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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6-양선(갈5:22-23; 갈 6:8-1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708 추천수:7 112.168.96.71
2016-05-08 07:59:30

 

성령의 열매6-양선

갈5:22-23; 갈 6:8-10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친구가 지난주에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감동적인 글을 보내 주어 읽어 보았습니다. 어떤 주부인데 아버지는 11살 때 돌아가셨고 아래론 여동생이 하나가 있었답니다. 홀어머니 품에서 자라 대학을 졸업한 후 입사 2년 만에 결혼을 하였답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친정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았고 수술비와 입원비 걱정부터 해야 했답니다. 남편에게 얘기를 하니까 걱정 말라고 내일 돈을 융통해 볼 터이니 오늘은 푹 자라고 얘기해 주었답니다. 다음 날, 친정엄마 입원을 시키려 친정에 갔지만, 어머니는 선뜻 나서질 못하셨답니다.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몇 개 있으니 4일 후에 입원을 하자 하셨답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답니다. 그 때 시어머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답니다. "지은아. 너 울어? 울지 말고 ..... 내일 3시간만 시간 내 다오" 다음 날, 시어머님과의 약속 장소에 나갔답니다. 시어머님이 무작정 한의원으로 자신을 데려가셨답니다. 간병해야 한다고 몸에 좋은 약을 한 제를 지어주셨답니다. 그리고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트레이닝 복과 간편복 4벌을 사주시고 "환자보다 간병하는 사람이 더 힘들어. 병원에만 있다고 아무렇게나 먹지 말고, 아무렇게나 입고 있지 말고." 말씀하시며 봉투를 내미셨답니다. "엄마 병원비 보태써라~. 네가 시집온 지 얼마나 됐다고 돈이 있겠어... 그리고, 이건 죽을 때까지 너랑 나랑 비밀로 하자. 네 남편이 병원비 구해오면 그것도 보태 써... 내 아들이지만, 남자들 유치하고 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부부싸움 할 때 꼭 친정으로 돈 들어간 거 한 번씩은 얘기하게 돼있어. 그니까 우리 둘만 알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시어머님께 기대어 엉엉 울었답니다. 2천만 원이었답니다. 시어머니 도움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이듬 해 봄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시어머니는 어머니 손을 꼭 쥐고 "사부인... 저예요.. 지은이 걱정 말고. 사돈처녀 정은이도 걱정 말아요. 지은이는 이미 제 딸이고요.... 사돈처녀도 내가 혼수 잘해서 시집 보내줄게요. 걱정 마시고 편히 가세요." 시어머님은 3일 내내 빈소를 함께 지켜주셨답니다. 친정 엄마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님는 동생까지 잘 챙겨주셨답니다. 가족끼리 외식하거나, 여행 갈 땐 꼭~ 내 동생을 챙겨주셨답니다. 동생이 결혼할 때 시어머님이 또 다시 봉투를 내미셨답니다. "어머님. 남편이랑 따로 정은이 결혼 자금 마련해 놨어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도망치듯 돈을 받지 않고 나왔는데 버스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문자가 왔답니다. “내 통장으로 3천만원이 입금 되었다.” 다시 시어머니 집에 가서 너무 죄송해서 울면서 안 받겠다고 했답니다. 그 때 시어머님께서 함께 우시면서 말씀하셨답니다. "지은아. 너 기억 안나? 친정 엄마 돌아가실 때 내가 약속 드렸잖아. 혼수해서 시집 잘 보내 주겠다고. 나 이거 안하면 나중에 네 엄마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 시어머님은 친정엄마에게 혼자 하신 약속을 지켜주셨답니다. 동생 결혼식에 혼주자리에 시부모님이 앉아 주었고 동생은 시아버지 손을 잡고 신부입장을 하였답니다. 그렇게 착한 시어머니도 돌아가셨답니다. 시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날 남편에게 시어머니와 비밀을 이야기 했고 지금 아들 둘이 있는데 생활비를 쪼개서 따로 적금을 들고 있다고 합니다. 시어머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자신도 며느리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서랍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어떤 생각이 듭니까? 참 착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약은 사람이 잘 살고, 착하면 경쟁력도 없고 낙오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각박한 세상에 한 시대 선하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니다. 이렇게 살면 살벌하고 각박한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10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선하게 사는 것은 선택 과목이 아닙니다. 필수과목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명령이고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표징입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는데 선한 열매가 안 맺히고 악한 열매만 맺힌다면 내가 예수님의 사람인가를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입만 열면 없는 것도 만들어 남 비판하고 욕하고 해코지 하며 악한 열매를 맺히면 교회는 다녀도 가라지가 아닌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이단들이 그렇습니다. 제식구들끼리는 참 잘하는 것같은데 전통 교회를 바벨이라고 말하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영혼 사냥을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가족이 원수가 되지 말고 선한 자식, 선한 시아버지, 시어머니, 선한 부모, 선한 형제들, 선한 교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 사람들을 보니 예수 믿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성령의 열매 6번째 양선에 대하여 말씀을 듣습니다. 양선(良善)을 글자 그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어질 “양” 착한 “선”자입니다. 헬라어 “아가도쉬네(롬 15:14, 갈 5:22, 엡 5:9, 살후 1:11)”를 번역한 말입니다. 영어(NIV. KJV)로는 goodness(선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선함", 공동번역에서는 "선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선함”은 단지 상대적인 도덕적 선함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9절에서 우리를 빛의 자녀라고 소개하면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 “아가도쉬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맺혀지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하나님 안에서 바름과 너그러움이 포함된 선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디카이오수네”가 정의 인데 아가도수네는 자격 없는 사람에게 관대히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포네로스”는 악인데 양선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으로 남에게 후하고 관대하고 항상 넉넉하게 베풀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하여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맺혀지는 선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1. 우리가 누구에게 선행을 행하여야 합니까?

