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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4) 모든 사람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 원합니다(히12:1-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312 추천수:5 112.168.96.71
2016-09-25 07:06:32

 

하나님의 마음(4) 모든 사람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 원합니다
히브리서12:1-3

어느 시대든 변절자는 있습니다. 적을 도와준 사람. 배신자를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노르웨이를 점령한 독일의 나치당에 협조했던 노르웨이 육군 장교인 퀴슬링(Quisling)의 이름을 따서 퀴슬링이라고 합니다. 다윈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진화되었다고 주장할 때 신부인 찰스 킹즐리는 다윈을 도와 진화론을 주장했습니다. 변절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12제자 중에 가룟 유다도 결정적인 순간에 스승을 인신매매한 변절자입니다. 일곱 집사님 중에 이단이 된 니골라도 이단의 두목이 되어 교회를 어지럽힌 변절자입니다.  개인적 분풀이로 암논을 죽이고 아버지의 미움을 받을 때 백성들의 마음을 다윗으로부터 빼앗아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도 변절자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라고 말합니다. 선한 양심, 청결한 양심이 아닙니다. 악한 양심, 더러운 양심, 약한 양심이 아닙니다. 구원 가능성이 차단된 사탄의 종이 된 양심의 소유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히브리서 6:4-6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는 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교회에서 가장 충성된 자처럼 위장하며 자기 욕심을 위해 교회를 죽이는 변절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믿는 척 사면서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죽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서 꼭 승리하여 천국에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자 존 뉴턴이 한 말입니다. 우리는 천국 가면 세 가지로 놀란다고 합니다. 하나는 꼭 천국에 올 것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다음은 천국에 도저히 갈 수 없어 보였던 이들이 버젓이 천국에 와 있다는 것에 놀라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이 천국에 있어서 놀란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의 경주를 잘 완주하여 영원한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잘했다 충성된 종이라는 말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경주를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겠습니까?

1.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려면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를 바라보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시선을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하면 믿음의 경주에서 중간에 포기해 버립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한 모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요(아르케곤)라는 말은 “시작자, 근원자,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온전케(텔레이오텐)”라는 말은 “완전한 자, 성취자”라는 말입니다. 즉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라보자(아포론테스)”라는 말은 “주목하다 시선을 고정하다”라는 말입니다. 문법적으로 현재분사입니다. 믿음의 창조자이시고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계속 지속적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주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최대 전략을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것입니다. 핍박과 유혹을 통해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네로 같은 사람을 통해 심각한 핍박을 가함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시선을 주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서를 받는 사람들은 네로 황제로부터 심각한 핍박과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고문을 당했습니다. 사자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형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10:33-34; 11:36-38).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히10:32-34) 박해가 계속되자(12:4) 세상 권력을 보면서 믿음의 경주를 하는 신앙인들이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중도에 신앙을 포기하고 배교하는 배교자들이 생겼습니다(3:12) 말씀 배우기를 싫어했습니다(5:12). 공적 예배에 잘 모이지 않았습니다(10:25).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12:12). 불건전한 교리에 현혹되었습니다(13:9)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면 이익도 편리도 기쁨도 없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다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핍박에 넘어갑니다. 무엇인가 잘 될 줄 알고 교회에 나왔는데 별로 좋아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 같고, 물질에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더 복잡해지고 갈등이 생기는 것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하지 않고 세상에 시선을 집중하게 됩니다. 이익에, 편리에, 기쁨에 시선을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는 세상에 시선을 집중하면 영원한 만족과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송창식씨가 노래하지 않아요.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고래사냥을 해보아도 남는 것은 허무만 남는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통해 알려 주고 있지 않아요. 큰 청새치를 잡지만 배가 그 고기를 끄는 것이 아니라 고기가 배를 끌어갑니다. 힘겹게 고기를 매달고 높은 가격에 팔릴 기대를 하고 항구로 돌아오지만 상어들이 다 먹어 버리고 뼈만 남지 않아요. 고기에 시선을 집중했지만 허무만 남는 것입니다.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헤밍웨이는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 펑 뚫린 가슴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결국 인생의 끝자락엔 공허와 후회가 남는 것입니다. 하비콕스(Harvey Cox)의 저서 '예수 하버드에 오다(When Jesus Came to Havard)'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버드는 본래 목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대학이었으나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점점 종교적 색채를 벗어버렸습니다. 세계적 명문대학의 자리에 올랐지만 커리큘럼이나 카탈로그에서 예수 이름을 빼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하버드 대학 졸업생들이 온갖 범죄에 연루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80년대부터 하버드 대학에 윤리적 사유(Moral Reasoning)라는 과목을 신설하게 되었고 하비콕스가 강의하였습니다. 그때 강의 하였던 내용이 바로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예수 없는 하버드가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니 다시 예수를 좇아가야 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역사 속에,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이 빠져 버리면 앙꼬 없는 찐빵에 불과합니다. 기름 없는 차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가시밭의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세상에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괴롭고 허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의기소침하고 욕심의 노예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사람 바라보며 실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참 안식과 만족이 있습니다. 세상 바라보며 허무에 사로잡히지 말고 참 만족을 주시는 주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연약한 나를 바라보지 않고 강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변질되기 쉬운 나를 바라보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족한 나를 바라보지 않고 완전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넘어지기 쉬운 나를 바라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님만 바라봅니다. 예수님만 예수님만 언제나 바라봅니다.”
