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잿빛 회의에서 부활신앙으로(요20:24-2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540 추천수:2 112.168.96.218
2018-04-01 07:48:00

 

잿빛 회의에서 부활신앙으로

요20:24-29

 

구봉서 장로의 간증문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학생 만나는 재미로 다녔지 신앙은 없었다고 합니다. 교회가면 무엇보다 몰려드는 잠을 참기 힘들었답니다. 목사님 설교는 자장가였고 찬송가를 4, 5절까지 부르는 것도 정말 지루했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도들이 기도하면 남자보다 배가 더 걸려 싫었다고 합니다. 이제 끝나려나 생각하면 또 “원하옵건대…”가 반복되는 것이 싫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광야의 결사대’를 찍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쳐 병상에 누워있을 때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의 연로한 목사님이 4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와서 기도해 주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5분, 10분씩 계속되는 그 기도소리가 지루하고 귀찮기도 해서 시큰둥하게 대했는데 매일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의 정성에 감복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첫 수술을 받은 뒤 40일 만에 다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의사가 필름을 들고 와서는“구선생, 내가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아무래도 다리를 잘라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였고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 절망감에 빠져 가슴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답니다. 그러자 의사가 “진정하세요. 어렵겠지만 다시 한 번 시도를 해봅시다.”라고 말했답니다. 수술에 성공할 확률은 30%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도님들은 정성을 다해 기도했는데 자신은 그래도 교만하여 "하나님이 계시다면 1차 수술에서 성공했어야지"하고 시큰둥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의사가 수술 결과를 가지고 와 “구선생, 주님이 도우셨습니다.다리를 안 잘라도 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게 그분의 첫 번 기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뿐이었지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답니다. “뭘 예수가 고쳐줘, 의사가 고쳐주었지."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더욱 등한시 했는데 부모님 돌아가시고 사업도 망하고 자신은 다리 통증으로 나날을 고통으로 보내었고 부인이 낙담해 앓아눕고 말았답니다. 그 때 곽규석 목사 부부의 전도를 받고 아내가 병이 낳고 본격적으로 성경공부를 하였는데 자기 집에서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곽규석씨 내외를 비롯 서수남 윤복희 정훈희 김자옥 고은아씨 등 많은 연예인들이 성경공부를 했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 제자들과 말씀하시는 장면을 가르쳤답니다. 목사님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 맨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이지요?"라고 질문을 하였답니다. 미리 성경을 읽어오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바쁜 일정에 아무도 읽어오지 않았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던 중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벌떡 일어났답니다. 코미디언 구봉서 장로님이었답니다. 손을 이리 저리 휘저으며 유령 같은 몸짓으로 "예들아, 너희들은 내 몸이 보이냐?"라고 말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폭소가 터져 나왔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20장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제자들은 이 날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고 부활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도마만 그곳에 없었습니다.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자랑합니다.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십자가로 죽으시고 다 끝난 줄 알고 각자의 길로 갔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여 자신들에게 보여 주었으니 얼마나 자랑할 만하고 감격적이겠습니까?

그 때 도마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왜 부활을 믿지 않을까요?

