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하나님의 마음(5) 모든 사람이 상실에서 회복되길 원합니다(욥기1:20-2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782 추천수:5 112.168.96.71
2016-10-03 07:16:00

 

하나님의 마음(5) 모든 사람이 상실에서 회복되길 원합니다
욥기1:20-22

제가 아는 목사님이 주일 11시 예배에 설교를 하는데 어느 권사님이 설교 중간에 들어왔답니다. 평소에 예배시간에 정확히 오셔서 예배드린 신실한 권사님이셨는데 왜 늦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설교를 하는데 계속 우셨답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아 우는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가시면서 권사님께 “집안에 무슨 일이 있냐?”고 인사를 하였답니다. 그러자 권사님이 “예숙이가 죽었어요.”라고 훌쩍 거리더라는 것입니다. “예숙”이는 그 권사님의 반려견 이름이었답니다. 반려견 장례를 치러주느라 예배에 늦었답니다. 우리가 살면서 사랑을 쏟고 애착을 가졌던 것들이 우리에게서 떠나면 상실로 인해 비탄에 잠기고 슬퍼집니다. 생명이나 친구나 돈이나 물건이나 지위나 건강, 직장, 신뢰, 능력이나 신분이나 자격이나 기억 등과 같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상실(喪失)이라고 합니다. 상실, 비탄, 슬픔은 학문적 정의로 “익숙한 행동방식이 변화하거나 끝나버림으로 인해 생기는 모순적인 감정”이라고 풀어놓습니다. 사랑했던 부모님이 어느 날 떠납니다. 의지했던 배우자가 어느 날 떠나버립니다. 사랑했던 애인과 해어지게 됩니다. 오랫동안 다녔던 직장을 떠납니다. 애지중지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립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교인이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 상실감에 빠져 비탄과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1. 상실의 종류
상실에는 많은 종류의 상실이 있습니다. 목회상담학 교수인 허버트 앤더슨과 케네스 미첼은 <상실과 슬픔의 치유>라는 책에서 인간이 일생동안 겪는 상실을 여섯 가지 유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의식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중요한 상실은 “물질적인 상실”입니다. 애착을 가진 물리적 대상이나 친숙한 환경에 대한 상실입니다. 손때가 묻고, 추억이 서리고, 애정이 깃든 물건을 잃었을 때 애착한 만큼 상실감도 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특별이 대체품이 없는 물질은 더욱 상실감이 깊어진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합된 외적 가치를 지닌 물건을 잃었을 때는 극심한 고통이 동반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관계의 상실”입니다. 무엇을 잃었다고 반드시 강한 고통이나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흔한 볼펜 하나 잃은 것 가지고 자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와 의미 있는 관계가 있는 것을 잃을 때 상실의 고통이 큽니다. 사람은 살면서 죽음이나, 병, 은퇴, 실직, 이민, 이혼,단교, 거부, 버림받음, 실연 등과 같은 관계상실로 큰 고통을 겪습니다. 일반적인 것을 보통 10일이면 잊어진다고 합니다. 그것을 뉴스효과라고 합니다. 뉴스라는 것은 조금 지나면 다른 파도가 밀려오기 때문에 쉽게 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의 죽음 같은 것은 큰 고통과 슬픔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보통 6개월 내지 1년 동안 슬픔에 잠기고 자식이 죽을 때는 4-5년 슬픔에 잠긴다고 합니다. 1주년마다 반복될 수 있고 2차 상실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내적 심리적 상실”입니다. 이것은 “기대와 꿈의 상실”입니다. 미래의 특별한 계획을 포기하고 꿈을 포기할 때 가지게 되는 심리적 상실로 허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합니다. 기대와 꿈의 상실은 청소년기나 성인기에 많이 일어납니다. 이 때 사람들은 기대와 꿈을 상실함과 동시에 기쁨, 자신감, 사랑, 만족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넷째는 “기능적 상실”입니다. 노화나 질병, 혹은 사고로 몸의 근육이나 신체의 일부, 신경계의 어떤 기능을 잃고 강렬한 슬픔에 잠기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역할 상실”입니다. 명퇴나 실직 등으로 자신의 지위나 역할을 상실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지위나 역할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데 명퇴나 실직은 한 순간에 그것들을 한 순간에 잃게 만들어 우울함, 죄책감, 수치심, 두려움, 무력감에 빠지게 합니다.

