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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원(8) 하나님 저의 눈을 밝혀주옵소서(시편13:1-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744 추천수:4 112.168.96.71
2017-06-11 17:19:17

 

애원(8) 하나님 저의 눈을 밝혀주옵소서

시편13:1-6

 

터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독일인 틸만선교사가 터키의 지르베출판사에서 독일어와 터키어 번역을 하며 성경과 기독교 관련 소책자를 배포했답니다. 46세인 세 아이들의 아버지인 틸만 선교사는 그 날도 출근하며 아내를 포옹하고 아이들을 안아 주면서 “안녕, 사랑한다!” 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답니다. 두 아이의 아빠인 35살 터키사람 네자티 아이든 목사와 우우르 육셀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였답니다. 부활 주일에 5명의 청년이 이 성경공부에 구도자를 가장하고 참여하였답니다. 이들은 ‘타리캇’ 즉 이슬람의 “신실한 신도”라 불리는 단체의 회원들이었답니다. 이들 모두 같은 기숙사에서 살면서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던 젊은이 인데 총과 부엌칼과 동아줄 그리고 수건들을 준비하여 알라에게 봉사하기 위해 성경공부에 찾아간 것입니다. 네자티 목사가 성경 한 장을 읽었을 때 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답니다. 세 사람의 손발을 의자에 묶었고 핸드폰으로 녹화하며 거의 3시간 동안이나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답니다. 틸만은 156번이나 칼에 찔렸고, 네자티는 99번 그리고 우우르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찔렸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한 사람씩 손가락들을 절단하고 코와 귀와 입들을 도려냈답니다. 결국 참수를 하였답니다. 출판사와 가까운 이웃 사무실들에서는 고함 소리와 신음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답니다. 결국 세 사람 모두 무참하게 순교당하였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라는 질문을 합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읽어 보거나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17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무참하게 고문을 당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참수를 당하고 바다에 십자가를 세워 달아 놓고 밀물과 썰물로 고문은 당하다가 무참하게 순교를 당합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로드리고 선교사는 왜 이 순간에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느냐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질병에 걸려 죽고, 사업이 잘 되지 않고, 취업이 안되고, 사고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신앙적 회의를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거나 충격적으로 다가오면 신앙에서 떠나 무신론자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진화론을 쓴 다윈도 어릴 때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심장이 과도하게 뛰는 심계항진, 설사, 각종 피부 질환, 불면증 등에 시달렸습니다. 8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지극히 사랑했던 첫째 딸 애니가 10살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이런 일을 당하느냐고 신앙적 회의를 하고 하나님을 떠나거나 영적 침체에 빠집니다. 무신론자가 되던, 회의론자가 되던, 불가지론자가 되어 버립니다. 교회를 다니다가도 가나안 교인이 되어 버립니다.

무신론자 데이비드 흄도 어릴 때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보고 10대에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악을 막아내기 원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가? 그랬다면 하나님은 무력한 자이다. 막아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기 원하지 않았는가? 그랬다면 하나님은 악한 자이다. 하나님 막아내기 원했다고 막아낼 수 있었는가?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무신론자 슬라보예 지젝은 “모든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와 악의 존재 사이에 있는 괴리감에 직면하게 된다. 전능하고 선하신 신의 존재와 가스실에 죽은 수천 만명의 아이들 고통 사이에는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이 있지 않는가? 기독교가 말하는 전능하고 선하신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개인들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는 무신론이며 그리스도는 괴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존재하는데 악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악이란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악이란 살인, 강간, 도덕질 등과 같은 도덕적 악과 지진 스나미 태풍과 같은 자연적 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항상 자유롭게 옳은 것만 선택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자연 재해가 일어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지 못했으니 무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존재하는데 악이 횡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지 않은 악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하신 데도 악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믿음 좋은 신앙인도 이런 일을 당하면 영적 침체에 들어가고 탈진이 되고 실존적 회의론에 빠지게 됩니다. 모세와 엘리야, 요나와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한 시대 참 능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200만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이끈 민족지도자입니다. 홍해를 가른 사람입니다. 돌에서 물을 나게 한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 선지자를 물리친 사람입니다. 놀라운 기적은 나타낸 사람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 12만명을 회개시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여달라고 할 정도로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말씀을 백성에게 전해도 듣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불의합니다. 과중한 사역으로, 강압적으로 떠밀려 사역을 했지만 괴로운 나날은 계속되고 사역의 열매는 없고 감옥에 저항에 부닥치고 조롱거리가 됩니다. 참으로 믿음 좋은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10여년 동안 사울에게 쫓겨 다녔습니다. 골리앗에게 멸망당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습니다. 귀신들려 괴로움을 당한 사울 왕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시기하여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나중에는 원수의 나라 블레셋 나라에 망명하여 개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1. 우리가 영적 침체나 신앙적 회의에 빠진 원인은 무엇일까요?(1-2)

다윗도 영적 침체에 빠지고 탈진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회의를 합니다. 다윗이 왜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까?