도마는 그 이유를 눈으로 보지 못하고 손으로 만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도마만 그랬습니까?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눅24:11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탄하다"는 말은 어처구니없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부질없는 헛소리라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는 어떠했을까요? 무덤에 갔다 시체가 없자 기이히 여겼습니다(눅 24:12). 이상하게, 신기하게 여기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각종 기적을 체험받은 사람들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나인성 홀로된 여인의 아들을 살리시는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는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실 보지 못해서 믿지 못할까요? 우리가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보고 믿는 것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진조 할아버지 계셨음을 믿습니까? 보았습니까? 보지 않았지만 믿습니다. 이순진 장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친 장군이라는 것 믿습니까? 보았습니까? 보지 않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왜 믿습니까? 기록된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록한 사람이 진실을 기록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록은 그 어떤 역사적 인물의 기록보다 많이 있습니다. 기록이라고 다 믿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하게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데 왜 믿지 않습니까? 성경 기록자의 진실성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화적 기록이고, 역사적 신빙성이 없는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꾸며낸 신화적 이야기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역사를 평가할 때 현대인을 지배하는 사고 구조를 근거로 한 것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가 비평의 원리입니다. 둘째가 유추의 원리입니다. 셋째가 상관의 원리입니다. 역사를 나눌 때 크게 기록된 역사와 사실적 역사로 나눕니다. 기록된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써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역사가 사실이려면 객관성이 필요합니다. 요즈음 방송을 보면 팩트 체크를 하지 않습니까? 많은 증거와 증인이 필요합니다. 고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개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 경험과 불일치가 되면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과거 발생한 사건은 오늘과 상호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결코 현재의 경험과 완전히 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일어 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도 일어 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이 없는데 어떻게 과거에 부활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부활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부활이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못한 그 당시 사람들의 신앙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니까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기절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빈무덤설을 말합니다. 무덤을 잘 못 찾았다고 말합니다. 도난설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 트렸다는 것입니다. 환상설을 말합니다. 너무 그리워하다 환상을 보고 실제인양 부활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교회를 다녀도 회색 지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과학주의에 사로잡힙니다. 진화론의 신봉자가 됩니다. 교회를 나오더라도 회의주의자가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문제만 보고 비평하고 흠만 보며 비난합니다. 매사 비판적이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입니다. 부모의 신앙 때문에 혹은 아내나 남편의 권위로 교회는 나오나 말씀이 다가오지 않고 신앙적 형식만 있을 뿐 신앙으로 역동하는 삶이 없습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성전물의 환상이 나오는데 발목까지 차는 단계에 머무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예수를 믿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지극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영아적 믿음의 단계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뿌리는 자 비유에서 길가 밭의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마13:19). 10년 20년 교회에 다녀도 자기 전제, 자기 신념, 자기 가정으로 단단하여 말씀의 씨가 자라지 못합니다.

회의적 신앙에 머물먼 무릎까지 차는 단계을 벗어날 수 없습습니다. 어린아이 단계에 머뭅니다. 돌짝밭의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변덕쟁이 신앙인이 되어 말씀으로 인해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곧바로 넘어져 버립니다. 신앙체험을 하면 조금 나아져 열심히 교회에 나오며 봉사하는 허리까지 차는 단계까지 가지만 가시떨기 밭의 뿌려진 씨앗처럼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이 다가오면 거기서 이기지 못하고 넘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확신하고 사는 창일한 단계 옥토에 뿌려진 씨앗처럼 풍성하는 열매를 맺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의적인 신앙에 머물면 예배를 드려도 감격이 없습니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습니다. 내일 아니면 아무것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어려운 이웃에는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과 가족만 아는 삶으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습니다. 기도 응답의 확신도 없습니다. 죄 용서 받음의 확신도 없습니다. 인도에 대한 확신도, 인생 승리에 대한 화신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믿지 않는 도마를 어떻게 대해 주십니까?

2. 우리 주님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합니까?