여섯째는 “체제의 상실”입니다. 부모나 자녀가 가족을 떠날 때 체제의 상실이 일어납니다. 공동체에서 중요한 인물이 그 공동체를 떠나면 상실감에 젖게 됩니다.

그 외에 상실의 종류에는 가족이 죽는 것 같은 구체적인 상실도 있고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같은 추상적인 상실도 있습니다. 실제 일어나지 않았지만 상상력으로 상실하는 가상적인 상실도 있고, 상실할 것으로 생각하여 위협을 느끼는 위협적인 상실도 있습니다. 피할 수 있는 상실과 피할 수 없는 상실도 있고, 일시적 상실과 영구적 상실도 있습니다. 실제적 상실과 상상속 상실도 있고, 예견한 상실과 예견하지 못한 상실도 있습니다. 어떤 상실이든 애착의 대상, 획득한 대상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2. 상실의 극복
상실은 누구나 다 겪는 인생의 필수적 과정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크고 작은 상실을 당하면서 인생의 과정을 거쳐 갑니다. 인간이 당하는 위기를 두 가지로 나누어 발달위기와 사건위기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발달 위기는 부모님의 돌아가심같이 누구나 발달과정에서 다 겪는 위기입니다. 사랑했던 부부가 해어지는 것도, 사랑했던 가족과 해어지는 것도, 애지 중지하던 물건과 작별하는 것도 시간의 차이이지 누구나 다 겪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상실의 과정을 잘 극복하고 회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상실감을 잘 극복하지 못하면 평생 엄청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우울증에 빠지는 수가 많고, 또 심신의 저항력이 약해짐으로써 여러 가지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감정에 의해 몸은 반응이 달라지는 데 상실감이 해소되지 못하고 기억에 굳어지면 각종 심리적인 질병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치유받지 못한 마음 상처로 일에 의욕을 잃어버리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잘 극복하면 상실은 창조적 에너지가 되어 인격을 성숙시키고 믿음이 깊어지고, 인간 이해의 폭을 넓혀주어 삶을 풍요롭게 하며 삶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상실의 아픔을 잘 극복하고 회복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욥의 상실과 회복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은 상실의 아픔을 애도의 과정을 통해 건강하게 정화시키길 원하십니다.
욥은 남들이 다 부러울 정도로 참으로 부요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정직한 사람입니다(1:1).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정적으로 7남 3녀를 둔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2). 거기다가 그는 부자였습니다(1:3). 양이 7000마리, 약대가 3000 마리, 소가 500 겨리, 암나귀가 500 겨리가 있는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자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에는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부자일 뿐 아니라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5).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자식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인 것을 하나님도 인정해 주었습니다(8) 그의 성품(1절), 가족사항(2절), 재산 정도(3절), 가정의 질서(4절), 종교적 경건성(5절) 등에 있어서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에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1:15) 스바 사람이 쳐들어와 종을 죽였습니다. 갈대아 사람 세 패거리가 약대를 약탈해 가고, 종들은 죽였습니다. 욥의 자녀들이 맏아들 집에서 잔치를 하였는데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이 집을 무너뜨려 다 죽었습니다. 자신은 악창에 걸렸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습니다. 하루아침에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10명의 자녀를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재산을 잃었습니다. 건강을 잃었습니다. 기대와 꿈도 잃었습니다. 물질적인 상실, 관계의 상실, 내적 심리적 상실, 기능적 상실, 역할 상실, 체제의 상실 등 여섯가지 상실을 다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상실 앞에 욥의 첫 반응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밉니다. 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애도하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죽었는데도, 자식이 죽었는데도 천국에 갔는데 울 필요가 없다고 꾹 참는 분들이 있습니다. 통곡하여 울면 “목사가 되어서, 장로가 되어서, 권사가 되어서.. 천국 환송식에 왜 통곡하냐...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실을 건강하게 푸는 방법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것의 표준이 아닙니다. 성경에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너무 지나친 슬픔을 자제하라는 말씀이지 애통하는 것을 금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라의 죽음 앞에서 아브라함은 애통하며 슬피 울었습니다(창23:2) 야곱은 아들 요셉을 잃어 버렸을 때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오래도록 애통하여 슬피 울었습니다(창37:34) 요셉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7일 동안 애통해하며 슬피 울었습니다(창50:10) 다윗도 아들이 건강을 상실하고 병들었을 때 금식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습니다(요 11:35) 감정은 도덕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옮겨질 때 평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물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슬픔을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슬픔과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슬픔을 애써 외면사고 도망갈 필요도 없습니다.
피가 흐르지 못하면 응혈이 되듯이, 감정이 표현되지 못하고 억제되거나 안으로 눌려 쌓여지게 될 때 정신적 육체적 질병이 발생하게 됩니다. “사람이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할 때 비통하게 울 필요성이 그대로 정신 기관에 남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애도란 정상적인 반응으로 충분히 눈물을 흘리다보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치유가 됩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났는데도 병적 슬픔을 가지고 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욥이 상실을 극복하고 일어나는 애도의 과정을 보십시오.
욥이 어떻게 자신의 상실의 슬픔을 표현하는가를 보십시오. 3장에 보십시오. 1절을 보십시오. 모태에 대하여 부정합니다. 자기의 생일을 저주합니다(1-10). 죽고 사는 것이 주님께 있다고 인정하던 사람이 죽음의 늦어짐에 대하여 후회합니다(11-19). 주님의 주권에 대하여 인정하던 사람이 생명을 주신 분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20-21). 하나님을 찬양하던 사람이 탄식합니다(22-26) 낮과 밤을 저주합니다(3-10절). 죽기를 바랍니다(11-19절). "어찌하여"라고 탄식합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갈망합니다(20-26절). 죽음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평화가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도 없다. 두려움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용의 친구들처럼 욥의 범죄라고 정죄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욥은 상실 앞에서 위선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좋은 사람처럼 위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자신의 슬픈 감정을 쏟다내 놓는 것입니다.
퀴블러스는 상실의 아픔을 건강하게 해소하려면 슬픔에 충분한 시간을 배려하라고 합니다. 분노가 솟구치면 소리 내어 분노하고, 판단하지 말고 오직 분노를 그대로 느끼라고 합니다. 분노는 치유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쏟아내야 할 눈물이 충분히 빠져나오기 전에 울음을 억지로 멈추는 일을 피하라고 합니다.

