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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용기(4)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막15:42-4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670 추천수:2 112.168.96.218
2017-09-17 14:26:47

 

신앙인의 용기(4)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

마가복음15:42-47

 

인터넷에서 본 어떤 아이의 일기입니다. 1월 13일 일요일, “텔레비전을 보는데 엄마가 물어 봤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고르기가 어려워서 가만히 있었는데 아빠가 물어 봤다. ‘영훈아 그러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좋아?’ 그냥 귀찮아서 말해 버렸다. ‘문근영 누나요’ 아빠가 날 한 참 동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도’” 대부분 부모들이 아이가 자라 말할 때쯤 되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물어 봅니다. 대부분 엄마가 좋다고 말하지만 눈치가 빠른 아이가 엄마가 물어 보면 “아빠”라고 말한답니다. 신이 난 아빠가 얼마만큼 물어면 “엄마만큼”이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끈임 없이 편 가르기 앞에서 한 편을 선택할 것을 강요받으며 삽니다. 지난 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가 부적합 판정을 받고 결국 자진사퇴했습니다. 부적합 판정 이유가 첫째는 그가 건국에 대하여 보수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경의 창조론을 신봉하는 창조과학회의 이사로 창조과학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장관으로 정무 감각과 정책 역량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당도 야당도 부적격 판정을 한 것입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당도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두들겨 패고, 야당도 내 편이 아니라고 두들겨 패서 내동댕이쳐 버린 것입니다. 서로 확실한 내 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과도하게 반응했는지 모르지만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끔찍한 학교 폭력 기사를 읽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 편이 아니라고 왕따 시키고, 옷을 벗겨 알몸에 찬물을 뿌리고, 오줌을 싸고, 오줌을 먹이게 하고, 머리카락에 불을 붙여대기도 하며 피 흘리기까지 구타하며 알몸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유포하는 폭력이 편 가르기 정치에서 재현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니 장관은 꼭 진화론을 믿어야 하고 창조론을 믿으면 장관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까? 객관적으로 보아도 진화론도 신념이고 창조론도 신념입니다. 정치인이 되고 장관이 되려면 창조론을 믿으면 안 됩니까? 이 나라가 무신론자들만 있는 나라입니까? 다양한 종교인이 사는 나라에서 그것은 편 가르기의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정치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끝없이 편 가르기 싸움을 합니다. “어느 지역 출신인가? 누구와 연줄이 있는가? 어느 고등학교와 어느 대학 출신인가?” 등 지연, 혈연, 학연으로 끼리끼리 어울리고 배타적으로 응집합니다. 진영논리로 무조건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돌리고 내편이면 뭉쳐 집단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똑같은 학교 자리를 놓고 장애인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장애인 학교를 지어달라고 하소연하고 비장애인 어머니들은 “쇼를 한다고 조롱하며” 한방병원을 지어달라고 시위를 합니다. 정치인들은 보수와 진보를 갈라 색깔 싸움을 하고, 평범한 사람도 학연, 지연, 혈연을 중심으로 갈라지고 뭉치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나라 역시 지금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로 한국과 일본, 미국과 북한 러시아 중국과 편 가르기를 하고 대치되는 것처럼 자국의 이익에 따라 뭉쳐 집단 이익을 추구합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나라나 내 편이 없으면 고립되고, 소외되고, 왕따 되고, 버려지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인간들이 벌이는 편 가르기를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 본성 상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어느 편에 서야할 것인가는 일평생 살면서 계속 요구되는 것입니다. 살면서 누군가가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주어 나를 이해해 주고, 내 말을 들어주고, 나와 함께 고락을 같이할 사람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문제는 편 가르는 기준입니다. 편 가르기 하는 내용입니다. 