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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어난 일을 보고(마27:54)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211 추천수:3 112.168.96.218
2018-03-25 08:03:31

 

그 일어난 일을 보고

마태복음 27:54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상도 시골 교회에서 믿음 좋은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전도하여 교회에 나오게 했답니다. 그런데 그날이 오늘 같은 고난 주일이었답니다. 그날 목사님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설교를 했답니다. 설교를 들은 그 할머니가 마을회관에 가서 친구 할머니에게 "어이, 예수가 죽었단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다른 할머니가 물었습니다. "와 죽었다 카드노?" "못에 찔려 죽었다 안카나" 그러자 과거에 교회에 다녔지만 지금은 방학한 할머니가 "어이구 머리 풀어헤치고 다닐 때 알아봤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때 암말 않던 옆에 있는 할머니가 묻었답니다. "어이 예수가 누고?" 며느리에게 전도받아 고난주일에 처음 교회에 간 그 할머니가 "몰라 우리 며늘아가 아부지 아부지 캐쌌는거이 보이 사돈 어른인갑지 뭐!"라고 하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백부장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했을까요?

오늘 본분 5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결혼하여 아들을 두어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요 1:1, 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을 통해 정확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물학적인 아들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말입니다. 요즈음 식으로 표현하면 사람의 아들은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의 DNA"를 가진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소 아들은 송아지고, 개 아들은 강아지며, 닭 아들은 병아리지만 송아지나 소나 같고 개나 강아지나 같으며, 닭이나 병아리는 같은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통해, 예배를 받음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예수를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요8:19; 14:7), 예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12:45; 14:9),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12:44; 14:1).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고(막9:37), 예수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과 같으며(요15:23), 예수에게 영광 돌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였습니다(5:23).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매우 신성시해서 ‘하나님’이라는 단어조차 입 밖에 내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부를 수 없으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히브리어 ‘아도나이’로 말했습니다. 서기관은 토라를 기록하다가 '하나님' 이름이 나오면 목욕을 하고 와서 지금까지 쓰던 붓을 바꾸어 그 이름을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중국문화권에서도 높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실례라고 간주하고 “자”나 “호”를 불렀습니다. 특히 왕이나 제후 이름을 부를 수 없었고 다른 사람도 그 이름을 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피휘(避諱)’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도 그랬는데 지금 북한 김정은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신문에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이름은 고딕으로 진하게 쓰고 있습니다. 평창 올림픽 때 북한 단장이 자원봉사자들의 AD 카드를 확인하면서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다가 고정은씨의 이름을 보고는 부르지 못했다는 기사를 보았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김정은 이름은 다 바꾸게 했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니까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죄로 죽이려한 것입니다. 사람이면서 자신을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했다고, 하나님이라고 했다고,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했다고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요한복음 10:33). 결국 예수님은 신성 모독죄로 재판정에 세웠습니다. 대제사장이 물어봅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 이때 예수께서는 주저함 없이 “네가 말한 대로 그러하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들은 빌라도 법정에서도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 19:7)라고 고소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죄로 예수님을 십자가 형으로 처형했는데 십자가의 처형 장면을 가까이에서 직접 지켜본 로마의 군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객관적으로 관찰의 결과입니다. 장교로서 관찰력을 가지고 역사적인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정말로 이 장교처럼 관찰한다면 이런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을 계기로 사상을 전향한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했겠습니까?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지진과 일어난 일을 보고”라고 말씀합니다. 51-5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성소의 취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습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이런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라고 믿었습니다. 유대교의 근간이 되는 셰마(Shema)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명기 6: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아브라함이 자신을 본 적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종교도 잘 모르는 이 떠돌이 목수가 난데없이 자신이 항상 존재해왔다고 주장하고 성스러운 하나님 자신을 지칭하는 “I AM(ego eimi)”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입에 대서는 안되는 말이고, 입 밖에 내는 것은 죽음이나 다름없는 이름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 “나는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요14:6)”. “나는 아버지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요14:6)”. “내가 부활이며 생명이다(요11:25)”.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 “나는 양의 문이다(요10:9)”.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51)”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나님 만이 주장할 수 있는 이런 주장을 하니까 유대인들에게는 신성 목독자, 미치광이, 사기꾼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만이 하실 수 있을 일을 하심으로 진정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예수는 폭풍을 잠잠케 하였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갔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습니다. 5000명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 먹였습니다. 홀로된 여인의 외아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어 주었습니다. 예수는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장님을 보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선생이라고 했는데 선생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하게 영적 감화력을 가진 종교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탁월한 유대 지도자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리고 "다빈치 코드"와 같은 소설들은 예수나 제자들의 가르침에는 예수가 신이라는 내용이 없었다는 주장을 통해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예수님 스스로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고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심을 입증했습니다. 황제만이 섬김의 대상으로 삼은 백부장도 객관적 사실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은 수가 없습니다.

