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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8) 온유(갈5:22 민12:1-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862 추천수:5 112.168.96.71
2016-05-22 08:08:40

 

성령의 열매(8) 온유

갈5:22 민12:1-3

 

오늘은 성령의 열매 중에서 여덟 번째로 온유의 열매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모세에 대하여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온유란 말씀은 히브리 말로 “아나브”란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에 24번 사용되는데 어느 때는 겸손, 어느 때는 가난, 곤고, 고난, 어느 때는 온유라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를 성품을 말할 때 온유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한자로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를 써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사전에서는 온유를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으로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온유는 헬라어 “프라우테스”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11번 사용되었는데 베드로 전서 3장 16절에서만 “선한 양심(온유와 두려운 합해)”으로 번역하였고 모두 온유라는 말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모세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이 온유라는 말은 누군가 대적했을 때, 누군가 불이익을 주었을 때, 공격을 받았을 때,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가 가지는 성품입니다. 그 사실을 성령의 열매 온유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인 온유가 어떤 때 쓰였는가 문맥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쓰였는가 갈라디아서 5장 26절을 보십시오. 헛된 영광을 구하고 서로 노엽게 하고 서로 투기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심방도 받지 않고 저를 담임목사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는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성경은 헛된 영광을 받고 싶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헛된 영광을 받으려고 하면 제 마음에 상처가 생기고 쓴 뿌리가 생깁니다. 헛된 영광을 추구하면 누군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분노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투기로 이어집니다. 공격을 받을 때 상대를 어떻게 대하라고 합니까? 갈라디아서 6:1절을 보십시오.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말합니다. 온유는 바로 잡음에 대한 하나님의 성품과 관계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땅이 하나님을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 안에서 온유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 오늘 읽은 모세의 경우를 보십시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한 것을 비방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이런 비방에 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유하게 참습니다. 마땅히 자신의 권위로 얼마든지 징계할 수 있는데도 징계하지 않습니다. 정당성을 변론할 수 있는데도 아무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을 성경은 모세가 모든 사람들보다 온유가 더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 온유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한 군데만 더 온유가 쓰인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고린도 성도들을 양육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바울을 이중인격자라고, 바울이 돈만 좋아한다고 비난합니다. 그 때 바울이 고린도전서 4장 21절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후서 10장 1절에서는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 후선 2장 25절에는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온유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수많은 모멸과 대적을 받으면서도, 십자가를 지시면 수많은 조롱과 모멸을 당하면서도 불로 심판하시지 않고 죄인을 다루는 태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대할 때 나타나는 성품입니다.

 

온유란 도덕적으로 단지 "부드럽고 온화한 친절, 마음이 조급하지 아니하고 너그러운 상태, 경솔하지 아니하고 침착한 상태, 마음이 단기적이 아니라 여유 만만한 상태, 극단에 서지 않는 것" 등 만을 말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 성령의 열매와 관계된 말입니다. 천성적으로 온유하지 못한 사람도 성령을 받으면 온유해 집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까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가정에서 믿을 수 없는 사람 1위가 아버지라고 나와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들 욱하는 성질 있습니다. 뼈 빠지게 돈벌어 아내와 자식들을 도와 주는게 쉽게 욱하는 성질 때문에 아내에게 자녀에게 외면당합니다. 나는 타고난 성품이 온유하지 못하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들도 얼마든지 온유해져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설명하는 갈라디어서 5장 24절을 읽어 보세요. 부족한 우리이지만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을 6장 1절에서는 “신령한 너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신령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온유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땅을 차지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온유한 자에게 사람이 몰려옵니다. 온유한 자가 존경도 받는 것이고 온유한자가 인정도 받는 것이고 온유한 자가 지위도 누리는 것입니다. 큰 일을 이루기 원하면 온유해져야 합니다. 강한 자라 오래 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폭력과 칼로 세상을 정복하려 했던 나폴레옹, 히틀러, 뭇솔리니는 땅을 차지한 듯했으나 다 빼앗기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던 공산주의는 100년이 못되어 무너졌습니다. 무력으로 세계 최대의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원나라의 시조 징키스칸의 나라도 10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강한 동물의 상징인 사자나 호랑이는 다 멸종위기에 있고 동물원에나 가야 볼 수 있지만 소나 양처럼 온유한 동물은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큰 물고기가 물의 세계를 지배할 것 같지만 멸종되는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가 아니라 큰 물고기입니다. 온유한 동물이 오래 삽니다. 거북이의 목은 강제로 빼기 힘들지만 거북이를 따뜻한 화롯불 가까이에 놓아두면 거북이의 목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거센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태양빛입니다. 강한 것을 숭배하며 사나울수록, 거칠수록, 딱딱해 질수록 오래 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유능승강(柔能勝剛)이란 말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능히 굳센 것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보리새우는 몸이 자랄 때마다 굳어진 껍질을 한번 씩 벗는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자주 껍질을 벗다가 나이가 들수록 껍질 벗는 기간이 길어지고 껍질은 더 딱딱해집니다. 그러다가 딱딱해진 껍질을 벗지 못하면 그 껍질 속에 갇혀 죽는다고 합니다. 나무도 껍질이 두꺼워지고 굳어지면 고목이 됩니다. 나무도 연한 가지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거친 돌들을 몽글게 만든 것은 날카로운 정이 아니라 부드러운 물입니다. 온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나약하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드럽고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온유한 사람은 머저리같이 보이고 경쟁 사회에서 도태될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온유한 자가 승리합니다. 사납고 힘센 짐승들이 세상을 다 차지할 것 같지만 기껏해야 험한 산을 차지할 뿐 온순한 짐승들이 넓은 평원을 차지합니다. 온유를 잃으면 수명도 짧고, 쉽게 부딪치고 상처받으며, 깨어지기 잘 합니다.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라고 했습니까? 믿습니까? 이 성령의 열매 온유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우리 열린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온유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힐 수 있겠습니까?

