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나는 누구인가?(갈4:21-3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296 추천수:3 112.168.96.218
2018-04-15 07:06:56

 

나는 누구인가?

갈4:21-31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어린 감자가 하루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엄마, 나 감자 맞아?” 엄마는 “당근이지!”라고 답했답니다. 엄마가 자신을 당근이라고 말하자 그 길로 꼬마 감자는 가출해 버렸답니다. 가출을 했다가 돌아온 꼬마 감자가 할머니 감자에게 다시 물었답니다. “할머니, 나 감자 맞아?” 경상도 출신의 할머니 감자는 “오이야(오냐)”라고 대답했답니다. 자신이 감자가 아니고 오이라를 말을 듣고 또 꼬마 감자는 엉엉울며 집을 나갔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생활하시는 우리 성도님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독일의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나는 누구인가" 하고 고민하면서 길을 걷고 있었답니다. 너무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 옆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부딪혔답니다. 그 사람은 화가 나 쇼펜하우어에게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데 길도 보지 않고 다니는 거요?" 하고 화를 와락 냈답니다. 그때, 쇼펜하우어는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참 좋겠소."라고 말했답니다. “네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을 남긴 소크라테스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마는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라고 말했답니다. 내가 누구인지 일생동안 탐구한 소크라테스의 결론은 바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은 단지 유인원에서 진화한 고등동물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고,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유물론자에게는 인간은 단지 물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은 유전정보를 실어나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처럼 나는 고등동물이나, 물질 덩어리나 유전전보를 전달하는 그릇에 불과할까요? 우리 신앙인은 나를 정확히 알려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사는 나는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나는 하나님이 선택한 약속의 자녀입니다(28)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라는 말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가 경수가 끊어져 인간적인 방법으로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약속에 따라 태어났습니다. 약속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과 섭리를 통해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육체의 족보를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태어나며 성령의 세례를 통해 새롭게 거듭나는 것입니다(29).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요3:5).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아무라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은혜를 받은 사람만 초자연적 방법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다시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원숭이에서 진화된 존재가 아닙니다. 물질 덩어리가 아닙니다. 세포 덩어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에베소 2장 10절 상반절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 말씀에서는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대가를 지불하고 산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였고,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우리를 우리 하나님이 아시고 특별히 구별하여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아서 1장 5절에서는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16:3)”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까?

어느 날 산에 올라갔던 농부가 바위절벽에서 독수리 알을 하나 발견하여 암탉에게 품게 하여 부화하였습니다. 병아리들과 함께 자라 어미 닭을 졸졸 쫓아 다녔고, 부리로 땅을 헤치며, 곡식과 벌레를 쪼아 먹었습니다. 물을 마시고는 다른 병아리들처럼 꼭 하늘을 쳐다보고, 강아지가 오면 병아리들과 함께 잽싸게 도망쳤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날갯죽지는 다른 병아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발톱과 부리가 날카롭게 났습니다. 병아리들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병아리와 다른 자신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부리고 깃털을 뽑아내고 부리고 발톱을 뽑았습니다. 닭들 가운데 가장 못생기고 이상한 닭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날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보고 감동한 닭들이 “와 새의 왕 독수리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 닭이 된 독수리는 말합니다. “우리 닭은 절대로 저렇게 날 수 없어. 우리가 누구야. 우린 닭이야!! 닭!”이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닭장 안의 닭독수리는 자신을 한 마리의 이상한 닭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다가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닭독수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어릴 때 코끼리가 작은 말뚝에 묶여 있으면 커서도 그 말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조건을 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판단합니다. 스스로 키 작다고, 눈 작다고, 돈 없다고, 실력 없다고, 권력 없다고, 실패했다고 루저로 판단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비하합니다. 결혼도 조건이 되지 않으면 안하고 홀로 사는 것입니다.

타인이 보는 눈으로 자신을 누구인지를 판단해 버립니다. 여성들은 외모가 평가의 기준이라고 죽기 살기로 성형을 합니다. 남자들은 돈이 나됨을 나타내는 평가의 기준이라고 죽기 살기로 돈에 집착을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어야 인생은 행복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뒤늦게 구치소에서 최순실 씨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회고록을 쓰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자신을 살펴봐도 자기 미화나 자기 기만, 자기 사랑, 자기 비하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내가 되어서도 안 되고, 타인이 되어서도 안 되며 나의 평가자는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무시하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나를 말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한 자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2:9)”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돈이 없다고 미모가 뛰어나지 못하다고, 실력이 없다고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열등감을 가지고 비굴하게 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나를 무가치하고 무능한 존재로 단정하고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라고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비참하고 초라하게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6장 14절에서는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처절함 삶의 환경에서 기도하면 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나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입니다(5:1).