<신의 언어>의 저자 프랜시스 S. 콜린스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한 때 무신론자였답니다. 젊은 날에 과학을 공부하면서 점점 무신론 쪽으로 기울어졌답니다. 지각 있는 과학자라면 지적 자살 행위를 감행하지 않고서야 어찌 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답니다. 그런데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로 근무하면서, 환자들이 신앙의 힘으로 궁극적인 평화를 누리고 위로를 얻는 광경을 무수히 목격했답니다. 그러던 차에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완전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 합니다. 대학생이었던 딸이 강간을 당한 일이 있었답니다. 왜 하나님이 그 일을 막아 주시지 않았는지 고통스러운 질문을 했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용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답니다. 십자가의 기적 앞에 가면 이해 못할 것도 이해가 되고 믿지 못할 것도 믿어지게 되고 용서 못할 것도 용서되게 되고 사랑할 수 없는 것도 사랑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의 세계를 알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을 수없다는 것입니다. <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존 레녹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옥스포드대학,캠브리지대학 등에서 3개의 박사 학위를 받았고 4-5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분입니다. 리처드 도킨스,크리스토퍼 히친스,샘 해리스를 중심으로 한 과학주의의 잘못을 비판합니다. 천문학,우주론,진화생물학,분자생물학,유전체학,수학,정보학,통계학 분야를 총망라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더 탐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더 알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반과학적 지성의 오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결코 우연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결코 하나님을 외면하지도 매장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던 베드로도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사도행전 7:59). 사도 요한은 예수님은 창조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1, 3-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존재하고 과거에도 항상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는데 앞 장 섰던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후에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라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씀하십니다(빌2:6:-11) 의심 많은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고난 주간을 맞이하고 예수님을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시는 성도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죄를 사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유대교에서 죄를 사한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죄지은 자들을 사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을 했다고 반발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마가복음 2:7) 죄의 사함에 있어서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변할 권리나 권위를 갖지 못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죄사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입술 밖으로 나온 말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말입니다.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은 후에는 역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사할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그리고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의 죄도 사해 주시고,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의 죄도 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이 가장 악랄하게 생각한 세리장 삭개오의 죄도 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년간 사역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많은 기적을 행했으며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려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첫번째 임무는 우리를 죄악에서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700년 전에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그 사실을 명백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5-6)” 주님이 ①찔림의 고통 ②상함의 고통 ③징계의 고통 ④채찍의 고통을 당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공생에를 시작하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생은 처음부터 인류를 위해 대속하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완전히 죄의 삯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백부장은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가 가까이 지켜보는데 조롱하고 침을 뱉고 책찍을 가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같이 십자가를 달린 우편 강도의 죄를 용서해 주시면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라고 하시는 소리를 똑똑히 들은 것입니다. ‘다이루었다’(요19:30)라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현장에 있으면 감동이 되지 않겠습니까? 공감하는 사람은 90%가 바뀐다고 합니다. 그 죄목 때문에 고발되었는데 죽음의 순간에도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어떻게 가능하겠냐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저 예수, 죽어가는 순간에도 우편강도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는 저 예수,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자기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맡기시며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시는 저 예수.... 이러한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백부장은 굉장한 충격과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진실한 신앙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의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요즈음 수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감옥에 가는 것을 봅니다. 2분의 전직 대통령도 죄 때문에 감옥에 가 있습니다. 누가 대신 그 죄를 져 주겠습니까? 어떤 청년이 살인 죄를 지고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판사가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절 좀 풀어 주세요!” 그 때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다 아들아, 하지만 나는 판사다." 결국 판사는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합니다. 