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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12) 모든 사람이 사명을 이루시길 원하십니다(딤후4:6-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789 추천수:5 112.168.96.71
2016-11-27 11:07:34

 

하나님의 마음(12) 모든 사람이 사명을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디모데후서 4:6-8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설계사가 자신이 설계한 교회가 설계대로 잘 지어지는지 보기 위해 건축되는 현장에 갔답니다. 인부들이 열심히 건물의 뼈대를 올리고 있었답니다. 한 인부에게 물어 보았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일하는 인부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위해 이 힘든 돌 깎는 작업을 하고 있소”라고 대답했답니다. 옆에 있던 다른 인부에게 물어보니까 “나는 부양가족 때문에 이렇게 벽돌 나르는 일을 하고 있소”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뒤쪽에서 열심히 일하는 또 다른 인부에게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주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 기쁘게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평생을 다해 인생의 성전을 짓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어떤 자세로 인생 성전을 짓고 있습니까? 어떤 일을 하는데는 크게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오직 보상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떡을 위해 노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세로 하면 노동은 고통스러운 짐이 되기 쉽습니다. 둘째는 의무 때문에 일하는 사람입니다. 부양가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의무에 매여하기 때문에 구차함 이해득실에 매이지는 않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세 번째는 사명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은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이라고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차한 보상이나 의무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합니다. 맡겨준 일을 기쁨으로 봉사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자녀를 양육하며, 직장 생활을 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할 때 어떤 자세로 하고 있습니까?
스위스의 사상가 칼 힐티(Kal Hilthey)는 "인간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다"고 했습니다.
의사이자 선교사, 아프리카 탐험가로 평생을 바친 리빙스턴은 밀림을 탐험할 때 맹수의 습격을 받아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를 따르던 조수가, "선생님 돌아가실 뻔 했죠?"라고 말했을 때 리빙스턴이 이렇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아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그것이 끝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우리 성도님들 이런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며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사명은 완수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사명을 주시고 그것을 완수하고 천국에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것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를 때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게 하고 네 자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모세에게도 민족을 해방시킬 사명을 주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성전건축의 사명을 주었고 느헤미야에게는 성곽 재건의 사명을 주었습니다. 기드온에게 민족을 구원하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에스더에게 민족을 살리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입니까?
남편을 전도하는 것입니까?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는 것입니까? 이 땅에서 돈을 많이 벌어 선한 사업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훌륭한 예술가. 정치가, 의료인, 학자가 되는 것입니까? 교회를 위하여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목사로, 장로로, 집사로, 권사로, 성도로,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아버지로, 어머니로, 아들로, 국민으로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가정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공통된 사명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명을 받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그릇"(행 9:15)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평생 사명입니다. 그는 평생 이 사명을 잊지 않고 이 사명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디아코니아”를 사명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섬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직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큰 사전을 보면 "사신이나 사절이 받든 명령, 맡겨진 임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calling(부른다)'혹은 'vocation(부른다)', 'mission(보낸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부여해 주신 것이 사명입니다. 바울은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9:17)”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부여해 준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였습니까?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을 받고 이제 마지막 순교로 생을 마칠 시점에서 부름 받은 사람으로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3가지 동사로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싸우고" "마치고" "지켰다"라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는 완료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볼 때 일관성 있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워왔다. 내가 노정을 마쳐 왔다. 내가 믿음을 지켜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록할 때가 언제입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로마 황제 네로가 로마시의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에게 돌리고 기독교인을 대대적으로 숙청할 때였습니다. 잡아서 십자가에 매달고, 화형을 시키고, 개들에게 찢기게 하고, 원형 극장에서 사자들의 밥이 되게 하고, 로마 거리의 횃불로 매달았을 때였습니다. 이미 베드로는 순교하였고 바울도 감옥에 갇혀 언제 순교할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 있을 때입니다. 