첫째는 고통이 본인이 생각한 것보다 이해 못할 정도로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어느 때까지?(“아드 아나)”라는 말이 4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어느 때까지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질병에 걸렸는데 10년이 되어도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10년을 다녀도 집안이 좋아지는 것이 없고 사업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 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의무적이고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닙니다.

 

둘째는 오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주의 얼굴을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사울이 그렇게도 괴롭힐 때 사울을 깨닫게 하여 자신의 죄를 완전하게 회개하게 하던지 아니면 징계하여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주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것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셋째는 긍정보다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은 우리의 영혼을 말하는 “루아흐”가 아니라 생명을 말하는 “네페쉬”입니다. 사람의 전인격을 말하는 말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마음이라는 말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번민과 근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종일토록은 하루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날마다 근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번민과 근심으로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기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적으로 회의를 하고 영적 침체가 찾아 오고 탈진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현실적으로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원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원수가 자신을 칩니다. 그러면서 불의를 행하여 잘먹고 잘 사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열심히 믿어 보아도 소용이 없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를 다니는데 왜 가난하게 살고 왜 질병에 걸리고 왜 사고를 당하느냐고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떨어지고, 사업이 잘 되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 열심히 하여도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손에 잡힌 것이 없습니다.

 

2. 영적 침체나 신앙적 회의가 다가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3-4).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다윗에게 영적 침체가 오니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3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무엇이 찾아 왔습니까? 두려움이 찾아 왔습니다. 어떤 두려움입니까? 골리앗을 넘어뜨릴 때 그렇게도 담대했던 다윗에게 두려움이 찾아 온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자신만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마 다윗은 쫓겨 다니면서 어떤 질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이 질병으로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문제만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모든 일에 의욕이 없어집니다. 식욕도, 성취욕도, 성욕도, 출세욕도 다 잠이 들어 버립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늪에 빠지게 되면 믿음이 의미가 없어지고, 무력감에 사로잡힙니다. 왜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지 사명감을 잃어버리고 몸이 연약해져 잠만 자고 싶고 활력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집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이 없어집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고 성경이 읽기 싫고 예배드릴 때 영적 기쁨이 없고 지루합니다. 기도하기가 싫습니다. 조그마한 서운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고 찬양을 드려도 기쁨과 환희가 없습니다. 전도하는 것이 짜증스럽고 신앙생활에 활기가 없고 재미가 없습니다. 헌신의 마음이 없어집니다.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는 일에 게을러집니다. 경건생활에 관심이 없어집니다.

 

둘째는 원수들이 승리를 자랑하며 떠벌릴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정당하였다고 떠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지 않고 살도 잘 먹고 잘만 산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면 좋은 것 100보다 안 좋은 것 1을 보고 그것에 집중합니다. 다윗에게 원수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충성스런 신하들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 같은 참으로 신실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픔을 함께 해 주는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2주 전에 제가 어릴 때 섬겼던 후배 장로님이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릴 때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가난한 가정에서 자녀를 잘 양육하였고 논과 밭도 많이 사서 시골에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장로님도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시골 사람들이 보면서 예수 믿고 잘 되었으니 우리도 예수를 믿자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작년에 시골 교회를 거의 혼자의 헌금으로 건축하였습니다. 이제 올 농사를 지어 사택을 건축하고 교회 차를 사드린다고 했다고 합니다. 아내 권사님이 자신의 차를 구입해 달라고 하니까 교회 차부터 먼저 사드리고 그 다음에 사주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은 장로님입니까? 그런데 오토바이 사고로 천국에 갔습니다. 아내 권사님은 믿음이 있어 하나님이 너무 일을 많이 하니까 천국에서 안식하라고 데려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염려를 하였습니다. 동내 사람들이 비난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침체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 열심히 해도 하나님이 살려 주시 않았다고 조롱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의인이 잘 못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 침체가 찾아오면 지금까지 주신 복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목회자가 말씀을 전해도 나쁘게만 해석을 하여 자신을 책망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좋았던 관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목사도 자신이 고꾸라지는 꼴 바라보고 고소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셋째는 자신의 믿음이 흔들려 대적들이 고소하게 생각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가 다가오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흔들립니다.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신 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감을 잃어버립니다. 의욕을 상실합니다.

