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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갈4:1-1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450 추천수:1 112.168.96.218
2018-03-18 08:14:11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갈4:1-11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느 정신병동에 환자가 들어 왔답니다. 2층 방에 수용하였는데 창문틈으로 얼굴을 내밀고 1층을 향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외쳐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시끄러웠겠습니까? 그러자 1층에 있는 사람이 2층을 향해 “야, 나는 너 같은 아들 둔 일이 없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우리가 정신병자입니까? 아닙니다. 신앙인은 이 천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맨 정신으로 이런 고백을 하고 사는 사람들은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고,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결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정신병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는 축복이야 말로 얼마나 커다란 복입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최고의 권력자 대통령을 아버지로 모신 아들이나 세계 최고 돈이 많은 재벌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이 얼마나 자부심이 크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권력자도 재벌도 아들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고 품어주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우리는 어제 '미투' 가해 의혹을 받았던 한 교수가 자살한 보도를 보았습니다. 세 명의 학생이 “다리가 늘씬한 게 시원해서 보기 좋다” 등의 성희롱과 성추행을 했다고 폭로하니까 수치심과 극심한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으니까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죄사함 받고 행복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면 “나는 행복해요 죄사함 받았으니 아버지 품안에서 떠나살기 싫어요 나는 행복해요 사랑이 샘솟으니 이 세상 무엇이든 채우고도 남아요”라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 어떤 죄도 회개하면 다 용서받고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입니까? 가난해도 실패해도 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못할 말이 무엇이 있고, 하소연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으며, 부탁하지 못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초가 삼간도 나는 만족하네...”라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1.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였습니다. 아들의 영은 성령을 말씀합니다. 보혜사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보내셨습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아바'란 말은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언어였던 아람어를 소리 나는 그대로 음역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의 ‘아빠’처럼 그 자녀가 매우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정신병에 걸려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이처럼 친근하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면 이미 성령님을 받았고 성령님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과거 아들이 아니라 종이었습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종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3절을 보세요. 무슨 종입니까? 초등학문의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종 되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때가 찾다는 말은 마치 모래시계가 다 떨어진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정한 때가 이르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후 1400년이 지난 후입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예수님이 오신 때의 정확성을 몇 가지로 말씀합니다.

①지정학적으로 정확한 위치입니다.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한 복판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②정치적으로 정확한 때입니다. 로마의 쥴리어스 시이저를 계승했던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이름으로 황제가 등극하여 거대한 제국을 형성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국가 마다 민족마다 거대한 성이 있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었는데 이 때는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1세기 전에 오셨더라면 복음은 확산되지 못하고 사그라질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는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길을 내놓아고 그 길을 따라 복음이 확산딜 수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③언어가 통일된 때입니다. 알렉산더가 헬라 문화를 가지고 세계를 정복해 코이네 헬라어가 곳곳에 사용될 때였다고 합니다.

④경제적인 메시아를 갈망하던 때입니다. 로마 황실의 호사스러움이 극에 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예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귀족층을 제외하고는 경제적으로 메시아 대망을 목마르게 했던 때라는 것입니다.

⑤새로운 도덕의 출현을 기다리던 때입니다. 특권층 지극히 타락하였습니다. 연회에서 맛있는 음식을 주는 순서가 인기 순서가 된 때였다고 합니다. 매일 잔치 배설하고, 사치와 연락이 극에 달하고, 동성 연애가 만연한 때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의 노리개에 불과한 시대였습니다. 새로운 도덕 출현에 목말라할 때라는 것입니다.