이 때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유언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이 사명을 바울처럼 잘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언젠가는 이 땅을 우리도 떠날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여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악한 싸움이 아니라 선한 싸움을 싸움으로 사명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톤 칼론 아고나 에고니스마이)"라고 자신의 인생은 싸움, 전쟁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싸움(아고나)"는 고대 헬라 사회에서 운동선수들이 경기장에서 경기를 벌일 때 상황 자체를 지칭하는 것입니다(고전9:24,25) 상징적으로 사용될 때는 삶의 여정을 말합니다(히12:1).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는 삶에 있어서 정신적 갈등이나 투쟁을 말합니다(살전2:2).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인생은 끝없는 싸움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싸움이 선한 싸움인가 악한 싸움인가를 구별하는 것은 그 싸움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동기가 욕심이나 경쟁심으로 하는 것을 선한 싸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욕심과 경쟁심으로 "누가 높으냐? 누가 많이 가졌느냐? 누가 잘났느냐? 누가 크냐? 누가 많으냐? 누가 빠르냐?"라는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싸움은 이런 싸움이 아닙니다. 바울의 싸움은 자신의 부를 축척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일어선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없는 자를 무릎 꿇린 싸운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바울도 예수 믿기 전에는 그런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는 본시 유대인으로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그 당시 명문학파인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한 지금 국회와 같은 산헤드린 회원으로 신입을 받을 수 있는 자였습니다. 율법에 능통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열심히 투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싸움을 한 것입니다. 그 때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행 26:9)”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싸우는 것입니다. 스스로 옳다고 하는대로 싸우는 것입니다. 요즈음 정치인들 싸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내의 분쟁도 대부분 그런 싸움입니다. 다들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며 싸웁니다. 사사 시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오늘날 하나님이 주신 가정의 사명, 교회의 사명, 직장과 민족의 사명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기가 옳은 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다 옳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싸울 때도 다 옳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열정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후 부터는 그런 싸움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동기가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모데 전저 1:18절에서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에 따라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라고 말씀했을 때의 예언은 디모데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아 거룩한 사명을 부여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부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말씀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이룰 때 선한 그 동기와 목적이 거룩하고 선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후 어떻게 변했습니까? 크게 두 가지 동기와 목적에 사롭잡혀 사명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정오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행9:15) 영광스런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가 “주님 누구시니이까(행 22:8)” 둘째가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입니다. 이것을 붙들고 바울은 평생 선한 싸움으로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매사 삶의 현장에서 이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게 직분을 맡겨 주신 주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알고 직분을 감당하면 그 사명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판단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신지를 알면 그 사명 다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벗어나니까 동기와 목적을 잃어 버리고 자꾸 악한 싸움을 하다 인생을 마감합니다. 수없는 사람이 이 싸움에서 실패하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이것을 분명이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싸움의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사탄인 것을 확실하게 알고 선한 싸움을 싸운 것입니다.
엡6:12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때로는 광명의 천사로 때로는 우는 사자로 나타나는 사탄이 우리의 싸움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신이 싸움의 대상인 것을 알고 평생 몸부림치며 이 싸움에 승리하고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로마서 7장 21절 이하를 보면 바울의 마음에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과 동시에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하되 육신의 자아는 죄의 법을 따르기를 좋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라고 고백합니다. 육적인 것을 따르기 좋아하는 자아를 이기는 방법은 날마다 내가 죽고 주님으로 사는 것(고전 15:31)이고 성령을 쫓아 사는 것(갈 5:16∼24)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싸움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날마다 싸우는 것입니다. 사단과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이 사명을 이루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의 핵심입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인생은 실패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사명을 다 이루어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달려갈 길을 다 마침으로 사명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톤 드로몬 테텔레카)에서 달려 갈 길은 헬라 운동 경기장의 트렉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비유적으로 사람의 생애나 인생 여정 자체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행13:25; 20:24). 마치다(테텔레카)라는 말은 "마치다. 완정한다. 결론짓다"라는 뜻입니다. 즉 복음 증거 사역을 하는데 중간에 포기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다는 말입니다.