우리 같으면 외면해 버릴 것입니다. 믿어 주지 않으면 얼마나 화가 납니까? 자존심 상하면 얼마나 견딜 수 없습니까? 8일 만에 우리 주님은 도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찾아 가십니다. 유대인의 날 계산법은 저녁부터 하루로 치기 때문에 그 날이 주일입니다. 도마가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 가신 것입니다. 찾아 오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첫째 먼저 평강을 주십니다.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평강’은 헬라어 ‘에이레네’라는 말로 ‘평화, 화평, 복지’ 등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살롬’과 같은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주는 영원한 평안을 말합니다. 깊은 좌절과 슬픔에 잠긴 자들에게 예수님이 진정한 평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평강은 관계를 회복하는 인사입니다. 불편한 관계는 살롬이 될 수가 없습니다. 도마와 예수님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사실 도마가 예수님에게 서운했을 것입니다. 왜 나만 빠졌을 때 왔냐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빠졌으면서도 섭섭했을 것입니다. 섭섭하면 감정이 상합니다. 자신이 신앙의 공동체에서 홀로 떨어졌다 그렇게 된 것은 생각지도 않고 섭섭해 하는 것입니다. 100번 잘 해 주어도 한 번 상처를 받으면 상처 하나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하지만 다 주관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나오지 않는 사진은 앨범에 넣어 놓지 않습니다. 기분이 나쁘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습니다. 자신만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감정적으로 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어깃장을 놓으면서 나는 보지 않고 만지지 않고 믿지 못하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부모와 관계가 나빠지면 아이들이 밥 안 먹는다고 어깃장 놓는 것과 같은 감정일 것입니다. 대부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상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증거가 없어서 안 믿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불편한 관계가 되어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릴 때 교회 옆에 살면서 교인들로부터 피해를 본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바로가 기적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자신이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이고 노예로 보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믿음은 증거가 우선하지만 관계적 믿음은 증명보다는 감정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내 부모인 것을 과학적으로 검증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면 홍해도 가르고 바위에서 생수도 내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게 하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분명하게 목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업하다 장로에게 당하면 그 때부터는 교회와 담을 쌓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시며 믿으라고 합니다.

27절,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우리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부활을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처럼 많이 나오는 말이 드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만 "믿음"이라는 말이 모두 98회 나옵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을 만나실 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바라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12살난 딸을 살려 주실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롬 14:23)"라고 했습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가장 없어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하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증거가 없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믿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부활도 기적도, 성경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삶의 기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착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확실한 증거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1)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 낫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고 군인들이 돌에 인봉하고 무덤을 지켰습니다.(마 27:62-66)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주님께서 무덤 문을 열고 나올 수 있겠습니까? 부활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2)여인들이 무덤을 잘 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눅23:55). 해 돋을 때에 무덤으로 다시 베드로가 갔습니다(막16:2).

(3)제자들이 시체들 도둑질하여 옮겨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 11명 전원이 순교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4)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유령이 아니라 실제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눅24:13-35) 도마에게는 상처를 만져보게 하셨습니다.(요20:28) 떡과 고기를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눅24:39-49)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겠습니까?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가장 큰 증거는 제자들의 생활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도망간 자들입니다.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낙담하고 뿔뿔이 흩어진 자들입니다. 여인들이 부활을 전해 주어도 믿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내 걸 수 있지만 거짓과 사기를 위해 누가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내어 놓겠습니까? 죽은 다음의 생명을 분명히 믿은 제자들이 순교의 잔을 마신 뒤, 위대한 신앙인들은 순교의 길을 기쁨으로 알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이 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의 삶들은 부활을 증거하였고(행4:2), 베드로는 부활을 말하지 말라는 사두개인들에게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 중에 어느 것을 듣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행2:14-36)

사도행전은 '부활의 복음서'라고 불릴만큼 부활이 확증하고 있습니다.(2:23, 32,3:15, 26, 4:10, 33, 5:30, 10:40, 13:30-34, 17:31)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기록할 때가 ad 55년 또는 56년으로 본다면 부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왜곡되거나 창작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목격자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식구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요7:5)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변하였습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확실히 부활하였습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예루살렘 교회의 감독)가 주후 62년경 순교하기 직전에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뭐라고 말씀합니까? 야고보서 1장 1절에"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였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은 확실한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쉽게 희생제사와 율법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불과 5주 만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메시아로 받아들였습니다. 안식일 제사 대신에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1500여년 동안 이어져 오던 전통을 그렇게 갑자기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채 20년이 되기 전에 로마의 황실에까지 복음이 들어갔겠습니까? 당대의 기준에 보기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었겠습니까? 예수님이 확실히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거짓인 부활을 증거하다 죽을 수 있겠습니까?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애놀드는 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다" 이 고백이 우리 성도님과 저의 거짓 없는 진실한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부활을 믿는 도마는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하나님이라고 신앙 고백할 때 우리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도 이런 신앙 고백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엄청난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큼 큰 복이 없습니다. 저는 딸들에게 꼭 믿는 사람들과 결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면 아무리 좋은 조건의 사람을 만난다 해도 결혼식장에도 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 아무리 부자로 산다고 해도 지옥가면 그것은 가장 불행한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조금 독선적인 것 같지만 이것은 저의 신앙입니다. 저는 믿음이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믿고, 영적인 것을 믿는 믿음은 영안이 열려야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3:2)"라고 말씀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30-31). 성령에 의하여 영적인 새생명이 있는 사람만이 가지는 신비한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고전 12:9)"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약속해 주시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1)영생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2)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3)기도응답을 받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2)”

