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갈5:13-1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061 추천수:1 112.168.96.218
2018-04-29 08:32:26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

갈5:13-15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동독과 서독이 분단국가일 때 동독의 개 한 마리가 사선을 넘어서 서독에 왔답니다. 그 때 서독의 개가 동독개에게 물었답니다.

'너 무엇 때문에 동독에서 이곳까지 그처럼 생명을 내걸고 내려 왔니? 동독에는 먹을 것이 없니?' '아니' '그러면 무엇 때문에 왔니? 동독에는 집이 없니?' '아니' 긍금해서 서독의 개는 계속 물었답니다. 그 때 동독 개는 먹을 것도 있고 집도 있는데 짖고 싶을 때 짖지 못하여 넘어왔다고 말했답니다. 금요일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정상 회담을 했는데 북한에 가장 없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유입니다. 국제적 인권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매년 1월 ‘세계 자유보고서’를 발표합니다. 지난 1972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올해에 북한은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에서 100점을 만점으로 한다면 3점을 받았습니다. 195개 조사 대상국 중 최하위는 시리아와 그다음은 남수단, 북한은 맨 밑에서 3위를 했습니다. 1972년부터 올해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두 부문 모두에서 최악의 점수(7점)로 평가된 나라는 북한이 유일합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네 가지 자유 즉, 언론과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말했는데 북한에는 이런 자유가 없습니다. 김정은이 잘 못할 때 비판하는 신문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야당 대표가 “남북 정상회담은 김정은과 문 정권이 합작한 남북 위장평화쇼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고 “김정은이 불러준 대로 받아 적은 것이 남북정상회담 발표문”이라고 말해도 잡아 가지 않습니다. 야당 의원이 “어처구니 없다.”라고 말해도 감옥에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이렇게 말하면 금방 감옥에 가고 처형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교회에 갈 수 있지만 북한은 교회에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교회에 갈 수가 없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자유를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사람이 행복하게 사람답게 사는 데는 자유가 중요합니다.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미국의 헨리는 “내게 자유를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시요!”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자유는 죽음을 주고 바꾸리만큼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불렀습니까?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이 성경을 읽고 있는 우리 성도님과 저를 말합니다. 우리를 왜 불렀습니까?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5장 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참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입니다. 2장 4절에서는 "예수 안에서 우리가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신분적으로 자유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는 영이 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신분의 종이 되지 않습니다. 소유와 신체와 지위와 학벌에 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믿습니까?

구체적으로 참 자유는 어떤 자유입니까?

그 첫째는 우리는 율법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그 율법의 종이 되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 가운데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안식일 법입니다. 그것 안 지켜도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39가지 안식일 금지법이 있습니다. '씨 뿌리거나 밭 갈지 말 것,' '곡식 단을 묶거나 거두지 말 것,' '곡식을 타작하거나 까불지 말 것,' '털 깍지 말 것,’ '바늘로 두 번 깁지 말 것,' '두 글자를 쓰거나 지우지 말 것,' '불을 끄거나 켜지 말 것,' 등 이런 것을 행하면 죄를 짓게되고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게 됩니다. 물건에 열을 가하여 어떤 형태로든 변화시키려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스위치를 꽂아 놓아야 합니다. 운전하는 것도 안식일에 불 피우지 말라는 법에 걸리니까 회당에 갈려고 해도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가야 합니다. 화장실 휴지도 절취선을 끊는 것은 일하는 것이니까 미리 잘라 놓아야 합니다. 꽃을 물병에 넣어 놓는 것도 일하는 것이니까 꽃을 선물받아도 그냥 물이 없는 꽃병에 꽂아 놓았다가 다음날 물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루심으로 우리는 이런 율법의 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신율법주의 자들이 있습니다. "칭의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성화도 함께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이라도 구원 받은 자의 행위와 삶과 열매가 없으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자신들은 그 누구 보다 가장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말씀대로 행한다고 말을 하며 기성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정죄합니다. 