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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다리(5) 신앙인의 희망 삼 요소(마15:21-2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457 추천수:5 112.168.96.71
2016-08-07 18:08:03

 

희망의 사다리(5) 신앙인의 희망 삼 요소
마태복음15:21-28

제가 우리 성도님들이 얼마나 희망적으로 사시고 있는지 희망 테스트를 해 보겠습니다. [희망과 함께 가라(셰인 J. 로페즈 저)]라는 책에 나온 내용으로 전세계 희망심리학 연구진이 공히 사용하는 간단한 희망 테스트입니다.(희망 검사에 쓰이는 것은 특성희망검사지, 상태희망검사지, 아동을 위한 검사지, 청소년용 희망검사지 등이 있습니다.) '절대 동의하지 않음'은 1, '완전히 동의함' 5점을 주시기 바랍니다. 주보 2면에 10문항이 나와 있습니다. 다섯 문제만 답을 써보시기 바랍니다.
1. 내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을 것이다. 1 2 3 4 5
2. 내게는 미래를 더 낫게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1 2 3 4 5
3. 미래를 생각하면 기분 좋은 일이 최소한 한 가지 이상 떠오른다. 1 2 3 4 5
4. 목표를 달성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1 2 3 4 5
5.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 장애물이 하나도 없다. 1 2 3 4 5

점수를 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희망점수입니다. 총합이 15점 이하라면 점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과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16~20점인 경우 보통이고, 21점 이상이라면 희망 수준은 아주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사고 자체가 자산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로페즈 박사는 현재 캔사스 주립대 교수이며 희망 심리학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자는 10여 년간 희망심리학을 연구하며, 사람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 위한 시도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는 “희망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바람직한 행동 및 결과 다섯가지(출석/출근, 생산성 상승, 충만한 행복감, 건강한 삶, 삶의 기간)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원동력이다”라고 말합니다. "희망은 삶의 가장 유용한 도구다"라고 말합니다.

그 책에 정신의학 교수인 스턴의 실험이 나옵니다. 진정 희망이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답니다. 참가자들에게 집에서 작성해오라고 나눠준 설문지에는 희망에 대한 간단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답니다. "미래를 희망적으로 생각합니까?" 응답자의 91퍼센트에 달하는 722명이 "예"라고 답했으며, 9퍼센트인 73명이 "아니오"라고 답했답니다. 연구를 마친 뒤 두 그룹에 속한 사람들에게 모두 감사를 표했을 뿐 연구 결과는 알려주지 않았답니다. 건강이나 기타 주의 사항도 전달하지 않았답니다. 두 그룹 모두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놔두었답니다. 연구진은 두 그룹의 대상자들을 멀리서 관찰했답니다. 1999년 8월경 연구 결과가 나왔답니다. 절망 그룹에서는 29퍼센트가 사망했고, 희망 그룹에서는 11퍼센트가 사망했답니다. 자살자는 없었고, 암으로 사망한 사람은 25명, 심장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은 25명이었는데, 이 두 질환의 사망자를 전체 대상자 대비 비율로 살펴보면 희망 그룹의 경우 2.8퍼센트, 절망 그룹의 경우 7.2퍼센트였답니다. 즉 모든 차이점을 통계적으로 통제하면, 미래가 희망적이라고 말한 사람들에 비해 절망적이라고 답한 사람들이 추적 관찰 기간 동안 사망한 확률은 2배 이상 높았답니다.

희망은 학업성취도 높여준다고 합니다. 희망이 증가되면 성적도 향상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일부 아이들이 쉐마 비전스쿨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점점 아이들이 희망 지수가 높아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희망은 스포츠 수행능력도 향상시켜 주고, 자기효능감도 높여주고, 스트레스를 잘 대처하게 할 뿐 아니라, 심리적 안녕을 준다는 것입니다. 희망수준이 높은 사람이 희망수준이 낮은 사람 보다 훨씬 자기가치감이나 원만한 대인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희망 지수가 높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잘 대처하고 장애물을 잘 극복합니다.
