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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갈3:1-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571 추천수:3 112.168.96.218
2018-02-18 08:44:30

 

 

믿음 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갈3:1-9

 

사람은 믿음 생활의 시작과 끝을 비교해 볼 때 네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사람입니다. 요셉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고 형제들에게 시기를 당하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성추행 당했다가 누명쓰고 감옥에 갔지만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살다가 마침내 국무총리가 되어 가뭄 때 나라를 살리고 가족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시작도 나쁘고 끝도 나쁜 사람입니다. 애굽왕 바로같은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수많은 기적을 보았는데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사람입니다. 셋째는 시작은 좋았는데 끝은 나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같은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성령 충만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하나님을 잘 섬겨 왕이 되었는데 왕이 되자 악신에 빠져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 결국 자신도, 자식도 다 전사한 불행한 삶으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입니다. 넷째는 시작은 나빴는데 끝이 좋은 사람입니다. 바울과 같은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사람이었지만 마지막 순교할 때까지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산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님은 이 네 가지 신앙 유형 가운데 어떤 유형의 사람인 것 같습니까? 어떻게 시작했던 끝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다가 이단에 빠져 자신도 망하고 가정도 풍지박살 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 1월 20일에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가평 목사 부부 사망실종 사고를 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은 미국 뉴저지 한인교계에서 30년간 목회했던 신망이 높았던 목사님이었답니다. 그런데 사이비 교주 임씨에게 빠져답니다. 전쟁을 예언하고 힘든 사람을 살린다하고 사람들의 비밀을 맞힌다며 사람들을 유혹한 사람이었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신앙생활한 분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라는 사이비 교주에 빠져 딸과 함께 부부가 한국에 왔다가 자신들은 죽고 딸은 살인 방조 교사죄로 감옥에 가 결국 비극으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유혹에 참 약합니다. CBS에서 방영된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교주가 죽지 않는다는 육체영생 교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가 이 시대의 마지막 약속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계시록 20장 4절을 잘 못 해석해서 14만 4천이 채워지면 하늘의 14만 4천의 영들과 합체되어 살아나 천년동안 왕노릇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곳에 빠진 젊은 대학생들이 어머니를 아줌마라고 집에서 가출한 아이들이 나옵니다. 가출한 자녀 때문에 비관 자살한 어머니의 사연이 보도되었습니다. 행복하게 살던 가정이 이혼한 내용도 소개되었습니다. 신앙생활 잘 해 보려고 시작했다가 끝이 비극적으로 끝나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믿음 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믿음의 뿌리를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려야 합니다(1).

오늘 소개된 갈라디아 교회 성도 중에도 믿음 생활을 어리석게 끝내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도하여 은혜받고 믿었던 갈라디아 교인을 어리석다고 말합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꾐 즉 유혹과 홀림, 미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꾀더냐(에바스카넨)“이라는 말은 마술사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유혹하는 것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믿다가 타락하거나 믿다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다 유혹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게 누구이겠습니까? 같은 동족 유대인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 동질 그룹의 사람, 친한 사람, 잘 해 주는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유혹입니까? 십자가 복음에 대한 유혹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해 주었을 때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밝히 보았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십자가 형장에 있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의 십자가 설교를 통해 그들이 직접 그 현장을 눈으로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게 여기며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과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꾐에 따라 십자가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리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고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할례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니까 그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죄의 대가로 내가 받은 지옥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이것은 값싼 복음이 아닙니다.

신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안나푸르나 등정 기록을 세운 박정헌 등반가에 대한 기사를 본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은 사람입니다. 히말라야의 난공불락인 촐라체(6440m) 북벽 등반에 성공한 후 하산 길에 큰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후배 최강식씨가 발을 헛디뎌 얼음 틈 사이(크레바스)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자일 하나에 생명이 매달린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강식아 강식아” 부르자 “형 나 살아 있어”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최씨는 크레바스에 부딪혀 양 발목의 작은 뼈들이 한꺼번에 부러지고 발꿈치 뼈들까지 으스러진 상태였답니다. 자신도 양다리 뼈와 갈비뼈가 부러졌답니다. 끈을 끊어 버리면 자신은 사는 것입니다. 60여권의 책을 낸 세계적인 산악인 메스너도 그런 일을 당했는데 그는 자일을 끊고 자신은 살아났습니다. 친동생이었지만 같이 죽는 것보다 자신만이라도 살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갈비뼈가 부러졌는데도 끝까지 그를 구출했습니다. 그래서 동상을 입어 손가락8개를 잘라내고 발가락을 잘라내어야 했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우리 성도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 아들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남의 일이니까 장하다고 하지만 실상 자신의 아들이 목숨 내놓고 그렇게 했다면 어리석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값싼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 가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뵐 턴데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 진리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 진리에 뿌리를 박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분명하게 내려야 합니다. 나무가 잘 자라 꽃을 피고 열매를 맺으려면 뿌리를 잘 내려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명료하고 간단합니다. 빌립보 간수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질문하였을 때 바울은 간단명료하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인 것을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는 단회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하며 믿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7)”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 끝까지 잘 하려면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주로 세가지 방법으로 유혹을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 대신 교주로 바꿔치기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 +A를 합니다. 셋째는 아애 예수님 지우기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생활을 어리석게 끝나게 만드는 사탄이 쓰는 방법입니다.