6절에 보십시오. 가르치는 자에게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구역장 너무 흉을 보지 말고, 가르치는 목자 왕따 시키지 말고, 가르치는 선생님 업신여기지 말고, 십자가의 보혈로 사신 몸된 교회 초라하게 생각하지 말고,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목사를 비난하고 비판하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입니다. 6절에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하라고 하였습니다. 선행이라는 것은 물질과 시간,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해 베푸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어떤 권사님을 보면 회사에 나가서 일하시고, 시어머니 돌보시고 늘 웃으면서 기쁘게 신앙생활하시는 분을 봅니다. 회사가 어려운데도 과일 철이 되면 과일을 사서 저에게 보내줍니다. 참 선하신 권사님이라 생각이 됩니다. 어느 집사님은 주일 학교 행사가 있으면 꼭 후원금을 내어 아이들을 격려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참 선하신 집사님입니다. 어떤 권사님은 주일이면 차 한 잔을 정성껏 준비하여 가져 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참 선한 마음입니다. 선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소자 하나에게 물한 그릇 대접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을 예수님 대하듯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선행입니다. 어떤 목적과 이득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 있는 교인, 남편, 아내, 시어머니, 시아버지, 며느리, 아들, 사위, 딸, 일가친척, 가족에서 예수님 대하듯 하라는 말입니다.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인사라도 기쁜 얼굴로 하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식구끼리 개업하면 한 번이라고 방문하여 격려해주고 잘 되기를 위해 협력해 주라는 말입니다. 상을 당하면 같이 가서 위로해 주고,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더 나아가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는 선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후하게 대접할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같이 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해를 끼치고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자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선행을 하는데 제외시키지 말라는 말입니다. 제한된 선행은 도둑도, 악마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살인자도 제 아들에게는 잘합니다. 히틀러도 독일 사람들에게는 잘 하려고 했습니다. 끼리끼리 주고받는 것은 사교 집단도 잘 합니다. 성경은 원수까지도 제한을 두지 말고 모두에게 선행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눅 6:27)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라고 말씀합니다.

 

