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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5-자비(갈5:22-23; 누가복음10:30-3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862 추천수:5 112.168.96.71
2016-05-02 07:28:02

 

성령의 열매5-자비

갈5:22-23; 누가복음10:30-37

 

오늘은 성령의 열매 다섯 번째로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랑할 자(慈)와 슬플 비(悲)입니다. 한자어로 자비라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마음으로 함께 슬퍼해주는 마음’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말 국어사전의 풀이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또는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비라는 말은 불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중생에게 행복을 베풀며, 고뇌를 제거해 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자'는 최고의 우정을 의미하며, 특정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우정을 갖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또 '비'의 원래 의미는 '탄식한다'는 뜻으로 중생의 괴로움에 대한 깊은 이해·동정·연민의 정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석가의 자비를 '대자대비(大慈大悲)'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로서 자비는 헬라어 “크레스토테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유용함, 선함, 착함, 친절함, 너그러움의 뜻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인자하고 관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영어 번역에서는 친절이라는 말로 번역했는데 자신에게 피해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친절하고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가 다릅니다. 도덕적 자비는 뿌리가 자신에게 있지만 성령의 열매로서의 자비는 근원이 성령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로마서 2:4, 11장22절에서는 인자로 번역했고, 3:12에서는 선이라고, 고후6장6절, 엡2:7, 디도서 3장 4절에서는 자비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또 헬라어 “엘레오스(Eleos)”도 자비로 번역되는데 이 말은 “사랑어린 친절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는 말씀을 하실 때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은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는 긍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 26번 사용되는데 주로 긍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비로운 긍휼의 심장을 지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외에 신약성경에서 5회 사용된 오이크틸모스(자비 골3:12)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자나 긍휼이나 자비는 각 단어들이 서로 다르지만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내 가슴에 못을 박고 결정적 상처를 주고 자존심을 뭉거트리고 명예에 먹칠한 사람을 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로 친절을 베풀어 주고, 불쌍히 여겨주고, 공감해 주고, 용서해주고,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신명기 4: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마땅히 죄의 대가로 형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겨주시고 선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자비의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1. 우리가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자비를 베푼 자가 누구입니까? 사마리아인입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개처럼 취급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가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어 줍니까? 강도 만난 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당시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입니다. 혼혈인이라고 비난받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인간대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멸시한 사람입니다. 천대하고 왕따 시킨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려움을 당하니까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자신을 사람취급하지 않는 사람들 마땅한 대가를 받았다고 통쾌해 할 수 있습니다. 침 뱉고 갈 수도 있습니다. 못 본 채 할 수도 있습니다. 벌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비의 열매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참 편협합니다. 재미있는 실험이 있습니다. 공원에 체인(도난방지용 쇠사슬)을 채운 자전거가 있습니다. 몰래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비슷한 복장, 비슷한 연령의 두 남성이 번갈아 등장해 자전거 체인을 끊도록 했습니다. 두 남성 중 한 명은 백인, 한 명은 흑인입니다. 둘 모두 사람들이 "당신 자전거냐"고 물으면 "아니다"라고 대답하기로 정해 놓았습니다. 얼굴색만 다를 뿐이지만 주위를 지나치는 시민들의 반응은 천지차입니다. 백인 남성이 체인을 끊기 위해 망치질을 하든 절단기를 동원하든 지나가는 이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약 한 시간 동안 100여 명이 지나갔지만 "열쇠가 없어서 그러냐"란 식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 고작입니다. 하지만 흑인 남성의 경우엔 상황이 180도 달라집니다. 시민들의 고발정신이 갑작스레 불타오릅니다. 실험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자전거 주위에 모여들고 "네 자전거냐"며 따져 묻습니다. 어떤 이는 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를 하고 한 여성은 셀폰으로 범행 현장(?) 증거사진을 찍는다. 한 백인 노인은 흑인 남성의 범행 도구와 가방을 빼앗아 들기까지 합니다. 예쁜 외모의 여성이 그럴 때는 절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동기가 되어 대상을 선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달린 예수님이 자비를 베풀어 주신 대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자비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원수)을 사랑하고,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최선 다하여 도와주고, 기억조차 하기 싫은 사람이 물에 빠질 때 건져줄 수 있는 것이 자비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인 자비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자비를 최우선시하는 불교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만 대상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침뱉고, 옷을 나누고, 조롱하고 야유하는 군중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 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시각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지옥 갈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 시각으로 사람들을 바라본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은 자비를 베풀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들로 삼아 한 밥상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핍박하고, 중상모략하고,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고, 비방하고, 모함하는 사람도 우리의 자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밥먹을 때 콩 골라내듯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을 골라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의 자비의 대상입니다. 사탄은 무자비해야 인간들을 만들게 하는 것에 선수입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자기의 형제 아벨을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자기 혈육인 아벨을 무자비하게 때려 죽여 타락한 인간의 표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CS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의는 완전히 실제적인 게 되고, 선의는 주로 상상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거든.”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가까이 있는 자를 자비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립니다. 무자비한 라멕처럼(창세기 4장 23절) 무자비를 그럴듯한 이유를 대서 상품화 시켜 버립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무자비를 놀이의 도구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할 예외의 사람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침 뱉고, 옷을 나누고, 조롱하고 야유하는 사람들도 자비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2. 어떻게 자비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무자비한 테러와 숙청과 학살, 탄압, 폭행이 일상화 되고, 무한 경쟁 속에서 자비를 베푸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어떻게 자비의 열매를 맺힐 수 있겠습니까?