역사 속에서 예수 이름 지우기는 끊임없이 이어져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자칭 하나님이라고 했다고 십자가에 처형함으로 예수의 이름을 역사 속에서 지우려고 하였습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10명의 황제는 그리스도를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대대적인 핍박을 가했습니다. 유물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마약으로 취급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라 진화론이라는 학설로, 인권이라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지구상에서 추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입니다. 옥스포드의 문학자인 C. S. Lewis 역시 무신론자였던 어린 시절에 예수는 신화이며, 모든 종교는 단순히 인간이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과 초기 비기독교적 설명, 초기 기독교적 설명, 초기 신약 필사본, 역사적 영향을 살펴볼 때 예수님이 실제 인물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댄브라운은 그의 책 <다빈치 코드>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과 결혼해 딸 사라를 낳았고, 사라는 프랑스 메로빙 왕조를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산 단순히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신화적 기록이고, 역사적 신빙성이 없는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예일대 법대 출신의 명 저널리스트였던 리 스트로벨라는 철저한 무신론자였고, 냉소적 회의론자였습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믿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막연히 희망이나 얻어 보려고 신과 천국을 지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은 굳이 시간들여 알아볼 가치조차 없는 말짱 허튼 소리였습니다. 기자로서 최대의 쾌락을 얻는데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류 역사 속에 그 어느 누군가에게 여덟 개의 예언이 성취될 확률은 1만조분의 1이다."라고 합니다. 이 확률은 미국 텍사스 주(한반도의 세배 넓이) 전체를 은화 동전으로 덮는데, 그냥 덮는 것이 아니라 동전을 60cm 높이로 쌓아 덮고, 그 중에서 미리 표시한 단 한 개의 동전을 단 한 번에 정확하게 집어낼 확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은 구약성경에 약 300개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창3:15) 했는데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갈4:4-5). 베들레헴에서 탄생과(미5:2; 마2:1) 탄생의 때(단9:25; 눅2:1-2), 동정녀 탄생(사7:14; 눅1:27), 헤롯의 학살(렘31:15; 마2:16-18), 애굽으로 피난(호11:1; 마2:14-15), 하나님의 아들(시2:7; 마3:17), 친구에 의해 배반당함(시41:9; 눅22:47-48), 은 삼십에 팔림(슥11"12; 마26:15), 손과 다리가 찔림(시22:16; 요20:27), 조롱과 모욕당함(시22:7-8; 눅23:35), 뼈가 꺾이지 않음(시34:20; 요19:32-33), 옆구리가 찔림(슥12:10; 요19:34), 부자의 무덤에 장사지냄(사53:9; 마27:57-60), 부활하심(시16:10; 막16:6-7), 승천하심(시68:18; 막16:19) 등 수많은 예언들이 성취되었습니다.

이단들은 교주를 예수님 대신 바꿔치기를 합니다. 유사 기독교는 예수님 + A를 시도합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주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믿음 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믿음의 뿌리를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려야 합니다.

 

2. 믿음 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믿음을 주시는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지 말아야 합니다(2-5).