대부분 편가를 기를 할 때 기준은 무엇입니까? 이해관계입니다. 서로 이익이 되는 사람끼리 뭉치는 것입니다. 진리보다 이해관계가 맞으면 한 편이 됩니다. 그래서 정당 정치에서 생생하게 보듯이 어제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한 평생 신앙 생활하는 우리도 늘 편 가르기를 강도당하고 사는데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하겠습니까? 정답은 ‘예수의 편’입니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보듯이 예수님 편에 서면 때로는 불이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우리는 어떤 순간 어떤 장소, 어떤 형편에서도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영화를 좋아해도 주일날 친구가 영화를 보러가자고 하면 예수님 편에 서서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오늘 예배를 드리러 가야한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교회에 오는 것이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입니다. 회사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연예인 합성사진을 만들어 인터넷에 유포하라고 하면 상급자 편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 서서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때문에 만들 수 없다” 거절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 전에 같이 자자고 하면 사랑하는 사람 편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 서서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평생 하나님 안에서 후회 없는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한다” 거절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낙태를 강요받았을 때 내 편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 서서 “나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살인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평생 예수님 편에 서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일컬어지는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를 때 “다른 사람 모두 예수님을 버려도 자기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마가복음14:29)”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잡혀 심문을 당하니까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세 번이나 부인하며, 자신이 예수의 편이라는 것을 부정했습니다. 베드로 뿐 아니라 대부분 제자들이 예수님 편에 서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으니까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를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 했지만 막상 십자가 앞에서는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용기가 없으니까 예수의 편에서 목숨을 걸고 진리와 정의를 지켜야 할 전사들이 배신하고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오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불이익 앞에서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 예수님의 장례 위원장이 되어 장례를 치릅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 시피 아리마대 요셉은 존귀한 공회원, 산헤드린 의원으로 빌라도의 눈치도 봐야하고, 유대인의 여론 지지도를 살펴야 하는 사람입니다. 여당의원으로 동료들에게 동조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는 “진리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내 한 몸의 영화를 구할 것인가, 진리냐 거짓냐, 예수님 편이냐 빌라도의 편이냐” 갈림 길에서 예수님 편에 당당히 서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면 빌라도의 분노의 화살을 맞아야 하고, 동료들의 증오와 멸시를 받아야 하고,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아야 하며, 산헤드린 의원 직위도 박탈당하고,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온 명예와 권세, 부귀가 다 무너질 것 같은 현장에서 예수님 편에 당당히 선 용기를 가졌습니다. 참신앙의 용기는 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잃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편에 선 용기를 가진 아리마대 요셉을 통하여 우리가 평생 예수님 편에 서서 살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용기가 필요한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평생 예수님 편에 서서 살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용기가 필요하겠습니까?

