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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안에 사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갈4:12-2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809 추천수:3 112.168.96.218
2018-04-08 10:04:40

 

복음 안에 사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

갈4:12-20

 

지난 주 법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1심에서 징역 24년, 벌금 180억원을 선고한 것을 보았습니다. 원인은 40년 지기 최순실을 만났기 때문인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잘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 날 수 있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최고 경영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CEO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덕목으로 '대인지능'을 꼽았답니다. 인간관계를 잘 맺고 인맥관리를 잘 해야 직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능지수나 학교시절의 성적이 인생에서의 성공을 예언하는 정도는 20%정도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Gibbs). 대인관계 지능이 인생의 행복과 성공의 중요한 요소라고 합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MBA 과정에서 유수 기업 CEO들을 상대로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전자는 응답자의 85퍼센트가 '원만한 인간관계 및 다른 사람과의 공감 능력'을 꼽았습니다. 하버드대학교의 위건(A.E.Wiggan) 박사는 직장, 가정, 사회생활 등 각 분야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전문지식이 모자라 실패한 사람들은 불과 15%밖에 안 되었습니다. 나머지 85%의 사람들은 모두다 인간관계를 잘못했기 때문에 인생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카네기재단에서도 5년 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1만 명을 대상으로 '성공비결'이 무엇이었는지를 질문 했는데, 85%의 사람들이 다양한 사람들과 골고루 인간관계를 잘했기 때문에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쉘러(Lyle C. Schaller)는 '많은 사람들이 왜 교회에 오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10년 간 연구하였습니다. 연구 결과 교회출석 동기가 홍보 2%, 계획된 전도방문 6%, 목사님의 권유 6%, 친구와 친지 86%였답니다. 누구와 만나 신앙생활 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질과 신앙의 성패가 좌우될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은 그 대인관계 중에 목회자와 관계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는 어떤 성도를 만나느냐에 따라 성도는 어떤 목회자를 만나느냐 따라 신앙생활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목회자와 성도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목회 생활을 오래한 목회자들은 후배 목회자에게 “목회자는 성도를 너무 가까이 해서도, 너무 멀리 해서도 안 되네.”라고 조언을 한다고 합니다. 성도를 너무 가까이 하면 성도들이 목회자를 너무 가볍게 대할 가능성이 있고 반대로 성도를 너무 멀리 하면 성도가 목회자를 너무 어렵게 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생활을 오래한 성도들이 새 신자들에게 “목회자와는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된다네”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목회자와 너무 친하면 목회자의 사생활과 허물을 많이 알게 되어 설교의 은혜가 떨어지고 너무 멀어지면 교회 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적당한 선에서 목회자와 관계를 맺는 것이 제일 좋다는 뜻입니다. 불완전한 목회자와 불완전한 성도가 모여 신앙생활하다보면 서로 부딪히고 서로 아픈 상처를 주고 받을 수 있으니까 가장 좋은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는 너무 친하지도 않고, 너무 서먹하지도 않은 적당한 선, 그저 ‘적당히’, ‘서로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필요에 따라 만났다가 필요에 따라 헤어지면 된다.’는 처세술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할까요? 성경에서는 목사가 성도에게 가져야할 태도와 성도가 목사에게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리고 여러 번에 걸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복음 안에서 바람직한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 상을 정립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성도는 목회자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1) 성도는 목회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성도로서 목회자인 바울에게 부당하게 대우하며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목회자와 성도이기 전에 주님의 피 값으로 부름받은 한 형제자매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부르시고 그 성도 가운데 목회자 세워 지상 교회를 목양하도록 했는데 성경은 목회자와 성도 간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를 닮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신비한 연합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영생하는 의를 얻은 것도 그리스도와 연합 때문이고, 신분이 거룩해지는 것도, 부활에 참여하는 것도 그리스도와 연합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관계도 목회자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교인을 사랑하는 목회자일 것이고 성도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듯이 목회자를 사랑하는 성도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했듯이 목사도 성도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섬겨야 합니다. 성도 역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목숨을 다하며 사랑하듯이 목회자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섬겨야 합니다. 서로 만나 해를 끼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단들은 교회에 위장하고 가장하여 교인으로 들어와 목회자의 약점을 잡아 목회자에게 해를 끼칩니다. 친하게 잘 지냈던 교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목회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대부분 서운함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섭섭 마귀”의 포로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서운한 감정은 상대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당연히 그것을 해 줄 줄 알았는데 상대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기대를 저버리거나 무시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가까운 사람, 함께 한 시간이 많은 사람, 사랑했던 사람, 신뢰했던 사람, 공동의 이익을 추구했던 사람, 친밀했던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입니다. 당연히 교회 연륜이나 나이로 보았을 때 이번 장로 차례는 나인데 안되면 서운한 감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목회자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때부터는 목회자에게 해를 끼치는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성경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12-13절에서는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사랑 안에서 목회자를 가장 귀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너희끼리 서로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끼리 화목하지 못하면 목회자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끼리 서로 질투하고, 다투며 화목하지 못하면 목회자는 영적으로, 마음으로, 육신으로 심각한 해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직분이란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섬김을 위한 것이고 목회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도끼지 화목하지 못하면 교회적으로도 심각한 해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귀하게 여길 수 없고 원수 시 삼고 싶으면 귀하게 여기는 목회자를 찾아가 신앙생활하는 것이 자신이나 교회나 가정과 자녀를 위해 더 좋은 것입니다. 목회자를 귀히 여기는 성도들은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누구의 편을 들어주겠습니까? 똑같이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성도인데 누구의 편을 들어주겠습니까? 혼자 가슴앓이 하면서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입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다시 말하면 행복을 느끼던 여러분의 그 마음이 어디로 갔느냐? 기쁨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며 안타까워합니다. 과거에 할 수 만 있으면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줄 정도의 관계를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의 질병이 안질, 간질병, 말라리아의 후유증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눈이 나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라도 빼어줄 정도로 바울을 위해 희생적 사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신장이 나빠 신장기증을 받아야 했답니다. 많은 교인이 신장 기증을 해 주겠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누구 것은 받고 누구 것은 받지 않으면 교인들이 누구만 사랑한다고 할 것같아 제비를 뽑기로 했답니다. 오리털을 날려 그 것이 떨어지는 사람 신장 기증을 받기고 했답니다. 목사는 오리 털을 교인들을 향해 날렸답니다. 맨 앞자리의 장로님에게 오니까 주여하면서 훅 불었답니다. 그러자 오리털은 둥실 하고 날아 다시 권사님에게로 갔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아버지하면서 훅 불었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희생적 사랑으로 목회자와 관계를 갖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화려하고 안락한 상류사회의 삶을 포기하고 바울을 만나 천막을 지으며 물심양면으로 바울을 도우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기 집에서 에베소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고전16:19) 바울을 위해서라면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어놓을 정도였습니다(롬16:4).