⑥종교적으로 메시야를 갈망하던 때입니다. 수천만의 신을 만들어서 만신전을 지어 신들을 초청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채우지 못할 때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메시아인줄 알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도둑인 것을 알고 실망할 때 진정한 메시아를 목마르게 기다릴 때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때에 누구를 보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었습니다(4).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에게 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 ‘아들을 보내사’라는 말은 예수의 신성을 가리키고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라는 말은 예수의 인성을 가리킵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께서 성육신하여 오신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나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첫째가 이렇게 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100% 순종함으로 죄 가운데 태어나 정죄를 받고 마땅이 죄값을 치루고 사망하여 지옥에 갈 인간들을 대신 죄값을 치루고 구원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죄를 정죄하는 율법 아래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3.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는 유업을 받은 아들의 특권을 누려야 합니다.

종으로 살 때 모습을 보십시오. 1절 이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본래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그런데 그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유업을 이을 상속자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 되었으니 당연히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아들로 체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여전히 종으로 살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 받은 유업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유산의 상속 뿐 아니라 아들로서 누리는 모든 복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종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모든 복을 소유한 자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모든 특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누구로 말미암아 주는 것입니까? 내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특권을 누리는 체질로 바뀌어야 합니다. 고귀한 신분과 특권적인 유업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종과 아들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입니다.

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담대히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예배의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조금만 권세가 있어도 허락없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 언제든지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은 아들이 되었으니 이 특권을 누려야 합니다. 아무라도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아빠 아버지라고 하면서 아버지까 나아가기를 거리끼는 사람들은 상속자로서 아들 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순간 바뀌는 것이 예배 체질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늘 예배하며 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들이면 종의 체질에서 아들의 체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예배를 기뻐하며 기대하는 체질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배를 좋아하지만 사탄의 자식은 예배를 가장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배함으로 새힘을 얻고 예배함으로 회복되고 예배함으로 능력을 받고 예배함으로 경건해 집니다. 앞으로 장로님으로 섬기고 싶은 성도님들은 예배 체질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새벽에, 주일에, 금요일에, 수요일에 예배하는 것이 특권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예배하는 것이 특권입니다. 체질이 바뀌지 않고 목사가 되면 목사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이 들고 종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②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는 이 땅에서 기도의 특권을 누려야 합니다. 기도로 아버지와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나의 보족함을 아버지에게 아뢰는 것입니다.

이번 주 금요 심야 기도시간에 고훈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폐결핵에 걸렸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출석했답니다. 대학 진학도 군입대도 못했고 간장염과 위장병, 기관지염에 폐결핵 3기까지 갔는데 하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눈물로 기도했고 병 고침을 받고 신학교에 진학했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답니다. 그런데 55세에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답니다. 암세포가 췌장과 십이지장, 임파선에 전이된 심각한 상태였답니다. 위 절반과 췌장의 3분의 1, 십이지장을 적출하는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온 교인들이 기도했답니다. 암에 걸린 어떤 권사님은 목사님의 암을 다 자기에게 주어 자기는 죽을 터이니 목사님을 살려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치료되어 17년(72살)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불의한 재판관도 밤낮으로 부르짖으면 들어주시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라고 말씀하십니다.

 

