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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 산다는 것은?(갈2:17-2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110 추천수:3 112.168.96.218
2018-02-11 06:40:36

 

믿음 안에 산다는 것은?

갈라디아 2:17-21

 

오늘 성경 20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믿음 안에(엔 피스티스) 산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믿음 밖”이 아니라 “믿음 안에”, “율법 안에”가 “믿음 안에” 산다라고 분명하게 강조해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님들 믿음 안에 살고 있습니까? 진짜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바로 “믿음 안에 사는 것인가” “믿음 밖에 사는 것이가”가 구분해 줍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 사는 사람들인데 그러면 “믿음 안에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1. 믿음 안에 산다는 것은 “나” 대신에 “그리스도”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20).

믿은 안에 산다는 것은 과거의 삶과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변화(變化)라는 말은 “세상에 존재하는 물체의 형상, 성질 등의 특징이 달라지는 것을 말한다.”다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습니다. 변화에는 물리적 변화와 화학적 변화가 있습니다. 물리적 변화는 물이 얼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물질이 원자나 분자 조성의 변화 없이 고유의 성질을 유지하면서 그 상태만 변화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옷을 찢는 것과 같이 찢어진 셔츠를 바느질하면 다시 옷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물리적 변화입니다. 그러나 셔츠를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돌이킬 수 없도록 변화되는 것을 화학적 변화라고 합니다. 물질이 그 자신 또는 다른 물질과 상호 작용을 일으켜 새로운 물질로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분자 구조가 변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산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화학적으로 완전히 변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완전히 화학적으로 변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문법적으로는 완료 수동형입니다. 과거 어느 때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지금까지 못 박힌 상태로 있다는 말입니다. 단회적 사건으로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5장 24절을 보세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데 그 육체는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로마서 6장 6절을 보세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서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로 죄의 몸, 거짓된 자아,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옛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이 삶이 주인이 된 자아,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 했던 자아를 말합니다. 영적으로 죽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옛 자아를 말합니다.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옛 사람, 육에 속한 사람, 죄에 속한 자아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사신다는 것입니까?