 

1. 우리는 살면서 부당한 동조 앞에서 예수님 편을 단호하게 결정하는 선택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편 가르기가 강요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하여 처형하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설 것인가를 강요당하고 있었습니다. 방관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편 중에 한 편을 지지해야 만 했습니다. 당시 기득권자이고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정치 지도자 빌라도를 자기 편으로 끌어 들였습니다. 거대한 권력이 그들 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해 “반역자, 신성 모독자”로 죄명을 붙여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대세였습니다. 이것을 거역하면 불이익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이 대세 편에 서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을 뱉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창으로 찌르고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니다. 저분은 메시아다. 당신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예수님 편에 서서 용기있게 주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열 명이 지지하는 의견을 나 홀로 반대하여 '아니다'라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살면서 늘 시대정신에, 다수에게, 문화에 동조할 것을 압박당하고 살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압력을 받으면 대부분 다수에 동조합니다. 심리학자 애쉬(Asch)는 이것에 대하여 실험했습니다. 실험실에 여섯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사람이 딱 하나 남은 의자에 앉았습니다. 실험자는 기준으로 선을 보여 주고 다른 선이 이 기준선보다 큰가, 작은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명이 선이 분명 기준보다 큰데 작다고 대답했습니다. 실험 전에 미리 짜고 틀린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성도님을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모두 다섯 명이 틀렸다고 말하며 크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나 같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줏대 없이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틀린 대답에 한 번도 편승하지 않은 피험자들은 전체 피험자들 중 25%뿐이었고, 나머지 75%는 두 번 중 한 번, 또는 항상 틀린 대답에 따랐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동조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 또는 기대에 일치하도록 자신의 행동을 바꾸거나 또는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왕따 당하는 것보다 대세를 따라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를 가진 아리마대 요셉을 달랐습니다. 4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두가 아니라고 도망가는데, 심지어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부인하고 저주하며 외면했는데 그는 최고의 권력자 빌라도에게 당돌히 나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당돌히"라는 말은 "담대히, 용감하게"라는 말입니다. "마음을 담대하게 먹었다"는 말입니다. 잘 못된 세상에서 옳음을 들어내려면 용기가 없으면 되지 않습니다. 그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존귀한 공회원입니다(막15:43).