베드로가 폭풍 가운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폭풍을 바라보았을 때 빠지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결국 두려워하고 우리가 고정한 것의 노예가 되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중도 포기하는 사람은 한눈을 팔다 그러는 것입니다. 못질하면서 망치로 손을 치는 사람은 못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2.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려면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경주에서 이기려면 벗어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벗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2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무거운 것(오그콘)”은 경주하는데 방해되는 외부적 요인으로 지나친 몸무게나 귀찮은 짐 보따리, 경주를 방해하는 옷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각종 달리는데 방해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할 때 경주자의 주의를 흩어지게 하고 집중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게 하는 외적인 장애물은 때로는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핍박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때는 광명의 천사처럼 다가오는 유혹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핍박은 달리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유혹은 잘 달릴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것같은데 방향을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조그마한 어려움이 다가와도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가난해도 참 강한 것같았는데 요즈음은 풍요로운데 참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일 약 1,100여 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매일 약 40여명이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37분 당 1명씩 10년 넘게 자살률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대졸신입사원 4명 중 1명, 즉 25%가 1년 이내에 중도 포기한다고 합니다. 새해 89% 정도가 계획을 세우지만 62%가 1개월 안에 중도포기하고 5명중 1명은 시작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통 12%만 연말이 되어도 중도포기하지 않고 새해 결심을 지킨다고 합니다. 쉽게 학업을 포기하고, 쉽게 취업을 포기하며, 쉽게 결혼을 포기하고, 집사는 것 포기하고, 출산도 포기 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믿음의 경주에서 중도 중단 유혹을 극복해야 합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이유를 의지의 박약 때문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변화의 시작, 하루 1%>의 저자 이인규 박사는 그의 책에서 액션플랜의 부재 때문에 중도에 포기한다는 말합니다. 그는 목표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실행 경로를 찾는 액션플랜을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실험을 해보니까 액션 플랜을 만들면 계획한 것을 중도포기하지 않고 성공하는 확률이 3배나 높았다고 합니다. 결심이나 목표를 ‘if ... then’ 가정문으로 바꾸면 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아침 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면 “알람이 울리면 뻘떡 일어나서 운동화를 신고 골목을 한 바퀴 돈다.”라고 바꾸면 된다고 합니다. 24시간 중 단 15분, 하루의 1%만 달라진다면 누구라도 인생의 성공을 맛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는 액션플랜으로 만족하지 말고 백업플랜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돌발 상황을 예상하고 플랜 B를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금주를 결심했다 해도 부서 회식같은 돌발 상황이 다가오는데 ‘회식 자리에 참석하되 약을 먹는다는 핑계로 술을 거절하면 된다’라는 식의 백업플랜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미래 대비책을 마련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고 합니다. 이시다 준은 그의 책 < 끈기의 기술 >에서 행동과학을 토대로 목표달성을 둘러싼 우리의 행동을 목표행동, 부족행동, 과잉행동, 라이벌 행동 등으로 분류합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려면 부족행동은 늘리되, 과잉행동은 줄이고, 목표달성을 방해하는 라이벌 행동은 원천봉쇄할 수 있는 환경조건을 만들기 위한 '행동계약서'를 작성하라고 합니다. 핵심은 단 두 가지입니다. 