그는 이 중요한 희망의 3요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희망을 작동시키는 세 가지 요소는 목표, 매개, 경로라고 말을 합니다. 목표는 달성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목표’는 희망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합니다. “1등을 해야 하겠다.” “매출 600백억을 올려야 하겠다.” “올해 전도 2명을 해야 하겠다.” “우리 가정도 행복해 질 수 있다.” “우리 아이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목표가 있을 때 희망은 시작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산해운대에 피서를 간다면 부산 해운대가 목표이고 해운대까지 가는 지도가 경로입니다. 그리고 매개는 차의 기름과 같은 것입니다. 매일 우리 삶을 이끌어 가는 인지된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기름이 없으면 해운대까지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표로 유도하는 에너지입니다. 매개는 목표로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인내력이나 동기 부여하는 능력, 노력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경로는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말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계획이라는 말입니다.
<희망심리학>의 저자 챨스 릭. 스나이더(C.R.Snyder)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희망과 용서 심리학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자녀교육을 잘 시키고 싶은 분은 한 번 쯤 읽어 보아야 할 책입니다. 그는 희망의 3요소를 “목표, 주도사고(의지력), 경로사고(경로의 힘)”를 말합니다. 같은 내용입니다. 목표는 현재 A지점에서 B라는 목표 지점으로 향하는 것이라면 목표에 이르는 길인 경로사고와 그 길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동기인 주도사고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용어인데 주도사고(agency thinking)는 목표를 보고 “나는 이일을 해낼 수 있다”, “나는 포기하지 않겠어.”, “나는 노력을 할거야”와 같은 내적 언어로 표현됩니다. 경로사고(pathways thinking)는 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마음속의 계획이나 절차, 방법으로서 “나는 이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다”와 같은 말로 표현합니다.

희망이 높은 사람은 대안적인 방법들을 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대안적인 방법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희망수준은 주도사고 점수와 경로사고 점수의 합으로 나타나는데 희망을 목표를 향한 will과 way라고 표현한 Snyder는 희망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도전적이라고 합니다. 실패보다는 성공에 초점을 맞춘다고 합니다. 목표달성에 대해 가능성을 많이 지각한다고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지지망을 활용한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정서 상태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반면 희망수준이 낮은 사람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패에 초점을 맞춘다고 합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 합니다. 도와줄 사회적 지지망이 없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정서 상태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희망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낙관적이고 자기효능감도 높고 자기존중감도 높다고 합니다. 희망의 수준이 높을수록 스트레스에도 잘 대처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 수준이 높을수록 직장 생활에서 성공하고, 학업 성취도도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죽어도 천국에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어떤 형편에 처해든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려고 주신 것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형통하고 강건하시길을 원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오늘 성경에 딸이 귀신들려 절망적인 삶을 사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행복한 삶으로 도약했습니다. 이 여인의 삶의 전환을 통하여 신앙인의 희망 3요소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인으로 높은 신안 수준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우리 신앙인이 희망수준이 높은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께서는 이 일까지 이루어 주신다”라는 신앙적 목표를 설정하여야 합니다. 