모든 목사가 자신들의 영적 수준에서 한참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교인들 80%는 지옥에 가고 교역자 90%는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로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한 민국 법을 지켜 대한 민국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대한 민국 국민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천국에 가기 위해 율법을 지키며 율법의 노예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참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율법 아래 율법의 종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참 자유인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노예와 율법의 저주,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죄와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자유를 잃습니다. 대통령을 한 사람도 감옥에 갑니다. 심각한 죄는 사형입니다. 만약에 문제인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회담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덤벼들어 뺨을 쳐다고 보세요. 경호원들이 뺨을 치려고 달려드는 순간 총으로 쏘아 죽입니다. 뺨을 때리더라도 아버지가 아들의 뺨을 때리는 것과 대통령의 뺨을 때리는 것은 그 죄가 다릅니다. 문제인 대통령보다 훨씬 뛰어난 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뺨을 때리면 즉각 사형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지 않고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를 가지고 살지 않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인간은 사형을 당하고 지옥에 가게 됩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34절 이하에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을 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오는 죄와 정죄로부터, 정죄의 결과로 다가오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믿으면 죄와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믿습니까?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로부터, 죽음의 노예로부터, 율법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참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자유, 참 자유입니다. 죽음의 노예가 아닙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자유를 부르짖어도 죽음 앞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지옥의 형벌 앞에 공포와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으며 ‘자유의 길’을 썼던 사르트르도 죽음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폐수종’으로 죽음에 임하자 품위 있게 죽는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욕을 하면서 물건을 던졌고 죽음이 두려워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발악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프랑스의 한 지방 신문기자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심판의 하나님을 만날 사실이 샤르트르를 공포로 몰아넣어 그로 죽음을 그토록 거부하게 했다.”라고 기록했답니다. 자유를 부르짖었던 1백년 안에 성경은 다 없어지고 말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도 죽음앞에 불안과 공포와 절망에 떨면서 “생명을 6개월간 연장시켜 주면 재산의 반을 주겠다”고 의사한테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는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하며 6주밖에 못살고 “나는 멸망으로 들어간다. 나는 지옥에 간다.” 하면서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소망하며 참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이 축구 시합을 하면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일본 만은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반 3:0으로 지면 얼마나 긴장을 합니까? 그런데 4:0이 됩니다. 왜 선수들이 그 정도냐고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통쾌하게 10분 남겨 놓고 연속으로 5골을 집어넣어 역전승을 하면 얼마나 통쾌 합니까? 너무나 감격적이어 다음 날 재방송을 봅니다. 그럴 때는 4:0으로 져도 불안하거나 실망하거나 화가 나지 않습니다. 느긋하고 편안하게 시청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전승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역전의 장면을 보며 즐거워하기 위해 또 다시 보기 때문에 기대를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한 번 죽은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고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는데 예수 믿는 우리는 지옥에 가지 않고 영원한 천국에 가고 죽음도 질병도 고통도 아픔도 슬픔도 없는 그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요3:36)”,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롬6:18).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요5:24). 원수 사단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습니다(눅1:74). 율법의 정죄에서 속량함을 받았습니다(갈3:13).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2. 