왜 사도 바울을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하고 있습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성령으로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믿으려고 했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이 오셔서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육체로 마치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사릌스)” 영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단순히 인간의 신체를 가리키는 것(6:13)이나 육체가 가지는 연약함과 죄성(롬8:5)이나 육체적 측면만이 아니라 전인격(2:16 롬3:20)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인간적인 노력을 말합니다. “마치겠느냐(에피텔레이스데)”라는 말은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말로 육체를 의지하여 인간의 노력으로써 완성할 수 있겠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 생활을 시작한 자가 그 믿음을 인간적 노력으로 완성키려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믿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이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중요한 구절이니까 한 번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전서 12장 3절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내 노력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행위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가진 것을 은혜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와서 우리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질 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라고 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행19:2). 말씀을 듣고 믿어 성령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행함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그 성령님께서 무엇을 하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괴로움은 성령을 따라 살면서 당한 괴로움(에파데테)을 말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다보면 많은 괴로움이 있지만 이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게 하십니다. 2절에서 말한 것처럼 갈라디아 교인들은 과거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문법적으로 현제 분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인간의 노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신앙생활 잘 하려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라고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마음,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교회 생활을 위해서는 성령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돈 충만, 위선 충만, 다툼 충만, 자랑 충만, 시기, 질투, 미움, 경쟁, 명예 충만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지만 성령 충만하면 세 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첫째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은사 나타납니다. 재능을 뛰어 넘는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셋째,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못하는 인격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회의와 의심이 살아집니다. 성령 충만할 때 불의가 판을 치지 못하고, 성령 충만할 때 거짓이 활보하지 못합니다. 성령 충만할 때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지지 못합니다. 성령 충만할 때 우울증이 살아지고 기쁨과 환희가 찾아옵니다. 성령 충만할 때 질병이 치유되고 삶의 질이 회복됩니다. 술 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술이 사람을 지배해버립니다. 알콜은 중추신경을 자극하여 자율신경을 제 기능을 못하게 하고, 지혜력, 이해력, 판단력, 균형 감각 등을 억제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생각이 성령에 지배를 받고, 감정이 성령에 지배를 받고, 의지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행동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이성과 감성, 의지를 지배하여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일으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성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감정을 조절하게 해 줍니다. 시기를 잠재웁니다. 분노를 억제해 줍니다. 다툼에 올가미를 씌워 버립니다. 남을 비판하고 욕하는 입술을 닫게 만들어 버립니다. 의지를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해 줍니다. 지혜를 주어 총명하게 합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선한 양심이 생겨 다른 사람의 의식하고 사는 자제력을 가지게 됩니다. 허랑방탕하게 낭비적 생활을 하던 사람이 절제할 수 있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을 부지런하게 합니다. 불안하던 사람이 평안해지고, 슬픔에 잠겨 우울하게 살던 사람이 어떤 경우에고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도덕적인 삶이 회복되고, 인생의 목표가 회복됩니다. 창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새 힘을 얻게 합니다.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평강이 넘치게 합니다. 고약한 술 냄새 풍기지 않습니다. 더러운 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인격을 가진 성령의 지배를 받으니까 바나바처럼 선하게 인격이 변화됩니다. 어둠 가운데 걸어 다니지 않고 방탕함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취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예배를 드리고 싶고, 예배를 기뻐하고,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날 성령충만 받고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 예배의 회복입니다.(행 2:42; 행 2:46-47; 행 4:32-35). 예배가 짐이 되는 것은 성령 충만하지 못한 징조입니다. 영적으로 병들었다는 징조입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예배가 결코 지겹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사시면 안 됩니다. 성령님을 근심시키고(엡4:30) 성령을 소멸해서는 안됩니다(살전 5:19) 가난하다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고리타분하다고, 재미가 없다고, 형식적이다고, 교회 다녀보았자 아무 이익이 없다고, 교회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예배드려도 감격도 기쁨도 없다고,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꾸 교회 생활 외면하고 멀리하지 마시고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받으시길 바랍니다.

내 능력 없다고 신앙생활 멀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면 우리에게 맡겨준 일을 넉넉히 감당할 능력이 생깁니다. 성막을 짓는 브사렐을 보십시오(출31:3).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충만히 임하니까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를 발휘하여 성막을 짓게 됩니다.

지혜 없다고 가방끈 짧다고 신앙생활 기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면 지혜가 생깁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안수를 받을 때 지혜의 영이 그에게 충만히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 충만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니까 어떻게 됩니까? "(신 34: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집안이 변변치 못하고 과거가 지저분하다고 자꾸 신앙생활 기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면 사람이 이해 못하는 강력한 힘이 생깁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시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습니다(삿 14:6)"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게 합니다.

소심하고 성격이 모났다고 신앙생활 등한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면 담대해 집니다. 성령 충만한 부모 밑에서 낳아 성령 충만한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눅1:15, 41, 6) 담대하게 천국을 전하고 그 악한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보십시오.(사도행전 6:5절 행7:55)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합니다.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강력한 영적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충만하여 엘루마를 꾸짖으니까 엘루마는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행13:9)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신앙생활 망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면 바른 길로 인도를 받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성령 충만한 바울은 아시아에서 전도하고자 했으나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시자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욕심이 너무 강하다고 신앙 생활 적대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면 육신의 욕망을 극복하게 합니다. 사도행전 11:24의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육신의 욕망을 물리치고 성령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믿음 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믿음을 주시는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 충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3. 믿음 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6-9).