사탄은 이 사역을 막기 위하여 때로는 광풍과 바다 광야 등의 환경을 통하여 때로는 동족 유대인과 권력자 이방인을 통하여 때로는 자신의 질병과 연약함을 통하여 포기시키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4-27)"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때 어느 한 순간만 포기해버렸다면 그는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적보다 내적 적이 더 힘겨운 싸움의 대상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합니다. 설교 못한다고 비난합니다. 돈 좋아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럴 때 포기했다면 그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사명을 이루는 데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장 큰 방해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1장 15절을 보십시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부겔로와 허모게네입니다. 2장 17절을 보십시오. 후메내오와 빌레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악성 종양과 같은 말을 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합니다. 4장 10절을 보십시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버렸습니다. 4장 14절을 보십시오.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포기해 버린다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4장 14절을 보십시오. 주님게 다 맡겨 버립니다. 4장 16절을 보십시오. 다 버렸지만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는 이런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4장 19절을 보십시오.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만한 브르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오네시보로가 있었습니다. 4장 11절을 보십시오. 누가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순교한 후 모든 것을 맡길만한 영적 아들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힘없는 자신의 말을 순종하는 두기고가 있었습니다(4:12)

무엇보다 누가 있었습니까? 4장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님이 계셨습니다. 그 주님이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그 주님이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말씀을 온전히 전파하게 하고, 그 주님이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이방인에게 듣게 하시고, 그 주님이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사자의 입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4장 18절을 보십시오.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주시고 천국에 이르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 이루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주님께서 안디옥 구브로 밤빌리아. 버가,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중감에 포기하지 말고 다 이루어야 합니다.
수많은 신앙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중간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장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욕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생명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일 이년이 아닙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식이 자신을 배반하고 자신의 첩을 능멸합니다. 이방 땅에 가서 개처럼 살았습니다. 이웃집 여인을 간음하여 만천하에 폭로되었습니다. 어떻게 얼굴 내밀고 살겠습니까? 그러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이루어 성군이 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살인자로 추방됩니다. 40년간 쫓기는 인생을 삽니다. 처가살이를 합니다. 왕궁 생활에서 완전히 망하고 셋방살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시시 때때로 원망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얼마나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어느 한 순간 포기했다면 그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다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순종했는데 가뭄을 만납니다. 자기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첩을 두었다가 처절한 아픔을 앓았습니다. 자신의 생명같은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 어느 순간 포기했다면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에게 주신 사명에 집중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다 이루는 사명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우리는 믿음을 지킴으로 사명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을 지켰으니(텐 피스틴 테테레카)"라는 말은 사명을 감당하면서 믿음을 지키며 그 일을 감당했다는 말입니다. 경기에 임한 자가 경기 규칙을 준수하듯, 군인이 상관에게 충성하듯, 청지기가 자신의 주인에게 순종하듯 주의 일을 하면서 믿음으로 일평생 사역을 감당했다는 말입니다. 어떤 경우도 일관성 있게 믿음으로 사역을 했다는 말입니다. "지켰다"라는 표현은 본래 보물을 관리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라고 합니다. 믿음을 보물처럼 지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바울의 삶의 원리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믿음으로 자족하고, 믿음으로 풍요를 누리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꾸 믿음이 아닌 다른 길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디모데 후서 4장 3절을 보십시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를 못견디어 한다는 것입니다. 귀를 가리워 버리는 것입니다. 진리가 현실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3장 2절 이하를 보십시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최고 이고 자기 자랑에 빠진 사람에게 당신은 죄인이이라고 말하면 듣기 싫어합니다. 베드로가 진리를 전하니까 이를 갈고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자랑하고 교만합니다. 비방하기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들이게 진리를 전하면 못 견디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하는데 부추겨 주고 자신을 지지해 주는 스승만 두기를 좋아합니다. 진리와 비슷한 헌탄한 이야기를 따릅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명을 이루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지루함을 못 견디는 속성이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낯선 것을 탐구하는 호기심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믿음이 아닌 것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바울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억울함도 당하고 부당하게 대우받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살면 결국 우리 하나님이 알아줍니다.

8절을 보십시오.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이 땅의 삶이란 이 세상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줄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 그렇게 사랑하고 의지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날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6절에 보십시오 죽음은 떠남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새로운 출발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육체를 떠나가는 것입니다. 허무나 종말이나 소멸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만남입니다.(빌1:23) 죽음 이후에는 우리 주님을 부분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거울을 통해 봄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온전하신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찬양하던, 사모했던 그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왔던 모든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상급입니다. 바울의 삶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의로우신 재판장"이 평가해 주실 날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불의한 네로 황제에 의해 불의하게 체포되었고 로마의 법정은 그를 불의하게 단죄 하였지만, 진정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바울에게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의입니다. 세상은 불의하게 바울을 단죄했지만 세상은 불공평하게 바울을 대접했지만 의로우신 하나님이 의의 면류관으로 바울에게 상주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하늘의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7)"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 바울은 삼층천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눈이 멀었다가 눈이 뜨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감옥에 갇혔다 풀려나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무엇으로 그런 체험을 했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평생을 믿음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지금 어떤 난관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감정 내세우고, 자신의 의 내세우고, 자신의 힘 내세우며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것같고 억울한 것같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이 성공이고 믿음이 능력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길입니다. 사명은 믿음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고 모든 일을 내려놓고 천국에 갈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까지 무엇으로 사명을 완성하겠습니까? 바울은 "선한 싸움으로,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침으로, 믿음을 지킴으로"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사명을 이룰 때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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