파크스(Parkes)는 비정상적인 애도의 상태를 “만성적인 애도, 억제된 애도, 지연된 애도”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만성적인 슬픔이란 슬픔이 비정상적으로 연장 강화된 형태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애도의 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보는데, 고인이 죽은 지 1년이 지나도 여전히 상실의 고통에 압도된 상태로 살아간다면 비정상적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억제된 슬픔이란 슬픔의 지속적으로 억제되는 것을 말합니다. 슬픔이 지속적으로 억제되면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게 되되고, 알코올 중독,약물 남용,문란한 성관계, 만성적 질병, 자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지연된 슬픔은 몇 주에서 몇 년의 일정한 기간이 지난 이후 슬픔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이라화’(mummification)가 여기에 속한데 10년이 지났는데도 고인의 방을 살아 있을 당시의 상태대로 보전하며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 틀림없다는 공상에 빠져 미이라처럼 죽기 전에 쓰던 모든 것을 간직하고 진열해 놓는 것입니다. 이는 슬픔이 너무 큰 나머지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회피하려는 모습으로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가질 수 없고 과거에 억매인 삶을 살면서 우울증과 신체적 질병으로 고통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상실이 현재와 미래의 삶을 노예로 만들지 못하도록 충분히 슬퍼하는 것을 하나님은 허용하고 있습니다. 상실의 아픔을 눈물로 씻어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상실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인생의 필수적 과정으로 수용하고 상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길 원하십니다.
욥의 두 번째 반응을 보십시오. 21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지금의 상실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상실된 현재의 상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2장 1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욥이 고통스런 질병으로 재 가운데 앉아 질그릇으로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본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이 때 욥이 한 말입니다. 아내의 어리석음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상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상실은 불가피성이 있습니다. 모호성이 있습니다. 상실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과 나쁜 것, 사랑과 증오, 선과 악, 주는 것과 받는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앓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한편으로는 슬프지만 한편으로 안도와 후련함도 있는 것입니다. 상실은 계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에서 생후 5-6년 경험이 성격의 일부가 되어 성인이 되어 유아기에 겪은 대상 상실의 경험과 관련하여 성인기에 상실을 통한 슬픔의 강도와 복잡성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사람은 일평생 40-50번은 크고 작은 의미 있는 상실을 당하고 산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여러 가지 획득과 상실을 경험합니다. 애착과 분리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상실은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하는 근원적인 경험인 것입니다. 어떤 상실이든지 부정하지 말고 결국 수용해야 합니다. 
정신의학자이며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 직전의 사람들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를 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이라는 5단계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으면 먼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병원진단이 잘못되었다고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병원에서도 같은 진단이 내려지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라고 분노를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 병을 낫게 해 주면 착한 일을 하겠다고 타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치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좋아지지 않으면 절망하고 시간이 지나면 절망을 극복하고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실도 역시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가 중풍으로 9년간 마비된 몸으로 힘겹게 살다가 죽음 직전에 남긴 유고작 『상실 수업』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겪는 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 등의 다섯 단계를 상실의 아픔을 겪는 사람도 거쳐 간다고 말합니다. 상실을 당하면 첫 단계는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상실의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그 다음은 의료관리 체제나, 삶, 하나님에 대해 분노합니다. 이 단계가 지나면 사랑한 이를 살리기 위해 타협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사랑한 이 대신 자신을 죽게 해달라고, 고통 없이 죽게 해달라고 타협을 한다고 합니다. 다음 단계로 절망하지만 결국 수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남녀 간에 사랑했다가 이별을 하여도 이런 과정을 대부분 거쳐 갑니다. 어떤 대상을 상실할 때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쳐 갑니다. 사람에 따라 달라 순차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평온했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고, 타협하다가도 어느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온 상실을 하나님의 섭리로 수용할 때 그 상실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수용하지 못하고 상실의 수렁에 빠져 우울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수용할 때 어떻게 수용하여야 하겠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욥은 슬픔을 표현하며 슬픔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무릎 꿇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슬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온 것입니다.