성취를 위한 행동은 늘리고 중도 포기를 하게 하는 행동은 줄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두 가지만 철저하게 실행한다면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려면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것들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려고 하는데 맨날 교회 비판하고 목회자 비난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가까이 하면 믿음의 경주 완주하지 못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는 죄의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 “얽매이기 쉬운”이라는 말은 “쉽게 얽어매는”, “달라붙는”이라는 말입니다. 경주를 방해하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죄는 우리를 쉽게 얽어맵니다. 단단히 밀착하여 옭아맵니다. 죄는 믿음의 경주에서는 거추장스런 것으로 쉽게 달라붙어 옭아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쉽게 부정적인 것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온 연못을 흐리게 만든다는 말처럼 한 방울 검은 색이 맑은 물을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너무 쉽게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게 됩니다. 개인마다 빠지기 쉬운 죄가 있습니다. 성격적 결함이 있습니다. 쉬게 저지르는 죄가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습관이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방해되는 생각, 성질, 행동, 습관 등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경주에서 탈락하게 하거나 좌절케 합니다. 젊은이에게 쾌락이 될 수 있습니다. 중년에게는 명예와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노년에게는 돈에 대한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달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는 것들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게한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토를 떠났으나 아비를 떠나지 못하고 국경도시인 하란에서 머물렀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죽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후 하나님 또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절) 그 말씀을 듣고 75세에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을 데리고 하란을 떠납니다. 아들이 없은 그가 친척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결국 롯을 떠나지 못하여 땅을 놓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것으로 롯과 헤어집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죄를 반복하여 저지릅니다. 그의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게 하는 발목을 잡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는 죄입니다. 결국 아들 이삭을 바치게 함으로 온전한 믿음의 경주를 하게 만듭니다. 야곱은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것이 욕심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삶으로 통해 그것을 정리하게 하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게 합니다. 노아는 술취함이었습니다. 모세는 분노입니다. 분노를 참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고 도망자가 됩니다. 결국 마지막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 그 분노입니다. 삼손은 음욕입니다. 다윗도 솔로몬도 음욕입니다. 요나는 편협한 애국심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감하게 던져 버려야 합니다.
창세기 35장에 보면 야곱은 이방 신상(神像)을 과감하게 버려버리고 완주하였습니다.
늦더라고,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누가 비난하고 공격하여도, 어떤 유혹과 어떤 난관이 다가와도 중도에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도, 모세도, 에스더도, 욥도, 바울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장인 사울의 위협도, 자신의 간음도, 아들의 반역도, 백성의 비난도 극복하고 성군이 되었습니다.

3.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려면 인내로서 달려가야 합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경주하기는 경주하되 무엇으로 경주하라고 말씀합니까? “인내”로써 경주하라고 말씀합니다. “인내를 통해, 인내와 함께”라는 뜻입니다. 인내는 완주의 필수요소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시기나 다툼, 자랑이나 오기나 증오심나 복수심, 공명심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인내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인내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한과 연약성이 있습니다.