 

1)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새 사람으로 온전히 변화 되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의 열매인 자비의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에 맞는 옷을 입게 됩니다. 재판을 할 때 판사의 옷을 입고 공무를 집행할 때 경찰관의 옷을 입습니다. 바로 우리가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인 자비의 열매는 우리의 신분에 맞는 옷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자가 될 때 진정한 자비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25절을 보십시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물어 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25절 보십시오. 메시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무능력과 교만, 죄를 해결하러 오신 분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합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답하는 것보다 다시 그에게 질문을 합니다. "네가 잘 알고 있는 율법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더냐?" 그는 27절에서 대답을 합니다. 구약 신6:5; 레19:18를 들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28절 "네 대답이 옳다. 그러면 이것을 말로만 하지 말고 행해 보라.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대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구약의 진리입니다. 이것은 율법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 18:5)"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8:9)" 그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영생을 얻는 방법이라고 가르치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무능력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차라리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저는 노력해 보았지만 도저히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제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그런 질문을 했다면 바로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그러면 너가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7)"라는 말씀을 명쾌하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도덕적인 자비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 성령의 열매인 자비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내 스스로 윤리적 노력에 의해 맺혀지는 열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거할 때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내 안에 거할 때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당연히 자비의 DNA가 심겨져 있고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눅 6:36).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그 자비를 잃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자비로운 하나님을 하늘에 유배시키고, 마음에 심겨진 자비의 DNA를 악마의 먹잇감으로 던지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가 교제의 관계가 회복되어 이미 심겨진 자비의 씨앗이 움을 트고 잎을 열고 열매를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최고의 자비는 예수님을 나누는 것입니다. 영혼이 쉴 곳 없는 나그네같은 인생에게, 아버지가 없는 고아같은 인생에게, 진정한 영적 신랑을 만나지 못한 과부같은 인생에게 진정한 양식이 없는 가난한 인생들에게 예수님을 전해 주는 것이 최선의 자비입니다.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 묘지가 있습니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1885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에 주재해 있던 총 선교사수 1,559명이었답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지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자비를 이 땅에 맺히게 하기 위해 이 땅을 '복음의 땅끝'으로 알고 찾아왔다가 숨진 10개국 395명의 선교사들이 묻힌 곳입니다. 이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자신과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데 이 땅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복지시설을 세우며 젊음을 불태웠습니다. 가난한 나라, 소망 없는 나라, 노예가 된 나라, 자유가 없는 나라, 자랑할 것이 없는 이 나라에 와서 칼에 맞아 죽기도 했고, 병에 걸려 죽기도 했으며, 갖은 핍박을 당하며 대한민국 국민을 사랑하다가 죽어갔습니다. 여기에 가면 루비 켄트릭의 묘비가 있습니다. 그 묘비명에는 "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 Korea should have them all ." - Ruby Kendric ?라고 쓰여 있습니다. "내게 줄 수 있는 천 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번의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라는 말입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이곳에 가서 이 묘비명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처녀 선교사님입니다. 한국에 온지 8개월 만에 병에 걸려 천국에 갔습니다. 그녀는 병상에서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회원들에게 열씩, 스물씩, 쉰씩 아침저녁으로 한국으로 나오라고 전해주세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을 후원하는 텍사스 웹윗 청년회 친구들에게 "만일 내게 일천 생명이 있으면 그것을 모두 한국에 주렵니다."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청년들은 뜨겁게 기도했지만 그가 죽었다는 편지가 그들에게 도착했고 함께 모여 있던 웹윗 청년회 회원들은 자신들도 이방 땅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다가 죽겠다고 20명의 청년이 선교사로 자원하였다고 합니다. 이 청년들이 돈을 내어 아름다운 친구의 묘비를 세워주었고 그 묘에 그녀의 말 "내게 줄 수 있는 천 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번의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라는 말을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술과, 놀음으로 멍들었던 나라, 남녀 차별로 여성이 사람 대접받지 못했던 나라, 첩 제도로 가정이 불행했던 나라, 신분차별로 설움 받던 나라, 일제의 압제로 정치적 자유가 없던 나라, 빈부차이로 경제적 자유도 절대빈곤으로 경제적 풍요도 없던 나라, 무지와 미신이 지배했던 나라에 와서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진정 구주로 믿고 난 후 맺힌 자비의 열매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견딜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손해를 보고, 오히려 손가락질을 하고, 오히려 비난하고, 오히려 모욕을 주는 자들이 예수님의 자비 때문에 이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공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제사장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보고 어떻게 합니까? 피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깁니다. 세 사람 다 보기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무관심하고 냉담합니다. 무관심과 냉담은 자비의 반대 개념입니다. 무자비한 태도입니다. 피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전 봉사자들입니다. 그 사람을 돕다 피가 묻으면 불결해지고 혹 치료하다가 그가 죽으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레위기서 22장 4-7절에는 "시체로 부정해진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피해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본업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질문하는 율법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른 것입니다. 이사야 1:11-12에 하나님은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 12:7에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알지 못했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었습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아들이지만 그의 행위 자체를 따지기 전에 돌아온 탕자를 아들로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눅15:11∼32). 마땅히 처벌해야 할 대상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마땅히 비난해야 할 대상을 환대합니다. 아버지의 자비는 그 아들이 한 행위에 따라 그 정도와 강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자비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마음, 그 자비를 이 땅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자비의 열매를 풍성히 맺히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당시 유대 종교의 무자비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친 레위인과 제사장은 바로 자비를 잃어버린 유대교를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을 보십시오. 당시 관습대로 하면 마땅히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간음하다 잡히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빙자하여 무자비하였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 당연히 죽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에 인색했으며, 속량에 대해 말은 많이 했지만 속량의 진정한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당한 손해를 마땅히 복수로 갚아 주어야 하고, 물질적 인격적 손실을 눈은 눈으로 갚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로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경험을 한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여기는 감수성을 지닌 여인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체험한 자비가 상대를 정죄하고 싶은 욕망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멸망당해야 하고 마땅히 버림받고 마땅히 돌에 맞아야 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속에 자리 잡았던 이기심과 탐욕들이 사라지게 되고 그 자리에 그가 하늘로부터 가져오신 자비한 마음이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 비로소 우리는 거듭나게 되고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 고난당한 자를 돌아볼 수 있는 자비심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인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할 때에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넘쳐 흐는 자비입니다.