유대사회의 지도 원로급입니다. 아리마대는 사무엘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헤드린의 구성원은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 중에서 선출되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갈릴리 출신의 이 젊은 선지자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며 예수님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편에 서면 공회원에서 축출될 것은 뻔하고 백성들 사이에서 매장될 것도 확실합니다. 그는 당연히 대세를 따라야 할 정치인입니다. 단지 소수 의견을 개진하면 헌법재판소 소장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닙니다. 공회원 자격을 하루아침에 박탈당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위험을 무릅쓰고 시대의 물결에 동조하지 않고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것입니다.

<오직, 용기(레나테 다니엘 지음)>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지금 당신이 마주하는 실패, 두려움, 불안을 극복하는 힘은 오직 용기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책은 독일의 저명한 심리분석가 레나테 다니엘이 칼 융의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용기의 진정한 의미와 그 속에 숨겨진 놀라운 힘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용기 있게 살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4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첫째, 용기는 결정과 단호함을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 선택지 앞에서 분열되는 내면의 갈등으로 무기력해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용기는 마음을 필요로 하고 셋째, 용기는 힘을 필요로 하며 넷째, 용기는 롤 모델과 멘토를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인의 용기는 부당한 동조 앞에서 예수님 편에 서는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부당한 다수 앞에서 예수님 편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우리는 43절에서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존경받는 공회원임과 동시에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 는 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말은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 질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며 진정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확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십자가 사건을 통해 감동과 변화와 결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고통 가운데 함께 매달린 강도 중의 한 사람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을 듣고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켜보는 백부장조차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는데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는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기준이 분명해 진 것입니다. 기준이 달라지니까 수준도 달라진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의 부도 자신의 권력도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태양 앞에서 촛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도취되어 세상 기준으로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면 삶의 기준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 주님 언젠가는 오십니다. 우리 영원히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다 놓고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이 엄숙한 진리 앞에 우리의 기준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예수님 편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믿습니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 10:37)"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11)"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내세의 소망을 가지면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받고 이 사실을 믿은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편에 서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라고 외쳤습니다. 신앙인은 비록 홀로 일지라도 예수님 편에, 진리 편에 서야 합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 때 대부분의 백성들이 바알신을 숭배했을 때 엘리야는 하나님을 섬기며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죽음 앞에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24:15)"라고 고백했습니다. 진리는 수에 의해, 지지도에 의해 변경되지 않습니다. 남편일지라도 아내일지라도, 자식일지라도, 상사일지라도, 전문가일지라도, 고향 친구일지라도, 동문일지라도, 목사일지라도 옳지 않으면 동조하지 말고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2. 우리는 불이익 앞에서 숨김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 서는 드러냄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보면 이기적인 욕심으로 약속과 신의를 헌신짝 버리는 사람들을 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책임을 회피합니다. 잘 믿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불이익이 다가 오면 숨고, 약속을 파기하고 믿음마저 저버립니다. 평생 예수님 편에 서서 살려면 불이익 앞에서 공개적으로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아리마대 요셉을 보십시오. 이미 돌아가신 예수님인데 예수님 편을 든다고 아리마대 요셉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그 전에는 전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을 보십시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도 숨기고 살았습니까? "유대인이 두려워"라고 성경은 명백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했겠습니까?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요 9:22)” 예수님 편에 서면 출교를 당하였습니다. 당시 출교를 당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편에 서면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입니다(마27:57). 존귀한 공회원입니다(막15:43). 70명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 동조했다가는 출교가 될 수 있고, 그의 재산을 다 빼앗길 수도 있으며, 그의 공회원 자격을 하루아침에 박탈당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지위와 명예, 신변의 위협과 손실을 감수하고 예수님 편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용기를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목격하고 이제 과감하게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예수님 편에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용감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그 이유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눅 23:50-5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선의지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거스 리(Gus Lee)의 용기(COURAGE)란 책에 걸프전의 영웅, 미국 4성 장군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 이야기가 나옵니다. 월남전 때 지뢰에 부상당해 쓰러진 병사를 구출하여 자신의 전용 헬기로 후송한 용기 있는 군인으로 미국인들에게 존경받는 분이었습니다. 노만 슈워츠코프 장군이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며 학생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군대가 국경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데 매일 밤 적들이 국경선을 넘어와 전우들을 죽이고 부상을 입혔습니다. 그런데 본부의 명령으로 국경선을 넘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밤 적이 다시 습격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국경을 넘어서 그들을 추격할 것인가 아니면 본부의 명령을 계속 따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국경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을 들라고 하니까 대부분의 생도들이 손을 들었답니다. 이 때 노먼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리더와 출세주의자. 리더는 도덕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옳은 것을 위해 행동하며 부하를 위해서 죽는다." "출세주의자. 그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며, 출세를 위해 부하들을 희생한다. 그들은 결과를 위해 거짓말도 불사한다. 출세주의자들은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부하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면서 “정답은 국경을 건너는 것이다. 부하를 보호하기 위하여 적을 섬멸해야 한다. 여러분은 명령을 위반하였지만 옳은 일을 위해 행동했기 때문에 군법회의에 가더라도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용기란 위험, 두려움, 어려움을 견디고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적, 도덕적 힘이라고 말을 합니다. 핵심가치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낮은 수준의 핵심가치(예: 남용, 통제, 생산성, 결과, 이익 등) 둘째, 중간 수준의 핵심가치(예: 고객중심, 리더십, 서비스, 충성, 팀워크 등) 셋째 높은 수준의 핵심가치, 이것은 고결(Integrity), 용기(Courage), 도덕적 본성(Character)의 세 가지 원칙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옳기 때문에 불이익 앞에 예수님의 편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도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문화와 환경도 사람들은 변하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 말고 빌라도 앞에서도, 직장 사장 앞에서도, 불이익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극단적으로 총칼 앞에서도 공개적으로 신앙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태10:32-33)