그렇게 사랑하면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목회자에게 해를 끼치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역대하 20장 20절에서는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대하20:20)”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1절에서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6장 27절에서는 제사장이 축복하면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해를 끼치면 내가 해를 당하고 목회자를 가장 귀하게 여기면 내가 복을 받는다는 믿음으로 목회자와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평생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2) 성도는 목회자의 육체적 연약함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13-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육체의 질병으로 시험거리가 있었지만 업신여기기 않았습니다. 버리지도 아니하였습니다. 문자적으로 “침을 뱉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목회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약점들이 있습니다. 약점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바울에게도 많은 약점들이 있었습니다. 글은 잘 쓰는데 설교를 잘 못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돈을 좋아한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중인격자라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신적 질병이 있었습니다. 꽃도 멀리 볼 때 아름답지 가까이 가보면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추한 것이 드러납니다. 그 때 그 약점을 확대 재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담임목사 자리가 비어 있던 어떤 교회가 있었답니다. 그 교회 대표들이 스펄전 목사를 찾아와, 담임목사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서 이런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성경을 탁월하게 가르치는 목사, 불타는 사랑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목사,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처를 싸매 주는 목사, 솔로몬의 지혜를 가진 목사, 성품이 좋고 적극적인 목사,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목사, 외모가 잘생긴 목사, 행정을 잘 하는 목사, 창의적인 지도력으로 양떼를 인도하는 목사’. 그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스펄전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생각에 이런 목사는 땅에 없으니, 차라리 하늘의 천사를 담임목사로 초청하시지요.”

성경은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를 결혼을 시키는 중매쟁이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약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복음에 대한 열정과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목회자의 연약함에 집중하지 말고 목회자가 소개하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연약한 그릇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연약한 그릇 속에 담긴 보배를 보아야 합니다.

목회자도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 약점을 우리 성도님들은 얼마나 품어줄 수 있겠습니까?