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상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내용이 욥기서에는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상실을 아픔을 앓고 있을 때 그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답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울부짖으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 사무엘을 얻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건강을 상실하였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건강을 회복하고 아들까지 얻고 적들을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상실의 아픔을 앓았을 때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모세가 상실의 아픔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어떤 상실일지라도 그 상실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으로 수용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로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은 상실의 아픔을 창조적으로 해결하여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욥은 상실의 아픔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얼마나 상실을 아픔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키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일은 자식을 잃은 일, 재물을 잃은 일, 건강을 잃은 일 등 모든 상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사고는 일시적 상실입니다. 그런데 그 사고로 인한 상실을 영구적 상실로 만들어 버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다면 상실을 파괴적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상실로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이지선 자매는 자동차 사고로 인하여 아름다운 외모를 상실했지만 그것을 파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해결하여 유학을 가 학위를 받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희망 강사로 활동하는 것을 봅니다. 교회 다니다 자존심을 상실하고, 직분을 상실했다고 해서 하나님도 떠나버리고 깊은 죄악의 수렁으로 빠진다면 상실을 파괴적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상실의 슬픔을 이기려고 술에 중독되고 약물과 도박이나 오락에 중독된다면 그것 역시 상실을 파괴적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상실로 인해 그것을 얻은 대상자를 비방하고 늘 원망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산다면 그것 역시 파괴적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상실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 에너지가 파괴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창조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상실의 에너지가 파괴적으로 작용하면 견디기 힘든 상실감으로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인생을 파괴적으로 마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상실의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면 상실감을 극복하고 인류에 많은 업적을 남겨 놓게 됩니다. 폴 투르니에는 "슬픔이 크면 클수록 슬픔이 생산하는 창조적 에너지도 커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제네바의 피에르 렌취니크 박사는「의학과 위생학」지에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라는 논문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그는 세계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정치가들의 전기를 읽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모두가 고아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답니다.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 황제, 프랑스의 루이 14세 왕,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조지 워싱턴, 세계 정복을 꿈꾸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해상을 장악함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는 기초를 놓았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던 골다 메이어,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히틀러, 공산주의를 태동케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던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 프랑스의 유명한 정치가 비스마르크 수상과 드골 장군 등, 300여 명의 인물들이 고아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공자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루소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데카르트는 한 살 때, 파스칼은 세 살 때 각기 어머니를 잃었다고 합니다. 창조적인 예술가들 가운데 고아의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생아였고 바흐는 고아였습니다. 루소, 사르트르, 몰리에르, 라신, 스탕달, 보들레르, 카뮈, 조르주 상드, 키플링, 에드가 엘런 포우, 단테, 알렉상드르 뒤마, 톨스토이, 볼테르, 바이런,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 등도 모두 고아였답니다. 이들은 상실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인생 수업>에서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 버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상실로 인해 현재와 미래의 삶이 파괴적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구체적인 상실이 있을 때 누구나 상실 앞에 아파하고 고통하며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상실의 노예가 되어 어제의 나를 놓아 보내지 못하고 인생을 우울의 수렁으로 끌고 갈 필요는 없습니다.
상실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잃어버리지 않으면 소중함도 모르며, 화려한 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빗물에 젖으며 만개하는 것입니다.