20절 계속 보십시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삶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삶의 주제권이 나에게서 예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화학적 변화를 해 버린 것입니다. 옛 자아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결혼 한 여인이 남편을 만나 정말 남편을 사랑하면 이제는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남편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믿음 밖에 있는가의 첫 번째 기준은 바로 내가 내 인생을 사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내 인생을 사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제는 우리 안에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입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 미국의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왔습니다. 이분은 믿음 안에 사는 분이라고 합니다. 어떤 권력을 취득한다고 해도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인생의 주인인 것을 명백히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기독교인이고 보수주의자이며 공화당원이다. 이 순서대로다”라고 소개한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제1 정체성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와 버스 운전사를 하며 정착을 했고 아버지는 육군에서 복무하며 한국 전쟁에 참여 동성훈장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어릴 때 가톨릭 신앙을 가졌는데 대학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세주로 영접을 했다고 합니다. 가톨릭의 많은 의식들에 참가했지만 이를 통해서는 그가 원했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얻지 못했답니다. 그는 금 십자가 목걸이를 했는데 선배가 그에게 “마이크, 기억해라. 너는 십자가를 목에 걸기 전에 네 마음에 걸어야 한다”라고 했답니다. 그후 신앙 집회에 참여해 그곳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기로 결단을 했답니다. 그는 대학생활에 대하여 고백하기를 “대학에서 친구와 가족을 합친 것 그 이상으로 내 인생을 바꾼 분을 만났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30년 전 이곳에서 나는 그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답니다.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6선 의원으로 활동했고 2012년 인디애나 주지사가 되었고 지금은 미국의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세 때 상대 후보를 공격하는 부정적 켐페인을 펼치지 않은 것을 유명한데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 나는 그 죄인들 중에 최악”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의원시절 그는 술이 나오는 자리에는 아내없이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료 의원들은 그가 나타나면 자신의 말을 깨끗히 씻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경건했다’고 합니다. 의회 내 성경 연구모임 회원이 되어 말씀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대학 때 교회에서 만나 결혼한 그의 아내 카렌을 ‘기도의 용사’라고 부르는데 그녀는 ‘Yes’라고 쓰여진 금십자가를 지갑에 늘 넣고 다닌다고 합니다. 부통령이 되었을 때도 “지금 저는 이곳에 매우 겸손하게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낙태 시술을 지원하는 단체에 대하여 연방자금 지원 중단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이유로 동성애를 거부해 동성애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 ‘종교의 자유 법안’에 서명했다고 합니다. 그는 단지 옷 소매에 신앙을 매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라는 조끼를 아예 입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는 대선 중에도 “기도는 이 땅에서 마지막 최선의 희망이라고 말한 아브라함 링컨의 말은 여전히 사실”이라며 “미국이 다시 건강하고 강한 나라가 되도록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진화론을 믿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나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전심으로 믿는다. 그가 이것을 어떻게 했는지는 나중에 그에게 물어볼 것”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새 삶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전의 바울이 더 나은 바울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의 내가 더 낳은 나로 변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 인생의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업을 해도, 운동을 해도, 공부를 해도, 취업을 해도, 운전을 해도, 음식을 해도, 전도를 해도, 자녀 교육을 해도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사는 삶입니다. 죄가 다스리던 인생이 이제는 예수님께서 다스리는 인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 마음의 죄의 거주지였다면 이제는 의의 거주지가 된 것입니다. 나의 무능함이 인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내가 내 인생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절망하기 쉬운 내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도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원리에 따라 살았던 내가 의와 생명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능력, 나의 인격, 나의 지혜, 나의 실력, 나의 경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지혜, 그리스도의 실력, 그리스도의 경험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질병에 걸려도 예수님이 나오고, 실패를 해도 예수님이 나오고, 흔들어도, 짓밟아도, 무시당해도, 멸시를 받아도, 자존심이 상해도 예수님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기쁨의 근원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소망을 주십니다. 내가 용서 못할 것 예수님이 용서하게 하고, 내가 이해 못할 것 예수님 이해하게 하고, 내가 사랑 못할 것 예수님이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치유 못할 것 예수님이 치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산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2. 믿음 안에 산다는 것은 “율법” 대신에 “믿음”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20,19,18).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제는 우리 안에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그 사실을 믿으면 우리 인생의 주체가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아는 완전히 없어져 버립니까? 아닙니다. 20절 중반 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말씀합니다.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또 육체 가운데 산다고 바울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순이 아닙니까? 모순이 아닙니다. 율법에 대하여 옛 사람은 십자가에 죽었지만 여전히 육신적 생명까지 잃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삶을 육신(사르키)이라는 말로 표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거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십자가에서 옛 자아가 죽었다고 인정하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으로 산다고 근심과 걱정 없이 만사형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늘 갈등과 번민, 문제가 다가옵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도 지상적 현세적인 삶은 여전히 연약한 육체 가운데 살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고 말씀합니다.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면 바울처럼 그런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엘리야도 두려워 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도 인정할 만한 온유를 가졌지만 80년이나 훈련을 받았는데 120세에 혈기를 부렸습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 성급한 성질 잘 바꾸지 못했습니다. 성군인 다윗도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 연약한 나이기에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낙심하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 죄성(罪性)이 남아 있습니다. 죄의 책임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이지만 여전히 노예의 근성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죄의 근성이 남아 있습니다(롬 7:19).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까 믿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율법 대신에 믿음으로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 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원리가 율법 대신에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울은 율법으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의 삶의 동기도, 그의 삶의 기준도, 그의 삶의 원리도, 그의 삶의 목표도 율법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율법을 철저히 지켜 살 것인가가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 율법으로 자유를 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는 “율법” 대신에 “믿음”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렇게도 추종했던 율법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직역하면 “왜냐하면 내가 율법을 통하여 율법에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도록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왔다”입니다. 18절에 나오는 율법을 버린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완벽하게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율법에 따라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은 율법의 정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을 말합니다. 율법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둘째로 율법에 대하여 죽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삶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살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그의 삶의 원리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으며 자기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이들을 심히 박해하던 자였습니다(갈1:13-14). 예수 믿기 전에는 내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내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내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내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후 어떻게 변합니까?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고 말씀합니다. "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그런 자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어 율법에 대하여 죽게 하시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십자가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가 어떻게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연약성과 한계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이것을 할 수 있는 줄 믿느냐?"(마9:28)

