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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갈3:23-2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774 추천수:4 112.168.96.218
2018-03-11 06:31:3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갈3:23-29

 

지난 주 한 집사님 집을 심방을 했는데 구역장님이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구역장님이 같이 심방가기 위해 교회 차를 타시는데 사과 한 박스를 가지고 올라탔습니다. 저 같이 교역자 생활을 오해 하다보면 눈치가 빠르게 되는데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구역장님이 참 배려심이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년 그 집사님 집을 심방할 때 아이들이 어찌나 과일을 잘 먹는지 아이들이 과일킬러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구역장 집사님께서 그것을 파악하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과일 한 박스를 사 가지고 간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집사님 부부와 이야기를 하는데 집사님께서 열린교회에 등록하여 다니는 것이 너무 너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퇴근할 때 아이들이 나와 교회에서 가르쳐 준대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쉐마 비전스쿨에 보내어 영어 성경을 암송하며 말씀을 배우는데 부모로서 자신들이 해 주지 못하는 것을 교회 선생님들이 해 주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에 자신들이 모델로 삼고자 하는 가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역장님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 다니면서 누군가 본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지금 쿠킹클래스를 하시는 박 권사님께서 초신자일 때 구역장이 늘 새벽기도를 하시면서 구역원들을 가족처럼 돌보았던 이 권사님이었습니다. 그 때 저에게 이 권사님같은 구역장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지금에 와 보니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시는 참 믿음 좋으신 권사님이 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 집사님도 나중에 누군가가 본받고 싶은 구역장님이 될 줄 믿습니다. 본받고 싶은 이유를 말하면서 온 가족이 함께 나와 같이 앉아 예배드리고 금요 심야 기도에 함께 나와 온 식구가 함께 한 자리에 앉아 기도하시는 모습이 너무 아릅답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구역장님이 딸 이야기를 했습니다. 본인의 딸은 그 집사님의 남편 같은 배우자를 만났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남자 집사님께서 간증하였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결혼하였답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 믿고 의지하며 부부가 출발했답니다. 아들 딸을 선물로 주었답니다. 어릴 때부터 아들딸과 함께 열심히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며 심야 기도회에는 온 가족이 꼭 참석하며 기도하였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직장 다니며 집도 마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많은 은혜를 실제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구체적으로 어떤 은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1.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26,27).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죄인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어마 어마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부모로부터 생물학적인 생명인 “바이오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부모의 자녀가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생명인 “조에”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죄인을 의인이라 칭해 주시고 지옥 갈 인생을 천국에 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미투(Me Too)” 운동을 통해 죄라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사무치게 느끼고 있습니다. 36년 동안 연기자로 살았던 유명 연예인이 성추행 의혹으로 그 죄짐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그 죄짐을 지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노벨상에 매년마다 거론되던 시인도, 한국 연극계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감독도, 차기 대권 주자로 알려진 정치인도 과거의 죄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사회에서 매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도 우리의 죄를 낱낱이 다 드러내면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이런 죄인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다시 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죄값으로 당해야 할 수모와 수치와 곤욕과 치욕을 다 짊어지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인간은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감옥에 있는 죄수와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율법 아래 있는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해 다 죄인으로 정죄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감옥에 가고 수치를 당해야 할 존재들입니다. 죄의 삯으로 사망을 해야만 할 존재입니다. 율법과 계명이 우리를 감옥에 넣어 도망갈 수 없도록 가두어 놓았습니다. 인간은 죄 아래 갇혀 항상 무거운 죄의식 속에 살게 했습니다. 매인바 되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미완료형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줄곧 갇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 죽음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 관계를 말합니다. 신비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런 신비적 관계를 표현하는 의식이 세례입니다. 세례는 죽음과 부활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4-5)” 믿습니까? 우리의 과거 죄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서 다 용서받고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과거의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43:25)”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아무리 죄가 많이 있다하여도, 성추행과 성폭행을 하여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을 정도로 명예를 잃고 수치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회개하고 성령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더러운 우리 몸을 감추게 해주고 새로운 신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어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보증하기 위해 인치시는 것입니다.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1:22)” 그래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옷이라는 신분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죄하며 죄의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정죄할 때 수치심의 감옥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고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더러운 실체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입혀주신 그 옷을 보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대장의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대장으로 보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세요.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몽학선생의 제제에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의 포로였습니다. 율법의 감옥에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특권과 영광 왕국을 상속할 자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죄수로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리스도로 옷입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어느 도시에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란 벤 후퍼라는 소년이 있었답니다. 어릴 때부터 체구가 작고 동네에서는 항상 따돌림을 받으며 비웃음과 멸시를 받으면서 자라났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이 12살이 되었을 때 그 마을교회에 한 젊은 목사님이 새로 부임해 왔답니다. 벤 후퍼는 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소문을 들으니까 그 목사님은 어떤 사람이든지 따뜻하게 맞아주고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벤 후퍼는 그 교회에 가보고 싶었답니다. 하루는 예배시간에 일부러 늦게 가서 몰래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목사님께서 축도할 때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 나와 집으로 갔답니다. 이렇게 몇 주 동안 교회에 다녔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벤 후퍼는 목사님의 설교에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아 넋을 잃고 있다가 보니까 축도까지 끝나버리고 말았답니다. 나가려고 하니까 벌써 사람들이 통로에 죽 늘어서 있었답니다. 그래서 벤 후퍼는 사람들을 따라 나오면서 목사님과 악수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때 목사님은 벤 후퍼를 보고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라고 하셨고,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답니다. 사람들은 그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환한 미소가 띠면서 이렇게 말을 이어갔답니다. “그래! 나는 네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겠다. 네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지!” 그러자 주변 사람들의 표정은 더 굳어졌지만, 목사님은 다시 이렇게 말했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후퍼가 당황하며 빠져 나가는데, 목사님은 다시 그의 등을 향해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벤 후퍼는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되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재선까지 하였습니다. 주지사 벤 후퍼는 어느 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날, 젊은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바로 그 날이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2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신분이 바뀌고 우리의 자존감이 바꾸어지고 우리의 미래가 달라질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 한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28).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떤 은총이 주어집니까?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인류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3대 장벽들,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들을 한꺼번에 무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수직적 관계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가 달라집니다.