우리는 참 자유인으로 주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참 자유인은 주어진 자유로 죄짓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13절을 같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육체라는 말은 영과 대비되는 말로 인간 신체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죄를 짓는 죄악된 인간성, 죄에 굴복하는 성향(롬7:5;8:5)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가지고 범죄의 기회로 사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까 율법은 필요 없다고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신율법주의가 아니라 무율법주의 삶입니다. 자유라고 해서 율법이 없는 것처럼 제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반율법주의 삶입니다. 율법을 거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참 자유가 아니라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는 삶입니다. 자유를 찾아 탈북한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에 오면 많은 자유가 주어집니다. 이렇게 자유가 주어지면 소유에 대한 욕망, 향락에 대한 욕망 꿈틀거리게 됩니다. 이 욕망대로 살면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탈북학생의 학업중단율은 일반학생에 비해 4배 이상 높다고 합니다. 무리지어 음란물에 빠지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먹으며 돈의 노예가 되어 성매매를 하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리는 자유는 자유를 잘 못 누리는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1917년, 러시아에 자유가 주어졌는데, 그 자유를 사용할 줄 몰랐던 데서 러시아 역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자유를 잘 못 누리면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유라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유를 남용하고 오용하여 방탕하게 사는 육신적 자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댓가를 지불하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참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기회입니다. 자유다고 남의 물건을 도덕질하고, 자유라고 동성연애를 하다 에이즈에 걸리는 것은 참 자유가 아닙니다. 종교는 자유라고 이단에 빠지고, 개인의 선택은 자유라고 술중독, 담배 중독, 게임 중독, 도박 중독, 포르노 중독, 성중독에 빠지는 것은 참 자유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육체에 죄를 짓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자유라고 하면서 유혹에 넘어가고, 방탕하고, 죄를 짓고, 자기의 건강을 헤치고, 남에게 많은 해를 끼치는 것이 참 자유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는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참 자유가 아니라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었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먹고 싶은 대로 아무것이나 먹고, 마시고 싶다고 아무거나 마시고, 놀고 싶은 대로 놀라.” 이것은 참 자유가 아니라 사탄이 주는 잘못된 자유에 대한 거짓 신념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면 마귀가 주는 거짓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울부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전환이 자유이니 성전환을 하였는데 호적을 바꾸어 달라고 합니다. 동성끼리 결혼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내 멋대로 내 마음대로 살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 달라는 것입니다. 헤겔이 “역사는 자유 확대의 과정이다.”라고 말했듯이 인류는 끝없이 자유를 추구하였는데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추구해 가고 있습니다. 니체는 주먹의 철학으로 자유를 누리려고 했고, 마르크스주의는 밥통의 철학으로, 프로이드는 성기의 심리학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고 자유의 남용이고 오용이며 결국 파멸의 지름길로 가는 것입니다. 찰나적인 쾌락이 인간에게 참 자유를 줄까요? 아픔과 후회와 파멸이 남을 뿐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파멸에 이를 때까지 질주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참 자유는 당연히 해야할 바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참 자유와 거짓 자유가 나누어집니다. 자유로 주일날 예배에 나올 수도 있고 설악산에 놀러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자유이고 악을 행하는 것도 자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잘못된 선택을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방종의 기회, 사탄의 종노릇하는 기회로 사용하면 안됩니다. 자유다고 동성연애를 하는 것을 참 자유가 아니라 거짓 자유입니다. 학생이 자유라고 공부는 하지 않고 포르노 중독, 오락 중독, 연애 중독의 노예가 되는 것은 참 자유가 아니라 사명을 망각한 거짓 자유입니다. 참자유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았다고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율법으로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하여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신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신앙인의 참 자유는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진리를 떠나 거짓 진리를 붙들고 자유를 누리는 자유는 탈선이고 방종에 불과합니다.