 

1. 우리가 온유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기 위해서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의 모든 열매는 나의 힘으로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윤리적 도덕적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 맺혀지는 성령님을 통해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예수을 구주로 믿을 때 열리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보고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맺힌 성령의 열매를 통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보고 느끼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온유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가를 말할 때는 모든 성령의 열매가 그렇듯이 반드시 제 1단계로 예수님을 우리가 구주로,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우리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은 이미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십자가에서 내 육체가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정욕이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탐욕이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자존심이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마음대로 심판하고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 죽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를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 온유함으로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돌을 던질 때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다투고, 큰 소리 나고,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고, 찢어지고 넘어지는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대적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온유로 대했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조롱합니다. 그 때 그들의 죄가 드러났습니다. 그럴 때 분노하며, 출교시키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시켰습니까? 초심을 일어 버렸다고 합니다. 만나 보니 듣은 바와는 너무나 딴 판이고 위선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상처받고 상처를 주고 증오합니까? 바울을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4장 12절, 13절입니다.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세상의 오물(汚物) 모든 것의 찌꺼기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오물 취급받고 찌꺼지 취급을 받습니다. 포르노 중독자도, 동성연애자도, 성도착증 환자도, 아동학대자도 경계인, 주변인인으로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믿는 사람이 찌꺼기 취급을 받습니다. 그럴 때 바울은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고 참고 그런 취급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당황하거나, 상처 입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세상의 오물이요 만물의 찌꺼기로 간주하고 있는데 욕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3절을 보십시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니까 상처주고 상처받고 온유를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0으로 보면 온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nothing이 아니라 뭔가되었다고(Something) 생각하니까 온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도대체 나를 뭘로 아는거야, 장로를, 목사를, 사장을......” 하니까 분노가 나고 상처가 생기고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는 자에게 도둑놈이라고 말해 보았자 상처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어떻게 나아갑니까? 고린도전서 4장 2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아니면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나아가랴?” 바울은 매를 가지고 징계할 수 있지만 그들을 진정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온유한 영으로 가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4-26절에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아니하며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 이것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부터 자신을 되찾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잡는데 온유함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는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온유함으로 대적하는 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온유란 영어로 “meek, meekness”입니다. 이 말은 mere(호수, 물)에 그 뿌리를 둔 말이라고 합니다. 어원적으로 흐르는 액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입니다. meek는(스위스어로 MIUK, 덴마크어로 MYG, 스페인어로 MEGO, 그리고 포르투갈어로 MEIGO라고 하는데) 흐르는 액체로 물컹하다는 말입니다. 온유란 마치 흐르는 액체처럼 돌을 던지면 잠깐의 파장 있지만 조금 지나면 잔잔해지듯이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거친 돌들을 몽글게 만든 것은 날카로운 정이 아니라 부드러운 물이었습니다. 온유함은 흥분하거나 낙심함이 없는 심령의 고요함을 나타낸 말입니다. 자기 자존심이나 탐욕, 헛된 영광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상처입고, 그 상처를 오래 동안 마음의 수첩에 기록해 놓고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이 온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면 우리는 온유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힐 수 있습니다.

 

2. 우리가 온유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대적을 받을 때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온유함으로 바르게 잡을 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1절을 보십시오. 먼저 그들을 바로 잡을 때 자신을 살펴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도 시험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온유하지 못한 사람은 대적을 받으면 시선을 상대에게 돌립니다. 그래서 땅을 차지 하지 못합니다. 평안이 없어집니다. 화평이 깨어져 버립니다. 타락한 본성 드러내어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어떤 말을 들을 때 욱하며 상대를 향하지 말고 그 말을 들을 때 먼저 시각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습니다. 한 때는 누이가 어머니처럼 그를 살려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세워주어 선지자 역할을 하는 것이지 자신이 안세워주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 아론은 자신의 대변인이 되어 도와준 사람입니다. 그도 모세가 외면하면 아무 실권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등을 돌리고 비난합니다. 그 때 모세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시각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아론이 어떤 사람입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사람입니다. 그 때 누이도 한 통속이었습니다. 얼마든지 대적하는 사람의 허물을 잡아 정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정당한 변명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나도 사람인데 아내가 죽어서 나도 외로워서 결혼했다고 변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처가살이하면서 아내에게 너무 무시받아 조금 젊고 예쁜 아내를 통해 위로 받고 싶어 결혼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침묵했습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아마 자신을 성찰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세의 정당성을 말씀해 주십니다. 온유한 자들은 비방을 받고 대적을 받을 때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런 온유한 성품이 어떻게 생겼겠습니까? 왕자로 힘이 있을 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현장에 나아간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렇게 온유한 사람으로 변했겠습니까?