희망 심리학자들은 목표는 희망이론의 출발점이며, 희망의 중심적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스나이더는 목표는 일련의 정신적 행동의 표적이며 다양한 행동을 유발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목표는 개인의 의식적 사고를 점령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어야 하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하며, 불분명해서는 안 되고 획득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목표가 너무 멀고 클 경우 잘못된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극단적으로 높은 목표를 설정하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낮은 목표를 설정하는 사람은 희망이 낮은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능력보다 좀 더 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한다고 합니다. 목표가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희망수준은 올라갑니다. 목표가 선명할수록 인생은 바르게 갑니다. 부장판사가 되어 성매매하러 가지 않습니다. 반에서 1등을 해야 하겠다는 목표가 분명하면 학교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오락실에 가지 않습니다. 희망이 낮은 사람의 특징은 구체적인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20대를 변화시키는 30일 플랜"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연구소에서 조사를 했는데 어느 사회에서나 65세 이상의 정년 퇴직자들이 3: 10: 60: 27이라는 비율로 경제 피라미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3%는 최고의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10%는 퇴직 전과 별 차이 없는 경제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60%는 간신히 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고, 27%는 자선 단체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3%는 젊었을 때부터 자신의 목표를 글로 적어 놓고 수시로 꺼내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0%는 목표는 있었으되 글로 적고 수치로 꺼내 읽는 습관은 갖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60%는 목표가 수시로 바뀐 사람들이었고, 27%는 목표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슷한 조사 결과가 예일 대학교에서도 있었습니다. 예일 대학교는 1953년도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당신은 인생 목표를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종이를 갖고 있습니까?" 3%의 학생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97%의 학생이 "아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20년 뒤에 졸업생들의 경제력을 조사한 결과 3%가 나머지 97%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더 많더라는 것입니다.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하고, 달성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명확한 목표를 문서로 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기록된 분명한 목표를 가지면 미래가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요소인 목표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단순한 목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나 상황을 근거로 한 목표가 아닙니다. 신앙인의 목표는 예수님을 근거로 한 목표입니다.
그래서 희망 수준이 높은 신앙인은 목표를 내 수준에서 잡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준으로 잡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흉악하게 귀신에 들려 고통당하고 있는 이 여인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께 나왔습니까? 딸이 고침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예수님이 고쳐줄 것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 나아갔는지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자신이 왜 예수님을 찾아 왔는지 분명한 목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소원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인 소원입니다. 적당이 포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를 드러내는데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챙피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솔직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면 가능하다고 예수님께 자신의 목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 수준이 높은 삶을 살려면 예수님께 나와 솔직하게 자신의 목표를 들러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소원을 예수님께 정직하게 알리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도 스스로 자기 기준에 맞추어 “이 문제는 예수님도 해결할 수 없어”라고 단정하고 소원을 접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못하는 것 우리 예수님이 하십니다. 인간이 못하는 것 우리 예수님이 하십니다. 과학이 못하는 것 과학의 법칙을 만드신 우리 예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어떤 불가능한 목표일지라도 예수님께 내어 놓고 아뢰는 사람이 희망 수준이 높은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최고 경영자 예수" 저자 로리 베스 존스는 연봉 3만 6천 달러를 받던 샐러리맨이었던 1985년 한 세미나에 참석하여 꿈 쓰기 기술에 관해 들었습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이내 꿈을 쓰지 않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났다는 생각을 하고 "내년에 나는 8만 6천 달러를 벌겠다"라고 적어서 욕조에 붙여 두었답니다. 1986년 그녀는 사업가가 되었고 연말에 8만 6천 달러를 상회하는 돈을 벌게 되었답니다. 루 홀츠는 20대 중반에 직장에서 해고당한 뒤 꿈을 종이에 쓰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듣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노트에 무려 107개나 되는 꿈을 적었답니다. 이 중에는 "백악관 만찬에 초대 받는 유명한 사람이 된다." "미국 최고의 축구팀 코치가 된다." 같은 당시로서는 거짓말 같은 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답니다. 후일 그는 만년 하위 팀 노틀담 축구팀의 코치가 되었고 이 팀을 2년 만에 최우수 팀으로 만들어 일약 유명 인사가 되어 백악관 만찬에 초청받게 되었답니다. 그는 107개의 꿈들 중 지금까지 95개의 꿈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모세가 민족을 해방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민족을 해방하라고 할 때 수차례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못한다고 하나님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100살에 아니를 낳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었는데도 아이를 낳게 만든 분이십니다. 홍해도 가르신 분이십니다.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희망을 접었다면 민족의 지도자 사무엘은 없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불치의 병 가운데 인간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희망을 접었다면 고침받는 기적을 체험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야 예루살렘 성벽이 다 불타 버리고 폐허화되었다고 희망을 접었다면 성벽 재건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민족이 다 죽게 되었다고 희망을 접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을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못한다고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어려움과 난관이 있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이 일까지 이루어주신다는 높은 신앙적 목표를 설정하며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정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아들은 안 된다. 나는 절대 변화되지 못한다. 내 병은 못 고친다. 내 성격 변하지 않는다. 우리 회사는 발전할 수 없다. 내남편, 내 아내, 내딸, 내 아들 어쩔 수 없다.”라는 식으로 제한하지 마시고 예수님이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목표를 설정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높은 수준의 희망을 가지는 신앙인이 신앙적인 비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목표를 설정할 때, 내의 삶의 조건, 나의 현재, 나의 재능 등만 보면 수준을 낮추지 말고 예수님께 가면 이런 것까지 이루어 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목표를 설정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희망 수준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까지 이루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면 불가능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2-3)" 희망은 품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선명하게 기록하라고 말씀합니다. 목표가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인생은 명쾌해 집니다. 목표가 구체적일수록 삶은 선명해 집니다. 목표가 있으면 희망은 잠들지 않습니다. 삶은 재미가 있고 흥분이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갈렙, 다윗, 바울, 에스더, 느헤미야 등과 같은 위대한 수준 높은 희망의 사람들은 선명한 목표를 가지고 산 사람들입니다.