이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심각한 박해와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유대교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 오랫동안 믿었던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치광이 같은 네로가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고문을 당했습니다. 사자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10:33-34; 11:36-38).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히10:32-34) 그 때 믿음이 확실한 사람들은 기쁨으로 그 고난을 감수(10:34)하였습니다. 그러러 박해가 계속되자(12:4) 교회 내의 신앙인들이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불신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3:12)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말씀의 초보에 머물렀습니다(5:12). 공적 예배에 잘 모이지 않았습니다(10:25).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12:12). 불건전한 교리에 현혹되었습니다(13:9) 전반적으로 신앙이 침체되었고 세상과 타협하는 자도 있었고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의 경주를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인내로 완주할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 끝까지 완주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참고 견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려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참으신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참는 것”은 한 번 참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으로 제1 완료 분사로 죄인들에 의한 지속적인 적대 행위를 계속 참았다는 말입니다. 인내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고난과 핍박의 현장에서 모든 고난과 핍박을 이기고 인류구원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신중하고 심사숙고하여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환난과 고난 가운데 위기를 극복하고 신앙의 완주를 하려면 참고 이기신 예수님의 삶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변절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예수님을 생각하면 변절하지 않고 순교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민 90%이상이 예수님을 믿는 섬이 있습니다. 천사의 섬이라 불리워지는 전남에 있는 증도입니다. 현재 2200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이지만 11개의 교회가 세워져있답니다. 이 작은 섬에서 김준곤 목사, 정태기 목사, 이만신 목사, 이성봉 목사 등 100여명의 목회자가 배출되었답니다. 그 씨앗은 순교한 문준경 전도사님이라고 합니다. 17살 나이 결혼했지만 남편은 신혼초부터 집을 나가 소실을 얻어 딴 살림을 차렸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만 생각하며 모진 고난을 다 참고 예수님 전했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일제의 강점기 때도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했답니다. 얼마나 전도를 했는지 고무신이 1년 동안 무려 아홉켤레나 닳아 없어졌답니다. 만 40세에 성경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무려 11개 교회를 세워 오늘까지 오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때로는 의사로, 때로는 간호사로, 때로는 산파로, 때로는 유모로, 때로는 우편배달부로 교인들을 위해 무엇이든 봉사하고 심부름 하는 역할을 도맡았답니다. 6.25 때 문 전도사님은 공산당에 채포되었답니다. 죄목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었답니다. 전도사님은 순교의 현장에서 수양딸인 백정희 전도사를 살려달라고 부탁한 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총탄세례를 받고 59세에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영광 염산교회는 6.25때 공산당에 의해 77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야월교회는 전교인이 65명이 순교당했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변절되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였습니다. 공산당들이 예배당에 불을 질러도 새끼줄로 온 몸을 꽁꽁 묶고, 돌맹이를 목에 메달아 교회 앞에 있는 바닷가로 밀어 넣어도 아버지와 아들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격려하며 변절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전교인 65명이 수장되거나 몰매를 맞고 대창에 찔려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이들은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끝까지 '주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전도하며 찬송을 부르며 순교했다고 합니다.
어떤 어려움도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면 넉넉히 인내의 강을 건너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참았습니까?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입니다. “거역한 일(안틸로기안)”이란 반박하고, 논쟁하고, 적의를 가지고 적대행위를 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대적자들이 예수님께 행한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엇을 참았습니까? “십자가를 참으로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 와보라고 조롱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계속 쫓아다니며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하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가족들도 미쳤다고 하면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에게 수없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았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조금만 자존심 상한 말을 들어도 참지 못하고 믿음의 완주를 하지 못하고 원수시하고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떠나버리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완전히 자존심이 뭉개지고, 옷을 벗김 당하는 수치를 당하고 만인들 앞에서 조롱을 당했는데도 참고 견디며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완주하였습니다. 채찍을 통해 주어진 가혹하고 잔인한 고통을 참았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움당하고, 옆구리에 창이 찍히는 고통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십자가의 조롱과 멸시와 수모를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권위가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거부하고 반항하는 것을 참았습니다. 모욕을 당할 때 끝까지 참고 구속사를 완주하였습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비교해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당할 때 예수님이 당한 일을 비교하며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참으셨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지상에서 얻는 기쁨 대신에 하늘에서 얻을 더 큰 기쁨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고 인내했다는 말씀입니다. 개의치 않았다는 말은 무시했다는 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피곤하여 낙심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낙심의 의미는 "바라던 일이 이루 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진다" 입니다. 낙심에 감염되면 풀이 눕는 것처럼 희망을 잃어 버리고 무기력해집니다.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친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자 낙심하고 중간에 포기하고 배교하는 것입니다. 낙심이라는 것은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피곤하게 하는 것은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끝까지 가지 못하게 낙심시키고 지치게 만듭니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사람을 보고 낙심시킵니다. 지치게 만듭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사장으로, 직원으로 지치고 낙심을 시키게 만듭니다. 사탄이 쓰는 전략입니다.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쉽게 지쳐 낙심하고 신앙의 경주를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어떤 핍박과 고난도 참고 견디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여야 하겠습니다.
“1. 구주를 생간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2.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3. 참 회개 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4.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5.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자녀를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진급하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하고,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모세 40년을 인내하였습니다. 다윗 17년을 인내하였습니다. 아브라함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인내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화입니다. 영원한 승리입니다. 영원한 영광을 차지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당하고 순교의 자리를 걸어가면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경주에서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나 고난이 있다하여도 믿음의 경주에서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기 원하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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