"네 믿은 대로 되라"고 말씀했습니다.(마8:13)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막9:23) 고 말씀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악한 성질, 좋지 않는 습관, 분노하기 쉬운 성질, 미움과 질투, 원망과 시비를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 사는 삶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연약함과 한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로 믿음으로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세대 영동 세브란스 병원의 암센터 소장인 이희대 박사님이 『희대의 소망』이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2003년도에 대장암이 발병이 되어 암세포가 간과 골반 뼈에 전이되어 암4기, 말기 암 상태라고 합니다. 이 정도 되면 보편적으로 3개월에서 6개월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8년이 지나도록 환자를 돌보았답니다. "암이 허락 없이 와서 돈도 안내고 전세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분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암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었기 때문에 저에겐 차라리 축복이었습니다. 기독교 학교도 나왔고 성경을 접한 적도 있었지만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암을 통해서 철저히 낮아짐으로써 비로소 저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003년 6월에 저는 이미 4기였습니다. 말기입니다, 말기. 그때 죽는다, 죽는다 했더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적인 치료 외에 영적인 치료를 허락하셔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주셨습니다. 절망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믿음으로 암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의술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믿음으로 놋뱀을 바라볼 때 살아난 것처럼(민21장)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혈루증 앓은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를 붙들고 고침받은 것럼 믿음의 손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가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발로 사마리아 성에에서 예수님을 전했듯이 믿음의 발로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초월한 믿음을 통해서 흘러오는 것입니다. 전선이 물에 잠겨 있으면 우리 몸이 물에 닿으면 감전되듯이 믿음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옵니다. 지금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를 갖고 예배의 자리에 오셨습니까? 질병의 문제가 있습니까? 용서하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까? 원한과 증오의 문제가 있습니까? 실패와 좌절의 문제가 있습니까?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자녀의 문제가 있습니까? 율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믿음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 산다는 것은 율법 대신에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3. 믿음 안에 산다는 것은 “공로” 대신에 “은혜”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20,21,18,17).

사도 바울은 자신이 믿는 예수님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은혜 아니면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잘 지키는 공로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것이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인간의 공로로 그것이 가능한데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냐는 것입니다.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헐어 버린 율법의 담을 다시 세운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는 번역하지 않았지만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앞에 있습니다. 17절의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17절을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쉽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일이 나중에 가서 잘못된 것으로 밝혀져 우리가 할례를 받고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망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전에 파괴해 버린 그 낡은 제도를 다시 세운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죄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공로로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이 놀라운 은혜로만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믿음 안에 산다는 것은 공로로 산다는 말이 아니라 은혜로 산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의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신 새로운 길은 율법의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의지나 노력이나 결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믿음도 공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쌓은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새로운 율법주의 또 하나의 공로 주의입니다. 이런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게 하는 일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조금 무엇인가 주어진다고 자꾸 공로로 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 거두어 가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은혜 떨어지면 천사도 마귀로 변하는 것입니다.

1995년 6월29일 명품만을 취급해서 강남 사람들이 즐겨 찾던 명소 중의 명소였던 삼풍백화점이 졸지에 무너졌습니다. 당시 피해액만 2천 7백억이 넘었답니다. 당시 삼풍백화점 사장이었던 이한상씨는 업무 상 과실 치사 혐의로 7년 동안을 감옥에 들어가 살아야만 했습니다. 사고와 함께 호화로운 삶은 끝나고 옷 한 벌, 숟가락 하나 제 것이 없는 삶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답니다. 교회에서 인정받아 30세 전에 집사 직분을 받았답니다. 사업에 성공하자 은혜를 잃어 버렸답니다. 자신의 공로로 된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주일날이면 먼지 쌓인 성경책의 먼지를 털고 교회에 출석해 예배시간 읽은 말씀이 전부였답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은혜가 되지 않았답니다. 주일도 종종 빠지며 골프를 치러 다녔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실 때에는 “주님, 오늘 술 취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술은 더 많이 마셨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한 세상 유혹이 다가오면 처음에는 매번 끌려가다가 나중엔 자발적으로 가증한 길을 걸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백화점 붕괴 사건으로 감옥에 가 24시간 벽만 보고 있었답니다. 감옥에서 성경을 읽고 은혜를 깨닫고 회개하였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토록 화려했고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채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었는데 자신의 공로로 이룬 것으로 착각하고 그 은혜를 잊고 교만하고 타락해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답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고, 나는 예수가 필요했습니다.’고 고백하며 진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의 은혜에 감격하게 되었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씀 앞에 꼬꾸라졌답니다. 은혜를 주었는데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 힘으로 사는 것처럼 살며 잘 나가니까 한 달에 한 두 번 교회에 나가는 것으로 믿음 안에 사는 것으로 착각한 자신의 삶을 회개했답니다. 피해자들은 몰려와 그를 살인마라고 저주하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사랑했답니다. 그는 “​하나님, 이제 내가 세상에 나가 다시는 세상 것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원합니다.”라고 다짐하였고 출옥한 후 어느 선교사님을 만나러 몽골에 갔다가 ‘바로 이곳이 주님이 나를 부르신 곳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그곳에서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원도 공로가 아니라 은혜이고 삶도 공로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은혜라”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은 ① “나” 대신에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20). ② “율법” 대신에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20,19,18). ③ “공로” 대신에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20,18).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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