신앙이 좋아진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범위가 넓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간, 엘리, 사울 같은 사람들은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용기 있게 출발했지만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우리 신앙은 룻처럼 가면 갈수록 좋아져야 합니다.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 3:10)" 두아디라 교회처럼 더 좋아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계 2:19)" 욥처럼 개인적으로 신앙이 더 좋아져야 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 8:7)"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 있게 예수님의 편에 서면 불이익을 볼 것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이익 앞에 굴복하면 그 당시에는 조금 이익을 보는 것같지만 멀리 보면 결코 그것이 이익이 아닙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공개적으로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정권은 바뀌고 시대는 바뀌어도 인정을 받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섭겼습니다. 그 때 모세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32:26)”고 합니다. 그 때 용기있게 여호와 편에 선 사람들이 레위 자손들입니다. 그들이 죽었습니까? 여호와 편에 서면 오히려 죽음의 위기 가운데 살아납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 450명과 아세라 선지 400명, 도합 850명과 대결할 때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 하나님 편에 선 기생 라합이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살아났고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오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하나님 편에 서는 용기를 가지고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았다고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풀무불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보호해 주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요셉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요19:3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19:39)" 신앙인임을 숨기고 살았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와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는 공적 영역에서 예수님의 편에 서있는 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적 영역에서 몰래 신앙생활하지 말고 점점 공적 영역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신앙 좋은 축구 선수들이 골 세러머니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군목출신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군목으로 처음 임관하면 연대장이나 사단장이 축하환영회식을 벌여준다고 합니다. 계급은 중위지만 목사님이니까 사단장이 존대말을 사용해 가면서 술을 한잔 권한다고 합니다. 그때 술을 한잔 마시면 “아 이번에 호탕하고 멋진 목사님이 오셨네요”라고 한답니다. 그리고 바로 뒤돌아서면 “어~ 또 나이롱목사 하나 왔구먼”이라고 말한답니다. 반대로 술을 끝까지 거절하면 “아니 중위님~ 좋은 자리에서 왜 이러시나?”하고 핀잔을 주지만, 돌아서서는 “이번엔 진짜가 왔군”이라고 말합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신앙을 공개하지 않으면 직장 생활이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내가 예수님 편에 서있다는 것을 공개하여야 합니다. “제가 교회 다녀서 술을 못합니다!”, “제가 예수님 믿기 때문에 이런거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공개하면 잠시 친구도 끊어지고, 거래도 끊길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 지나면 더 신뢰해 주고 더 건실할 거래가 트이고 평생 끌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주도하는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쓰임받음 앞에서 예수님 편에 서는 헌신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빌라도를 찾아가 시체를 달라고 해서 무엇을 합니까? 46절을 보십시오.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둡니다. 그 무덤이 누구의 무덤입니까? 마태복음 27장 60절에 보면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무덤입니다. 자신이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예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직 아무도 사용한 일이 없는 새 무덤입니다. 당시 평민들은 누군가가 사용한 무덤을 다시 잘 정리해서 사용함이 보편적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자신의 무덤을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헌신한 것입니다. 헌신은 용기의 꽃입니다. 헌신은 용기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용기 있는 군인은 자신의 몸을 던져 적진에 들어가 전우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용기있게 같이 죽겠다고 큰 소리쳤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헌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들의 지위가 박탈될지 모르는,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반역죄와 신성 모독죄로 처형된 예수님의 장례 위원장이 됨으로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의 자세를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의 헌신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안식일 예비일인 금요일 오전 9시였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유대인 안식일은 금요일 오후 6시부터 저녁 일몰과 함께 시작됩니다. 따라서 3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후 언덕을 내려와 빌라도총독이 머물고 있던 관저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로마총독인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담대하게 요구한 것은 로마법과 유대법 모두에 크게 저촉되는 중대한 범죄행위였습니다.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님의 시체를 거두어가 장사를 지낸 행위는 그 또한 사형에 처하게 될 충분한 죄목이 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감수하는 헌신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을 앞두고 3시간 내에 장사 지내지 않으면 예수님의 시체는 날짐승과 들짐승에게 훼손되었을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시신이 그 같은 치욕적인 처치를 당하지 않도록 헌신한 것입니다. 모든 수모와 불이익, 그리고 생명의 위협까지도 감수하면서 헌신한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유월절 행사에도 참여할 수 없어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매우 수치스럽고 비난거리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명절에 유대인들은 부정하다고 하여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하였습니다(요18:28). 하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이방인이었던 빌라도를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에게 시켰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했다면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주목하고 있는데 온몸에 땀이 뒤범벅이 되어, 골고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피범벅이 되어 돌아가신 예수의 시신을 만지면서, 자신의 의복과 손에도 피로 얼룩져 장례를 치르는 그의 헌신을 상상해 보십시오.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물, 우리의 재능을 주님 편에 서게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헌신하면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저 이름 없는 무덤이었을 이곳이 인류 구속의 찬란한 부활의 현장이 된 것입니다. 자신이 사용했다면 그저 이름 없은 무덤에 불과한 것이 구속사에 빛나는 부활의 현장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한 현장이 된 것입니다. 아리 마대 요셉에 의하여 이사야 53장 9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죽음)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고 이 사건이 있기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어쩌면 공회원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의 장례 위원장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평민이 빌라도에게 접근할 수 있고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부자가 아니었다면 예수님께 자신의 무덤도 내어 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짧은 순간이지만 결정적인 시간을 주님께 헌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덤이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이 되게 하였습니다. 내게 주신 것을 가지고 예수님 편에 서서 쓰임받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이것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사용일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사용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되는 것은 가장 가치있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편 가르기 하는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어려운 환경에 처해서 양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의 일이랍니다. 교회의 대표자로 링컨에게 보내어진 사람이 링컨에게 격려의 말을 했답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 편에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답니다. "네, 나의 진실된 관심사는 주님이 어느 편에 계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과연 주님의 편에 서 있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23)”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를 바르게 살려면 무엇보다 예수님 편에 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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