기차는 레일에 있어야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비행기는 하늘에 있어야 참 자유를 누리는 것이고, 물고기는 물 속에 있어야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배는 물 위에 있어야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곳을 벗어나면 자유처럼 보이지만 파멸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가 자유롭겠다고 혈관을 뚫고 나오면 죽음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은 결국 자유를 제한하고 사탄의 종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다시 죄와 죽음의 노예로 자신을 만들어 버립니다. 15살 소녀가 남자 친구가 좋다고 그 친구와 자는 것도 나의 자유라고 생각하여 잠을 잤습니다.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의 선택은 미래의 자유를 완전히 제한해 버립니다. 한 때 잘못된 선택을 한 자유로 인해 일생 동안 고통을 당하며 살 것입니다.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의 자유를 제한해 버립니다. 진정한 자유는 진리 안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진리 안에 누리는 자유는 죄도 죽음도 올무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육체에의 탐익을 위한 자유가 아닙니다.(13)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웃을 착취하는 자유가 아닙니다.(13하, 15)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을 도의시해도 되는 자유가 아닙니다.(14)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죄짓는 자유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둘째, 참 자유인은 주어진 자유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참 자유는 죄를 짓기 위한 육체의 기회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부르심을 향한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부르심을 위한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기준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바를 하는 자유입니다. 참 자유인이 되었으면 당연히 해야 할 바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여종이 주인과 결혼하면 사람으로 남편을 섬기는 것입니다. 법 아래 고용된 종이 아닙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과 결혼했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자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 자유를 누리려면 당연히 하여야 할 바를 해야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의무가 아닙니다. 은혜에 감사해서 사랑으로 섬기는 것 입니다. 사랑으로 섬기면 참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참으로 자유를 원한다면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여기서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말합니다. 종노릇하는 것은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말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랑을 다시 설명합니다.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루어졌다”는 말은 “끝내다. 완성하다”는 뜻입니다. 모든 율법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으로 섬겨야 십자가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자유의 완성입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능동적으로 종노릇하고 순종하며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갈라디아 교회에는 있습니다. 이 문제로 서로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할례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사소한 것에 목숨 걸어 십자가의 사랑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섬기면 어떤 경우도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단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부터 참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살라고 말씀합니까?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섬기면 미움의 종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정죄의 종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시기의 종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경쟁의 노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비교의 노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하면서도 과거의 미움 때문에, 원한 때문에 마음의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같은 버스 회사에서 근무한 동료가 25년 전에 여자문제 때문에 싸우고 직장을 그만 두었답니다. 그런데 같은 지역으로 내려와 버스 운전을 하는 것을 알고 원한을 갚기 위해 버스를 따라가며 위협운전을 해 승객 30여 명은 15분간 공포에 떨어야했답니다. 50대 후반이 되었는데도 그 옛날의 원한으로 자유인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과거 문제로 인간관계에 있어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나아가면 어떤 과거도 다 용서해주고 용서받고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과거가 있다고 해도 그 과정의 노예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참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종이 된 것처럼 섬기지만 결코 그 사람이 우리의 주인은 아닙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그 주인이 사랑으로 섬겼기 때문에 우리는 참 자유를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고 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참된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미국에는 미국 대통령을 한 사람에게만 주는 '자유의 대통령 메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 카터 전 대통령이 미국 국민이 주는 최고의 상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이 지난 다음에는 자유인 되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카터 대통령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좋은 일에, 이웃과 가난 한 형제를 위하여,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고 좋은 일을 했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좋은 도시 별장을 짓고 즐길 수 있었지만 고향으로 가서 교회 학교에서 열심히 섬기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남아공에서 빈민촌의 ‘마마 제인’으로 불리우는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남지연 선교사는 60대 후반인데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기상해 빵을 구어 빈민촌의 ‘홈리스’들에게 아침 식사를 준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공부든 운동이든 1등을 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 대학원까지 공부하고 남편을 만나 캐나다로 이민 가 큰 부를 누렸답니다. 미국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티칭프로 자격을 얻고 전 세계 명문 골프장을 돌며 골프를 치면서 여생을 보낼 요량이었답니다. 95년 세계적 자동차 회사인 GM의 한국지사장이 되었답니다. 그러다 위암에 걸렸답니다. 몸속에 암덩어리가 자라고 있는데도 건강하다며 큰소리 뻥뻥 쳐온 스스로가 불쌍하고 가소로웠답니다.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위의 70%를 잘라내고 기도했답니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김현철 전 삼미그룹 회장을 만났답니다. 몸도 불편한 상태에서 재벌 회장을 지낸 사람이 선교에 투신한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지에 뼈를 묻겠다는 사명으로 오직 예수의 사람으로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3. 자유를 잘 못 사용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심하라”는 말은 분별하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보라”는 말입니다. 세 가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물고 먹으며 멸망한다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잘 못 사용하면 서로 물어뜯습니다.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잘못 사용하면 서로 야수들이 음식을 먹는 것처럼 서로 잡아먹는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잘 못 사용하면 결국 멸망하여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잘 못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에 의해 교회가 분쟁하면 결국 교회는 비극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입니다.