(4)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병고침을 받고 능력을 행합니다. 소원을 이룹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5)세상을 이깁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6)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7)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1:5)”

 

확실한 이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복을 받은 도마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평생 전하면 살았습니다.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벨론과 페르샤를 통해 인도의 남부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낙동강 하구인 김해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마박물관 조국현 박사가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간 암각상에는 히브리어로 ‘도매’라고 새겨진 분처석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암각 하단 부분에는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라는 글과 명전행(名全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야소화왕’은 ‘예수’로, ‘인도자’는 ‘전도자’로 풀이된다는 것입니다. 도마의 한반도 복음 전파설은 통일신라 때 것으로 밝혀진 ‘경교 돌십자가’ ‘마리아상’, 김해 김수로왕릉의 ‘쌍어문’ 등 기독교적 색채가 짙은 문화재가 발견됨에 따라 그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야국을 기독교 국가로 세우고 철기문화를 일으킨 후 다시 배를 타고 인도에 건너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지금 남인도 최대의 도시 첸나이에 “성 도마 성당”이 있고 성당 뒤편에는 도마의 무덤이 보존되어 있고, 박물관에 도마의 유물로 보이는 것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인도는 힌두교 신자가 대다수인데 이곳만은 교회가 많이 있고 인도 기독교인이 3900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첸나이를 중심으로 한 남인도에 약 2000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부활을 확실하게 믿으면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변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낙관적으로 살아갑니다. 죽음의 두렵지 않습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쾌락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세계관이 변합니다. 재물관이 시간관이 변합니다. 삶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죽음 후에 있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동물처럼 생물학적 삶으로 자신과 가족만 생각하는 삶으로 살지 않습니다. 가치를 지향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좀 더 살기 좋게 애쓰면서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영원한 천국을 지향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투자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천국에 가서 하나님이 세상에서 무엇하다 왔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나의 물질, 나의 재능, 나의 시간을 통해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해 주님 믿고 천국 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지난 주 아는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자신 교회에 다니는 신앙 좋으신 안수집사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1억 4천을 헌금하여 교회에서 전도하고 교인들 봉사하기 위해 대형 버스와 승합차를 사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물질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예수 믿는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내 물질이, 내 재능이, 내 시간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지옥가지 않고 천국 가는데 쓰임받는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앞에서 소개한 구봉서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확신 있는 신앙으로 바뀌어졌답니다. '인간 구봉서’가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교회를 건축하고 연예인들을 전도하며 간증집회와 우간다에 학교를 건축하고 선교하는 일과 섬 지방 선교에 최선을 다했답니다. 그의 인생은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돈을 찾던 삶, 인기를 찾던 삶에서 하나님을 찾는 삶으로 변화되니까 너무나 평안하고 행복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왜 진즉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 라고 말합니다. 그랬으면 더 인생을 보람 있게 살고 그 돈 많이 벌었을 때 더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살았을 텐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아직도 비평의 원리, 유추의 원리, 상관의 원리의 노예가 되어 진화론이나 과학주의에 사로잡혀 회의적 회색 지대에서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으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고 가다 보면 보여주시고 만져 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광야길 같은 인생 앞서가신 하나님 따라 가다 보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시게 됩니다. 홍해를 가르고 여리고성도 무너뜨리는 하나님함께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죽지만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부활하신 그 예수님과 살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회의적인 신앙에 머물지 말고 확신과 큰 기쁨, 소망,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는 신앙으로 일어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4.1.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