고든 맥도날드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훌륭한 아내와 함께 훌륭한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목사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안락하고 풍파없는 그의 삶은 권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교인 중 한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여인은 목사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한 교인에게 토로하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은 즉시 당회에 전해졌고 당회원들은 이미 그 교회를 떠나 다른 선교 단체의 총재로 봉사하고 있는 그를 소환해서 징계하였습니다. 그는 당회의 징계에 순복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토설하고 회개하였습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당회원들의 지도하에 징계를 받았습니다. 3년이 지난 후 당회원들은 그가 충분히 회복되었다고 판단하고 그를 다시 목회 일선에 복귀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그 후 뉴욕시의 어려운 지역에 들어가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의 목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당회는 다시 그를 자신들의 교회로 불러 담임 목사직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충성스럽게 다시 그 교회에서 목사의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이미 다른 곳에 가있는 사람을 과거의 문제로 불러 치리한다는 것도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저 묵인하고 손가락질하고 혐오하며 비방한 것이 아니라 확실히 정리하고 용서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들의 담임목사로 모셔 정상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성숙한 교인들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았습니다. 목회자의 약점을 위해 우리 성도님은 어떤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십자가 밑에서 험담하고 욕하고 비방하고 조롱하는 성도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3) 성도는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를 존중해야 합니다.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존귀하게 여기며 존중했다는 말입니다. 주어진 조건 보며 무시하지 말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성도를 위한 기도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존중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이고 기도의 중보자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은 참으로 고귀한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생명을 얻고,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고, 말씀을 통해 소망을 가지고, 말씀을 통해 일어나고,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받고, 말씀을 통해 성숙하고, 말씀으로 통해 축복의 그릇으로 인생이 바꾸어집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지 찾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좋은 교인이 좋은 목사를 만들고 좋은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이 바른 말씀을 전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렇게도 좋은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 지금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 참된 말은 무엇입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가짜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단들에게 미혹된 것입니다. 이단들은 아주 열심을 내었습니다. 왜 이렇게 열심을 내었습니까? 좋은 뜻이 아닙니다. 이간질 시켜 신뢰를 깨뜨려 거짓말을 하는 자들에게 열심을 내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목회자인 바울과 성도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겉모습만 보았지 속마음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본질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17절에서 그들은 좋은 동기로 한다면 바울은 얼마든지 좋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기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듣기 싫으니까 그렇게 좋았던 관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목회자가 전하는 말씀 때문에 그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을 치는 말로, 자신을 비난하는 말로, 자신을 책망하는 말로,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는 말로 설교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좋았던 관계라 무너지고 불편한 관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말씀을 나의 양식으로 삼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살아 움직이는 말씀을 표현 할 때 쓰이는 단어가 세 가지 있습니다. 로고스, 레마, 케리그마입니다. 로고스는 기록된 말씀입니다 레마는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케리스마는 목사가 선포하는 설교 말씀입니다. “또 설교해”라는 식으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도 말씀듣기를 싫어합니다. 따분한 말씀 전하지 말고 즐겁고 흥미롭고 부담없는 공연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내 죄를 지적하고 마음에 부담되는 말씀을 전한다고 말씀을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5:33, 행7:54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복음을 듣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베드로를 죽이려고 합니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행 5:33)"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4)" 성경에 나오는 여러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고 귀를 닫고 심지어는 죽입니다. 오늘날 설교를 들을 때도 목회자와 관계가 나빠지면 아무리 좋은 말씀일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합니다. 옥토에 뿌려진 씨앗처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기도하라고 하고, 회개하라고하고, 전도하라고 하면 뻔한 이야기 한다고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매주 감동도 없고 새로운 것도 없고 뻔하다고 설교 듣는 것 회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산제일교회 고훈목사님과, 사모님이 쓰신 <목회칼럼, 사모칼럼>이란 책이었습니다. 그 중에 사모님이 쓰신 칼럼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교회권사님 중에 한 분이 계절이 바뀌고, 사모님의 생일이라고 외출복을 하나 사주더랍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고마워서 그 권사께 식사대접을 했다고 합니다. 식사하면서 그 권사님이 자신은 15년 전에 교회에 오게 되었다고 말하더랍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사모님, 내가 안산제일교회에 와서 15년간 전도한 사람들을 일련번호를 매겨 놓았는데, 지난주까지 1030명입니다. 500명 째 와 1,000명 째 전도한 분에게 감사하다고 선물을 사서 드렸습니다.”하더랍니다. 한 말씀이라고 말씀을 듣고 행해야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매주 마다 주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나가면 우리 연약한 그릇이지만 축복의 그릇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부자였던 록펠러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10가지 교훈을 했답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겨라. 친아버지보다 더 중요한 공급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다.”이고 두 번째가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목사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축복된길이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주일이며 본 교회에 나가 예배 시간에 항상 앞에 앉아 말씀 듣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다고 합니다.