하지만 판사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재판석에서 내려와 법복을 벗고 대신 벌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대신하여 전기의자에 앉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요14:6).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갈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밖에 길은 없습니다. 신학자 R.C. 스프라우트는 "모세는 율법에 대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마호메트는 칼을 휘두를 수 있었습니다. 부처는 개별적으로 상담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공자는 현명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인간 세계의 죄악에 대한 속죄를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무한한 섬김과 예배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너무 고상하지도 않고 간단하다고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죽어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대에 달린 구리뱀만 보면 살아나는 데 그것을 보지 않고 죽는 것처럼 그런 인간들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2001년 9월 11일, 600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순간의 잘못된 정보를 믿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세계무역센터 남쪽 타워의 92층에 있던 한 남성이 북쪽 타워로 비행기가 충돌하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그래서 경찰에 전화해 "나가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폭발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 때 경찰관은 "다시 연락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기다리다가 한 대의 비행기는 남쪽 타워 80층에 충돌했고 600여명의 생명은 순식간에 사라졌답니다. 죄인을 위해 구원하기 위해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다 용서해 주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제주로 믿는 것은 영원한 삶이 걸려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무시하거나, 예수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스로 도덕적 우월감으로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암 부스에 관한 일화 중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윌리암 부스목사님이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에 박히고 계셨습니다. 한 사나이가 사다리를 걸쳐놓은 채로 예수님의 손에 못을 마구 박고 있더랍니다. 꿈에도 생각이 들기를, 예수님이 못 박히고 계신다…저러면 안되는데….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 소리를 질러도 그 사람은 못 들은척 계속하여 못을 박고 도대체 저놈이 누구냐 ? 누구길래 우리 예수님을 못을 박고 있느냐, 하면서 얼마나 흘렀을까? 이윽고 그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고개를 돌린 그 얼굴은 뜻밖에도 자기 자신의 얼굴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야 할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1서 1:9)”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모든 범죄 행위에 대해 완전 사면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는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해서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필요성을 거부하는 도덕적 저항심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왜 이 곳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귀찮아하고 그저 동물적 삶을 살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의 질문을 애써 외면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인생은 결코 공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으로 우리는 대사면을 받았고 죽음과 죄로부터 자유를 받았지만 그 사면을 받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전혀 돈이 들지 않는 이 영생과 죄사함의 선물을 누구나 가져갈 수 있는 데 세상 향락에 취해 공허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이 시간 백부장처럼 예수님을 나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3. 예수의 도덕성이 예수의 주장과 일치한 것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그 행위를 통해 진실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합니다.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아하, 네가 그랬다며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겠다고 했다며. 그래, 한번 해봐라!”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도 조롱하며 모욕합니다. 로마 군인들도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으며 조롱합니다. 관원들이 비웃습니다.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합니다. 백부장은 가까이 있으면서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빈정거리고 조롱하는 말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막15:32)”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 말했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했지. 네가 인간을 구원할 그리스도라고 말했냐?” 이렇게 조롱하며 대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도둑질 한 것도 아닙니다.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성폭행 한 것도 아닙니다. 사기 친 것도 아닙니다. 좋은 일만 하셨습니다. 좋은 말만 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힘있는 사람이 조금만 조롱받아도 참지 못합니다. 조금만 오해 받아도 견디지 못합니다. 조금만 듣기 싫은 소리 들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평범한 사람도 모욕당하고 희롱당하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지지해주고 자기가 원하는 소리만 듣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이신 예수님이 참고 견디며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말 그대로 예수의 인격에서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눅가복음을 보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 23:47)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신성 모독죄로 사형을 당한 예수님을 보면서 무죄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을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분노하거나 억울해 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으며 끝까지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낸 것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잔인한 군인들 앞에서도, 완고한 강도 앞에서도, 조롱하는 제사장 앞에서도, 지나가는 자들의 무관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예수님을 보신 것입니다.