2.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양선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1) 우리가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으로 살아가야 양선의 열매를 풍성히 맺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열매인 양선을 풍성하게 맺힐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열매를 소개하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를 보십시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소개한 후 24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믿습니까? 이미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욕과 탐욕이 우리를 주장하게 한다면 결국 어떤 열매가 맺히게 됩니까?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를 보십시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다 짖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알콜 중독, 방탕함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데도 여전히 정욕과 탐심으로 살면 결코 성령의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교회를 다녀도 그저 본성대로 살아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옛날 섬겼던 교회에서 한 권사님이 계셨는데 당시 봉제공장을 하였습니다. 열심히 새벽기도회를 나오고 모든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구역장이 되었는데 구역 식구 중에 남편이 돌아가시고 어린 딸 둘과 아들 하나 데리고 사는 집사님입니다. 아이들 교육시키기 위해 집을 팔았는데 그것을 사기치고 도망가신 분을 보았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습니다. 말은 천가같이 말합니다. 자신이 최고 예수님 잘 믿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열매는 더럽습니다. 악합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자동적으로 선해지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망했다고 말하면 이를 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왜 교회 다니면서도 저렇게 말하며, 저렇게 행동하며 살까 이해 못할 사람도 있습니다. 존경받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진정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습니까? 지식으로 만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만 믿는 체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님으로 사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선함을 이루려고 하는데 잘 안됩니다. 예배 끝나고 사람들 만나면 좋은 이야기를 합니까? 수다를 떨고 나면 선한 열매가 맺힙니까?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험담하며 웃고 좋아들 합니다. 그러면 선한 열매가 맺힙니까? 혼자서 집에 있으면 성경을 잃고 기도하고 묵상합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칭찬하기 보다는 험담하기 좋아하고, 성경 보고 기도하기 보다는 놀음하고 음란물 보기 좋아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기 스스로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주 이중적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 안에서 죽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군대에 가서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답니다. 군대에 갔는데 예수 믿는 신병이 들어왔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잘 때도 기도하며 살더라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환자라로 합니다. 환자 하나 또 왔구나 생각했답니다. 마구 괴롭혔답니다. 흙이 번 벅이 된 군화로 짓밟았답니다. 그런데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고 다 당하더라는 것입니다. 잠을 잘 때 보니 여전히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을 자다 깨었는데 그 병사가 내무반 근무를 하면서 엎드려 자신의 군화를 닦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힌 그를 위해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환자들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보기 위해 교회에 나가 은혜를 받고 그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핍박을 해도 이미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로 믿는 것입니다. 자존심도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못 죽습니다. 욕심도, 인기도, 명예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다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으로 살아가면 모든 주제권을 주님께 맡겨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됩니다. 순교의 자리에서도 선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내가 살아 펄펄 뛰기 때문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면 그 예수님이 나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내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데 내가 살아 펄펄 뛰니까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눈빛이 달라집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말을 하고 주님이 하라고 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의식하고 살면 선한 사람이 되어 집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살면 우리도 선해집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었습니까?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서도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양선의 열매를 맺으려면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양선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힐 수 있습니다. 선한 행위를 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면 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2) 성령 충만을 받아야 양선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힐 수 있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성령의 열매인 양선의 열매는 도덕적 노력에 의해 맺혀지는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육체의 소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두 가지 마음을 육체를 위해 심는 자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로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이 두 마음이 늘 싸우고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 심으면 양선의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육체를 위해 심을 때 맺혀지는 열매에 대하여 디모데 후서 3장 1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딤후3:1-5)” 로마서 3장 10절 이하에서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마음속에 심겨진 이것들이 수시로 몸 밖으로 뛰어 나와 악하고 더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영적 싸움은 쉬운 싸움이 아닙니다. 참으로 선하게 살았던 사도 바울이 이 싸움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성경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롬 7:15을 보십시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8을 보십시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자기 스스로 선하게 살려고 하지만 안 된다는 것입니다.

롬 7:24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선한 열맺을 풍성하게 맺힐 수 있겠습니까?

롬 8장2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해방됩니다.

롬8:11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죽을 몸이 살아납니다.

롬8장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성령이 친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구원해 주었는데 성령 충만하면 성령님께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성령을 받았으니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살인을 하려 사람을 쫓아다녔던 바울이 성령 충만하니까 선한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도망한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으니까 가는 곳마다 성령의 선한 열매를 풍성히 맺는 주인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나바가 성령 충만을 충만히 받으니까 초대교회가 선한 열매를 풍선하게 맺는 공동체로 변하였습니다.