 

3. 영적 침체나 신앙적 회의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5-6)

다윗은 영적 침체와 신앙적 회의, 탈진에서 어떻게 탈출합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다윗은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다윗은 기도합니다. 어떤 기도입니까?

여기서 “생각하사(하비타)”라는 말은 “열심히 바라보다. 주시하다. 주목하다.”하다는 말입니다. “응답하시고(아나)”는 본래는 보다는 말입니다. 원수들의 핍박으로 고통받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자신을 살펴 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영원히 잊으신 것이 아니라면 나를 생각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얼굴을 더 이상 숨기지 마시고 내게 응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하이라)”라는 말은 “빛나다 빛을 비추다”라는 말로 일차적으로 질병과 슬픔으로 흐려진 자신의 눈을 밝게 해 달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역을 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숨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눈을 밝혀 하나님의 얼굴의 생명의 빛을 보게 해 달라”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문을 떠 이 부조리한 상황을 이해하는 영적 통찰력을 달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갖 근심과 번민으로 자기 눈이 어두워졌다고 말할 만큼 힘든 다윗은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의인이 고난 받는 현장에서 마치 하나님이 침묵하고 악이 횡행하여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지 않는 것 같은 현장에서 영적으로 침체되지 않고 힘 있게 신앙생활하려면 그 상황을 정확히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고난을 보는 영적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는 피상적으로 보면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지 이유를 모습니다. 왜 신앙 좋은 사람이고 할 일 많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천국에 먼저 가는지 이유를 모릅니다. “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지? 왜 야고보 사도가 순교를 당하여야 하는지? 왜 세례 요한이 참수형을 당하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도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인데 사업이 망하고 질병에 걸리며 사고를 당하는 지 이유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이 눈이 열리면 그 고난의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도 기도할 때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영안이 열려야 고난의 이유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조리한 이유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악인이 판을 치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40년 동안 고난의 광야를 걸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적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편안히 잘 곳이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들은 왜 이 길을 40년 동안 걸어야 하느냐고 질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8장을 통해 그 이유를 명쾌하게 3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 낮추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신8:2)"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하면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사람은 겸손해지지 않습니다. 인간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답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잘되면 사람은 끝없이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교만이야 말로 인간의 최고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하면 그 때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아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구나! 인생이란 내 힘으로 살 수 없구나. 나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이구나" 광야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인간이 인간답게 되지 않습니다.

 

둘째 이유는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위해서입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들이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이유는 아이가 나중에 커서 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들지만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광야 학교를 통하여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시킵니다. 약할 때 남의 말 듣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 야곱은 30여 년,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다윗은 17여년을 광야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인격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생물학자가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나방을 관찰하였답니다. 2mm도 안되는 작은 구멍을 비집고 나온 나방은 몇 시간 뒤 어른 나방이 되었답니다. 그는 가위로 각각의 누에고치 구멍의 크기를 3mm, 4mm, 5mm 정도로 점점 넓혀주었답니다. 자세히 관찰하니 더 큰 구멍을 빠져나온 나방의 크기가 컸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더 큰 구멍에서 나온 나방들은 작은 구멍에서 나온 나방보다 성장 속도도 느렸고 날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알조차 낳지 못했다고 합니다. 작은 구멍을 통과하는 고통을 누구나 피하고 싶지만 고통을 통과해야 건강한 성장이 있습니다. 365일 내내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만 계속된다면 대지는 사막으로 변해 버립니다. 구름도 끼고 바람도 불고 비도 와야 자연이 유지되듯이 고통이 있어야 행복도 진정으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낮추시고 훈련하여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8:16)"라고 말씀하십니다. 근본적으로 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부모들이 이빨 빼는 고통을 감수하고 아이들의 이빨을 빼주는 이유는 건강한 이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세계적인 나병권위자인 폴 W. 브랜든 박사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장거리 비행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위해 신발을 벗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쪽 발뒤꿈치에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피부조직 마비가 나병의 징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더럭 겁이 났답니다. 날카로운 핀으로 마비부위를 찔렀지만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답니다. 그는 자신이 나병에 감염되었다는 생각에 온밤을 하얗게 지새웠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날카로운 핀으로 발뒤꿈치를 사정없이 찔러보았답니다. "아악!"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큰소리로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질렀답니다. 그날 이후로 브랜든 박사는 발목을 삐거나 손가락을 베어서 고통을 느낄 때면 이렇게 큰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의인이 고난을 당할 때 왜 고난을당하는 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원망도 하고 회피도 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에도 다 뜻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어야 깊은 바다 물고기도 산소가 부족하지 않아 살 수 있습니다. 천국 가면 분명하게 우리는 내가 당한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봄 여름이 있어야 가을에 열매도 맺는 것입니다. 바람이 있어야 비행기도 떠는 것이고 물이 있어야 배도 항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돌이 있어야 개울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고 레일이 구속인 것같지만 레일이 있어야 기차는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픔이 있어야 진주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큰 복이 무엇입니까? 천국의 복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복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신앙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성공을 못해도, 출세를 못해도, 부자가 안되어도, 승진을 못해도, 때로는 실패해도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눈을 열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어떻게 영적 침체에서 탈출합니까?