그래서 자비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내가 맺고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서 행하시는 열매입니다. 내 힘으로, 내 성품으로, 내 노력으로 맺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임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세상을 바라볼 때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게 됩니다.

사무엘상 9장에 나오는 다윗을 보십시오. 원수 같은 사울 왕조가 무너지고 드디어 다윗은 왕이 됩니다. 고대 왕들은 이럴 때 이전 왕족을 다 멸해버립니다. 그런데 사울의 손자 무비보셋이 살아있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두 가지 어마어마한 대우를 해 줍니다. 다윗은 그에게 선대왕 사울의 모든 밭을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왕자 중 하나같이 높여 주었습니다. 어떻게 다윗 왕이 이 엄청난 자비를 베풀 수 있었을까? 사무엘 하 9장 3절에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나의 자비, 나의 은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은총"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용서받을 수 없는 자를 용서하고 사랑받을 자격이나 가치가 없는 자를 무조건 사랑하는 행위가 헤세드입니다. 신약의 자비(크레스토테스) 같은 뜻입니다.

자신이 왕이 된 것은 가문이 좋아서도 똑똑해서도, 조건이 좋아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되어졌다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데서 긍휼은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고,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부족한 사람을 볼 때 정죄하고 비판하고 수군덕 거리리는 것이 아니라 긍휼의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 은혜를 망각할 때 무자비한 사람으로 변하여 간음하고 부하는 죽입니다. 이 때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 보좌 앞에 엎드려 회개합니다. 시편 51편은 그의 참회록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1절).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열매인 자비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오늘도 살아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긍휼의 마음이 생기고 그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면 자비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멸할 사람 멸하지 않고 버릴 사람 버리지 않고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가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면 성령이 마음을 장악하여 긍휼이 여길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의무 방어전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들추어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부분을 소문내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3)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비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후 무엇을 요구합니까? 37절을 보십시오.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은 자비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누가 6:36)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님께 순종할 때 열리는 열매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일지라도 길가나 자갈밭이나 가시 떨기에 떨어지면 잘 자라지 못합니다. 우리의 밭이 순종의 밭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의 밭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하지 못할 상황이 올 때 십자가를 바라보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행동을 하고 싶을 때 타인과 자신을 동일화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내 이웃이 아니라 누가 강도 만나자의 이웃이 되겠느냐(29,36)로 강도 만나 자의 입장으로 시선을 바꾸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의도적인 결단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자비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의도적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무자비한 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은 자비이며, 그 자비를 행하는 것입니다. 자비가 바로 우리의 삶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라고 하는데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행합니까? 그는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상처를 후벼 파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싸매주는 것입니다. 홀로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 걸어가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짐승에 태워주는 것입니다. 그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시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단순한 감정적 동정이 아닙니다. 