2. 우리 신앙인이 희망수준이 높은 사람이 되려면 “믿음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희망 심리학자들은 희망의 두 번째 요소로 주도사고(agency thinking)를 말합니다.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will)입니다. 목표를 보고 “나는 이일을 해낼 수 있다”, “나는 포기하지 않겠어.”, “나는 노력을 할거야”와 같은 자기 다짐입니다. 목표로 유도하는 에너지인 매개입니다. 차의 기름과 같은 목표로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목표 지점까지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희망과 함께 가라(셰인 J. 로페즈 저)]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기 결석은 현재 미국의 학교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가장 큰 골칫거리라고 합니다. 미국 기업들의 직원들의 만성적인 건강 문제로 입는 손해는 1년에 1억 5,300만 달러에 이르며, 가벼운 질환이나 크고 작은 가정사로 인한 손실액 또한 수백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센트럴 워싱턴 대학 경영학 교수 제임스 애비는 자기가 몸담은 회사의 목표에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희망적인 직원은 결근하는 일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그는 팀원들을 이끌고 「포춘」이 선정한 100대 첨단 기업을 대상으로 기술자와 전기 엔지니어 100여 명을 대상으로 희망과 결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답니다. 사내 인사부와 함께 진행한 공동 작업으로 애비 교수는 참가자들 모두, 즉 희망 수준이 높은 그룹과 낮은 그룹을 모두 묶어 계산하니 한 해 48시간, 즉 6일을 병가로 썼음을 알아냈답니다. 분석 결과 엔지니어의 희망 수준이 높을수록 직장에 출근할 확률이 높았답니다. 희망 수준이 높은 사람은 12개월 동안 결근 시간이 평균 20시간 또는 3일 이하였으며, 결근이 전혀 없는 경우도 많았답니다. 희망 수준이 낮은 사람의 결근 일수는 평균 10일 이상이었답니다. 희망 수준이 낮은 직원의 잦은 병가 때문에 회사가 입은 손해액은 희망 수준이 높은 직원과 비교할 때 네 배 정도 많았답니다. 그 밖의 어떠한 직장 평가 지수(업무 만족도, 회사에 대한 충성도, 일에 대한 확신 등)도 직원의 출근 확률을 예측하는 데 희망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인자가 되지 못했답니다. 희망이란 “어떤 일을 이루고자 기대하는 바람이며,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자 밝은 전망”으로 희망 있는 사람이 생산성도 높고, 행복감 뿐 아니라 건강한 삶도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한 신념이나 의지이겠습니까? 신념과 의지를 뛰어 넘는 믿음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희망의 두 번째 요소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미래의 역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들은 내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신념입니다. 우리는 자기 신념을 뛰어 넘는 예수님께서 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목표를 붙들어야 합니다.