③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용서받는 특권을 누려야 합니다. 죄를 짓고 허랑 방탕하게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아들을 아버지는 끝까지 용서하시고 상속자로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출34:7)”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 아들로서 죄의식의 노예가 되지 말고 아빠 아버지에게 다 회개하고 죄로부터 참 자유를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아들답게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종으로 살 때의 삶을 보십시오. 1절을 보십시오. 주인이지만 종처럼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합니다. 2절을 보세요.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제약과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재산권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14세까지 미성년자의 후견인인 가정교사 통제를 받았다고 합니다. 25세까지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직책을 가진 관리인이 재산을 관리했다고 합니다. 율법 아래 매인자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초등학문의 종노릇하였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 어떻게 이런 상태를 설명합니까? 과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 즉 우상에게 "종노릇"하는 비참한 인생을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듣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아신 바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시 초등학문의 종노릇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이란 기본적 지식을 말합니다. 당시로 말하면 율법주의, 천체숭배, 점성술, 철학 등을 가리킵니다. 믿음이 약할 때는 이런 것에 지배를 받고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10절을 보세요. 유대주의자들의 꼬임에 넘어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려고 합니다. 날은 안식일, 금식일, 월삭 등을 말합니다. 달은 중요 절기를 지키는 달 즉, 추수의 시작인 아빕 월 등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절기는 유월절, 초막절, 장막절 등과 같은 절기를 말합니다. 해는 안식년, 희년 등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의 모든 종교 행사 관습이나 전통 종교적 행위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닌데 예수를 믿은 후에도 이런 절기를 지켜야 구원이 보장받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수고하여 복음을 전했는데 다시 율법주의의 빠져 율법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복음이 헛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어떤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바 되었거늘”입니다. 여기서 “알다(기노스코)”라는 말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오이다)”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야다”와 같은 말로 직접 체험하여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무신론의 심리학(아버지의 부재와 무신론 신앙)’라는 책을 쓴 폴 비츠 교수가 있습니다. 뉴욕 대학 심리학과 교수입니다. 그분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답니다. 그러나 30대 후반에 하나님을 체험하고 신실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근대 서구 사상계를 주도해온 유명한 무신론자들의 전기적 사실을 두루 살펴 본 결과 그들이 무신론자가 된 것은 인격적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해서라는 것입니다. '결함 있는 아버지 가정'이 그들의 무신론적 사상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하지 못하여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부재, 무기력, 죽음, 학대에서 유발된 트라우마와 결핍이 하나님 이미지를 왜곡시켜 하나님에 대한 거부와 불신앙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일단 육신의 아버지에 대해 실망하거나 존경심을 잃게 되면 하늘의 아버지에 대한 믿음도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무신론자의 경우 자기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무의식적으로 신에 대한 부정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때는 아이가 세 살에서 다섯 살 사이인데 이 때 아이의 성 정체성뿐만 아니라 초자아(아버지로부터 파생되는 윤리체계)를 확립하는 결정적인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니체는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흄은 두 살 때,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쓴 러셀은 4 살 때, 사르트르는 15개월에 각각 아버지를 떠나보냈고,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그가 17세 때 자살했습니다. 스탈린은 부당하면서도 가혹한 매질 때문에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복수심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는 무정하고 강퍅한 다혈질의 남자였고, 마우쩌뚱의 아버지는 가정의 폭군이었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를 증오하며 하나님도 체험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살아도 유약하고 학대하는 아버지에 의해 볼테르는 이신론자가 되었고, 지그문트 프로리트는 자기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을 정도로 약하고 성도착자였던 아버지를 증오함으로 종교적 믿음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객관적으로는 아는데 체험적 신앙을 가지지 못하면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실제적으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실제적으로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신주단지처럼 지켰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초등학문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울 역시 율법의 노예로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히 율법의 노예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과거 사상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린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일생을 바친 리빙스톤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오른 팔이 사자의 공격으로 불구가 되었는데도 아프리카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의 오랜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프리카 부족의 추장 아들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리빙스턴 선교사가 그 부락을 방문하게 되어 고쳐 보려고 하였으나, 가망이 없었습니다. 다급한 리빙스턴은 죽어 가는 추장의 아들을 붙들고,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추장이 기도하는 리빙스턴을 치면서 “당신이 기도 할지라도 내 아들은 이미 죽었소!”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들은 숨이 끊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리빙스턴은 “주여, 제 믿음을 보옵소서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소생케 하심을 믿습니다.” 하고 눈을 떴을 때, 그 아이가 몸을 틀더니 일어나 앉는 것입니다. 그 후 추장은 변했고 모든 악습에서 벗어나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를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체험하면 복음보다 더 귀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체험한 사람들은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초등 학문에는 죄인 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아무 능력이 없었으므로 '약한' 것입니다. 죄를 속량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악인 된 사람을 의인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었으므로 '천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고상한 학문일지라도 천국으로 인도하기에는 부족하고 천한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를 알려 주기에는 부족한 것들입니다. 복음을 모르면 이런 것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것에 매여 평생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형식주의 율법주의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아들이 되었으니 어떻게 살라고 말씀합니까? 종의 멍에를 매지 말고 자유를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죄어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면 안 됩니다. 구체적으로 아들로서 우리가 누려야 자유가 무엇인지 로마서 8장 1-4절을 보십시오.

