하는 도중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게 되었답니다. 혼자서 산을 넘는데 한 사람이 추위에 지쳐 쓰러져 있었답니다. 앞에 가던 사람이 못 본 체 하고 그냥 지나갔답니다. 썬다 씽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들쳐 업고 힘들게 산을 넘었답니다. 그런데 한 참 가다 보니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답니다. 자세히 보니 앞에 혼자 갔던 사람이었답니다. 그는 혼자 험한 산을 넘다 쓰러져 추위에 얼어 죽었답니다. 그러나 썬다 씽은 죽어가는 사람을 엎고 가다 보니 땀이 나고 모진 추위에서 그 사람도 자신도 살았답니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무거운 짐을 진 자의 짐을 대신 져 주면 대인관계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꾸 그 짐을 회피하려고 하니까 피하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프거나 탈선하면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지고 교회에 나와 사랑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병들면 그 무거운 짐을 내가 지고 주님 앞에 나와 사랑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허물이 들어나면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고 욕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짐을 같이 져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지체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고전 12:26)"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빨이 아픈데 발과 손과 머리만 아무 고통 없이 잠을 잘 수 있습니까? 이빨이 아프면 온 몸이 온밤을 새우게 되는 것입니다. 눈이 아프며 그것은 눈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몸 전체의 문제입니다.

같이 지어야 할 짐이 있다면 서로 같이 지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져 주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지어야할 남편의 약점의 짐, 내가 지어야할 아내의 짐, 내가 지어야할 부모님의 짐, 내가 지어야할 자녀의 짐, 내가 지어야할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목사님, 구역 식구들의 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그것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지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전략에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탄은 인간관계의 부자유함을 통해 교회와 가정과 기업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서로 허물을 들추어내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하게 하고 증오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짐을 져 줌으로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짐이 우리의 거침돌이 아니라 우리의 보약이 되고 우리를 성장하고 성공하게 하는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한나가 브닌나의 비난의 짐을 기도로 졌기 때문에 위대한 기도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아들 사무엘을 민족의 짐을 짊어진 기도의 용장으로 만든 것입니다. 에스더가 민족의 짐을 자신의 짐으로 받아들여 죽으면 죽으리라고 기도했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로 한 시대 쓰임받은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자신의 풍족하지만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진 것은 자신의 짐으로 졌기 때문에 시대 속에 쓰임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상대의 짐이 크면 클수록 그 짐을 내가 지면 내가 큰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어떤 사람도 소화할 수 있는 대인관계의 자유함이 폭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대인관계 지능의 최고 소유자이신 예수님은 대인관계 지능을 높이는 방법에 대하여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3. 다른 사람의 잘못이 드러날 때 자신과 자신에게 맡겨준 사명에 대하여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대개 나쁜 방향으로는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자신은 의롭다고 교만해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믿는 사람 다 그렇고 그렇다고 생각하고 자신도 신앙이 나태해지다가 신앙을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이 잘 믿은 줄로 알았는데 뭐 별수 없구만 하고 교회를 기피합니다. 장로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고 권사님, 목사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생각하며 교회를 기피합니다.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 타인의 약점을 보면서 자신을 성찰하여야 합니다.

1절 하반절에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런 범죄에 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구 비난한데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면 더할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그만한 지위권 권력이 주어지지 않아서이지 주어지면 더할 수도 있습니다.

2) 타인의 연약함을 보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3절에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 버리면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습니다.

3) 타인의 죄를 보면서 자신은 떳떳하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4절에서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교만하게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4) 타인의 허물을 보면서 주어진 사명 포기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5절에서는 자기의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펴 자기에게 주어진 짐을 지고 가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맡겨준 짐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묵묵히 해내는 것입니다. 더욱 열심을 다해 맡겨준 일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신령한 너희입니다. 믿지 않은 사람과는 차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서로 짐을 져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럽고, 모순 많고, 허물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에게 준 사명을 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짐을 책임감 있게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인관계의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대인관계 지수가 높은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도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리더쉽"이 높은 사람입니다.

대인관계의 자유함을 누렸던 모세를 보십시오. 가나안을 향해 나갈 때 백성들이 범죄합니다. 원망합니다. 좌절합니다. 이방신을 섬깁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이 때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자신에게 맡겨준 일을 포기합니까? 하나님은 그 일을 포기하라고 합니까? 계속해서 주시는 말씀은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였습니다. 그런데 홍해가 앞에 있습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우리 매장지가 없어 이곳으로 이끌어 와서 이곳에서 죽게하는냐고 원망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출14:15-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 앞길에 무엇이 막겠습니까?

사탄은 어떻게 하든 우리의 신앙의 공동체의 부정을 드러나게 하여 파괴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에 어디 문제없는 곳이 있겠습니까? 무덤에 가면 문제가 없지만 이 세상 사는 어는 곳이든 문제는 있습니다. 문제를 보고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사탄은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도 아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낙심시켰습니다. 초대교회가 형성될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공동체를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선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묵묵히 지고 감으로 가나안을 정복했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탄은 늘 유혹합니다. 너 같은 것이 너 같은 교회가, 너 같은 가정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오늘도 말씀하십시다.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신 31:8)"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출 23:20)"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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