민족적인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당시 선민의식에 젖어 있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짐승이나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겼습니다. 헬라인들은 자신들만 지식인이요 철학자로 생각하며 다른 나라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생각했습니다. 문명이 발달된 현대 사회에서도 얼마나 인종차별이 심합니까? 단순히 소속 가정, 소속 단체, 소속 사회, 소속 국가 다르다고 얼마나 차별을 합니까? 단순히 피부색과 외형적인 요소가 다르다고 차별 행위를 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합니다. 인종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백인을 다 죽여야 한다고 흑인을 다 죽여야 한다고 인종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인종청소 내세운 광기 어린 살인과 집단강간이 지구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민족적 차별이 없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신분상의 차별이 없습니다.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하나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귀족, 기사, 시민, 해방노예, 노예 등에 따라 엄청난 차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신분의 고하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출생 배경과 부의 정도와 교육 수준과 사회적 능력에 따른 신분의 차별이 얼마나 강합니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모든 벽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얼마나 신분차별이 강했습니까? 백정이었지만 장로님이 된 박성춘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당시 백성은 죽도록 일하지만 인간대접을 받지 못했고, 호적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상투도 매지 못했습니다. 의젓이 걷지도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깨끔발 뛰어다녀야 하였으며, 어린이까지도 반말을 하였습니다. 만일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교수형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백정 박성춘이 심한 병에 걸려 에비슨 선교사님으로부터 치료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즉시 동료들에게 전도하여 곤당골 교회(1983년 설립)가 백정들로 채워지자 양반들이 교회를 분리시켜 홍문섯골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 신앙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평등함을 깨닫고 다시 합쳐 승동교회를 세웠습니다. 백정이었지만 승동교회 장로님이 되어 독립협회에도 참여하였고, 아들은 세브란스의학교(제중원) 제1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신분차별의 악습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공동체는 학력 차별도, 신분차별도 인종 차별도 없는 곳입니다. 혈연과 지연과 학연에 따라 끼리끼리 문화를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성별상의 차이가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입니다. 당이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차별이 많았습니까? 여자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차별이 아니라 멸시를 받았습니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 취급을 받았습니다. 수자에도 넣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여자에게 말하지 말라. 여자는 생각이 없는 존재들이다."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은 여성에게는 영혼이 없다고까지 헛소리를 했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남성에 의한 여성은 폭력적 차별과 지배를 받았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도 대소변에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변덕이 심해서, 창의력이 부족해서 여자는 열등하다고 했습니다. 19 세기에 와서 여자들의 참정권이 생겼습니다. 지금이야 미투 운동도 하지만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칠거지악에 묶여 여성들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섬겨야 하지만 시어머니 설거지 시키면 쫓겨나야 했습니다. 아들 낳지 못하고, 남편이 첩둔 것을 시기만 해도 칠거지악 걸려 쫓겨났습니다. 지금이야 여성들이 말이 많으면 칠거지악에 걸렸습니다. 만약 쫓아내지 않으면 남편이 곤장 80대 형에 처해졌습니다. 우리 역사에도 이런 험악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문화에서 미투 운동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예수님 믿고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투 운동에서 보듯 여성을 성적 상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투 운동은 과거 신상털기를 통해 상대를 모욕하여 무너뜨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선정적 보도를 통해 낙인찍기가 아닙니다. 언론을 통해 여론 재판하고 인민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조리한 의식과 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검찰 고위 공직자, 정치인, 문학계 원로, 연극계 거물, 연예인, 의사, 대학교수, 성직자 등 가해자는 반사회적인 악당들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열정을 다해 사회적 위치를 차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권위를 무기로 상대를 범한 것입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제도와 구조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제자리 찾기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인권이 우상화 되어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는 안되고 인간을 수단화 시켜 동물처럼 전락되어서도 안됩니다. 남자나 여자나 창조질서에 맞게 제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누구도 다 실수할 수 있고 연약하기 때문에 5명의 남편을 둔 여인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와 과거의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소수자 보호와과 여성 인권을 포장하여 마치 자신은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처럼 타인을 정죄하지 말고 자신의 위선과 거짓을 솔직히 인정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인간 삶의 근간이 되는 가정, 가정의 기초가 되는 부부와 부부의 성을 성찰해야 합니다. 사탄의 운동장이 된 성애주의에 노예가 된 타락한 성문화를 바꾸어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이 타락해 버린 여성을 성상품으로 포장하는 문화를 바꾸어야 합니다. 단지 가해자와 피해자, 나쁜 남자와 불쌍한 여성으로 접근하지 말고 여성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하보다 귀한 한 인격체로 보는 의식의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미투 운동을 보도하는 신문을 보십시오. 미투를 보도하는 그 지면에 바로 옆에 수영복 입고 상품을 선전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파는데 왜 수영복을 입은 여성이 그 옆에 서 있어야 합니까? 내 딸이라면 그렇게 딸 같은 여성을 성폭행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 의식, 형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혈로 인간끼리 막힌 담을 헐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이처럼 인류 역사를 통하여 지극히 고질적이고도 근본적인 3대 장벽들,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린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자유인이나 종, 남자나 여자, 어른과 아이, 지식인과 무식인,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고 있던 모든 장벽을 자기 육체로(십자가에서) 허물고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장벽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죄'인데 그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장벽을 다 헐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 되어 형제자매로 살아가야 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씨로 받는 유업 영원한 천국의 상속자가 됩니다(2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받는 세 번째 은총은 무엇이겠습니까? 2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직역하면 “그리고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그런 까닭에 너희는 아브라함의 씨이다. 약속을 따라서 상속자들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할례나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상관없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아브라함과 맺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만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믿는 자는 다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유업을 이을 자(클레로노모이)”는 상속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상속자란 말은 아버지가 가진 신분, 재산, 지위 등을 자녀들이 물려받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상속은 토지를 분배 받는 일이나 재산을 물려받는 일을 의미하는 뜻으로 주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내가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를 받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야 이 복을 누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습니까? 할례 받았다고 다 가나안에 들어갔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에게 계승되고, 야곱에게, 야곱의 12지파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로 계승되어 가나안 땅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등 패역한 행동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약속의 땅을 상실하고 나라도 망하고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출애굽 할 때 장정만 60만(출12:37) 부녀자 아이를 합하면 250만 명 이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60만 명 중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민14:30). 왕국시대에도 엘리야가 나만 홀로 남아 있다고 고백할 정도록 수많은 사람들이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 할례받았다고 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상속받은 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유업(후사 롬8:17)은 신약에서는 성도가 들어가는 천국을 상징하는 의미로 주로 쓰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천국을 상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것을 상속받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될 당시 일부 유대 기독교인은 자신들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유업을 받을 수 있고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으려면 이방인들은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뿐 아니라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유업,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천국 유업을 이어받을 상속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천국 유업을 받습니다.