죽음 앞에 서 있는 그를 보면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 그 사람의 말이 진실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구도 다 이런 극한 상황에 다가가면 성질 드러나고 이기심이 들어나고 인간의 연약함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까지 순결했습니다. 정말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래도 실천했습니다. 백부장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인격에 감복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 바울 그리고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도 모두 예수님의 무죄함을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분은 죄가 없으시며, 거짓을 말한 적도 없으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베드로전서 2:22). 예수의 친구가 아니었던 빌라도도,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종교적인 의식을 갖는 것 이상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신앙인으로 참 맛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신문을 보니까 유럽 젊은이 56%가 무종교인이며 100년 내에 기독교는 사라질 수도 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선조들이 거의 기독교인이었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리처드 도킨스, 피터 싱어, 스피븐 호킹과 같은 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되어 진지하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주의에 사로잡혀 과학이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고 맹종하며 예수님을 인격으로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망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과학은 사물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답할 수 있지만 왜 그렇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과학이 하나님을 매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진리로 갈 수 있는 유용한 도구지만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이 실존했고, 예수님이 실제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 달리시는 예수님을 백부장처럼 인격적으로 만나면 삶이 변합니다.

<누가 예수를 종교라 하는가>를 쓴 조쉬 맥다월은 예수가 단순히 종교 지도자들 중 한 명이며 지킬 수 없는 규율을 만들었다고 생각한 대학생이었습니다. 조쉬 맥도웰은 어린 시절에 부모나 가족들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답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로서 어머니에게는 늘 폭력을 멈추지 않았답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고.’ 소리쳤답니다다. 집에서 일하는 흑인 청년에게 치욕적인 성추행을 7년 동안 지속적으로 당했답니다. 상처투성이의 성장기를 보낸 조쉬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애당초 관심도 없었고 때로 하나님은 없다고 다짐하면서 회의주의자가 되었답니다. 조쉬는 예수가 자신의 삶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쉬는 학생회관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 미소가 밝고 활기찬 젊은 여학생 옆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흥미를 느낀 조쉬는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녀가 바로 말한 답은 이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잖아요!" 예수 그리스도? 조쉬는 발끈해서 쏘아붙였습니다. "그런 이상한 말 좀 하지 마세요. 종교는 지겨워요. 교회도 지겨워요. 성경도 아주 질렸어요. 종교에 대한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 여학생은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종교라고는 안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지요." 조쉬는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를 종교적인 인물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고 있습니까?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인 파스칼은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 형태의 빈 자리가 있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삶의 목적에 대한 질문도 무의미합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결국 무덤에서 "썩어질 것"이라고 체념했습니다. 그런데 러셀은 자신의 저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유(Why I am not a Christian)"에서 삶의 의미에 대해 예수의 모든 발언과 자신의 영생에 대한 약속까지도 부정해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완전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구주로 모시면 인생의 방황은 끝이 납니다. 길을 찾습니다. 진리를 만납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평강과 안식을 누립니다.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벧전2:24) 원수를 소멸시키기 위해서(엡2:16)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엡2:17)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골1:20) 우리를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히10:22)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내 사랑하는 아들(막1:11)” 변화산에서도(막 9:7)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해 주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도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짓말쟁이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지 알면서도 거짓말 했겠습니까? 백부장은 결코 거짓말 장이가 아니다는 사실을 십자가 현장을 목격하고 알았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정신병자이겠습니까? 백부장은 죽음의 현장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꾸며낸 이야기 신화나 전설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열광하던 자들이 꾸며낸 이야기이겠습니까? 십자가 현장에 있던 백부장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주 이십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확실하게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주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도덕성이 예수님의 주장과 일치했습니다. 예수의 인격은 죽음의 순간에서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유혹 앞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연의 힘을 초월한 능력을 드러냄으로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이 예수님에 대하여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마16:15~16)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의심 많았던 도마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라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같이 큰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성도님들의 평생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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