광야 40년 동안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자연을 보면서 목동으로 일하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훈련을 수없이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nothing).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마치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는 처갓집 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순종하고 타인에게는 관용하고 자신에게는 인내하는 온유의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훈련을 통해 온유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모든 열매가 그렇지만 성령의 열매 온유의 열매도 가만히 있는다고 저절로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가꾸어야 풍성히 맺힙니다. 나무를 심어 놓고 거름도 주지 않고 병충해도 방제해 주지 않으면 풍성히 맺히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훈련입니다.

온유(파라우테스)라는 말은 어원적 배경이 있습니다. 벌판을 질주하던 야생마를 길들 때 쓰는 말입니다. 라틴어의 온유(mitis)는 "말에게 재갈을 먹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생마를 길들여 주인의 말을 잘 따르게 만들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본능적인 행동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길들여지고 훈련된 성품을 온유라고 말합니다. 힘이 잘 조절되어 유익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훈련된 인격을 온유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능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춘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가진 힘을 유익한 목적을 위해 바로 사용할 줄 아는 성품을 가진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다스리고 통제하시도록 내어 맡기는 훈련을 할 때 온유의 열매는 풍성히 맺히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온유의 열매를 풍성히 맺히려면 대적을 받을 때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9-30)

예수님은 얼마든지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할 권리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매일 우리의 잘못을 보며 심판한다면 하루에도 수없이 정죄를 당하고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못된 인간들에게 저주를 받았습니다. 왕 중의 왕이 종이 되셨습니다. 거룩하신 분이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천지를 만드신 분이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셨고 온갖 죄인들 즉 창녀들, 도둑들, 살인자들, 사기꾼들, 거짓말쟁이들 아래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저주하는 자도 용서하였습니다. 이런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산상수훈에 8가지 복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9가지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그 중에 공통된 것 두 가지입니다. "평화와 온유"입니다. 복받은 사람, 성령받은 사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온유"입니다. 예수님 잘 믿으며 예수님께 배우면 온유해 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온유하지 않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배우지 않고 있다는 증표입니다. 대적을 당할 때 함부로 말하고, 정죄하고, 분노하고, 보복 한다면 내가 예수님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징조입니다.

요한은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이 붙을 정도로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의 한 촌에서 예수님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일을 거부하자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9:54)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불을 내려 죽이자는 욱하는 성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배우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원수도 품을 수 있는 온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4:7)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잘난 체 잘하고 대적하는 말고의 귀를 벨 정도로 욱하는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완전히 온유한 사람으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좋은 일 하다가 감옥에 가도 욱하지 않았습니다. “(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라고 합니다.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내게 분노를 일으킬만한 사람 있고 나에게 몹쓸 짓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비방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고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이시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을 통해 배우면 그런 사람에게도 다정하고, 선하고, 부드럽게 대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얼마나 분노가 가득한 사람이었습니까?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찾아다닌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온유의 목회를 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 배우면 어떤 상황에서도 온유의 열매는 풍성하게 삶의 현장에서 맺힐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배우면 말이 온유해 집니다.

잠언 15:4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강하고 바르게 산다고 상대방의 가슴에 칼을 드리대면 안 됩니다. 상대의 허물을 보고 상대가 자신을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것이 온유입니다. 행 2:1-4에 보면 성령께서 임하시자 그들의 혀가 사로잡힙니다. 말이 하나님께 길들여집니다. 불평하고 분노하고 흉보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린 것을 통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쳐주시길 기도하였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부드러워집니다. 감정대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온유하다고 결코 약하고 무른 것이 아닙니다. 바보이거나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권리가 있지만 권리를 행하지 안으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사고방식이 온유해집니다. 경직되지 않습니다. 얼굴이 부드러워집니다. 그래서 온유함이란 성정이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남이 상처를 입힐 때 나타나는 성품입니다. 상처를 받지 않는다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받고 대적을 받으면 온유한 사람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옳고 그름은 하나님이 판단해 주십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 12:7-8)

 

우리는 대적을 만날 때, 비난을 받을 때, 그릇된 것을 바로 잡을 때 예수님의 사람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선을 대적하는 사람에게 돌리지 말고 나에게 돌려 자신을 살피며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 배워야 그 상황을 예수님의 방법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면 온유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누리는 삶이 삶의 현장에서 펼쳐질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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