5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라는 말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000은 종이 아니라 자유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비유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비유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유로 무엇을 설명하고 있습니까? 두 언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특징지어지는 시내산 언약과 약속으로 특징지어지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부인 사라와 하갈을 예로 들어 옛 언약인 율법과 새 언약인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고대 사회는 모친의 지위에 따라 신분과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홍길동전에서도 보면 아버지가 아무리 양반이라도 종의 몸에서 태어나면 양반 노릇을 못하지 않습니까? 종이었던 하갈을 시내산 율법에 비유하여 옛 언약이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은 율법의 정죄 아래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5절에 그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갈-시내산-예루살렘을 동일 선상에 놓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결국 죄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유인이 사라의 아들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자유인라는 말씀입니다(22,23).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천상의 새 예루살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말합니다. 율법의 종에서 해방시키신 예수님이 통치하는 영적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이 거룩한 도성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믿는 사람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유로운 신분과 상속자라는 특권을 갖게 한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3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유하는 여인의 자녀입니다.(갈4:31) 우리는 율법에 묶인 노예의 자녀가 아닙니다(31)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고 기꺼이 받아들이실 자유인의 자녀, 자유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유인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에 빠져 자꾸 율법의 종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자를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21) 그래서 이미 자유인 되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리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5:1)

율법이 정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서는 끝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참 해방은 정죄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정죄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확정을 짓는 것입니다. '세금' '부채'를 의미합니다. 즉 죄의 삯, 죄의 부채를 의미합니다. 부채가 있는 분들은 얼마나 마음이 무겁고 자유롭지 못합니까? 어디에나 쫓아다니며 괴롭히지 않습니까? 밥맛이 없어지고, 협박당하고, 도망당하고 신용불량자가 되고,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경련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동반자살하기도 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네 과거를 보라, 너의 추잡한 인생을 보라 네가 예수 믿는다고 웃기지 말라. 위선 떨지 말라.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는 더러운 인간이야. 너의 과거를 폭로하면 너는 얼굴 내밀고 사람들 앞에 서있을 수 없어. 고상한 채 하지 말고 그저 질퍽하게 살아." 조롱하고 정죄합니다. 우울증에 빠지게 하고 용기를 꺾어 버리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모든 정죄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었습니다. 누가 정죄하며 "그래서 어쩠다"고 반문하면 됩니다. 그 정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다 받아버렸습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아시지 않습니까? 공소 시효가 소멸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정죄 상태에서 해방 시켰습니다. 법정적으로 너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포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죄인으로 심판하지 않고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평안히 가라'고 하신 선포와 같이(요8:11) 우리가 어떤 죄를 졌다 해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고 기억지도 아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율법의 선고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와 죄의 결과로서 오는 사망의 원리 사망의 법칙입니다. 모든 인류는 '죄와 사망의 법'에 묶이었고, 속박되었고, 사망의 언도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도 이 법 앞에 무기력해 집니다. 아무리 지식 있는 사람도 이 법 앞에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 있는 사람도 이 법 앞에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이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권력 있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고상한 지성의 소유자 영국의 회의론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도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 "아, 하루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 나는 내 앞에 다가오는 저 세상이 무섭다. 저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나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이 어둠 속으로 그냥 덥석 뛰어 들어가는 것 같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죽음의 공포와 이 죽음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겠습니까?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해방을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복음은 하나님의 정죄하시는 진노, 도덕적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사탄의 속박과 죄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사망의 공포와 영원한 지옥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는 우리를 죄와 죽음, 절망과 좌절, 불안과 고통 그리고 두려움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삶을 속박하는 모든 얽매이는 것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두려움과 탐심, 죽음과 죄, 저주와 지옥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방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선물입니다. 단순히 “외부로부터 속박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죽음과 정죄,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진정한 자유를 말합니다.

 

3.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상속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여종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상속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인 사라의 아들 이삭 만이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유업은 26절에 나온 것처럼 위에 있는 예루살렘 천국입니다. 천국을 상속받을 자들은 율법으로 할례를 받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7절을 보십시오.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궁극적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지옥갈 자가 아니라 마침내는 천국 갈 자입니다. 이런 자기 정체성이 없으니까 인생은 공허하면 허무하고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합니다. 권력이 있는 철학을 하든, 부자이든, 유명인이든, 마지막 가는 곳을 모르면 다 허무할 뿐입니다. 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베스트셀러를 많이 써서 큰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답니다. 지중해에 요트가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이 있었으며, 파리에도 호화로운 집이 있었답니다. 은행에는 그가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는 1892년 1월 1일 아침,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답니다. 목숨은 구했지만 이후 정신병자가 되어 고통으로 절규하다가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반복해서 했던 말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허무한 나그네 인생입니다. 정처 없는 나그네는 무언가 성취하기 위하여 수고하며 도전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 허탈감과 허무감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한 집착도, 남보다 앞서 가려는 경쟁심도, 인간의 욕심과 허영심도 다 부질없는 짓이 되어 버리고 허무한 인생 앞에 소망 없는 나그네길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처 없는 나그네로 살았던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는 41세의 나이로 약물중독으로 죽었습니다. '할리우드 섹스 심벌' 마를린 먼로도 37세 젊은 나이에 약물과다복용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약물과다복용으로 5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독교인을 핍박했던 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어머니도 아내도 자식도 권력을 찾지하기 위해 죽인 인간입니다. 그는 31살 젊은 나이에 근위대에 체포되어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사고 사는 것입니다. 너 나은 본향은 바로 천국입니다. 죽음도,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싸움도, 질병도, 아픔도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사는 곳입니다. 그 천국에 대하여 계시록에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계 21:4) 곳으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땅은 잠깐 육신을 입고 머물다 가는 곳입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천국을 가장 많이 소개해 주었습니다. 성경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4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천국에 가서 영생합니다. 믿습니까? 허무가 극복된 나라, 죄와 죽음이 정복된 나라, 고통과 슬픔이 사라진 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나는 바로 이 나라를 상속받은 자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같은 친구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 들수 없도다"