실제가 따르는 희생이 있는 책을 다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생각에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불쌍히 여기는 발로, 불쌍히 여기는 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율법사처럼 관념의 방에 자비를 가두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늘에 유배시키고 은총의 물방울만 떨어뜨리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자비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손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자비의 모델을 보여 주었습니다. 수많은 인생의 강도를 만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다.(마태 9:27; 마태 15:22; 마가 9:22; 누가 18:38) 건강에 강도 만난 자들, 경제의 강도를 만난 자들, 죽음의 강도를 만난 자들, 소외의 강도를 만나 자들을 찾아가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절박한 심정으로 병든자나 고통받는 자가 자비(엘레에오)를 베풀어 달라고 외칠 때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다(마9:27, 15:22, 17:15, 막5:19, 9:22, 10:47). 예수님을 그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겼습니다(마9:36, 15:32, 20:34). 예수의 자비는 이론이나 논문에 기록되어 서고의 장식품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성 자비의 힘>을 쓴 매튜 폭스는 자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비는 연민이 아니라 축제이며 자비는 감상이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고 긍휼을 실천하는 것이며 자비는 사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도취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며 자비는 인간미 넘치는 인격주의인 것만이 아니라 넓이로는 우주적인 것이며 에너지 관점에서는 신적이다. 또한 자비는 금욕적인 초탈이나 추상적인 명상이 아니라 열정적인 관심이며 자비는 지성을 반대하지 않고 만물의 상호연결을 알고 이해하려고 하며 자비는 도덕적인 계명이 아니라 가장 충만한 인간 에너지와 신적인 에너지의 흐름이자 흘러넘침이며 자비는 이타주의가 아니라 자기-사랑과 타자-사랑이 하나된 것이다. 자비는 종교가 아니라 삶의 길, 즉 영성이다.”

 

우리는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고 또 자비를 베풀어야 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 큰 자비를 입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자비를 입은 사람임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인데도 백 달란트 빚진 자를 감옥에 가두는 무자비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18:33)

 

1930년 어느 날. 상점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쳐 절도혐의로 기소된 노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답니다. 판사가 정중하게 물었답니다. "전에도 빵을 훔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처음 훔쳤습니다."

"왜 훔쳤습니까?" "예, 저는 선량한 시민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흘을 굶었습니다.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은 다 떨어지고 눈에 보이는 게 없었습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저도 모르게 빵 한 덩어리를 훔쳤습니다." 판사는 잠시 후에 판결을 내렸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해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대로 당신을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노인의 사정이 딱해 판사가 용서해줄 것으로 알았던 사람들은 판결이 인간적으로 너무하다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답니다. 판사는 논고를 계속했답니다. "이 노인은 이곳 재판장을 나가면 또다시 빵을 훔치게 되어있습니다. 이 노인이 빵을 훔친 것은 오로지 이 노인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 노인이 살기 위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을 내리겠습니다. 동시에 이 법정에 앉아 있는 여러 시민들께서도 십시일반 50센트의 벌금형에 동참해주실 것을 권고합니다."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어 모자에 담았답니다. 이 놀라운 판사의 선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그렇게 거두어진 돈이 57달러 50센트였답니다. 판사는 그 돈을 노인에게 주었답니다. 노인은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리며 법정을 나갔답니다. 이 명 판결로 유명해진 '피오렐로 라과디아' 판사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 동안 뉴욕 시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는 등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답니다. 그는 늘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주어서 '작은 꽃(little flower)' 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답니다. 뉴욕의 3개의 공항 중 하나를 판사의 이름을 따 '라과디아 공항'이라고 불리게 되었답니다. 자비를 베풀면 손해가 아닙니다. 자신도 복을 받고 이웃도 복을 받습니다. 베푸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같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시18:25)라고 말씀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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