이 여인이 소원을 이룬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이 목표를 성취하게 한 것입니다. 희망지수가 높은 사람은 큰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의 크기만큼 희망의 크기는 커지는 것이고 믿음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희망지수가 높은 삶을 살려면 큰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한계 상황을 뛰어 넘게 만듭니다. 이 여인은 믿음을 가질만한 조건을 가진 여인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헬라인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마가복음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여인이라는 말입니다. 혈통적으로 믿음을 가질 만한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을 가질 만한 조건이 없는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 만한 이유가 없는 여인입니다(22, 25, 27).
그런데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주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는 존칭어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인간 편에서 보면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속에서 절박성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 앞에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문제로 말미암아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믿음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큰 문제가 큰 믿음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절박하지 않으면 사람은 예수님께 잘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일 날 한 꼬마가 엄마 몰래 장난감 총을 숨겨서 교회에 들어갔답니다. 한창 설교 중, 갑자기 꼬마가 장난감 총의 방아쇠를 당겼답니다. 그러자 총소리에 기겁한 신도들이 납작 엎드려 눈을 감고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를 했답니다. 당황한 꼬마의 엄마는 부랴부랴 아들을 끌고 예배당을 빠져 나갔답니다. 두 사람이 문가에 이르렀을 때, 목사님이 제지하며 말했답니다. "괜찮아요. 난 사람들이 오늘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못 봤어요.  댁의 아들은 목사인 내가 10년 동안 한 것 보다 더 큰 일을 했어요!" 큰 문제가 큰 믿음을 만듭니다. 문제를 두려워하며 희망을 접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딸의 구원을 위해 민족적 반감이나 개인적 자존심을 모두 팽개치고 예수께 메어 달린 것입니다. 예수님 발 앞에 모든 창피를 무릎 쓰고 겸손하게 엎드렸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주 되신 예수님, 문제의 답을 가지고 계시는 예수님,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만 하면 말씀 한 마디로 질병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께서 해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위선이 무너지고 가식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민낯을 보이는 것입니다. 교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집이 꺾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을 가지게 하는 통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믿음은 힘이 있습니다. 믿음은 위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옮겨줍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믿음은 질병을 고칩니다. 믿음은 삶의 질을 바꾸어 줍니다. 믿음을 우리를 구원시켜 줍니다. 믿음이 우리 인생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줍니다. 믿음이 큰 만큼 인생은 커지고 믿음의 크기만큼 마음의 크기도 삶의 폭도 넓어집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은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이루게 합니다. 믿음은 신비한 에너지가 있어 믿는 대로 되어지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믿음은 자신감을 주고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줍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11:6)"고 했습니다. 우리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희망은 믿음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3. 우리 신앙인이 희망수준이 높은 사람이 되려면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희망 심리학자들은 희망의 세 번째 요소를 경로사고(pathways thinking)라고 말을 합니다. 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입니다(way) 희망 수준이 높은 사람은 목표를 이루는 방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는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마음속의 계획이나 절차, 방법으로서 “나는 이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높은 사람은 대안적인 방법들을 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희망 수준이 높은 사람은 실제로 대안적인 방법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희망 수준이 높은 이 여인을 보십시오.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데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까?
첫 번째 장애물이 자신의 출신 성분입니다. 여자입니다. 당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출신 지역이 가나안 땅입니다. 헬라인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마가복음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넷째는 예수님의 냉대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방해하면 뒤에서도 큰 소리를 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녀를 위해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26절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 자존심 문제입니다. 그런데 목표를 이루는데 인격적 모멸감과 훼손된 자존심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희망수준이 높은 사람이 되려면 끝까지 우리 인생문제의 답을 가지고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하든지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백가지 방법이 안된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마가 화장대에서 마사지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있었답니다. 유치원 다니는 아들이 엄마에게 물었답니다. "엄마 그건 왜 바르는 거야?"