상실을 창조적으로 해결하여 회복하기 위해서는
(1) 상실이 있을 때 자책하며 죄의식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욥은 친구들이 죄 때문에 그런 상실이 왔다고 회개하라고 했지만 욥은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상실 때문에 자책하며 괴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상실의 과정을 통해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요셉도 수많은 상실의 당했지만 그것은 연단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전 1:7)"

(2) 상실이 있을 때 인간은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욥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까
38장에서 시작하여 41장까지의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이런 말씀뿐입니다. "네가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무지개가 어떻게 뜨는지 아는냐 산야이 새끼나는 데를 아느냐?" 욥기에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평이 100개 이상 나옵니다. "언제까지, 어찌하여" 누구나 상실을 당하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상실을 아픔을 가지게 되면 그런 상황을 허용하신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하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제하신다면 왜 암세포가 퍼져가도록 허용하시고, 자동차가 충돌하도록 허용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무력한 분이어서 모든 것을 통제하지 못하시거나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우주의 가학자”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욥에게 하나님은 능력의 한계를 깨달아야 합니다. 상실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는 메가폰입니다. 상실의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않습니다.
인식의 한계를 깨닫게 합니다. 모세의 상실, 아브라함의 상실, 스데반의 상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상실에는 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상실의 아픔을 거친 후 욥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42:1-6을 보십시오. 귀로 듣고 알았던 하나님을 실제 상실이라는 삶의 경험을 통해 눈으로 보고 체험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 42:5)라고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실을 통하여 우리의 능력의 한계, 인식의 한계를 깨닫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실존적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상실 속에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통해 슬픔을 통한 성장을 깨달았습니다. 
교통사고로 아내와 어머니와 딸을 한꺼번에 잃은 제럴드 싯처 교수는 상실을 통한 변화된 자신을 ‘나쁜 경험을 통해 탄생한 복된 결과“라고 표현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은 상실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상실을 통해 인간과 삶, 오늘의 소중함,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임재에 대한 깊을 ’통찰‘을 주십니다. 상실을 통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인간의 삶엔 슬픔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상실의 슬픔을 통해 인간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되고 정직한 마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만납니다. 상실의 고통 앞에서 욥처럼 이해할 수 없지만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상실을 통해 슬픔을 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게 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상실의 슬픔을 통해 애통하는 자들과 함께 동참하게 되고 공동체 내에서 슬픔을 공유함으로써 슬픔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성숙하게 됩니다. 상실의 슬픔을 통해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신의 약함을 통해 완전함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로 인해 마지막 날에 누릴 영원한 삶을 소망하게 됩니다.

(3) 상실이 있을 때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온전히 회복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던 욥입니다. 그러나 잃지 않은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42:10-17). 우리가 이 땅에서 회복되지 않는다고 해도 상실의 아픔이 천국에서 온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운 사람들 만나 죽음도 눈물도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세상이 반드시 올 줄 믿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다.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상실의 아픔을 품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거절, 멸시, 갖은 수모를 당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찔림과 상함과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상실의 아픔 속에서 고백하는 욥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 19:25)"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상실에 동참하시는 예수님을 모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의 상실의 아픔에 멀리 떠나 있거나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상처의 아픔 한 가운데 하나님은 동참하시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모리아 산에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를 영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상실의 아픔은 십자가에 비하면 큰 것이 아닙니다. 내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하시기 위해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상실의 아픔을 다 감당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믿습니까?

우리는 진정 상실로부터 치유되고 회복되고 자유하려면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실 앞에서도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회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노년에 감옥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자신을 떠나 버렸습니다. 심각한 관계의 상실감에 빠져있을 법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고백하며 상실의 아픔을 극복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모든 것은 다 상실할 때가 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진정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을 때 다니엘의 세친구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이것이 바로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신앙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상실하는 위기를 겪으면서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라고 고백한 하박국의 고백처럼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해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삶 변화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을 때 상실로부터 완전한 치유와 회복,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상실의 아픔에서 회복되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상실의 아픔을 애도의 과정을 통해 건강하게 정화시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상실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인생의 필수적 과정으로 수용하고 상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상실의 아픔을 창조적으로 해결하여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10.2.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