우리가 믿음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습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으니까 의롭다 칭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던 것은 할례 받기 전입니다. 할례는 17장에 나오는데 의롭게 된 것은 15장입니다. 조가 롯을 구출하기 위해 북쪽의 다섯 왕 공격 이겼습니다. 그러나 염려 있었고 자식이 없는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15장 1절 "아브라함아,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 자신이 '나는 너의 방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 내가 무자합니다. 내가 자식이 없습니다.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라야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네가 하늘의 별을 보라.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믿는 믿음이 과연 어떤 믿음이었냐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신약 성경은 이렇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약속의 자손은 단수로 되어 있는데 그 자손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 주십니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아직은 분명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단지 이삭을 낳을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실 메시야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율법적으로 볼 때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가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도덕적으로 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의롭다 칭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계적 의입니다. 법정적 의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한다고 다 도덕적으로 의롭습니까?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의로운 자로 신분이 변화되었지만 아직도 상대적 악이 있습니다. 행위를 볼 때 아직도 신앙인 답지 못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절망하고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다 누구 자손이라는 것입니까?

7절을 보세요.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믿으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나옵니까?

8절을 보세요.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은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창12:3, 18:18, 22:18절에 이미 “모든 이방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라고 거듭해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은 처음부터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삭의 후손에게서만 난 자가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장래 자신의 후손 메시아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해 주었는데(요8:56) 유대인들을 그것을 모른 것입니다. 의롭다 하는 복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믿음 안에서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율법의 지킴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방인들도 결국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예를 통하여 우리가 믿음 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율법을 붙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로마서 4장 18절 이하에서는 자세히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약속 붙들고 믿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알고도 믿었습니다(19). 자신의 몸의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믿습니다.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어 의심치도 않았습니다(20). 견고해지는 믿음(20)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죽은 것 같은 것을 보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으니까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 주보에 믿음의 사람 네 사람의 이야기를 실어 놓았습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7차례나 수술대 올랐지만 남자 쇼트트랙에서 우리나라에 첫 금메달을 올려준 임표준 선수 이야기입니다. 태어나서 인큐베이터 신세를 졌답니다. 중학교 때 오른쪽 정강이뼈 골절을 시작으로 발목 인대 손상, 손목, 허리 골절 등 수술대에만 7차례 올랐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기도하며 결국 금메달 시상대에 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미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링컨을 보십시오. 그는 가난한 구두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학교를 1년도 채 다니지 못했고, 9살에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으며, 23살엔 직장을 잃었습니다. 24살 다시 도산했고, 그 도산으로 17년 동안 빚에 시달렸습니다. 26살엔 사랑하는 여인을 백혈병으로 잃었고, 신경 쇠약과 정신분열증으로 정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29살 주의회 대변인 선거에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선거에서만 모두 6번 떨어졌습니다. 그는 공식적으로만 27번 실패했다고 합니다. 20세에 사랑하는 누나가 죽었습니다. 42세에 5살인 둘째 아들이, 54세에 셋째 아들이 11살에, 63세에 넷째 아들이 19세로 천국에 갔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결국 51살 미합중국 16대 대통령 당선되었습니다. KFC의 창업자 커넬 할랜드 샌더스을 보십시오. 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2살 때 어머니마저 재혼하여 괴로운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40살에 주유소에서 일했지만 아들이 죽었답니다. 식당을 시작해 잘 되었지만 불이나 망하였답니다. 결국 그는 정신병까지 앓았고 아내마저 그를 떠나 버렸답니다. 그는 65세에 너 근심 걱정 말아라는 찬송을 듣고 다시 일어났답니다. KFC라는 간판을 내 걸고 자신의 조리법을 받아들이는 식당을 찾았지만 1008번 거절당했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1009번째 찾아가 KFC 1호점이 탄생하게 되었답니다. 그는 사업에 성공한 후 그는 전용기를 타고 다니며 자기의 삶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신 살아계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였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이사야 50장 15절)”를 전했다고 합니다. 이런 삶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기만 하면 낫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치료받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개취급 받았지만 예수님께서 딸을 고쳐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38년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물속에 들어가 고침을 받고자 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고침 받을 것을 믿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이 능히 일룰 줄로 확신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21). 확신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아는 것과 아는 것을 적용하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가 필요합니다. 확신하고 요단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확신하고 뱀을 잡는 것입니다. 확신하고 나아만처럼 요단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를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기 믿음 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첫째 믿음의 뿌리를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려야 합니다. 둘째 믿음 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현제를 성령 충만으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 믿음 생활 어리석게 끝나지 않으려면 미래를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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