금요일 남북 정상 회담을 했지만 우리 민족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8.15 해방이 되어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우익과 좌익이 피차 물고 먹고 그러다가 분단이 되었습니다. 요즈음 제주 4.3 사건이 보도가 되던데 6.25 때 우익과 좌익이 나누어져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서로 죽이고 죽였습니까? 같은 동네 일가 친척들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서로 죽이고 죽이는 것입니다. 4.3사건으로 인한 희생자는 2만5000~3만명으로 추산되는데 당시 제주도민의 10%에 달하는 규모라고 합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 애국자들이 얼마나 피땀을 흘렸습니까?

김좌진과 함께 이범석 장군은 20살의 어린 나이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은 1200여 명을 죽이고 2100여 명을 부상을 입혔다고 합니다. 독립군은 130여명의 전사자만 낸 항일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큰 전과로 꼽힙니다. 이범석 장군은 세 명의 전우로 눈을 감을 수 없었다고 했답니다. 과실로 전우를 죽인 병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60여면을 일본군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최인걸이라는 소년병은 스스로 자기 몸에 기관총을 묶고 몰려오는 일본군을 향해 탄환이 떨어질 때까지 난사하며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노병은 소년병의 원수를 갚겠다고 적진에 홀로 뛰어 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독립군들은 “후손이 잘 되기 위해 이 한 몸 바치겠사오니”라고 죽기를 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장렬하게 전사하여 이 민족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자유를 얻으니까 야야로 나누어 눈만 뜨면 싸웁니다. 남북, 동서, 좌우로 나뉘어 서로 물고 뜯습니다. 이렇게 분단된 민족의 비극이 왜 일어났습니까? 서로 권력을 잡아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피차 사랑으로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독립이 될 때 주역을 담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독립투사 중 절반 정도가 기독교인들이었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도 안중근도 기독교인입니다. 해방될 때 주역을 담당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장로였고 김구 선생님도 기독교인이었고 건국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여운영 선생님도 신학을 공부한 전도사였고, 북한의 김일성도 교회를 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건국 준비위원회 지방 위원들은 대부분 목사나 장로가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자신만이, 자기 방식으로 만이 민족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는 아집으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섬기지 못한 것입니다. “대면공화 심격천산 對面共話해도 心隔千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어도 마음의 거리만은 천(千) 겹 산을 마주한 듯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꼭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국정 교과서를 만드는데도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군정 때도 교과서를 만들 때 이씨 문중 이야기, 김씨 문중 이야기 안 나왔다고 서로 싸웠습니다. 누구의 글은 넣고 누구의 글을 넣지 않았다고 서로 싸우니까 우리나라 사람 이름 지우고 외국 사람만 넣었다고 합니다. 교과서 만들 돈을 여당 야당이 정당 홍보를 한다고 가져가 하품 종이로 만들어 교과서 겉을 포장해야 했다고 합니다. 주어진 시간, 주어진 재능, 주어진 물질, 주어진 건강 가지고 탐욕의 노예가 되지 말고 참 자유인으로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정채봉 씨가 쓴 <옷걸이>라는 글에 보면, 낡은 고참 옷걸이가 새로 들어온 신입 옷걸이들에게 훈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들이 옷걸이인 것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싼 옷이 걸리더라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너희들은 옷걸이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처절한 비난과 고통을 겪으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려면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합니다.

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육체에의 탐닉을 위한 자유가 아닙니다(13).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이웃을 착취하는 자유가 아니다(13하, 15).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율법을 도외시해도 되는 자유가 아니다(14).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자유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4.29.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