고전15:50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요1:12-13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요3:36절에 보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기준이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할례가 아닙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문성명이나 마호메트나 이만희나 안상홍이나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장길자가 아닙니다. 오직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느냐 그리스도 밖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것이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사람이면, 그가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그가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단한 예술품 수집가인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 세계를 다니며 훌륭한 예술품들을 수집했습니다. 그러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은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전쟁에 나갔다 그만 아들은 전사하였습니다. 전우를 구하려다 전사하고 만 것입니다. 아들 덕분에 목숨을 건진 군인은 그 아들이 군에 있을 때 초상화를 그려 아버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 그림이 예술적 가치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소중히 간직하였습니다. 아들을 그리워하던 아버지는 수많은 예술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며 집사에게 지금까지 수집한 모든 예술품을 경매해달라고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경매하는 날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경매인은 아마추어가 그린 아들의 초상화부터 경매하였습니다. 좋은 그림 놓아두고 아무런 가치 없는 것을 경매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떤 사람이 그 초상화를 9달러 50센트, 만 원 정도에 사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경매인이 물었습니다. 다른 분 안계십니까? 아무 대답이 없자 그가 말했습니다. 그럼 9달러 50센트에 낙찰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자 다른 사람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경매될 그림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경매인은 전혀 다른 말을 했습니다. 자 그럼 오늘 모든 경매는 끝났습니다. 그러면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항의했습니다. 진짜 그림들은 왜 경매안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경매인이 서류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유서였습니다. 그 유서의 내용은 “내 아들의 초상화를 갖는 사람이 나의 수집품 모두를 갖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나의 모든 것을 누릴 상속자다.”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잠깐 살다 죽을 인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할례를 받는다고 율법을 지킨다고 천국을 상속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의 존재는 3차원적으로 달라집니다. 높이와 넓이과 길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가 됩니다.

옆으로는 땅 끝에 이르도록 다 평등한 한 형제자매로 살아갑니다.

영원으로는 비록 이 땅에 살지만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이어받은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분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혁명입니까? 단순한 진화된 동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한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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