① 정죄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아들로서 정죄는 끝이 났습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정죄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확정을 짓는 것입니다. '세금' '부채'를 의미합니다. 즉 죄의 삯, 죄의 부채를 의미합니다. 부채가 있는 분들은 얼마나 마음이 무겁고 자유롭지 못합니까? 어디에나 쫓아다니며 괴롭히지 않습니까? 밥맛이 없어지고, 협박당하고, 도망당하고 신용불량자가 되고,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경련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동반자살하기도 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네 과거를 보라, 너의 추잡한 인생을 보라 네가 예수 믿는다고 웃기지 말라. 위선 떨지 말라.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는 더러운 인간이야. 너의 과거를 폭로하면 너는 얼굴 내밀고 사람들 앞에 서있을 수 없어. 고상한 채 하지 말고 그저 질퍽하게 살아." 조롱하고 정죄합니다. 우울증에 빠지게 하고 용기를 꺾어 버리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모든 정죄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었습니다. 누가 정죄하며 "그래서 어쩠다"고 반문하면 됩니다. 그 정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다 받아버렸습니다. 과거로부터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갈4:6-8)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여전히 과거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② 죄와 사망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아들이 일찍 죽었다고 우울하고 고통의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부정적이며 슬프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다 만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믿으면서 여전히 죽음의 종으로 살면 안됩니다. 스데반은 죽음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었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려야 할 유업이 바로 천국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1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공포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고상하게 이 땅을 살아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죽음을 초월하여 살듯했던 사르트르도 사망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병명도 묻지 않고 한 달 동안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 갔다고 합니다. 권력으로 모든 것을 정복할 듯 살았던 마르크스도 사망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천국에서 상급의 심판이 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 가는 형벌의 심판이 있습니다. 지옥이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최종 지옥인 불못에 던져질 것이고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3:50). 지옥이 있기 때문에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무신론자 하워드 스톰이라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27살에 교수가 되었답니다. 그는 유물론자였고 모든 진리는 과학에 의해 주어진다고 믿고, 비과학적인 것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답니다. 믿는 게 있다면 그건 자신뿐이었고 완전히 자기 중심주의자였으며, 자신 외에 것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아무 관심이 없었답니다. 세속적인 성공, 유명한 화가, 경제적으로 큰 부자, 높은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을 가지고 싶었답니다.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어 훌륭한 집에 살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고, 술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여자와 쾌락의 탐닉에 빠졌답니다. 36살에 질병으로 입원하였습니다.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임사체험을 했답니다. 지옥과 천국을 임사체험을 통해 맛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답니다. 천국과 지옥을 자신이 체험했으니 인생관, 세계관이 바뀌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바뀌었습니다. 세속적인 쾌락과 부, 성공 등 일찍이 그가 전심전력으로 추구했던 것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답니다. 오늘날 사탄은 지옥을 막연한 동화의 세계로 만들려고 합니다. 학자들을 통해 추상적 개념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실제성을 믿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 과학은 허구적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실존의 세계입니다. 추상적 동화의 세계가 아니라 인류가 직면할 실제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죽음 후에 첫 번째 대면해야 할 실제의 세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 앞에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천국을 상속받기 때문에 이 땅에서 죄와 죽음의 공포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③ 율법의 요구로 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절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그것을 아십니다. 율법의 요구를 다 주님께서 이루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율법 주의에 사로잡혀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율법으로 자신을 비하하며 살아서는 안됩니다. 여전히 복음 안에 있으면서 율법의 종으로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입니다.

유업을 받은 아들의 특권을 누려야 합니다. 성숙한 아들로서 참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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