이 유업은 단지 천국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업을 이을 자는 유산을 다 받을 자, 하나님 나라를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상속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 전부 나의 것 되는 것입니다. 천국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의 부요를 누릴 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편 7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그러나 이 땅은 생로병사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다고 해서 믿지 않은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죽음과 질병과 고통이 없는 천국을 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2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합니다. 종이었던 하갈이 아들 낳았다고 사라를 박해합니다. 종의 자식이 이스마엘이 자유자의 자식인 이삭을 괴롭힙니다. 박해하는 말은 문법적으로 미완료형으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괴롭힙니다. 이것은 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을 믿고 거듭난 사람을 계속 괴롭혔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목사를 ‘먹사’라고, 집사를 ‘잡사’라고, 평신도를 ‘병신도’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요즈음처럼 과학문명이 발달된 세상에서 미신같은 기독교를 믿느냐고 잘난 체 합니다. 조금 지식을 가지면 하나님은 만들어진 신이라고 조롱합니다.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이제 걱정을 멈추고 인생을 즐겨라"라고 설득합니다. 이들은 하나님 인간의 자유와 발전을 반대하며, 인간을 속박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빼앗으며, 인간의 소외를 가져 오게 하였다고 믿는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공공장소에서 기도하면 종교 차별한다고 못하게 합니다. 소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며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만듭니다. 동성애를 죄라고 하고 벌금을 물게 만드는 법을 만들어 신앙인의 삶을 제한하려고 합니다. 동성연애를 하여 에이즈가 걸린 사람들을 100% 국가에서 치료시켜주면서도 동성연애가 죄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소수인권이라는 명목으로 신앙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예배도 기도도 못하게 합니다. 어느 순간 인권법으로 전도도 못하게 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이단, 사이비들은 기성 교회를 매도하며 교인들을 빼어내어 갑니다.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 중에서도 교회 내에서 눈알을 부릅뜨고 비난거리만 찾아 매도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교회 목사와 장로 집사를 고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믿지 않는 아내가, 믿지 않는 일가친척이 비난을 합니다. "예수 믿는 누가 사기치고, 누가 이혼했고, 누가 사업에 부도났고, 누가 행실이 더럽고, 누가 첩이 있고, 어느 목사님이, 어느 교회가 어떻고" 얼마나 비난을 합니까? 질병 걸리면 예수 믿으면 잘 되다면서 그게 뭐냐고 조롱합니다. 이런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로마서 8: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도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은 누구에게나 필수과목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생로병사의 고난의 강을 건거가야 합니다. 어느 날 원치 않는 질병에 걸립니다. 때로는 상상하지 못한 사고를 당합니다. 때로는 끝없이 번창될 것 같은 사업이 갑자기 부도를 당합니다. 실패하고, 이별해야만 하고, 시간문제이지 모든 사람들은 사랑했던 사람들과 사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과정을 거치게 합니까? 신명기 8장에 보면 광야 훈련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은 명쾌하게 해답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광야 훈련을 시키지 않고 바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데 구태여 광야 훈련을 시킨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낮추어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그 무수한 고난의 강을 건넜던 다윗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의 용광로에 들어가야 우리 인생은 정금처럼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훈련을 기록한 욥기에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풀무불에서 죄와 미움과 탐욕과 시기와 분쟁과 교만의 불순물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훈련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이 복 주시는 깨끗한 그릇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파도가 몰아친다고 해도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참기름은 참깨를 잘 볶아서 짓이겨야 나옵니다. 좋은 숯은 자신을 태우는 고통을 감내함으로 탄생합니다. 좋은 나무는 오랜 세월 풍파에 시달리는 고통을 통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365일 내내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만 계속된다면 대지는 사막으로 변해 버립니다. 구름도 끼고 바람도 불고 비도 와야 자연이 유지되듯이 고통이 있어야 행복도 진정으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핍박을 받지만 결국 어떻게 됩니까? 이사야 54장 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예언적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태어나 믿음의 자녀들이 결국 핍박자들의 고난을 물리치고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말씀합니다. 90세에도 아이를 갖지 못한 사라에게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좁게는 자손이지만 넓게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앞으로 돌아올 유대인과 이방인의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을 때 그 고난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기뻐하면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우리는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나는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이 만세 전에 선택한 약속의 자녀입니다.

나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입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4.15.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