 

2. 목회자들은 성도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1)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자신을 통해 예수님을 보게 하여야 합니다.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인데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유대인의 의식주의를 모두 벗어 버리고 복음 안에 참 자유가가 되었으니 이방인으로 기독교인이 된 갈라디아 성도들도 바울처럼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바울을 본받아 살라고 말씀합니다. 속박이 아니 자유, 종이 아닌 아들로 삶을 사는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최고 가치로 알았고 살았던 자신이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자신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목회자와 성도를 목자와 양무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5장 2절 이하는 보면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흠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는 말씀과 자신의 삶, 약점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미국의 목회 전문가이자 기독교 작가인 조 맥키버가 교회를 망칠 나쁜 목회자 유형 '8가지'를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한 가지 이슈만 고집하는 목회자, 정치적 야망이 강한 목회자, '삯꾼' 목회자, 호전적(好戰的)인 목회자, 미숙한 목회자, 정신 건강이 나쁜 목회자, 세속적인 목회자, '외톨이' 목회자” 이런 목회자는 절대 청빙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2) 목회자는 성도를 위해 해산의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자녀들이라고 칭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 것처럼 그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랑과 희생 인내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단들의 교주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교주가 됩니다. 남의 교인들을 훔쳐갑니다. 교회에 이단들을 침투시켜 교인들을 빼내가고 교회까지 통째로 삼킵니다. 나쁜 목사들도 마케팅을 통해 이웃 교인들을 자신의 교인으로 만들어 상품화시켜 버립니다. 종교 소비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도들을 이용물로 생각하고 도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사랑과 희생과 인내를 감당합니까?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의 분량에 이르는데는 누군가 해산의 수고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로 의식화되는 것입니다. 의식도, 생각도, 행동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 낳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가정에서 아비와 자식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영적 자녀처럼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레몬서 1장 10절에도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했습니다. 여기에도 <오네시모를 바울이 낳았다>고 했습니다.

인터넷에 보니까 성도들이 좋아하는 목사에 대하여 46가지 조건이 제시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몇가지 골라보면 “성도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목사님,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에게까지도 친절하신 목사님, 결코 세속적이지 않으신 목사님, 가슴이 넓은 목사님, 친정 아버지 처럼 편안한 목사님, 당구,볼링,골프,사우나을 즐기지 않는 목사님, 이왕이면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목사님, 돈 욕심이 전혀 없으신 목사님, 너무 거룩한 체 위장하지 않으시는 목사님, 설교시간이 지루하거나 짜증스럽지 않은 목사님, 자녀는 하나 정도만 낳으시고 목회에만 전념하시는 목사님” 등입니다.

 

3) 목회자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권면하여 성도를 보호하고 성숙시켜야 합니다.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변질된 그들의 신앙에 대하여 의혹을 가지고 잠잠하지 않았습니다.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소리 내어 훈계하는 것처럼 “훈계를 좀 해야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성도를 위해 책망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도의 삶과 처지에 대한 깊은 고려 없이 성경 구절을 남발하거나 자존감을 해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 운영에만 관심을 가지고 성도를 봉으로 삼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말씀을 이용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과 자기 변명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를 살리기 위해 성도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성도의 풍성한 열매를 위해 말씀으로 단호하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 가는데 가만히 놓아두면 그것은 참된 목회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이용하고, 교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권면이라는 명목으로 교인을 이용하고, 말씀 앞에 진실하고 솔직하기 보다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성전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9-10절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을 세울 때 성전을 파괴하는 자를 그대로 놓아두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사탄의 놀이터가 됩니다. 사탄을 성전을 파괴하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습니다. 파당을 만들고 이간질하는 장로님 세분만 있으면 사탄은 500여명 되는 교회도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목회자는 악한 사탄으로부터, 이단으로부터 교회와 교인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목자는 당연히 이리와 늑대로부터 양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은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농사로 비유하며 목회자를 농부 성도를 밭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고전3:5-9) 좋은 밭을 만들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야 합니다. 좋은 밭을 만들려면 말씀으로 기경을 해야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싫은 소리도 해야 보약이 되고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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