"엄마가 예뻐지려고 바르는 거야" 잠시 후 엄마가 화장솜으로 얼굴의 마사지크림을 닦아 내자 아들은 말했답니다. "엄마, 왜 닦아내? 벌써 포기하는 거야?" 예뻐지려고 화장하는 것도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입술이 미우면 빨간 것도 발라보고 분홍색도 발라보고 그것도 안되면 파란 것도 발라보는 것입니다. 어느 집 가훈은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고, 실패란 바느질할 때나 쓰는 말이다.”라고 합니다. 
서울역 가는 길은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워싱턴은 수없이 전쟁에 실패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겨 승리하였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수없이 실패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성공하여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희망수준이 높은 사람은 시간 개념이 지속성(permanence)과 공간 개념인 만연성(pervasiveness)이 다릅니다. 희망 수준이 높은 사람은 거절된 사건, 나쁜 사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 때문에 느낀 무기력과 모멸감을 지속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희망 수준이 낮은 사람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생각합니다. 희망 수준이 높은 사람은 좋은 일의 원인을 지속적이고 전부인 것에서 찾습니다. 불행한 일의 경우 일시적이고 일부인 것에서 찾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 지속적이고 전부라고 생각하고 좋은 일에 대해서는 일시적이고 일부라고 생각하면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적인 사람은 공간의 개념인 만연성에도 차이가 납니다. 희망적이 사람은 절망감의 여파를 다른 영역까지 확산시키지 않습니다. 불행한 그 일은 그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절망적인 사람을 불행한 그 일을 전부로 확산시켜 버립니다. 일어난 일의 해석은 자신의 믿음에 근거하여 방향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어떻게 대하든 지속적으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 해결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해결 될 때까지 예수님께 집중하였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 절하면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거절당해도, 무시당해도, 개처럼 취급당해도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 주님이 응답해 주시던지 그것은 주님이 옳습니다. 100%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어도 수용하는 것입니다. 손해가 되어도 수용하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이 옳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받으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주인되심, 메시아 되심을 인정합니다. 예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뭉개져도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유대인의 우선권과 특수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비천한 존재 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요구합니까?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마치 상아래서 꼬리를 흔들고 주인의 호의를 기다리는 귀여운 강아지도 부스러기를 먹듯이 자신과 자신의 딸에게도 그런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개'라는 말로 자신을 지칭할 때 받는 인격적 모멸감과 훼손된 자존심을 개의치 않고 주의 은총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라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냉대와 멸시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주실 것을 호소하면서 겸손히 엎드렸습니다. 어떤 수모를 당하고 수치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딸의 치료를 위해서는 그 모든 수모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한다고 회사 그만 두고, 자존심 상한다고 가정 포기하고 자존심 상한다고 교회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짓밟는다고 해도 매달려야 합니다. 들어 줄 때까지 매달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지만 다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은혜이고 자비일 뿐입니다. 안 고쳐주면 어쩔 것입니까?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시험(테스트)에 합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첫째는 믿음이 크다고 말씀합니다. 줄기찬 인내력, 예수님에 대한 신뢰도, 예수님에 대한 집중도, 끈기 있는 신앙, 안 보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는 신앙, 자존심을 내려놓는 신앙 이 모든 것이 합격점수를 맞은 것입니다.
둘째는 네 소원대로 되라고 말씀합니다. '네가 원하는 것만큼'되어 진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축복은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의 크기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수용의 그릇이 바로 믿음으로 바라는 희망의 그릇입니다. 우리 주님은 큰 믿음을 통한 희망을 원하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원하는 소원은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이루어집니다.

3포, 5포, 7포 세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 희망이 없습니까? 내일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부르짖어도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됩니까? 풀어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해도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까? 사람으로 인해 주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되는 것이 있습니까? 심각하게 자존심 상하도록 거절당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문제에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제의 답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방해 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디딤돌로 삼고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것을 넘어가면 바로 앞에 있습니다. 아무리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다하여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주님 붙들고 네 소원대로 되라는 말을 들으때 까지 주님께 부르짖으시길 바랍니다. 자존심의 꽃이 지면 기적의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께 희망이 있습니다. 28절 같이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여자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한 번 외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우리 성도님이 순간순간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듣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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