 

3)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말씀에 순종할 때 양선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힐 수 있습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끝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착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갑니다. 교회에서 가서 목사님 설교는 어떻고, 장로님은 왜 반바지를 입고 왔고, 성가대는 왜 화음도 맞추지 못하고 마구 비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눅 6:37)”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비판하고 싶어도 비판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한 입술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예배 끝나고 길거리를 가는데 거지가 구걸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저것들 일도 하지 않으며 놀고먹는 사회의 기생충이다”라고 외면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이 곧 나에게 대접한 것이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손해 보는 것 같고 순진하고 무식한 것 같지만 그 말씀대로 행합니다. 그러면 양선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것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양심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양선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아무리 이해가 안 되어도, 손해가 될 것 같아도 자존심이 상해도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도 성경은 선한 일을 위해 하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에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남주기 위해 돈 벌라는 말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8)”

그러면 이 말씀에 따라 나에게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선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게 됩니다.

그런데 악한 세상에서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3. 우리는 왜 선한 일을 하다 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세가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선을 행하면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언젠가 거둘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9).

9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직역하면 "그러나(데) 우리가 선한 것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가르) 적절한 기회에 우리가 지치게 되지 않고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 낙심하고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변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만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1-3)"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심으면 반드시 거둘 때가 옵니다.

 

둘째는 우리가 선을 행하면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7).

우리가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직역하면 "너희는 미혹되지 말라. 하나님께서 조롱받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뿌린 이것을 또한 그가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쉬운말 성경은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결코 속임을 당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다가 왜 쉽게 낙심하고 포기합니까? 사람에게 그 선한 행위가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니까 낙심하고 포기합니다. 열심히 회사에서 일했는데 사장님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승진시켜 주는데 자신은 한직으로 보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는데 목사님이 알아주지 않고 교인들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임직자 투표를 하는데 표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낙심하고 포기하고 이제는 암세포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체의 가장 악랄한 세포가 암세포입니다. 정상적으로 열심히 교회 다니며 선한 일을 하던 사람도 어느 날 그렇게 암세포로 변해 버립니다. 암세포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무제한 증식을 합니다. 그 사람만 만나면 열심히 선을 행하던 사람도 악을 행하는 사람으로 바꾸어져 버립니다. 열심히 비판하며 공동체를 죽이는 사람으로 변해버립니다. 둘째, 원래의 성질을 잃어버립니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약 60조 개의 세포들은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기능이 있는데 암세포는 고유한 기능을 잃어버리고 아무 쓸모없는 세포 덩어리를 만들어냅니다. 셋째, 암세포는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 범위까지 침범하면서 증식합니다. 넷째, 암세포는 전이합니다. 주변 조직까지 침범하여 온몸으로 번지는 것입니다. 정상세포와 달리 몸 전체와 조화를 유지하면서 성장하지 않고, 계속해서 분열하고 자라나면서 몸속의 영양분을 빼앗아 갑니다. 교회 분위기를 써늘하게 하고,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 가버립니다. 욕심을 부리며 자기들만 챙겨먹는 바람에 극단적인 영양실조를 만들어 자기가 속한 몸 전체를 망가뜨려 버립니다. 교회의 암적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 우리의 형편, 우리의 헌신, 우리의 무능력, 우리의 눈물, 우리의 기도,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셋째는 우리가 선을 행하면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거둔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7절에 "그대로 거두리라" 8절에 "거두고 거두리라" 9절에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말씀합니다. 8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데리세이"라는 말은 "추수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다 낙심하고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이 기대한 바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없으면 낙심도 없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기대, 부모에 대한 기대, 교역자와 직분자에 대한 기대, 성도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그 기대가 거품으로 끝날 때 낙심하고 포기합니다. 선한 것을 심었으면 반드시 선한 열매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0-41)"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유해 지고, 남에게 마실 물을 주면, 자신도 갈증을 면한다”( 잠11:25, 표준새번역)라고 했습니다.

 

어떤 비난과 어떤 방해, 어떤 장애물을 당해도 선한 일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얼마나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습니까? 예수님도 보십시오. 인류 구원이라는 선한 일을 위해 전파하시고, 가르치고,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다 환경합니까? 끝까지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조롱하고, 협박하고, 고발하고, 모욕을 주고, 배반하고, 비협조적이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처형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하며 선한 일을 포기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인류 구원 사역을 다 이루었습니다. 신앙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모세, 예레미야, 다윗, 이사야, 하박국, 엘리야, 엘리사, 세례요한 등 수많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다가 얼마나 낙심할 일을 당하였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고 사명을 접지 않았습니다.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일어나 마침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 땅에 이루어 드렸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에 내 이름을 넣어 9절 말씀을 크게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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