첫째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며 영적 침체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여기서 “사랑(헤세드)”는 “인자, 은총, 자비”라는 말로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말합니다. “의지한다”는 말은 “확실하다. 신뢰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이미 확고하게 결정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기름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해 주었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확실하게 믿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믿고 영적 침체에서 탈출하시길 바랍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명을 받았으면 그 사명 수많은 과정을 거치지만 반드시 우리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기도 응답되지 않았다고 포기하지 말고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약을 받은 후 약 17년 만에 이스라엘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난의 현장에 계시는 것입니다.

침묵이라는 소설에서 로드리고 신부도 잡혀 취조를 받게 되는데 교활한 일본인들은 '후미에'라는, 예수님상이 새겨진 동판을 나무판에 붙여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려 주는 고문을 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차마 그 '후미에'를 밟고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저주저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그러자 로드리고 신부는 통분합니다.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나는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침묵한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순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 왜 침묵합니까를 되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침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통의 현장에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주의 구원을 기뻐하며 영적 침체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그는 고난을 당할 때 마음이 근심과 번민으로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니까 주의 구원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나 돈이나 출세나 명예나 건강이나 성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그 구원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 미완료 시제로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구원의 기쁨을 계속 간직하겠다는 말입니다. 신약적 용어로 말하면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천국 백성으로 구원을 받았고 앞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아직 고통의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질병이 치유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 대적과 화해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가난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 합격하고 취업하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적 사랑에 근거하여 확고한 소망가운데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선취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음도 고통도 질병도 갈등도 없는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 땅에서 보상과 능력과 축복만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 영원한 천국에서 같이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결국 훈련받고 가는 것이 이 땅의 삶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해” 이 찬양을 정직하게 부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이 땅의 삶의 훈련입니다. “주님 한분 밖에는 아는 사람 없어요 가슴 깊이 숨어있는 주를 사랑하는 맘...주님 한분 밖에는 사랑 할이 없어요 작은 가슴 뜨거웁게 주님 피가 흘러요...나는 행복해요 사랑이 샘솟으니 이 세상 무엇이든 채우고도 남아요” 돈 있어야 하고, 권력이 있어야 하고, 남편이 있어야 하고, 아내도 있어야하고, 명예도 있어야 하고, 존경도 있어야 하고, 건강도 있어야 하고, 성공도 해야 하고 그래야 우리는 행복한 것이 우리의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 땅 살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 한 분으로 행복해 지는 신앙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스티브 세인트가 쓴 '창끝(End of Spear)'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창끝'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었습니다.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와오다니(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사로 갔다 모두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살해되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영적 침체에 빠지고 신앙의 회의론자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아내들은 남편들의 뒤를 따라 아우카족에게 들어갔습니다. 자신들의 남편을 죽인 사람들은 정성껏 섬겼습니다. 추장을 비롯한 모든 아우카족들이 이들의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부인들이 본국으로 떠날 때에 아우카족 추장이 물었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십니까?"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벳이 말했습니다. "남편들은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들이 그들을 죽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우리는 남편들이 그렇게도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엘리엇 등을 창으로 찔렀던 5명의 아우카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답니다. 그 가운데 4명은 목사가, 한 명은 전도자가 되었답니다. 아우카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답니다. 5명의 아우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 살해된 5명 선교사 가운데 한 명인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였습니다.

 

셋째는 은덕을 베푸실 여호와를 찬송함으로 영적 침체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면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원망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의를 가집니다. 심하면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떠나 버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내게 은덕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통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골이 깊으면 깊을수록 산은 높은 것입니다. 의를 행하면 주님 때문에 당한 고난은 결국 다 상급이 됩니다.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후대하시고 보상해 주시고, 은총을 주시고, 혜택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나를 관대하게 너그럽게 선하게 대해주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터키에서 순교당한 틸만의 아내 수잔나는 TV 회견에서 그들을 용서해주었습니다. 복수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듯이 “오 하나님, 저들을 용서 하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눅23:34)”라고 했습니다. 그 때 어떤 칼럼니스트는 “천명의 선교사들이 천년 동안 할 수 없었던 것을 그 한마디로 말했다”라고 신문에 썼다고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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